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畿 北部 연천군의 보개산줄기 지장봉(877.2m)(2009년 6월 22일)
지난 곳 ; 관인면 중리(87국지도)-사기막고개(중리-고문리간 비포장78군도)-향로봉(610m)-삼형제봉(북대,710m)-화인봉(810m)-지장봉(환희봉)-향로천 지장계곡
(부부산행)
이곳 중리 지장산 입구에 내리는 동안 집에서 지하철 두번 갈아타고
버스 두번 갈아타니 4시간 20분 걸린다.
마두역(3호선,5시 21분)-종로3가(1호선)-의정부(포천행,차편 많음)-포천,한마음 약국앞(59번 관인행)-중리도착(9시 40분)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이동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거나 택시비를 많이 지출해야한다.
포천에서 출발하는 관인행 8시 25분차를 못 타면 다음차가 10시경 있으니 산행에 차질이 많이 난다.
버스에서 내리면 아스콘 포장길을 따라 중리 저수지 옆으로 가게되며
주차장에 도착, 임도길을따라 왼쪽으로 한참 오르면 사기막 고개에 도착한다.
왼쪽으로 가면 종자산(642.8m)에 가게되고 우린 우측 길로 향로봉(610m)을 향한다.
중리에서 고문리로 통하는 78번 군도이나 아직 포장이 안된 상태이고 부분적으로 세멘포장이 되어 있다.
종자산쪽 사격장에서 따다다 따다다하고 한참을 갈기더니 이제는
약간 템포가 느리긴 해도 중량감을 느낄수 있는 쿠아아 앙 쾅!하고 지축을 울리는 포소리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포 소리가 안들리면 왠일인가하고 오히려 궁금해 할것 같다.
향로봉 직전 전망바위에서 내려다본 중리마을과 중리저수지.
날씨가 맑았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지장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물이 저수지를 가득 채우니 바닥이 다 보였다.
등산로는 아주 좋았고 많은 바위가 숲에 감춰져 있어 바로 보이는것은 별 없었으나
바위산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향로봉.
걱정 했지만 전부 우회길이 있어 위험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잡목이 하늘을 가려 시원해서 좋았지만 여름산 보다는 가을산이 더 좋을것 같았다.
바위를 감싸고 멋지게 자란 나무가 너무 건강해 보여 좋다.
아직도 낙엽이 발등을 덮을 정도이니 숲의 정도를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바위와 소나무는 相生관계가 있는지 잘생긴 소나무들이 제법 있었다.
저 봉우리들을 다 넘어야 지장봉(877.2m)에 가게된다.
지난 고대산(832,1m)과 금학산(946.9m)을 종주할때 바라본 이 산줄기는
이렇게 오르내림이 많은것 같지 않았는데 상당했다.
저 멋진 관인봉(610m)능선을 시간이 허락지 않아 갈수 없었다,
화인봉(810m)오르는 바윗길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참나리꽃.
대야산(930.7m)처럼 스릴있는곳도 두어군데 있어 산맛을 느낄수 있어 좋았다.
지나온 능선길,
삼형제암, 북대. 향로봉.그 오르내림이 대단했으나 우리는 이곳까지 왔다는 뿌듯함에 흐뭇해 한다.
내려다본 지장계곡,
생명을 다한 소나무도 끝까지 우리에게 그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바로 作品이다,
보긴 저래도 우회길이 있어 힘들이지 않고 오를수 있었다.
보개산 지장봉(환희봉),
정상엔 3개의 정상비와 군인들이 쌓은돌탑(케른)이 있었지만 높이가 틀려 보기 안좋다.
삼각점 (철원 312 2007 재설)이 있었고 남쪽은 바위 절벽이고 사방이 잘 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포천에서 세운 정상비 뒷면엔 白沙 李恒福(抱川出身)의 詩가 있다
철영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어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어떠리.
뒤돌아본 나의 발길이 참으로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다.
눈은 게을러도 발은 부지런 하다고 언제 이렇게 많이도 왔을까?
담터고개(570m)
고개에서 볼때는 차가 충분히 오르내릴수 있으리라 생각 했는데
내려오면서 확인하니 불가능했다'
옛날엔 통행 했겠지만 지금은 폭우에 깊게 파여 돌길이며 4륜구동도 아마 못 오를것 같았다.
