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15317 [수정요청] 청백리 유권해석 요청[全彭齡 or 金彭齡]에 관련한 의견 |
이름 : 전과웅 등록일 : 2015-12-09 조회수 : 93 |
청백리 유권해석 요청[全彭齡 or 金彭齡]에 관련한 의견
게시판 일련번호15184번으로 청백리에 대한 유권해석을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일단 문헌에 나오는 것을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청백리 김팽령은 본관이 경주로 되어 있고, 관직은 사용입니다. 전팽령은 본관이 옥천입니다. 본관이 경주라면 혹 성씨를 오기한 건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는데, 실록 기록만으로는 자료로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저의 의견을 올립니다. 학문적으로 더 논의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1]1507년 문과급제자 김팽령의 경우(1486년 진사) ①1552년 염근인 포상할 때 공직생활 45년차고 진사합격 후 66년차로 86세로 추정되는 나이(진사합격이 20세인 경우)가 되어 이 때까지 공직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行 司勇의 벼슬이 무관 9품이므로 경력이 일천한 관직이므로 문과급제자 45년차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문과급제자로서 발자취가 1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507년 문과급제자 김팽령의 경우의 수는 거의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② 『전고대방(典故大方)』(국립중앙도서관[古2513-416]) 권2, [청백리록(淸白吏錄)]『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권7, [청백(淸白)] 121 김팽령(金彭齡) 121 김팽령(金彭齡) 경주(慶州)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23위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에 의거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에 의하면 김팽령의 본관이 경주가 아니고 부령으로 되어있습니다. 또한 관직은 성균관학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문과 급제자가 무관 9품 行 司勇이라는 기록은 모순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는 문과급제 후 45년차에 다시 무과 9품으로 강등되었다는 모순이 있습니다.
[가정2] 무관 김팽령인 경우 行 司勇이 무관 9품이므로 공직생활 경력이 아주 적다고 생각합니다. 염근인으로 선정되기에는 실적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경주김씨 무관합격자 명단에 김팽령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기록이 오직 염근리선정에 1번 나옵니다. 관련된 기록이 없고 오직 1번만 나오고 무관 9품 벼슬로 청백리로 선정된다는 것이 성과가 일천하여 어렵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경주김씨 무관합격자 명단에도 없는 사실로 보아서 무관 김팽령의 경우의 수도 거의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정3] 1524년 문과급제자 전팽령의 경우 1550년 10월 05일(乙丑/命增秩尙州牧使全彭齡, 以居官廉謹也。) 1551년 11월 10일(전팽령, 염근인으로 선정) 1552년 03월 09일(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이희안·조식·전팽령·김취문 등을 천거하다 )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 1552년 11월 04에만 빠졌으로 문맥상으로 전팽령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팽령은 조선왕조실록 11번 기재되었고 염근리관련 기록이 3건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등재된 전고대방과 청선고는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는 