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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長水 天主敎會 水分公所)
종 목 : 등록문화재 제189호(전북)
명 칭 : 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
지정일 : 2005. 6. 18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667-1(뜬봉샘길 51-3)
장수천주교 수분공소 건물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나의 고향 무공해 청정지역 맑고 깨끗한 名山들
물의근원지 물뿌리 물과 연관성을 셀수없이 수식어가 붙어 三淸지역(淸淨. 淸山. 淸水)이라고
하는 전라북도 長水 땅이다 ! 이 아름다운 곳에 금강의 발원지 물의 근원지인 뿌리가 있는
뜬봉샘이 있다 뜬봉샘 가는길 수분마을에 등록문화제 제 189호로 지정된 천주교 장수본당
수분공소가 있다 장수읍 출발하여 남원방향 19번국도 따라 약 8㎞정도 가면 우측으로 수분마을
뜸봉샘 가는길 이정표가 있다 이 마을입구의 삼거리에서 우측방향은 뜬봉샘생태공원 가는길이고
직진하면 수분공소가 나온다 마을회관과 아담한 정자가 보이고 왼쪽 언덕위에 수분공소가 있다
이 곳의 수분마을은 물뿌리 마을 또는 물뿌랭이 마을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만큼 물과 관련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수분이고개, 가운데들, 강태들. 개안들, 고무들, 깃대봉이 있고 돈방날, 뜸봉
막골, 매산바우, 모색골, 배정이, 버드나뭇골, 선바우, 선지당골, 수분치, 순천잿들, 아랫박골
야지편, 여시바우, 연사동, 운학동들, 웃막골 등이 있다 수분(水分) 말그대로 물이 갈라지는 곳
이란 뜻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을 이루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이 된다.
수분마을과 신무산
공소건물이 세워진 것은 1913년 경남 함양군 본당의 이상화(바르톨로메오)신부와 전북 진안군
어은동 김양홍(스테파노)신부는 두 본당의 인접 지역인 무주, 남원, 임실 등지의 공소를 방문하기
위해서 서로 왕래하는 중간 지점인 이곳(수분공소)에 쉬어가는 쉼터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고
수분리에 강당과 침실을 짓게 된 것이 수분리 본당의 모체가 되었다한다
그러나 건물 관리가 부실하여 허물어질 지경이었다 당시는 함양본당에서 수분공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1920년에 함양본당 주재용 신부가 진안 백운면 두원리 주암동에있는 김한서(니고나오)
회장에게 수분리 공소를 맡을뿐만 아니라 인근공소를 지도 해주도록 권하여 김한서는 1920년
10월 5일 수분리로 이사하였다.
김한서 회장은 이사한후 박재은(스테파노1932년사망)와 합심하여 1921년 공소건물 개수공사를
착수하였다 김한서는 가난하여 자신의 정력과 열심을 제공하고 박재은(스테파노)는 물질적인
봉헌을 하기로 했다 당시 기와공장은 70리 거리인 함양에 있었는데 흙기와를 구해 고개를 세 번
이나 넘어가며 지게로 날랐고 목재는 4km떨어진 번암 금천 앞산에서 육송을 구해 옮겼다
성당지붕을 개수하고 내. 외벽을 고쳤으며 창고 식당등을 짓고 정원을 정비 하였고 옆으로
방 2개를 신축하였는데 이는 1920년초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공소를 정비할때 방 2개가
딸린 강당을 더 짓도록 지시한데 따른 것 이라고 한다 이는 사제 수급이 원활해지면 공소에
사제를 파견해 본당으로 승격시킬 요량으로 사제관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어려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일심동체 되어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도왔다.
전체적으로 1920년대 한옥성당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한편으로 영신회(신심회)등
친목회를 조직하여 화목의 일치를 다졌으며 1926년 5월29일 서품된 김필곤(바르나바)신부가
초대 수분리 본당신부로 부임했다 부임한지 1년쯤되어 결핵에 걸려 고생하시다가 1928년
2월에는 늑막염으로 대구에 입원하였다 그래서 1928년 5월 6일에 대구 남산당 본당의 석종관
(바오로) 신부가 수분리 본당으로 부임하였다 석신부는 문맹퇴치 운동에나서 소화학원을 세우고
가난으로 학교 갈수없는 어린애들을 대상으로 교육했다 수분리 주위에는 공소가 많았고 그중
수분리 교세가 가장 컷다고 전한다.
수분리에 천주교도가 살기 시작 한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살면서 부터
이다 병인박해때에 진다리(송천리 이교)에 6,7호 40여명 막골(수분리북쪽골짜기)에는 5,6호의
30여명 운학동(수분리남쪽골짜기)에는 10여호가 살았으며 1840~1850년대에 다블뤼, 최양업
신부가 수분리에 제단을 만들고 미사를 했다고 한다 또한 김대건 신부가 이 곳을 다녀갔다고
전한다 1926년부터 수분본당으로 미사를 드리다가 한국전쟁시 조상익 신부가 군종 신부로 입대
함에 따라 신부가 공석이 되어 임시 남원본당 공소로 되었다가 1954년 장계면에 장수군을
관장하는 본당이 신설됨에 수분리 본당 시대는 끝나고 장계천주교회 소속 공소가 되었다
이후 1977년 장수천주교회가 설립되면서 장수천주교회 소속 공소가 되었다 한편 공소 뒤뜰에
세워져 있는 대형 예수 성심상은 멀리서도 이곳이 천주교 건물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 성심상은 2003년 공소 신자들이 공소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이 공소는 장수읍
수분리 667-1외 2필지이다.
