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석별장 평면
이종석별장전경
성북동 이종석별장 城北洞 李鍾奭 別莊(성북구 민속자료 10호)
이종석 별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재준가옥으로 불리던 곳이다. 최근 연구에 의해서 이종석의 여름별장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2009년 성북동 이종석 별장으로 문화재명칭이 바뀌었다. 이종석(1875-1952)은 대대로 부자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벼 9,900석을 소출하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이종석은 1933년 보인학원을 설립하고 1952년까지 이사장을 역임하였는데 이종석의 본가는 장교동에 있었고 이곳을 여름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성북동은 지금도 강북의 알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도 물좋은 곳으로 알려져 좋은 집과 별장이 많았던 곳이다. 성북동에는 이종석별장 외에도 명승 제35호로 지정된 정원이 아름다운 성락원城樂園, 마포 최사영 고택(麻浦 崔思永 古宅/성북구 문화재자료 제37호), 상허이태준가옥(尙虛 李泰俊 家屋/성북구 민속자료제11호), 만해 한용운심우장(萬海 韓龍雲尋牛莊/성북구 기념물 제7호) 등이 있다.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한번쯤 둘러 볼만한 곳이다.
대청 내부
이 집은 현재 덕수교회의 소유로 되어있다. 1960년 대림산업 소유로 되있다가 1985년 덕수교회에서 매입하여 목사사택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교회수양관은 사용하고 있다.
이종석별장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별장으로 지어진 집으로 구조는 일반살림집과는 다른 모습을 모이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거부의 별장다운 섬세함이 보인다는 것이다. 집은 현재 많이 변형되어있는 상태이다. 기단부분은 원래 모습이지만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종석별장은 집구조와 일반집과 다르다. 일반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으로 구분되고 각 시설간의 위계가 있다. 그러나 이 집은 별장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별당과 그것을 관리하는 행랑채로 구분되었을 뿐이다. 또한 행랑채는 본채에서 바라다보는 경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본채 전면에 위치하지 않고 본채 좌측 뒷산에 붙여 배치되었다.
누마루 외관
현재 배치는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별장 앞마당이 펼쳐지지만 과거 배치를 보면 행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일반 살림집 구조와는 다르지만 본채와 위계를 두려는 기본개념이 살아있었다. 지금 앞 담이 조금 높아 보이는 것이 예전과 같은 높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별장으로서의 기능은 충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집은 거부의 집답게 당당하다. 잘 다듬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우뚝 서있는 집은 들어서는 이에게 주눅이 들게 할만큼 당당하다. 특히 잘 다듬어진 장대석기단과 누마루 아래 잘 다듬어 만든 장주초석長柱礎石은 이 집을 지을 때 얼마나 공력을 많이 들였는지 느끼게 한다.
별당 본채는 전면 6칸 측면 4칸의 규모이다. 우측 누마루 부분이 전면으로 한 칸 돌출되었고, 후면 좌측 두 칸이 뒤로 한 칸 돌출되어 전체적으로 집 형태가 ㄴ자와 ㄱ자를 이어놓은 형태로 되었다. 집은 철저하게 별장의 구조로 되어 있다. 한 채로만 본다면 마치 부자집의 사랑채를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구조이다.

이종석별장의 옛 모습
별장은 바깥주인의 휴식이나 손님접대를 위한 공간이다. 따라서 집구조가 사랑채 구조와 유사할 수밖에 없다. 집구조는 맨 좌측에 부엌과 방이 있고 다음에 방 두 칸, 대청 두 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집은 1고주 5량집으로 굴도리집이고 겹처마를 하고 있다. 집은 최근에 수양관으로 고치면서 많은 개조가 있었다.
개조된 상황을 보면 좌측 뒤에 있던 방은 부엌으로 개조되었고, 부엌은 화장실로, 앞에 있는 방은 현관으로 개조하였다. 현관으로 개조하면서 방이었던 부분의 입면이 바뀌어 집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하인방 아래 벽돌을 십자가 문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뒤쪽에 있었던 쪽마루는 늘려 퇴칸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보니 지붕선과 맞지 않게 되었다. 그리나 이러한 점만 빼놓으면 과거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함석차양이 설치되어있었는데 최근 수리하면서 없애버렸다. 그러나 겹처마로 지은 집에서 함석 차양을 한 것은 집의 격에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초기에는 없었던 것을 나중에 만들어 올린 것이 맞을 것이다.
누마루 내부
집의 깊이는 두 칸으로 대청은 두 칸 깊이로 되어 있고 사랑방은 한칸 반 규모의 깊이로 되어 있다. 이렇다보니 방이 일반 집보다 넓다. 대청 옆에는 누마루가 있는데 대청보다 한자(30cm) 정도 높다. 대청과 사랑방 사이, 대청과 누마루사이는 현재 불발기 창이 설치되었고 접이문으로 열도록 되었다. 원래는 이런 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불발기문으로 되었었다면 문은 들어열개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 도면을 보면 미서기 문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후기에 약간 변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청에서 목구조 상 특이한 점은 대공이다. 일반집에서 사용하는 대공은 판대공 형식인데 판대공은 사다리꼴 형태이고, 대공이 수축팽창시 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판재로 이어붙여 만든다. 그런데 이곳에 쓰인 대공은 동자대공 형태에 가깝다. 형태를 보면 판대공과 비슷하지만 부재가 한 개로 되어 있어 동자대공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런 동자 대공은 곳간 등과 같은 부속건물에서는 동자대공을 많이 쓰는데 일반 살림집에서는 동자대공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청의 대공모습
누마루는 전면 한 칸 측면 세 칸 규모로 되었지만 전면 칸의 넓이는 일반집의 두 칸 규모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마루의 규모는 일반집의 육간대청의 규모와 같다. 대청과 면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면이 모두 창으로 되어 있어 주변 경관을 잘 바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청 선자서까래 모습
누마루에서도 몇 가지 구조적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추녀 부분이다. 대부분 고급집에서는 선자서까래를 많이 쓴다. 이 집에서는 추녀가 반 선자서까래이다. 이 집의 품격으로 볼 때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이렇게 된 것은 부재의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부재를 보면 서까래 부재가 부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부재로 집을 짓다 보니 반 선자서까래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곳은 소로이다. 이 집은 인방과 장혀사이에 소로를 끼워 놓은 소로 수장집이다. 일반적으로 소로수장집에서 소로는 기둥과 기둥사이에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기둥 양옆에 소로를 반쪽으로 만들어 끼워 놓아 마치 주두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렇게 소로를 반쪽으로 만들어 붙이는 소로를 건소로件小累라고 한다.

소로와 건소로의 모습
이 집은 잘 관리되고 있는 집이다. 최근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용도에 맞도록 변형을 해서 원래 모습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초기에 지었던 집이 가졌던 풍미를 찾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예전 집보다 더 격이 높아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특히 후원 화계花階는 원래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수준의 집이라면 당연히 가졌어야할 수준의 조경시설이다. 집을 고칠 때 이런 배려까지 한 것이 놀랍기만한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뒤편에 있는 장독대이다. 후대 살림집으로 이용되면 장독대를 들였을 것이지만 별장이라면 장독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가 오히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후원 화계의 모습
어쨌든 이 집을 고칠 때 교회에서 많은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재古材와 신재新材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옛날 나무도 일일이 겉을 벗겨내 신재처럼 보이게 했고, 새로 들인 창호도 집의 격格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갖추었다. 형태도 격에 어울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속품인 손잡이 하나 하나에도 깊은 정성을 들였다. 이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배려를 한 덕수교회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