오직 1552년 11월 04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복사 전재(轉載)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국가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 전고대방, 청선고보다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염근리 선정과 관련된 기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1550년 10월 05일 明宗 10卷, 5年(1550 庚戌 / 명 가정(嘉靖) 29年) 10月 5日(乙丑) 1번째기사
청렴 근실하게 고을을 다스린 상주 목사 전팽령의 자급을 높이게 하다 ○乙丑/命增秩尙州牧使全彭齡, 以居官廉謹也。 【태백산사고본】 8책 10권 87장 B면 【영인본】 19책 722면 【분류】 *인사(人事)
2. 1551년 11월 10일 明宗 12卷, 6年(1551 辛亥 / 명 가정(嘉靖) 30年) 11月 10日(甲午) 4번째기사
삼공이 안현·홍섬·박수량 등 33인을 염근으로 이름을 고쳐 뽑다 ○舍人以三公意啓曰: “淸簡之人, 難於廣選, 故改以廉謹爲號而抄啓矣。 且守令不能盡知, 令監司抄出, 六曹所屬各司, 令六曹抄之何如?” 傳曰: “可。” 被抄, 安玹、洪暹、朴守良、李浚慶、趙士秀、李蓂、任虎臣、周世鵬、金秀文、李夢弼、李世璋、李榮、金玽、全彭齡、(洪雲)〔洪曇〕、成世章、尹釜、尹鉉、尹春年、鄭宗榮、朴永俊、吳祥、李重慶、金鎧、任輔臣、李滉、安從㙉、宋益壽、金雨、卞勳男、辛士衡、姜允權、禹世謙, 幷三十三人。 【태백산사고본】 9책 12권 48장 A면 【영인본】 20책 57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行政)
3. 1552년 03월 09일 明宗 13卷, 7年(1552 壬子 / 명 가정(嘉靖) 31年) 3月 9日(辛卯)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이희안·조식·전팽령·김취문 등을 천거하다 ○辛卯/慶尙道觀察使李夢亮薦草溪居前典獄參奉李希顔、三嘉居布衣曺植, 又擧廉謹守令尙州牧使全彭齡、永川郡守金就文、知禮縣監盧禛。【希顔, 才行卓異, 孝友兼篤, 母喪三年, 一不到家, 不脫衰絰。 中廟朝薦擧授職, 謝恩還鄕, 不求聞達, 足絶官門, 非義不取, 一鄕欽服。 曺植, 方正廉潔, 兄弟同居, 不私己物, 有志學問, 不事科擧。 父母喪三年, 身不脫衰絰, 家無甔石, 常晏如也。】 【史臣曰: “二人學行, 求之於古, 不可多得, 而自己卯以後, 士氣沮喪, 世皆以學問爲諱, 不知善可好、賢可尊, 而沈淪草野, 不求聞達之君子, 屢發於宰相、監司之薦聞, 足見好惡之天, 有所不泯而然也。 古人云: ‘才不借於異代。’ 在上之人, 苟能心誠求之, 則才行兼備, 學問該博, 安貧守道, 不求利祿者, 豈止斯二人? 而如金就文、盧禛, 亦皆有學行, 不但以廉謹目之者也。 擢而用之, 置諸左右, 尙何不可之有哉? 下焉不尊, 遠焉不近, 當時秉權衡人物之柄者, 不得辭其責也。”】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18장 B면 【영인본】 20책 76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행정(行政)
4. 1552년 11월 04일 明宗 13卷, 7年(1552 壬子 / 명 가정(嘉靖) 31年) 11月 4日(壬午) 1번째기사
궐정에서 염근인과 근근인들에게 물건을 차등있게 내리다 ○壬午/命賜宴廉謹人于闕庭, 賜一等樂, 勤謹人亦參。 各賜丹木、胡椒等物有差, 至昏, 各賜白蠟燭一雙。 戶曹判書安玹、右參贊朴守良、平安道觀察使洪暹、【未赴任。】刑曹判書趙士秀、大司成李眞、禮曹參議李夢弼、左承旨洪曇、右承旨成世章、大司諫尹春年、判校尹鉉、右通禮尹釜、掌令柳渾、濟用監副正禹世謙、司僕寺正朴永俊、司僕寺副正任輔臣、弘文館校理鄭宗榮、副校理朴民獻、工曹正郞李增榮、內贍寺直長金夢佐十九人, 以廉謹被選。 尙衣院直長金思謹、義盈庫直長趙容二人, 以勤謹被選。 大司憲李浚慶、同知中樞府事任虎臣ㆍ周世鵬、同副承旨金鎧、前大司成李滉、典翰宋賛、部將許世麟、軍器寺別坐安潜、行司勇金彭齡、司宰監正姜允權十人, 以廉謹被選, 而因病未參。 外任廉謹人, 會寧府使李榮、江界府使金洵、羅州牧使吳祥、尙州牧使申潛、密陽府使金雨、溫陽郡守李重慶、醴泉郡守安從琠、江陵府使金擴、新溪縣令兪彦謙、金溝縣令卞勳男、韓山郡守金若默、知禮縣監盧禛、柒原縣監辛士衡、善山居前郡守金就文十四人, 各賜鄕表裏一襲。 【史臣曰: “嗚呼! 夫人可欺, 惟天不容僞。 與選者, 其能皆無愧於內省乎? 推選不精, 故非但物議笑之, 被選之中, 亦自有羞與爲比者焉。 然當國之元衡、通源, 不得與焉, 燻灼之威, 亦有所不及乎!”】 【史臣曰: “被選之中, 豈無數三廉謹之士哉? 然或失身於權貴之門, 或受賂於昏夜之間, 混然雜進, 徒竊美名, 飮酒聽樂, 內省無咎者, 幾何人哉? 况尹元衡挾梁、楊之勢, 肆貪濫之慾, 將至於不奪不厭。 此可以革豺狼之心, 而興廉謹之風乎? 臣未知其可也。”】 【史臣曰: “內需、私帑之政方急, 而欲以此聳勤淸愼之人, 其於群下之莫予信, 何哉? 而況被選者, 其間雖有一二可人, 而小廉曲謹, 眞贗莫知, 吹竽之混, 識者笑之。 又況不貪爲寶, 執事如祭者, 不無其人, 而不見省於時宰, 是可謂公選乎?”】 【태백산사고본】 10책 13권 74장 B면 【영인본】 20책 104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 *예술-음악(音樂)