당초 계획은 이곳을 통과 관인봉을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올 계획 이었는데
歸家길이 염려되어 후일로 미루고 계곡탐방을 했다.
계곡의 푸르고 맑은 물은 내 마음 깊은곳까지 깨끗하게 씻어 주는듯 했으나
차가 올수 있는 지점에 접근하니 그 기분은 싹 가셔지고 말았다.
먹고 마신 후의 그 쓰레기를 모두 그곳에 버려두고 말았다.
올때는 박스에 가득 담아와서 먹고 놀다가 갈때는 자기 차만 깨끗이 청소 하고 가 버렸으니
다음 오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만약 자기들이 놀러 왔다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어쩌겠는가?
우리 모두 아름다운 자연환경 잘쓰고 잘 관리하자.
보가산성지(保架山城址)
보개산성및 궁예왕 대각대성지라고도 하며
강원도 철원에 도읍하고 있던 태봉국왕 궁예가
왕건과 싸우기 위해 쌓은 것이라며 포천군 향토유적 제 36호이다.
관인봉의 우아한 모습
빨리 가 보아야 할텐데.....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조금 내려가자 5분정도 계속 소나기가 퍼 붓는데
비를 피할수있는곳에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우리가 계획대로 관인봉을 올랐더라면
생각만 해도 웃으웠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명성지맥을 시원하게 마치지 못한 후유증이 앙금으로 남는다.
이곳이 바로 佛國淨土였음에도 접경지역이라 모든 산봉우리는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우리 민간인에게 한 치의 양보도 아량도 피하고 있는 그들만의 아지터 이자 천국으로 알고 있는 곳이다.
명성지맥의 관음산, 불무산, 보장산, 보개산 지장봉등 모두가 불교와 연관 있으며 곳곳에 나라 잃은 궁예의 슬픔이 유적으로 남아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이틀간 많은 비를 내리고도 또 남았는지 하늘이 맑아 보이진 않는다.
지금이 장마기간이라 내일부터 전국적으로 또 비가 올 것이란 예보도 있었지만 오늘 하루 기상청의 예보만 믿고 우리 부부는 집을 나섰다.
휴전선이 가까이 있는 경기북부의 산들은 만나기가 쉬운 곳 아니다. 오로지 끈질긴 집념과 하고자하는 의지력으로 몇 개 안남은 未踏峯을 내 나이와 접목해볼 참이다.
인간에겐 불가능이란 없는 모양이다.
온갖 지혜와 노력으로 不可能을 可能으로 만드는 노력이 결국엔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룩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산만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도전하는 것이라 본다.
主客이 전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급경사 길을 오르자 아래 중리 저수지의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뛰어들고픈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億劫의 세월이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仙境이다.
출발한지 두어 시간 되어 가니 목에서 단내가 난다.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지만 산에서는 여유를 부려야 함에도 산에서는 귀가할 욕심에 또 빠른 주문을 한다.
준비해간 커피로 우선 목을 축이니 꿀맛이다.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를 꿀맛이라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곳에서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고 세상 살아가는 맛 일 것이다.
인생에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에 잊지 못할 고마움과 인간으로서의 해야 할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는 순간이기도 하는 것이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 위치하며 함경남도를 통과한 백두대간줄기가 강원도 북부에 들어서 남서쪽으로 분기한 임진북예성남정맥의 끝머리에 솟은 암봉이 바로 보개산(지장봉877.2m)이다.
산의 봉우리가 중의 머리같이 생긴 바위로 되어있고 불법승 삼보의 지붕구실을 한다는 뜻으로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최북방의 산이다,
매표소나 기타 지도에는 지장산으로 되어 있으나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동국여지지도등 모든 지리관계 문헌들은 보개산이라고 記名하고 있다
정상북쪽의 고대산(832m)과 남쪽의 종자산(642,8m)이 잘 조망된다,
오늘 종자산이나 관인봉 능선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두개 다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동거리(4시간) 때문에 산행시작이 늦은 것이 제일 큰 이유이고 관인봉 능선은 곧 비가 올 것 같아 계곡으로 내려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나기가 오는데 정말 잘했다고 오랜만에 집사람한테 칭찬을 받기도 했으며 바쁘게 서둘러도 집에 오니 10시 20분이었다.