수분공소 내 대형 예수상
수분리에 언제부터 천주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최양업 신부가
이곳(수분)까지 다녀갔고 병인박해(1866년) 이전부터 이 곳에 이춘경 이라는 교우가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수 많은 교도가 병인박해를 피해 이 곳 수분리 북쪽 골짜기인 막골과
남쪽 골짜기인 운학동에 교우들이 피신해서 흐터져 살았다고 한다 이런점으로 보아서 수분리에
1800년대 중반쯤 부터 천주교 교도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분리에 1913년~1914년쯤
공소를 처음 지었고 이후 1920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본당
이상화(바르톨로메오)신부와 진안 어은동본당 김양홍(스테파노) 신부는 무주, 임실, 남원 등지의
공소를 방문하기 위해서 두 본당의 중간지점에 쉬어가는 쉼터를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수분리에 강당과 침실을 지었다는 것이 수분공소 성전(
수분공소 강당과 침실
세월의 흐름따라 여러번 보수를 해온 공소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6칸으로된 팔작지붕의 전통
한옥 양식이다 시멘트로 바닥을 고르게 한 후 주추를 놓고 나무기둥을 세웠으며 벽에는 좌우로
밀어서 여닫는 미세기 창을 냈다 정면 가운데와 양측면에 출입구를 냈으며 주 출입구는 왼쪽
측면으로 냈고 제대 뒤쪽 으로는 고해실과 제의실을 두었다 고해실은 창틀을 통해 무릎을 꿇고
고해를보는 신자석과 사제가 고해를 듣는 사제석이 완전히 구별되있고 사제석 윗벽에는 '기렴'
이라고 쓴 나무현판이 걸려 있다 이 것은 수분리와 인근 송산리 두 공소 신자들이 힘을합쳐 성당
침실을 중수한 것을 기념해 1956년 5월16일에 쓴 현판이라고 전한다.
공소 내부의 마룻바닥은 물론 기둥과 벽 제대까지 모두 처음 공소를 지었을 때인 것 그대로다
제대는 원래 벽에 붙여져 있었으나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떼어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나무 기둥들을
철근으로 고정해 놓은곳이 군데군데 눈에띈다 김종환(안드레아) 공소회장은 흙기와로 만든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기둥이 무너질 염려가 있어 조치한 것이라 한다 공소의 지붕을 함석
슬레이트로 바꾼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붕의 형태를 보자면 초기는 흙기와 였다 1970년대에
시멘트 기와로 바꿨다가 다시 1980년대에 함석 슬레이트로 바꿨다 지붕을 가벼운 것으로
교체하여 기둥을 장기적으로 보호하고 건물 뒤틀림을 막기위한 조치라고 사료한다
공소 내부는 두 개의 열주(줄지어 늘어선 기둥)에 의해 신랑(身廊, Nave)과 측랑(側廊, Aisle)
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공간이다.
1800년대 들어 30년 단위로 신유(辛酉)· 기해(己亥)· 병인(丙寅) 세 차례 천주교 대박해가
있었다 팔도를 휩쓴 검거망을 피해 신도들은 남부여대하고 산속을 찾아들었다 신도 가족
다섯가구를 이끌고 소백산맥을 헤맸던 베드로 신대보(申大輔)가 있다 눈이내려 양식은 구할수도
품을팔아 끼니를 이을수도 없어 40여 식구와 말 한 마리는 고스란히 굶을 수밖에 없었다
말은 나무밥통 바닥을 긁어 구멍을 내고 죽었다고 한다 어린것들은 눈동자 돌릴 기운마저도 없어
멍하니 한곳만 노려보고들 있다 어른들은 이토록 빠져나갈 길을 주지않는 천주님이 너무 가혹
하시다 원망했다 당시 산속을 헤맸던 많은 교도들은 이 같은 경우를 겪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유박해 때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갈라지는 고갯마루 가까이 방황하던 교도들은 정착 조건에
맞는 땅을 찿는다 산등성으로 둘러쌓여 넘나드는 고갯길에서 보이지 않고 화전을 가꿀 완만한
비탈이 있으며 연중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땅이다 이 곳이 수분리 이며 이 곳에 박해를 피해서
도망온 신자들이 많았다.
