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요 타계, 모든 아시아 국가의 염원인 '일류국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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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요 수상의 자서전 표지20세기 아시아의 마지막 거인 이광요 수상이 타계하다.
[고성혁 군사전문기자] 패전 후 일본을 일으킨
요시다 시게루 수상과 10억 중국인을 굶어죽지 않게 만든 등소평,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을 흔히 아시아의
작은거인이라고 말한다. 이광요 수상은 ‘일류국가의 길’이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오늘날 싱가포르를 만들기까지의 역경을 책으로 남겼다.
‘일류국가의 길’은 모든 아시아 국가의 염원이다. 싱가포르는 홍콩, 한국, 대만과 더불어서 아시아의 4 마리용으로 불릴 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싱가포르는 명실공히 세계 초일류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광요 수상의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을 재조명해 봄으로서 아직 일류국가로
가야하는 우리의 길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1. 싱가포르의 탄생
인큐베이터속의 미숙아 싱가포르 - 갑자기 찾아 온
독립
“내가 마흔 두 살 되던 1965년에, 200만 국민의 생명이 달려 있는 독립국가 싱가포르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서른 여섯 살이던 1959년에 나는 싱가포르 자치정부의 총리직을 맡아 왔으며, 1963년 9월에 우리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와 말레이연방정부 사이에는 몇 가지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65년 8월, 갑작스럽게 우리는 독립국가로서 홀러 서게 되었다. 우리는 내일의 운명에 대한 아무런 갈피를 잡치 못한 채, 말레이 연방 탈퇴를
강요당하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어 가야만 했다.”
이상의 말은 이광요 수상의 자서전인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제일 첫 장에 나오는 리콴유 수상의 말이다. 1867년 영국이 싱가포르를 직할 식민지화 한 이후 거의 100년만의
독립이지만 이것은 예기치 않게 찾아 온 마치 인큐베이터 속의 미숙아 같은 그런 모습으로 싱가포르는 탄생하였다.
2.
리콴유 수상의 일류국가를 위한 길
이광요 수상의 자서전을 보면 신생독립국
지도자로서 그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하였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서 봉사했는 지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말레이시아
끝단의 작은 섬 싱가포르의 안전보장 확보를 위한 군사외교적 노력과 투자이다. 두 번째는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투쟁으로서 산업화와 인적자원
확보를 위한 정책이다. 세 번째는 국가 공동목표의 공유와 국가 정체성확보를 통한 분열의 극복과 통합 노력이다.
이 세 가지
소주제를 통하여 21세기 제주도가 번영의 섬으로 나갈 길을 싱가포르를 통하여 벤치마킹해 보고자 한다. 또한 평화번영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보장책으로서 그리고 또한 경제적 가치로서의 해군기지의 가치도 같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번째. 군사외교적 노력과 투자
① 맨손으로 시작한 군대 만들기 - 독립국가로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군대
‘맨손으로 시작한 군대 만들기’ 이
제목은 이광요 자서전의 둘째 장에 나오는 제목이다. 군대는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담보하는 가장 확실한 존재이다.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군대의
가치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광요 수상은 그 누구보다 군대의 존재가치를 알았던 인물이다.
인큐베이터 속 같은
불완전한 독립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싱가포르의 속사정은 이러하였다.
싱가포르는 작은 섬에 불과한 도시국가이지만 다인종
다문화사회이다. 싱가포르는 약 76%의 중국인, 17%의 말레이시아인,7%의 인도인등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으로 부터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인종구성요소가 있었다.
말레이 연방정부가 표방한 말레이인종 우선시 정책은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싱가포르로서는 받아 들 일 수 없었다. 그리고 사회적 부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던 중국인에 대한 말레이인의 반감은 말레이연방속의
싱가포르에겐 위협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런 복합적 요소로 독립한 후 어엿한 국가로서 자신의 안위를 책임질 군대의 보유는 당면과제였다. 그러나
신생독립국 싱가포르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콴유는 국가안전보장을 위한 군대 창설에 대한 협조를 구하였으나 영국은 거부하였다. 당시
영국이 싱가폴에 주둔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싱가폴의 안전보장책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말레이시아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②
이스라엘군을 모델로 싱가포르 군 육성
상황을 파악한 이광요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과도 암중모색을 하였다. 이런
이광요 수상의 국방에 대한 의지는 당시 싱가폴 국방장관이던 켕쉬의 국방논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싱가폴 군의 포스터 : 자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서 강한 군대를 육성한 싱가포르, 국민의 신뢰가 두텁다. " 싱가포르와이웃
나라들간의 인구 대비 격차에 우리 스스로를 최면에 걸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장 군대의 전투력이지
인구의 규모가 아니다. 징병제도를 도입하여 5년쯤 뒤에는 우리도 예비군을 동원하여 15만 군대를 전투에 투입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이것은 이스라엘 방식이며 실제로 1965년 11월 비밀리에 자크 엘라자리 대령이 이끄는 이스라엘 소부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이 모두가 독자적인 군대창설을 위한 이광요 수상의 몸부림이었다.