(중리에서 포천으로 오는 버스 5시 40분 있음)
寶蓋山은
보배로 가득하며 불보살의 보배스러운 加被(부처와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와 영험이 가득한 산이란 의미가 함축된 산이다. 地藏眞身이 머물며 설법하는 곳이며 수많은 준봉들과 함께 솟아있는 명산으로 거대한 산군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와 계곡 이름이 모두 불교에서 유래한 것 같다.
옛 기록에는 이 산에 28개의 장엄한 산봉우리와 36개소의 절경지가 있었으며 골짜기마다 불당이 들어서 있어 등을 켜면 마치 밤하늘의 별빛만큼 사찰의 등불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구한말의 항일 의병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불교 문화재가 소실 파손되어 지금은 단 한곳의 옛 절도 남아 있는 곳이 없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개산은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탐승객과 스님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기도 하였다.
이 산의 상봉을 地藏峰 또는 歡喜峰이라 이르며(무이지천) 武夷之川이라 했다.
지족암, 용화사, 운은사 등 불교와 관련한 사찰들도 많았으나 6,25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계곡의 하류쯤 해묵은 석축은 보가산성터인데 조금 아래 낡은 불상 네 개를 방치한 묵은 절터도 있었으며 여기서 보가란 보개에서 유래된 것으로 천여년 전 태웅의왕 궁예가 부하인 왕건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웅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거의 무너진 상태라 본래의 규모는 알 수 없고 70여m만 남아 있다.
보개산 지장봉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포천군 관인면 한탄강 건너에 있지만 강원도 철원군에 더 인접해 있다.
보개산 자락인 철원 동송 심원사에 모셔진 지장보살상에는 왼쪽어깨에 화살자국이 남아 있는데 “烏飛梨落”이라는 말이 생긴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 불상이다.
오비이락 즉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라는 속담으로 뒤로 넘어져도 코 깨지고 소금 팔려니 비 온다는 말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하는 말도 있지만 재수 없는 속담은 아니다.
환희봉 왼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석대암 창건설화의 주인공 이순석과 지장보살의 사연이 담겨있는 말이다,
신라시대 보개산 기슭(석대암자리)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까마귀가 배나무에 있다가 날아오르는데 동시에 배가 떨어져 하필이면 그 아래 독사가 똬리를 틀고 쉬고 있는데 떨어져 머리를 맞은 독사는 까마귀가 고의로 했다고 판단 까마귀에게 독을 품어 까마귀도 죽게 되었고 독을 심하게 뿜은 독사도 기진맥진 그 자리에서 같이 죽게 되었다.
그야말로 오해로 인한 참극 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까마귀와 뱀은 죽어서도 그 원한을 풀지 않았다,
뱀은 죽어서 멧돼지가 되었고 까마귀는 꿩이 되었다.
어느 날 멧돼지가 먹이를 찾던 중 원수라고 여기던 꿩이 아래에 있는 것을 확인 바위를 굴러 비명횡사하게 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그 꿩을 발견 집으로 갖고 가 요리를 해 먹고는 부인이 아들을 낳게 되었다.
한편 까마귀-꿩의 업보를 타고 태어난 옥동자는 훗날 유명한 사냥꾼이 되어 멧돼지(뱀)만 사냥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보개산으로 사냥을 간 그는 금빛 찬란한 돼지를 발견하고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힌 돼지는 환희봉을 향해 도망쳤고 사냥꾼은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금빛돼지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멧돼지는 온데간데없고 지장보살 석상만이 우물에 몸을 담근 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비이락”속담의 전말이다.
바로 지장보살이 까마귀와 뱀이 인과를 반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 멧돼지로 화현하여 화살을 맞은 것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희생으로 쓸데없이 죽고 죽이는 악연의 관계가 끝 이난 것이다.
지장봉 동쪽 큰골 건너엔 길게 뻗은 관인봉(710m)이 아름답게 건너다보이며 이곳의 가을 단풍은 설악을 견줄만한 아름다움이 연출된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 단애를 이룬 바위에 붙은 돌단풍의 물든 모습을 살짝 그려 보기도 하며 계곡을 찾아 피서하는 우리 질 좋고 품위 있는 환경보호 애호가들의 수준 높은 문화수준 기대해 보며 오늘의 산행 후기 이것으로 줄인다.
아름다운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