200여년 신앙을 숨겨 믿어온 이 마을에는 은폐신앙 관행이 적지 않았었다 일제시대 때도
신도집의 토방에는 손바닥만한 조선종이 조각이 나풀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들추어
보면 먹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고 전한다 성물단지로 통하는 바가지통이 처마 밑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 속에 십자가나 묵주 필사 주기도문 등 신도로서의 증거물을 은폐하는 바가지통이
박해가 끝난지 오래인데도 관행으로 남아 있었다 온갖 박해를 참고 거룩히 지켜온 이 마을의
신도들이 대단하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수분리(水分里)를 일컬어 천주교마을 이라 부른다
이 곳의 공소는 김대건 신부님도 들렀으며 이 곳에서 멀지않은 계북(溪北)면 정지터골 토굴에
자리잡고 선교활동을 했던 리델 주교의 후임 블랑 주교가 들르기도 한 곳이다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수분리 박해 천주교의 숨어 지켜내린 신앙문화를 집성시켜 곁들이면
순례지로 크게 각광받을 것이다.
뜬봉샘 생태공원 전시관
성스러운 곳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하고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을 가보려한다 뜬봉샘 가는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번암쪽으로 오르는 길, 수분 동네를 관통하는 길 그리고 최근 새롭게 조성된
뜬봉샘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나는 생태공원으로 가는길을 택하여 사부작 사부작 걷기로
한다 생태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공원내 전시관 뒤쪽으로 뜬봉샘 오르는 길 안내표지판이 있다
이 곳으로 가면 뜬봉샘까지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야영장을 거쳐 위쪽에 야외무대가 있으며
중앙에 물 체험관이있다 산쪽으로 이차선 시멘트 포장길 따라서 가다보면 좌우로 풍경이 멋지다
2년전 여름에 이 곳을 통해 뜬봉샘을 갔다왔다 겨울에 또다시 가는길 나름으로 운치있고 좋도다
얼마나 걸었을까 등골에 땀이 베는구나 저 멀리 왼쪽 산등성이에 사슴농장이 있고 가까이는
야생화 군락지란 안내판이 있는데 겨울이라 아쉽다 봄에 꽃피면 다시와서 향에취해 보고 싶구나
물레방아 방앗간이 있어 홀로이 디딤돌을 밟아본다 숨 가프게 계단을 오르고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뜬봉샘에 도착했다 어떤이는 등산을 힘들게 하는 이유가 정상의 정복한 성취감 이라 한다
비록 한 시간 남짓 걸었지만 그 기분 나는 충분히 느낀다 날아갈듯 좋구나.
금남호남정맥으로 장수의 명산 팔공산으로 이어지는 이 곳의 신무산 당재에 뜬봉샘이 있다
등고 897m이며 인근 팔공산 합미성을 지킬때 허수아비를 세워서 적을 유인 했다는 곳 바로
이곳이 신무산이다 이 곳에 금강 발원지 표석과 함께 뜬봉샘을 조성하였다 옛날에는 이 지점에
신당과 상이암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흔적은 찿을길 없다 이 곳 뜬봉샘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나라를 얻기 위해서 먼저 명산의 산신이
영령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리산과 장안산 등에 제단을 차리고 신천지를 열어 등극할 수 있도록
기원했으나 산신이 영령하지않았다 이에 후속으로 택한 팔공산 줄기 신무산에서 신당을 차리고
석달 열흘동안 조석으로 목욕재개를 한 후 정성을 다해 개국역사에 영령해 주시기를 기원했다
그러자 백일째 되는 날 새벽 하늘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일더니 빛을타고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성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샘에서 봉황이
떠서 하늘로 날아갔다 바로이어신천지를 열어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귓전을 스치는
이 소리는 새 나라를 열라 는 하늘의 계시가 분명하다고 생각한 이성계는 아담한 암자를
짓고 정중히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의 소리를 귀로 들었다하여 상이암(上耳庵)이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그 뒤 이성계는 새 나라를 열고 등극하여 조선국 태조가 되었는데 정사에 바쁜 와중에도 관아로
하여금 신당과 상이암을 돌보게 하여 현감이 몸소 현지를 살피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터는 없어지고 자취마저 희미하다 다만 신당이 서있던 재를 당재라고 부르고 이 곳의
샘을 봉황이 떴다고 하여 뜬봉샘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곳에서 이성계장군의 채취를 느꼈고
위대한 금강의 첫 출발지에서 비상하는 꿈을 꾸노라.
한편 이 곳을 출발하여 금강의 1천리 물줄기는 순리를 역행하지 않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금강은 유역이 9,810㎢로서 전북,충북,충남,대전,경기(안성),경북(상주)지역이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군산시 금강 하구로 400㎞를
흘러 흘러 서해바다와 합류하여 황해로 흘러간다
뜬봉샘(신무산)→장수→장계→진안→용담댐→무주→금산→영동→옥천→대전→대청댐→부강→
연기→공주→부여→논산→강경→서천→군산→서해로 흘러간다고 지도에 그림을 그려놓았다
한편 옥천에서 영동과 상주로 가고 부강에서 청주로 증평 진천으로 해서 안성으로 흘러 간다
우리의 시대가 복합다양한 사회로 흐른다 가면갈수록 우리의 문화를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부인 못할 것 이다 오늘의 답사는 단순히 문화재 답사를 떠나서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군산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우리나라 6대 하천의 하나인
남한에서는 낙동강· 한강 다음으로 큰 강의 발원지를 돌아 본 것이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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