이광요 수상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군대창설의 과제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는 국민에게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전통적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정서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국민정신을 재교육 시켜야만 한다."고 밝혔다.
③ 영국군 철수를 막기 위한 이광요 수상의 노력
- 원조보다는 안전보장이 중요하다.-
중국 속담에 좋은 강철은 못이 되지 않고 훌륭한 젊은이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이광요수상은 모든 중등학교에 국가학도 군사훈련단과 국가학도 경찰 훈련단을 만들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광요 수상이
목표로 하는 군대는 스위스나 이스라엘 같이 유사시 커다란 시민 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강한 독자적 군대를 만들기 위하여 이콴유 수상은
10년을 목표로 잡았다고 술회 하고 있다. 자서전에서 이광요 수상은 영국정부와의 일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66년
10월 데니스 힐리는 캥쉬와 내가 싱가포르에 영국 전투기를 넘겨 달라고 요청하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우리에게 손가락을 흔들면서 영국군대가
당신네들을 지켜줄 것인데 무슨 일을 벌이려 하느냐?"
신생 독립국 싱가포르의 지도자 이콴유 수상은 군대창설 작업 중에서도 이렇게
영국의 실질적 안전보장에 대한확인도 잊지 않았다. 그만큼 국가 안전보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군대창설과 무기구매에 부정적이던
영국은 다른 경제적 지원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이광요 수상은 거부하였다. 이광요 수상은 이렇게 말하였다. "싱가포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안전보장이다"
두 번째 - 생존의 몸부림 , 산업화와 인적자원의 확보
▲ 자서전 속의 사진 1971년 싱가포르 군대의 시가행진, 리콴유수상의 장남도 사관생도 출신임을 설명하고 있다. ① 지도자육성을 국가적
과제로 -세계 2위의 국가경쟁력으로 발전-
아시아에서 지도자 교육을 가장 잘하는 나라는 싱가포르이다. 국가경쟁력 지수에서도
세계6위로서 아시아 국가 중엔 가장 높다. 그 배경엔 바로 교육을 통한 지도자의 육성이다. 중학 입학 과정에서부터 미래의 지도자는 체계적으로
육성된다. 전국에서 3% 이내에 드는 학생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문과(인문사회계)를 선택할 수도 없다. 전원 이과(이공계)를 택해야 한다.
문과를 굳이 하고 싶다면, 대학 졸업 후 대학원 과정에서 선택해야 한다.
문과는 나이가 들어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지만, 이과는
20대만 넘으면 거의 하기 힘들고, 현대 사회는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국가의 기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인구가 350만밖에
안 되는 싱가포르는 한 명의 인재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의 생존을 걸고 이들에게 진로 선택의 자유를 잠시 유보한 것이다. 최우수 학생들은
부모가 잘 살든 못 살든 중학부터 학비를 안 내는 것은 물론 국가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다.
최우수의 최우수 장학생은 ‘국방부
장학생’인데, 이들은 전원 외국에 내보내어 명문대에서 학위를 받게 하고 군사훈련을 시켜 장교로 만든다. 군인으로 그대로 남는 수도 있지만,
제대하면 이들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30대에 바로 중앙 정부의 고위직에 발탁된다. 이들은 끝없는 공부와 평가와 실습을 통해, 정보와 지식과
지혜를 넓히고 쌓고 깊숙이 팔 뿐 아니라 업무 능력도 향상시키고 윤리의식과 애국심도 고양시켜야 하는데, 그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하면 가차 없이
탈락한다.
