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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타락과 재건운동의 태동 |
2. 최상림목사(경남 동래) 3. 최봉석목사(평남 평양) 4. 박관준목사(평북 영변) 6. 이춘관전도사 7. 이용희전도사 8. 김윤섭전도사(평북 선천) 9. 박의흠전도사(평북 의주) 11. 안영애(한국 첫 순교자) |
1) 조선 예수교 재건교회 창립 과정. 평북
차령관교회에서 김린희전도사를 부흥강사로 하는 부흥회가 열렸는데, 교회사택에서 재건교회 창설의 발의가 있어 위원장에 김린희전도사가 피선 되고,
재건교회 창설 취지문을 전국교회에 발송함. 동년 4월평북 선천읍 황금동의 미곡창고를 빌려서, 최초로 재건교회의 간판을 달고, 기성교회를 거부하고
예배를 드림.(이때 참석한 교회대표가 71명) 교회의 질서있는 운영과 성도의 신앙 연락의 필요를 절감하여, 경남 동래군 기장면 대변교회에서 30여교회
5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조선 예수교 재건교회 임시중앙위원회가 회집되어 위원장에 강상은목사를 선출하고, 재건교회 표어·주의·주장·규약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 이원칠 전도사가 월남하여 아현동에서
회집하다가 47년 가을에 김린희전도사가 월남하여 서울 태평로 364번지의 2층 가옥을 구입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이 간판을 단 것이
서울에서의 최초의 재건교회가 됨. 돈암동교회에서 재건교회 전국교역자 대회가 모이고, 회장에 고흥봉 목사, 부회장에
김린희전도사가 피선되었으며, 교회수는 15개처. 재건교회 중앙위원회(2회)가 진해에서 소집되었는데 김창인전도사가
합류하였으며, 호주선교사 태매시선생도 가담함. 6.25사변으로 피난한 교인들이 부산 영주동교회에 운집하면서 고흥봉목사가 당회장으로
최초로 성례를 베풀었음. 수세자가 100여며, 장로장립 5명, 정찬준씨가 목사안수 받음.
부산교회에서 제6차 중앙위원회가 모였는데 최덕지선생을 목사로 허락함. 마산교회에서 재건신학교가 개학됨, 교장에는 강상은
목사, 학생은 현역 남교역자 전원 중앙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예수교 재건교회 제1회 남한 지방회」가
부산교회에서 개최됨. 개최된 제3회 남한 지방회에서 주상수장로가 목사안수 받음. 「재건교회 헌법」통과.
「여성직에 대한 성경적 천명」이라는 강상은목사의 성명서를 계기로 해서 여성직을 반대하던 주상수 목사 이하 6명의
교역자와 9교회가 분리됨, 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측에서는 신학생들을 중심해서 신학적 의견 차이를 일으켜 1952년 3월에 고흥봉목사를 필두를
134명의 전도사가 집단 탈퇴함. 개최된 제8차 전국 교역자 대회에서는 함북의 덕천에서 신앙을 지킨 이계실목사가
가담하여 회장에 피선되어 내려오던 중에 1955. 9월에는 자기를 따르는 18명의 장로, 전도사를 이끌고 재건교회를 이탈하여 나감.
남한지방회 제4차 총회에서 최덕지, 김영숙, 김소갑숙 제씨에게 강상은목사가 안수하여 목사로 장립함. 소집된 제8차 교역자대회에서는 김응진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남한 지방회의 주상수목사측과 통합할 것을 결의함. 2년간 끌어오던「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측과「예수교 재건교회 남한 지방회」측 통합. 영주동교회에서 소집된
통합대회에서는 그 명칭을「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대회」라 칭하고 회장에 주상수목사를 선출함. 「예수교 재건교회
남한지방회 제14차 총회」가 개최되어 「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로 명칭을 바꾸고, 총회 산하에 동부, 중부, 서부지방회를 두기로 결의함.
