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箱의 片貌
朴 泰 遠
내가 이상을 안 것은 그가 아즉 茶寮 ‘제비’를 경영하고 있었을 때다. 나는 누구 한테선가 그가 高工建築科 출신이란 말을 들었다. 나는 상식적인 의자나 탁자에 비하여 그 높이가 절반 밖에는 안 되는 기형적인 의자에 앉아 점안을 둘러보며 그를 괴팍한 사나이다 하였다.
‘제비’ 헤멀슥한 벽에는 십 호 인물형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나는 누구엔가 그것이 그 집 주인의 자화상임을 배우고 다시 한 번 치어다 보았다. 황색 계통의 색체는 지나치게 남용되어 전 화면은 오직 누-런 것이 몹시 음울하였다. 나는 그를 ‘얼치기 화가로군’ 하였다.
다음에 또 누구한테선가 그가 시인이란 말을 들었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 한마디 알 수 없지.......”
나는 그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시가 보고 싶었다. 이 상은 방으로 들어가 건축 잡지를 두어 권 들고 나와 몇 수의 시를 내게 보여 주었다. 나는 쉬르리얼리즘에 흥미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의 「運動」일 편은 그 자리에서 구미가 당겼다.
지금 그 첫 두 머리 한토막이 기억에 남어 있을 뿐이나 그것은,
일층 우에 이층 우에 삼층 우에 옥상 정원에를 올라 가서 남쪽을 보아도 아모것도 없고 북쪽을 보아도 아모것도 없길래 다 시 옥상 정원 아래 삼층 아래 이층 아래 일 층으로 나려와.........
로 시작되는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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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감도烏瞰圖」는 나의「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거의 동시에 중앙일보 지상에 발표되었다. 나의 소설의 삽화도 ‘하융河戎’이란 이름 아래 이상의 붓으로 그리어졌다. 그러나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오감도」의 평판은 좋지 못하였다. 나의 소설도 일반 대중에게는 난해하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나 그의 시에 대한 세평은 결코 그러한 정도의 것이 아니다. 신문사에는 매일 같이 투서가 들어 왔다. 그들은 「오감도」를 정신이상자의 잠꼬대라 하고 그것을 게재하는 신문사를 욕하였다. 그러나 일반 독자뿐이 아니다. 비난은 오히려 사내에서도 커서 그것을 물리치고 감연히 나가려는 尙虛의 태도가 내게는 퍽이나 민망스러웠다. 원래 1개월을 두고 연재할 예정이었으나 그러한 까닭으로 하여 이상은 나와 상의한 뒤 오직 십 수편을 발표하였을 뿐으로 단념하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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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팍한 사람이다”라는 것은 그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이거니와 물론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었어도 역시 ‘괴팍’하다는 형용만은 결코 글르지 않은 듯 싶다.
일즉 『여성』지에서 나에게 「文壇畸形李箱論」을 청탁하여 왔을 때 그 문자가 물론 아모러한 그에게도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닌 듯 싶었으나 세상이 자기를 기형으로 대우하는 것에 스스로 크게 불만은 없었던 듯 싶다. 그러나 그 이상론은 발표되지 않은 채 편집자가 갈리고 그러는 사이 원고조차 분실되어 나는 그 때 어떠한 말을 하였든 것인지 적력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나 하여튼 茶店 플라타느에 앉아서 당자 이상을 앞에 앉혀 놓고 그것을 초하며 돈을 벌려면 마땅히 부지런 하여야만 하는 것을 이상은 너무나 게을러서,
“그래 언제든 가난하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 둘이 소리 높여 서로 웃던 것만은 지금도 눈앞에 또렷하다. 사실 이상의 빈궁은 너무나 유명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은 그의 도저히 구할 길 없는 게으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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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러한 점 만으로만도 조선 문단이 이상을 잃은 것은 가히 애석하여 마땅한 일이나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었다.
이상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하로 저녁 지용이 그와 한강으로 같이 산책을 나가 문득 그의 건강을 염려한 나머지, “여보 尙虛를 본뜨시오. 상허의 반만큼만 몸을 애끼시오.” 간곡히 충고하였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거니와 그와 가까운 벗은 모두 한 두 번쯤은 그에게 그러한 종류의 말을 할 것을 잊지는 않았었다. 이상보다 이십 일 앞서 돌아간 金裕貞도 자기 자신 병고에 허덕이며 몇 번인가 이상의 불규칙하고 또 아울러 비위생적인 생활에 대하여 간절하게 일러준 바가 있었다. 아직 동경에서 그의 미망인이 돌아오지 않았고 또 자세한 통신도 별로 없어 그가 돌아가든 당시의 주위와 사정은 물론, 그의 병명조차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으나 역시 폐가 나뻤든 모양으로 그 점은 김유정과 같으나 유정이 죽기 바로 수일 전까지도 기어코 병을 정복하고 다시 일어나려 끊임없는 노력을 애끼지 않든 것에 비겨 이상은 전에도 혹간 절망과 같은 의사 표시가 있었고 동경에 간 뒤에도 사망하기 수개월 전에 이미 「終生記」와 같은 작품을 써 보낸 것을 보면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病死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
그러나 이제 있어 그러한 것을 새삼스러이 문제 삼아 무엇하랴. 이상은 이제 영구히 돌아오지 않고 이상이 없는 서울은 너무나 쓸쓸하다.
자료출처 : 『조광』193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