이들의 능력은 프랑스의 그랑제콜을 졸업한 사람이나 영국의 옥스퍼드 장학생 이상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싱가포르의 국부
이광요의 아들 이현룡은 30대에 말 그대로 별을 달았고 그 후 스스로 탁월한 능력을 입증해서 고척동에 이어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이들 인재에
대한 싱가포르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② 몰타에서의 충격 - 이광요 생각을 바꾸다
1967년 영국의 해외 주둔지
철수를 언급한 이후 이광요 수상은 현실은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찿아야 만했다. 그는 영국기지 철수 후의 구상을 하기 위하여
1967년 이콴유는 몰타를 방문하였다. 몰타는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로 영국의 해군기지가 있었다. 이광유 수상은 영국의 해군기지가 철수한 후
몰타가 자국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벤치마킹하러 들렀으나 그곳에서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광유 수상이 방문한 시점은 바로 중동에서 6일
전쟁이 발발하여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시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남지중해의 몰타의 조선소 역시 폐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몰타는 태평천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이 철수하면서 약속한 경제지원금으로 먹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광요 수상은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자선에 가까운
무상지원은 국민을 나태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광요 수상이 주목한 것은 무역로의 확보와 경제적 자립기반의
확충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영국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또다시 수에즈 운하가 끊겨서 몰타의 조선소가 폐쇄된다면 몰타는 더 이상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광요 수상은 보았다. 몰타에서의 충격은 이광요 수상에게 경제적 자립을 위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였으며 그것의 핵심은 바로 산업화였다.
③ 영국의 조기 철수 - '해군기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한 싱가포르`
1968년 1월, 영국은 1971년에
싱가포르에서 철수 한다고 발표하였다. 원래 1975년경을 언급하였으나 보다 빨라진 결정이었다. 물론 그 배경은 영국의 경제 상황 때문이었다.
영국의 철수를 대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빨라진 영국의 조기 철수는 싱가포르 경제에 분명한 마이너스였다. 자서전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이지만 1967년~1971년 당시 싱가포르 GDP의 20%나 차지하는 영국기지의 주둔비 감소는 싱가포르 경제에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영국군
기지는 3만개의 직접적인 일자리와 4만개의 보조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국기지의 예상보다 빠른 조기 철수는
이광요 수상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광요 수상은 영국이 몰타방식으로 싱가포르에 대한 지원약속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바로 몰타에서의 충격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가 유약한 사회를 원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멸망했을 것입니다. 유약한 국민은 달콤한 해결책을 약속하는 사람에게 투표할
것이지만, 그런 해결책은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에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물조차도 돈을 내야
합니다.... <중략>... 영국이 물러난 후에도 오랬동안 싱가포르는 산업,교역,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1968년 1월 이콴유 수상은 영국의 철수 방침 소식에 이렇게 대국민 방송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술회하였다.
"앞으로 닥칠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국민들의 의욕과 확신이 결정적인 역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④ 영국군에서 싱가포르 군으로 주인을 바꾸다
▲ 싱가포르 창이 군항은 싱가포르의 무역항을 겸하고 있다. 영국군은 싱가포르 군으로 바뀌어 갔으며 영국 해군기지는 싱가포로 해군의 기지로
변화되었다. 결코 군사기지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영국군의 기지가 독립싱가폴 군의 기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부는
산업화시설로 탈바꿈 하였다.
영국 해군의 조선소는 민간 조선소로 바뀌어 싱가포르에 기항하는 선박의 수리와 정비를 하면서 외화를 벌어
들였다. 또한 싱가포로 해군을 위한 조선소 역할도 겸하였다. 영국군이 사용하던 텐가 공군기지는 싱가포르 공군의 주력기지로 바톤 터치를 하였고
창이공군기지는 매립을 통하여 더욱 확장하여 창이 국제공항으로 탈바꿈 시켰다. 영국의 철수에 미리 대비한 싱가포르는 철수의 충격을 100%
흡수하여 싱가포르화 하였다.
⑤ 생존의 위한 결실 - 산업화와 무역
물까지 수입해야 하고 자원이라고는 인력밖에 없는
꼬마나라 싱가포르의 경제적 거인화는 바다와 기름에서 비롯되었다. 천혜의 양항 싱가포르는 인도양과 태평양, 동양과 서양, 북의 공업 국가와 남의
자원 부국을 이어 주는 로터리이다. 현재 물동량 면에서 세계 2위의 항구이다. 로테르담, 이어 싱가포르다.
▲ 싱가포르항구내 콘테이너 선적항구 싱가포르 항구를 거치는 항로는 3백 노선이나 된다. 이들 뱃길에 의해 싱가포르는 세계 80 나라의
3백여 개 항구들과 이어지고 있다.
