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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스크랜턴(1832~1909) |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메리 스크랜턴(Mary F.B. Scranton 1832~1909)은 40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53세이던 1885년 5월에 미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 1922) 내외와 함께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온 한국최초의 감리교 여선교사이다. 이들 모자(母子)는 이 땅에 와서 어머니는 여성평등과 교육에, 아들은 의료와 교회 개척에 힘쓰며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은 후 이화학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양반집 아녀자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렇듯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풍조에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심리가 더해져 설립 초기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런데 1886년 5월 31일, 한 관리의 소실인 김 부인이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왔다. 이로써 단 1명의 여학생으로 역사적인 첫 영어수업이 이루어졌고, 이 날이 이화학당의 창립일이다.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어나고, 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으며 동년 11월에는 200평 규모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명성황후로부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梨花(이화)’라는 친필의 교명을 받았다.
1889년 최초로 한국인 이경숙을 교사로 채용하면서 한글과 한문 교육이 시작되었고, 한글과 영어로 기초과목과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학생이 꾸준히 늘자 1891년에는 기와집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 2층 건물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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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당시 이화학당 모습 | 1904년에 중등과(4년)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대학과(4년)를 신설함으로써 초·중·고등 교육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이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38년 이화고등여학교에서 1946년 이화여자중학교(6년)로, 1950년에는 3년제 이화여자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으며, 현재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1년)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고 동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125년 전 정동의 한옥방에서 싹튼 한 여선교사의 꿈이 자라나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가 된 것이다. 한편 이화학당은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 총독부 제약을 덜 받았기에 학생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3·1운동은 물론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1929년 말~1930년 초 서울학생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처럼 이화학당은 전통적으로 여성 교육이 전무하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의 의식을 깨우고 다양한 사회진출을 가능케 하였다. 3·1운동의 상징적인 여성운동가 유관순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양의사 박에스더(김점동),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와서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독살당한 하란사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이화여고 내에는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제3호), 정문으로 쓰였던 사주문,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남아 있으며, 본관 뜰에는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남긴 이 글처럼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초로의 나이에 열악한 환경의 이 땅에 찾아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진정으로 이 민족을 사랑하며 섬겼다. 특별히 여성사회를 변혁시키고 근대화해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여성의식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로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 운영하고 여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지방 전도·교육 활동을 펼치는 등으로 구한말 여성인권 향상과 교육, 의료, 복지에 기여한 감리교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 여선교사들의 대모이다. 조선인들은 스크랜턴 여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를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렀다. 이 땅에 여생을 바친 그는 1909년 25년간의 한국 사역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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