|
[답변 1]
자료등록수정/게시판
- 등재를 원하는 인물의 정보를 올려주세요. 자료의 오류 수정에 대한 의견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No. 15323 [수정요청] 실록 비교 의견 |
이름 : 정수순 등록일 : 2015-12-09 조회수 : 87 |
비교표
명종 6년 11월 10일 명단 : 명종 7년 11월 4일 명단
안현(安玹) : 호조 판서 홍섬(洪暹) : 평안도 관찰사 (미부임) 박수량(朴守良) : 우참찬 이준경(李浚慶) : 불참 / 대사헌 조사수(趙士秀) : 형조 판서 이명(李蓂) : 대사성 임호신(任虎臣) : 불참 / 동지중추부사 주세붕(周世鵬) : 불참 / 동지중추부사 김수문(金秀文) : X 이몽필(李夢弼) : 예조 참의 이세장(李世璋) : X 이영(李榮) : 외임 / 회령 부사 김순(金珣) : X 전팽령(全彭齡) : X 홍담(洪曇) : 좌승지 성세장(成世章) : 우승지 윤부(尹釜) : 우통례 윤현(尹鉉) : 판교 윤춘년(尹春年) : 대사간 정종영(鄭宗榮) : 홍문관 교리 박영준(朴永俊) : 사복시 정 오상(吳祥) : 외임 / 나주 목사 이중경(李重慶) : 외임 / 온양 군수 김개(金鎧) : 불참 / 동부승지 임보신(任輔臣) : 사복시 부정 이황(李滉) : 불참 / 전 대사성 안종전(安從㙉) : 외임 / 예천 군수 송익수(宋益壽) : X 김우(金雨) : 외임 / 밀양 부사 변훈남(卞勳男) : 외임 / 금구 현령 신사형(辛士衡) : 외임 / 칠원 현감 강윤권(姜允權) : 불참 / 사재감 정 우세겸(禹世謙) : 제용감 부정
추가된 인물 : 1. 염근 : 장령 유혼(柳渾), 부교리 박민헌(朴民獻), 공조 정랑 이증영(李增榮),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 김몽좌(金夢佐) 2. 근근 :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김사근(金思謹),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조용(趙容) 3. 염근(불참) : 전한(典翰) 송찬(宋贊), 부장(部奬) 허세린(許世麟), 군기시 별좌(軍器寺別坐) 안잠(安潛), 행 사용(行司勇) 김팽령(金彭齡) 4. 염근(외임) :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순(金洵), 상주 목사(尙州牧使) 신잠(申潛), 강릉 부사(江陵府使) 김확(金擴), 신계 현령(新溪懸令) 유언겸(兪彦謙), 한산 군수(韓山郡守) 김약묵(金若默), 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 선산(善山)에 사는 전 군수(郡守) 김취문(金就文)
빠진 인물 : 김수문(金秀文), 이세장(李世璋), 김순(金珣), 전팽령(全彭齡), 송익수(宋益壽)
특이 사항 : 1. 김순(金珣)(명종6년 11월 4일) -> 김구(金玽)(명종6년 11월 10일) ->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순(金洵)(명종7년 11월 4일) 2. 전팽령(全彭齡) -> 행 사용(行司勇) 김팽령(金彭齡)
의견
전고대방이나 청선고 같은 20세기 문헌보다 실록을 더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같은 실록 내에서 명종6년 11월 10일 기사를 인정하고 명종 7년 11월 4일 기사를 배제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명종6년 11월 4일 -> 명종6년 11월 10일 -> 명종7년 11월 4일 각 기사마다 명단에 조정이 있습니다. 상주목사 전팽령은 염근하여 천거되었으나, 어째서인지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않고 김팽령이 대신 낙점되었다고 보입니다. 김수문, 이세장, 송익수 등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수문은 전고대방에는 빠지고 청선고에는 실렸습니다. 이세장은 둘 모두에 실렸는데, 고관을 지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송익수는 전고대방과 청선고에 빠졌는데, 명종6년 11월 4일 기사에 들어간 송익경(宋益璟. 