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학당(興學堂)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 147호(전북)
명 칭 : 흥 학 당
지정일 : 1999. 07. 09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97-2(유천길 40-1)
흥 학 당(興學堂) 전경
계남면사무소 막 지나면 계남농협이 있다 농협건물 앞쪽에 보면 계남면 복지회관이 보인다
복지회관 앞에 흥학당 가는곳 안내판이 있다 안내 방향따라 500m 쯤에 작은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흑학당이 있다 흥학당이 있는 이 곳은 계남면 화양리 난평마을 이다
화양리는 법화산 양지쪽 마을이라해서 화양(華陽)이라한다 말 그대로 법화산((法華山)의 화(華)
양지쪽이라는 볕양(陽)를 쓴 것이다
이 마을은 1914년에 송산, 명동, 고기, 중방, 난평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양리라 했다 현재는 난평, 명동, 중방 세 마을 합치어 화양리라 부른다
이 곳의 난평마을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아름다운 숲과 온후함을 지켜준듯하다 그리고 느티나무
두 그루는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으며 주민들 무병장수와 복을 빌고있는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있다
이 마을은 약 400여 년전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전해지며 마을앞이 너무 트여 있어서 마을의 복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고하여 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정시대 전에는 난평마을 이름을 난초
난(蘭)자 썻으나 일정시대 이후에는 알란(卵)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마을 가까운곳 언덕에는
둘레 100여m 높이 20여m의 잔디로 덮여 있는 능(陵)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알봉이라 부른다
혹여 이곳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흥학당 정문(반월문)
흥학당 바깥담 정문(대문)은 반월문이다 이름에서 풍기듯이 달도차면 기울어 많고 적음을
반복하지만 반달은 그져 마음이 풍만할 따름이다 이런 뜻이다 옛날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글귀인듯 하다 들어올 때 반으로 왔다가 나갈 때 학문을 익히고 반을 보태서
나간다는 말 인가보다 참으로 의미있는 표현이다 반월문은 평대문으로 되었으며 좌측에는
이 곳을 통하여 배출된 선비들을 기리는 비문과 우측에는 흥학당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정문인 반월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에 관리사 비슷한 건물이 있고 안쪽으로 내담이 경계를
짓고있다 내담 중간에 입덕문(入德門)이 있다 덕을 배우고 인간이 되어라는 뜻일까? 옷 매무새
고치고 경건한 마음을 다져본다 옛날에 이 문을 팔왕문(八往門)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입덕문 열고 들어가니 정면4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된 흥학당 본 건물이 보인다 세월의
흐름에 퇴락하여 보수를 거듭했으며 부속 건물은 정문, 담장, 고사(庫舍)가 있다.
입덕문(흥학당 입구의 문)
이 곳의 흥학당은 장수군내 교육기관으로서는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왜적의 침입을 받고 난뒤에 자녀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지방의 사족들인
연안송씨(延安宋氏) 남원양씨(南原梁氏) 보성오씨(寶城吳氏) 문화유씨(文化柳氏)
충주박씨(忠州朴氏) 전주최씨(全州崔氏) 전주박씨(全州朴氏) 동래정씨(東萊鄭氏)
금계한씨(錦溪韓氏)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 청주한씨(淸州韓氏) 등 11성이
뜻을모아 1597년(선조 30)에 조촐한 초가집 강당을 세우고 훈학을 불태웠으며 그 후 세월따라
흐름따라 학당을 고치고 팔작지붕에 기와장을 올리고 양쪽으로 방을 들였으며 중앙은 마루다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기거 했을것이라 생각이 들고 가운데는 넓은 마루로 이 곳이
교실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훗날에 정문과 중문 그리고 고사(庫舍)를 지었고 돌과 흙을
혼합하여 담을 치었으며 안담과 바깥담을 구분하였다 들어가는 정문을 반월문(半月門)이라고
했으며 중간문은 팔왕문(八往門)이라 했다가 이후 입덕문(入德門)으로 바꾸어 본 흥학당(興學堂)
이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흥학당(興學堂) 건물
이 학당에서 소대항(蘇大恒), 오득량(吳得良), 정국신(鄭國臣), 여선덕(呂善德)등 4명의 문과
급제자와 온표(溫彪) 등 10여명 생원진사 합격자가 배출되어 명문학당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장수군내 각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배운 수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하여 과거에 응시하였다
전한며 이후 개화의 물결속에 문을 닫았다 흥학당은 일제시대에는 계남면사무소로 사용된바
있으며 지금의 계남초등학교 전신인 계남보통학교가 이곳에서 개교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여러
여건상 흥학당을 보통학교 교실로 이용했을 것이다 사학으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이 곳은 미풍양속의 맥을 이어오는 계남 향학 발상지로 역사적 의미가 아주크다 또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흥학당 부근에 흥학(興學)의 얼과 정기를 받고 후학의 백년대계를 있고자 1980년
에 계남중학교를 세웠다 한다 이 곳은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인 가치가 높아 1999년 7월 9일에
전북문화재자료 147호 지정받아 보존 되고있다 특이 한것은 다른 문화재와 달리 흥학당 본 건물
안쪽 마루에 문화재 지정서를 게시 하고있다 장수인이 아니라 해도 교육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지나가는 길에 한 번쯤 이 곳의 흥학당을 찾아가서 옛 선조들이 공부를 하였던 모습과 과거에
합격 하였던 분들의 채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흥학당 이모저모
끝으로 이 마을의 또 다른 유래에 대하여 문헌상의 기록에는 희미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
소개하고자 한다 옛날 장수군 고지도(古地圖)에 보면 이 곳의 흥학당이 있는 마을 이름을
유천(柳川)이라 표기 되었다고 한다 실재로 마을이 70년대 중, 후반까지 형성되어 오다가
근래에 들어 몇가구 남지 않아서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현재의 난평마을에 편입 되었다는
것이다(주민 류지봉씨 증언).
이를 유추 해보면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 할 당시 흥학당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 버드나무가
흩날리는 비경(秘境)이라는 걸 알수있다 유천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을
떠 올릴수있다 이런 풍경을 유천표모(柳川漂母)라 한다 장수 8경중 제3경인 것이다
당시의 흥학당 유생들은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방망이 소리를 들으며 풀피리 벗삼아
하늘천, 따지를 외치며 훈장으로부터 회초리 맞아가며 배워야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으로 사료한다.
유천마을의 또 하나의 증거는 예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래가락이 있다
이 동네 사시는 팔순넘는 할머니가 직접 불러주어 녹음을 해두었다
♬사방에 모여든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소리는 들녘에서 밭 가는소리 가까운
산에서 벌목꾼들이 흥겨운 노래소리, 어야디아 어야디야 ♬.
또 다른 증거는 현재 이 마을 도로명 주소를 옛 지명을 찿아 유천(柳川)길로 표기 하고있다
유천(柳川)은 흥학당 앞 냇가에 큰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서 버드나무가 많은 냇가의 마을이라
해서 유천((柳川)이라했을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유촌(柳村)으로 불렀을
것이다 유천이든 유촌이든 장수 제3경은 이 동네의 풍경을 말함이 확실한 것 같다
지금까지 여러 설들을 유추해보면 계남의 유천표모(柳川漂母)는 정황상으로 보아서
이 마을 앞 냇가의 풍경을 일컬어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판단해 본다
필자는 이곳 흥학당 앞 냇가에 지난날 버드나무 흩날리는 풍경을 상상하며 발길 돌린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