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청각 행랑채

임청각 배치도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보물 제182호/경북 안동시 법흥동 20-3)
임청각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종택이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911년 이상룡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팔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후 임청각은 소유권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2010년에서야 고성이씨종중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이다.
현재 남아있는 집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는 임청각은 현재 건물 전체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1942년에 완공된 철도 중앙선이 임청각 앞으로 지나가면서 임청각 대문간과 행랑채가 헐려나가 규모가 축소되었다. 규모가 축소되었기는 하지만 지금 규모만으로도 다른 고택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20세기 이전에 지어진 집으로 이 집과 규모를 비교할 수 있는 정도의 집이라면 강릉 선교장 정도가 아닐까 한다.

임청각 안채
임청각은 1519년 조선중기에 이명李 이 건립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성이씨 법흥종회에서 발간한 임청각소개서에 의하면 임진란 후와 1767년에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중수기에 의하면 1626년에 단청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히 말하면 1626년에 첫 번째로 중수하고 1769년에 두 번째로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침구조를 자세히 보면 일부 고식古式으로 보이는 구조가 있어 두 번의 중수에도 불구하고 옛 구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登東 而舒嘯 臨淸流而賦詩(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읍조린다)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철도개설로 낙동강과 단절되어 있으나 과거에는 대문이 낙동강과 붙어있었다고 하니 임청각이라는 이름이 결코 집분위기와 동떨어진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임청각 대청
또한 임청각은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하고 있는 임청각은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어 고가도로나 도심의 건물로 주변이 산만하지만 예전에는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종택에서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집 대문을 누대樓臺 건축하였는데 바로 이 누대 앞에 낙동강이 흘러 2층 누대에서 낚시를 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집 앞 자연 풍광이 참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다.
임청각은 규모뿐만 아니라 집 구조에서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임청각은 동남향을 하고 있는데 경사가 급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횡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좌측에 몸채가 있고 우측으로 가면서 임청각의 별당인 군자정이 있고 맨 우측 언덕에 이 집의 사당이 배치되어있다. 언덕에 건물이 횡으로 배열되고 보니 지금은 철로 둑으로 막혀 제 위용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대가大家로서의 위세가 자못 당당하였을 것이다.

임청각 대청 상부구조(장연과 단연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었음)
현재 집은 크게 보면 3열로 구성되어있다. 경사를 따라 맨 뒤에 있는 몸채가 일렬로 배치되었고, 가운데 안행랑채가 몸채와 같은 위치에 있고 한단 아래쪽에 바깥 행랑채가 있다. 그리고 그 건물들을 수직방향으로 날개채로 연결하고 있다. 이런 폐쇄적인 구성은 그리 많지 않다. 위에 정침 부분은 月자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이런 구성은 화성에 있는 정용채 가옥과 같은 배치로서 매우 폐쇄적인 구조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임청각 구조 때문에 임청각 평면 형태를 문자형文字形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용用자 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日자와 月자를 합친 형태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임청각의 정형화된 형태 때문에 문자형으로 집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안채 마당에서 본 별채 안마당 통로
임청각은 특별한 형태 때문에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형 마당을 중심으로 각 실이 배치된다. 이런 중정형 집은 중정이 넓지 않을 경우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는 데 임청각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앞쪽 안행랑채가 2층으로 지어져 답답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집은 매우 크고 당당하게 지어졌으나 안채에서 생활하는 안주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감옥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폐쇄적인 구조이다.
임청각이 폐쇄적인 구조를 지녔지만 집은 매우 튼실하게 지어졌다. 부재도 넉넉히 사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안채를 보면 민도리집이기는 하지만 보를 받치는 동자주가 포형동자주로 되어있는데 아름답게 초각이 되어있고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도 매우 화려하게 초각이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매우 공력을 들여지는 집임에는 틀림없다.

안채대청에서 본 중정
안채 대청은 깊이는 한 칸 반 앞에 반 칸 퇴칸을 둔 두 칸 규모의 오량집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이 임청각의 서까래는 다른 집 서까래와 달리 두 서까래가 주먹장 이음으로 결구되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집 서까래는 위에 있는 단연과 아래 있는 장연을 엇갈려 걸고 있다.
일반적 공법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음을 채택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미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장연과 단연을 엇갈려 배열할 경우 내부에서 올려다보면 중도리에서 장연과 단연이 엇갈려 배치되어 가지런한 느낌이 감소된다. 가지런한 느낌을 들도록 어렵지만 이음으로 처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점에서 임청각은 다른 집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집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사랑채
이 집에서 주목을 받는 곳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쪽에 있는 방이다. 앞에는 우물이 있어 우물방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임청각의 배치로 보아 사랑채로 쓰였다고 보이는데 종중 안내책자에는 산청産廳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서 정승 3명이 태어난다고 하는 곳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이상룡선생이 태어났고 외손外孫으로는 문헌공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쨌든 집 구조를 보면 작은 사랑채로 쓰였던 곳이 아닌가 한다.
정침 옆에는 별당이자 사랑채인 군자정君子亭이 있다.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정경은 철도로 짤리고 콘크리트 건물로 혼탁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마음을 확뚫리게 한다. 왜 이곳에 군자정을 지었는지 한눈에 이해가 된다. 군자정은 누정형식으로 지어졌는데 동쪽 4칸 대청 옆에 일 열로 4칸의 방이 배열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ㅏ자형태 평면이 되고 있다. 군자정은 대청과 방 4칸의 구조가 다르다. 대청은 이익공구조에 팔작지붕이고 방은 민도리 3량집이다. 왜 이렇게 구조를 달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습에 화려한 누마루에 단아한 맞배지붕이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집이다.

군자정
군자정은 단청을 올렸던 집이다. 1767년 이종악李宗岳이 중수하면서 작성한 중수기에 의하면 7대조가 병인년에 단청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해가 1626년에 해당된다. 지금을 색이 바래 외부에서는 단청한 흔적을 찾기가 힘들고 내부에서만 단청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도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다.
임청각은 집 자체의 가치를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내보이고 있지만 무엇보다 임청각의 가치는 근세사에서 고성이씨가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관점에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서예의 가치를 단순히 잘썼다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글쓴이의 인품과 더불어 판단하는 것처럼 집의 가치도 그 집에 살았던 사람과 연관지어 판단하여야 한다.
처칠은 말했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고.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사람의 호연지기를 키울만 하였다. 이런 경관을 바라다보고 살아온 석주 이상룡선생은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모든 재산을 팔아 모든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그냥 드러나지 않는다. 집안 내력과 함께 집의 가치는 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군자정내부

군자정 익공

군자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임청각사당
첫댓글 군자정 앙쪽 벽에 걸려있는 액자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