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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주일설교
본문: 눅 11:37-39
제목: 속에는 탐욕과 악독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11:39)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타락한 종교 정치 세력과 분리되어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겠다는 무리들이다.
처음 의도는 좋으나 세력화 되고 전통화 되면, 그 또한 타락과 부패를 면치 못하는 법이다.
사람과 세력의 주의 주장은 항상 정의와 성결과 도덕을 앞세우지만
역사적으로 그것은 겉포장이었을 뿐
숨은 목적 곧 탐욕과 악독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 온갖 공약을 앞세우며 정의와 평등을 약속하였지만
결과는 너무도 비참하고 한심한 것을 본다.
‘탐욕과 악독’, 두 단어로 이 정권의 실상이 족히 표현되는 것 같다.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셨다.
선지자들 뿐이겠는가?
어느 분야든 겉과 속이 다른 거짓 지도자들이 문제이다.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우리 주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에게 혹독하셨는지 우리는 보아야 한다.
그들은 거룩한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며 종교와 백성 전체를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상황과 종교개혁 상황이 비슷하였다.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후 히브리어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율법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로 읽고서는 통용하는 아람어로 해석하여 주었다.
그러면서 그 해석에 그들의 철학과 주장이 들어가고 쌓이면서 그들의 전통이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카톨릭은 알아 듣지도 못하는 라틴어 성경을 읽고서는
그 해석을 자국어로 하면서 그 해석에 그들의 철학과 주장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쌓였다.
순전한 성경의 해석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교황과 무리들의 소견에 옳은 해석이 전통이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다.
그들이 만든 율법 해석의 전통에 의하면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전통이었다.
율법에는 그런 것이 없기에 예수님은 바로 잡아주기 위해 안 씻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런 말씀을 여러번 하셨다.(6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마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27-28)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33-34)(43-44절).
‘너희가 들었으나’,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해석한 말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그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다.
율법의 원래의 취지와 원칙과 뜻을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도 예수님을 본받아 카톨릭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그르친 것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 종교개혁자들이 돌이킨 순전한 해석의 전통을 이어받고 완성한 사람들이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성경의 바른 해석과 적용으로 영국을 개혁하고 미국을 건설한 것이다.
원칙이 바로 설 때에 개인도, 사회도, 나라도 부강해진다.
성경을 바리새인 무리들과 교황 무리들처럼 해석하고 적용하면
겉과 속이 다르고,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를 만들고, 나라 전체를 암흑시대로 만드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백주년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순전한 해석 전통을 내어버리고 유대교와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다.
유명 교단과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소중한 책들을 거의 가르치지 않고
바리새인들과 카톨릭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가르침만을 전하고 있다.
그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는 전혀 모른채 교회 전체가 휩쓸려가고 있다.
우리 교회가 작지만 ‘청교도 아카데미’를 세우고, 교회 사명으로 받드는 것은,
우리라도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순전한 종들을 길러내고
이를 잘 모르는 종들에게 옛 길로 돌이키도록 선한 영향을 줄려고 하는 것이다.
역사는 다수의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도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이끌어간다고 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소수의 열 두 제자에 의해서 세워졌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서 가르쳤다.
여기서 배운 많은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교회들을 개혁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 스코트랜드 교회를 개혁시킨 존 낙스이다.
윌리언 테넌트는 1726년 통나무로 오두막을 짓고 ‘통나무 신학교’를 세워서 운영하였다.
네 아들과 청년 몇 사람을 순전한 신학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이 되었다.
19세기에 스펄전도 자기 교회에 ‘목회자 신학교’를 세우고, 오직 청교도신학만을 가르쳤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울왕과 솔로몬이 망한 것도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순전한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세상화되고 타락하게 된다.
교회는 오직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한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3:15)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다.
오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은 받으신다.
이 셋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살 수 있다.
인간의 철학이 말씀에 들어가고, 시대 사상으로 순전한 말씀을 혼잡할 때,
교회는 부패되고 오염되기 시작하였고, 탐심과 악독, 방탕과 위선이 속을 채웠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잘못된 성경 해석과 적용을 한탄하고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예수님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사람의 계명(철학)으로 교훈(진리)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만이 성령의 역사로 속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한다.
순전한 말씀만이 활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왜? 바리새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도,
속에는 탐욕과 악독, 방탕과 위선이 가득하게 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세세한 규정을 하면서도 율법의 원칙과 큰 뜻을 저버렸다.
율법의 원래의 취지와 원칙과 큰 뜻을 저버리면서
지키지도 못할 세세한 규정, 오히려 원 뜻을 거역하고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는 몇 가지 종교적인 행위만 하면 온전히 율법을 지킨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율법의 대원칙은 우리 주님이 요약해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강령은 기본이 되는 큰 줄거리요, 주 원칙이요, 대원칙이요 요약이다.
종교적인 행위 몇 가지를 아무리 잘하였다 할지라도
마음을 다한 하나님 사랑이 없고, 자신 같이 이웃 사랑하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였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여러분,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보이는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율법적으로 금한 것을 하지 않은 것, 세세한 규정에 따라 자기가 행한 행위만을 자랑하고
세리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면서, 스스로 높이는 것만 보이지 않는가?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것도 성경에는 없고 자기들의 전통이 만들어 낸 것이다.
성경에는 일 년에 한 번만 대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것이 규정하였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켜 버렸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했는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고,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였는데,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 갔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다.
주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사람들로부터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바리새인처럼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하게 해서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고,
속에는 탐심과 악독으로 가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세상은 외모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지만 우리는 그 유행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심판하심을 믿어야 한다.
탐심과 악독이 가득할수록 성형에 매달리다가 망신을 당하고 만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
속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은 속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내놓은 열매가 결정된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4-45)
손을 씻지 아니한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속에서 나오는 것 때문이라 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
사람 속에 있는 이 많은 더러운 것들을 무슨 수로 깨끗케 할 수 있는가?
세상은 도덕과 교육과 수양과 고행을 통해 해결할려고 해 왔다.
그러나 세상이 날로 더 악해지는 것을 보면 별 효과가 없다. 소리만 요란하다.
종교의 대표격인 바리새인들은 겉만 깨끗하게 할 뿐 속에 가득한 탐욕과 악독을 처리하지 못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씻어내고, 가셔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새롭게 할 수 있다.
먼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은혜와 믿음의 선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롭게 함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의 보혈로 양심과 심령을 씻어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시작과 출발이 이루어진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출발도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거듭나고 회심했다고 속이 다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화작업을 평생동안 주님 부르는 날까지 이루어가야 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성화는 몇 가지 행위를 하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과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은혜 체험은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 성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말씀과 기도의 경건생활에 힘쓰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결단과 헌신을 해야 한다.
성결과 성화 성숙이 없으면 축복과 영광이 없음이 성경의 대원칙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시고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다.
그 끝에 축복과 영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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