宋翼璟?)은 등재되었습니다. 한편, 청선고에는 김순(金洵) 뿐만 아니라 김구(金玽)도 실었는데, 이는 실록의 여러 기사를 모두 참조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두 문헌에서 김팽령과 전팽령은 김팽령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집필의 일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史臣曰 : "... 推選不精, 故非但物議笑之, 被選之中, 亦自有羞與爲比者焉。..."라 하였으니 만일 기록상 전팽령이 염근으로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이 때 염근으로 뽑혔던 이준경의 문집인 <동고유고>를 보면, 효종조에 적상산사고본 실록을 보고 해당 기사를 발췌해둔 내용이 있는데, 그곳에도 동일하게 김팽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
[답변 2]
자료등록수정/게시판
- 등재를 원하는 인물의 정보를 올려주세요. 자료의 오류 수정에 대한 의견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No. 15331 [수정요청] 답변 드립니다. |
이름 : 운영자 등록일 : 2015-12-11 조회수 : 42 |
안녕하십니까. 늘 관심을 가지고 저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답변을 아래와 같이 드립니다.
청백리의 원전은 [전고대방]과 [청선고]가 맞습니다. 하이퍼링크는 제가 서비스 차원에서 삽입한 것입니다. 김팽령의 문과·사마 연결은 저의 실수였습니다. 본관을 확인하지 않고, 검색이 된 결과로 연결한 것입니다. 청백리 김팽령은 경주김씨이고 과거 합격자는 부령김씨입니다. 링크는 삭제하였습니다. 청백리가 옥천 전팽령인지, 경주 김팽령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합니다. 전고대방이나 청선고의 편자들은 다른 자료를 참고하였을 것입니다. 그 자료가 실록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실록은 사고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열람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록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고, 7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축쇄 영인하였습니다. 이것을 한국고전번역원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1993년에 국역을 완료 하였습니다. 국역본과 영인본을 1995년, 1997년에 서울시스템(주)에서 CD-ROM으로 만들었고, 이 데이터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터넷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전팽령이 염근리에 선발되었기 때문에 전팽령이 청백리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 김팽령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시대에 김팽령이란 사람이 없었다면 또 원전들의 오류라고 할 수도 있는데, 부령 김팽령, 경주 김팽령이 동시대에 살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벼슬도 사용이라고 한 것을 보아서는 옥천 전팽령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동래 정연처럼 이분도 현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다만 청백리가 어떤 식으로 자료에 출현하는지를 보여드리려고 서비스를 한 것입니다.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문의 사항이나 수정요청 사항 등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료등록 수정게시판을 통해 문의,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고객님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잘 반영하여 보다 정확한 정보와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