마산교회당에서 회집된 제19회 재건교회 총회에서 헌법 수정안 통과 서울 남창동교회당에서 개최된 재건교회 대회에서는 그 명칭을 「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로
변경하고, 노회장에 주상수목사를 선출함. 개최된 재건노회 제3회 임시노회에서는 김문제목사가 수요일 예배에
한부선선교사를 세웠다는 이유로 이탈함.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은 재건오사교회 양영례 유년부장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국기경례를 거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0월을 선고함 (단, 거부학생 60여명은 훈방됨) 부산교회당에서「대한예수교
재건교회 총회」와 「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노회」는 「통합공동 성명서」를 내고 통합 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박재준, 부총회장에 박은수씨를
선출하여 30년동안 양립되어 온 재건교회를 통합함. 재건여수교회당에서 회집한 제14회 총회에서 「헌법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헌법개정을 위해 1987년 11월 3일(화) 재건서면교회(전포동)에서 헌법개정위원회 제1차 회의로 모였고 제2차 회의는
1988년 3월 14일 부산시 동대신동의 애린 유스텔에서 열렸다. 제3차 회의는 1988년 4월 18-19일 서울에서 모였다. 결국「양쪽이
상반된 해석의 견해를 갖는다」는 회의록을 남기고 7명의 위원이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는
부산재건성은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총회에서「헌법개정안」이 통과됨, 따라서 지역노회와 총회신학교가 운영되게 되었음. 또한 이때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의 이념과 행동 강령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통합총회를 구성하고 서울노회(박재준 목사), 부산노회(박성규
목사), 재건노회(최일구 목사)는 서울중앙교회당에서 합동총회를 열고, 이 총회를 제71회 정기총회로 명명하고, 총회장에 최일구 목사를선출하였다.
동 총회에서「대한예수교 장로회 재건교회 헌법」제정을 했다. |
1938년의 신사참배 가결이전까지의 27회. 1938∼1945년 기간동안의 정기총회는 인정하지 않음. 1945∼1989년 통합까지의 44회. 그래서 27호와 44회를 합산하여71회로 결정함. 참고로 1989년 당시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측의 합동합의문서를 게재한다. 예재 총 제 89-4호 대한예수교 재건 부산 노회장 귀하 합동합의 문서의 건 표제의 건에 관하여 총회가 전권 위임한 예수교장로회 재건노회측과 합동에 관하여 양측 전권위원들이 수차에 걸쳐 회동한 결과 합의에 도달하여 별지 합동합의 문서에 서명날인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989년 5월 2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 총 회 장 박 재 준 합동전권위원대표 박 성 규 총회위원 목사 박 성 규, 목사 박 재 준, 목사 신 종 구, 목사 김 정 윤, 장로 차 균 희, 장로 이 장 덕, 재건노회 목사 최 일 구, 장로 이 상 철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총회와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노회 합동 전권위원 합의문 과거 일제하의 수진을 위하여 투쟁하고 범죄한 한국교회의 재건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출발한 재건교회가 그동안 본의아니게 분열되며 각자의 교단으로 나오던 중 금번 하나님의 하나되라는 지상명령을 따라 하나되어야 겠다는 동일한 의지하에 양측의 전권위원이 수차 합석하여 의논한 결과 아래의 사항을 합의하였습니다. 1. 먼저 합동 후에 개혁이라는 문제에 합의함. 2. 창립총회 회원은 노회단위로 하여 서울노회 16인, 부산노회 16인, 재건교회노회 16인으로 한다. 3. 총회 회수는 과거 27회 총회를 기점으로 하여 산정토록 한다. 4. 장소와 소집일자는 양측의 대표 2인씩으로 구성하여 정하기로 한다. 5. 경비는 한 노회 30만원씩 90만원을 거출한다. 6. 창립 합동회의 개회 사회는 목사 중 연장자가 하도록 한다. 주 후 1989년 5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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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검색한 내용을 별도로 입력합니다.
1994.9 총회에서 미주노회를 승인함.
1995.8 현재 전국교회수 107교회, 목회자 88명, 장로 119명
현재 서울노회, 부산노회, 영남노회, 서부노회, 미주노회 5개 노회가 되었음.
출처 : "광복 50주년 기념 '95재건부산노회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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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그동안 신사참배에 관한 여러 사실들을 매우 알차게 정리 요약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정독하고 기억하면 좋으리라 믿어집니다.
감사합니다. 공유합니다.
이런 뜻깊은 움직임이 있었군요~
아주 가슴아픈 역사입니다. 진실한 성도님들이 얼마나 얼마나 우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