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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북단, 소백산 아래 첫 동네, 소백산 남녘 자락에 안긴 풍기(豊基)는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터이다. 위도상 36도30에 위치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렸하며 웬만한 장마에도 홍수가 들지 않고, 백두대간이 북녘을 가린 덕에 때때로 녈비(지나가는 비)가 내려 가뭄이 들지 않는 천혜의 자연과 좋은 기후가 있다. 거기에다 진흙보다는 모래가 더 많이 섞인 모래진흙땅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죽령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단양이 석회암지대이지만, 그 남쪽 풍기 땅은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이루어진 사양토이다.
1970년 인삼 포장 규격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해도 풍기인삼의 300그램을 다른 지방의 인삼 375그램과 같게 쳤을 정도였다. 모양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두 고려인삼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말린 인삼을 구부린 정도로 보아 산지를 구별했다. 강화,김포,개성 인삼은 곧은 그대로인 ‘직삼’이며, 금산인삼은 완전히 구부린 ‘곡삼’이고, 풍기인삼은 그 중간쯤으로 꼭 절반을 구부리는 ‘반곡삼’이다. 이 구부림은 약효보다는 그 지방의 습성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반곡삼인 풍기인삼의 뿌리는 소백산의 산삼에 닿아 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산삼은 이름난 진상품이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734) 당나라에 산삼 200근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왕가에서도 즐겨 썼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산삼을 바치라고 성화를 부렸고, 풍기사람들은 산삼을 진상하기위해 얼마나 애를 썻겠는가? 산에서 케는 산삼만으로는 모자라기에 소백산 산삼 씨앗을 받아서 기르게 된 것이 풍기인삼의 시초라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산삼 씨앗을 구해 풍기읍 금계리에 뿌리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주세봉 선생이 처음으로 풍기에서 인위적으로 인삼재배 기술을 국민들에게 개발보급하여 그공적을 기리고 송덕하기위해 풍기인삼협동조합에 송덕비를 세웠다
풍기를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해서 뭍의 제주도라 불렀다. ‘풍기 삼다’ 중 바람과 돌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도 여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여자’는 십승지지에 그 뿌리를 둔 곁가지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의 비결서 <정감록>의 십승지는 남사고의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으뜸으로 꼽는 곳이 풍기 금계동인 것은 같다. 하여 금계동을 중심으로 한 소백산 남쪽 자락 곳곳에 <정감록>을 받드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풍기를 찾은 때는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때처럼 고단한 시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6.25 때 피난 와서 눌러앉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풍기는 거란이나 몽고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도 큰 피해가 없었고, 6.25 때도 스쳐가는 정도였다니 십승지의 ‘영험’ 덕을 톡톡히 봤다.
1940년도에 100대 정도에 불과했던 쪽닥베틀기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1,500대로 무려 15배가 늘었다. 풍기인견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6.25를 거치면서 대도시의 공장들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풍기의 인견직은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급증한 인견직의 수요를 충당하느라 집집마다 인견직을 짜는 베틀소리로 밤을 밝혔다. 요즘은 그 베틀기를 이은 100여 개의 섬유공장에서 인견직.나일론.폴리에스터 생산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인견직 기술의 품질향상과 개발이 활발하여 지역경제에도 큰 몫을 하고 있다
풍기역 뒤편으로 비로봉 가는 길에 금계리가 있다. 한때 정감록마을로 소문이 자자했던 옛날도 잊은 듯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십승지로 풀이하자면 소백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으며 금선계곡을 타고 온 비로봉의 옥수로 몸을 적시는 땅이다. 비로봉 가는 길에 비로사가 있다.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로사는 풍기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그 창건유래는 알 수가 없다. 이절에 당간지주,진공대사의 보법탑 석조 비로차나 불상,아미타블상,목각영정, 그리고 영조때 조성된 불화등이 있다
정감록으로 풍성한 터를 일구어낸 땅 풍기. 약속의 땅 풍기를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살아낼 방법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찾아왔다. 평안도 영변사람이 베틀기를 들고 왔다면, 황해도 개성사람은 개성상인의 사업수단을 품고 왔으며, 대구사람들은 사과를 손에 움켜쥐고 찾아왔다. 이렇게 풍기사람들은 소백산 칡넝쿨 얽히듯이 정겹고 풍요로운 삶의 터에 태어나 씨를 뿌리고 살어 왔고, 살어갈것이다 현재 풍기인구는 만이천여명, 호적상 풍기출신이지만 삶의 터를 옮겨사는 이가 오만, 그리고 원적변경등 모두 계산한다 해도 풍기가 고향인 사람은 칠만정도 이다. 지키는 사람과 떠난 사람 모두의 고향, 우리가 자랑하는 인삼,사과,인조의 특별한 역사를 바탕으로 더 힘차고 발전하는 고향이 되기를 소원하고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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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정말 좋은 고향에서 태어남에 대하여 새삼 긍지와 감개가 무량합니다...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킬수 있도록 무언가 지역 여건에 맞는 고용창출에 대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