이 방대한 항로의 네트웍,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중계
무역항이자 동아시아의 정보 센터다. 싱가포르는 원자재를 수입, 가공하여 수출하는 자원빈국의 일반적인 무역 전략 이외에 '전략적인 배급 기지'라는
개념을 도입, 무역상의 십자로 구실을 하고 있다.
⑥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석유제품 수출국 -산업없이 발전
없다.-
흔히 싱가포르하면 중계무역항으로만 떠올린다. 가장 싱가포르다운 산업은 정유 공업이다. 싱가포르는 로테르담과 미국의 휴스턴에
이어 세계의 세 번째 정유센터다. 정유 능력은 한국 전체의 약 두 배인 하루 1백10만 배럴이다. 쉘을 비롯 칼텍스 모빌 BP 에소 등 세계
굴지의 석유 회사들이 주롱 지역의 섬들과 해안선을 차지, 정유 공장들을 돌리고 있다. 비행기에서 이 근방을 내려다보면 수십 개의 오이를 물에
띄워 놓은 것 같이 슈퍼탱커들이 묘박지에 와글와글 모여 있는 게 가장 눈에 잘 뜨인다. 말래카 해협의 탱커 통항량이 많은 한 이유도 싱가포르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정유 시설이 부족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원유를 받아 정유해 주는 임가공 장사도 하고 있다. 이곳 정유
공장에서 나오는 석유류 제품의 거의 전부가 수출되는 것은 물론이다.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 수출 상품이었다. 싱가포르엔 아시아에서 하나뿐인 석유
현물 시장이 있다. 동아시아 석유 개발 현장의 야전 사령부이자 석유 정보의 집합점이기도 한 것이 싱가포르다. 이렇게 싱가포르의 발전의 이면엔
생산시설의 유치와 교역항으로서의 활발한 개발이 있었기에 가능 한 것이다. 오늘날 제주가 더 발전하려면 싱가포르의 이런 진면목을 배워야 할
것이다.
⑦ 경제력과 국방의 결합 - 당찬 국가로 발전
이런 거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싱가포로은 스위스와 같은
고슴도치식 국방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정규군이 5만, 예비군이 25만이나 되는 작지만 당찬 나라, 그래서 큰 짐승도 어쩔 수 없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싱가포로인 것이다. 한 운전자에게 나는 "당신네들의 가상적국이 어디냐"고 물어본 적인 있었다. "우리 군대에서는 어느
나라가 가상적국이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우리 이외의 어느 나라도 믿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명답이다. 강국사이에 있는
小國은 자신밖에 믿을 수 없다는 독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싱가포로처럼 소국이면서도 부자이면 더욱 그렇다. 바다, 항구,
공항을 부의 원천으로 삼아 오늘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싱가포로의 지도자 이광요는 그들의 생명줄이 어디에 있으며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실천하였기에 오늘의 싱가포르가 있는 것이다.
3. 개방과 국제화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향한 단결
▲ 싱가포르의 상징 사자상 배타성이 아닌 교류와 흡수
글의 서두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싱가포르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이다.
인종적으로 중국인,말레이인,인도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서울과 비슷한 면적에 인구는 서울의 절반도 안 되는 싱가포르이지만 종교 인종등 여러
부분에 서 다문화 사회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독립 초기 싱가포르는 인종적 갈등과 위기를 격기도 하였다.
이런 싱가포르의 태생적
갈등요소를 이광요 수상은 매우 현명하게 극복하였다. 갈등적 요소를 공동의목표로 승화시킴으로써 갈등의 원인을 해소시켜 나갔다.
그
근본적 바탕은 물론 경제발전을 통한 경제적 안정에 있다. 경제적 불안은 사회갈등을 촉발시킨다. 그만큼 경제적 발전을 통한 안정은 사회갈등해소를
위한 확실한 처방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광요 수상은 이루었다. 마치 우리 속담에 "곡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처럼 경제적 안정이 사회
안정으로 이어짐을 뜻한다 하겠다.
이것이 다인종 싱가포르를 공동의 목표로 묶음으로써 오늘날 싱가포르가 존재
하게하였다. 2015년 03월 23일 (월) 고성혁 sdkoh4061@naver.com ------------------------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의 생애. -1923년 9월16일: 싱가포르에서 부유한 중국인(화교) 가정에서 리친쿤과 추아짐니 부부의 첫째 아들로 태어남. 스스로를 4세대 중국계 싱가포르인이라고 부름. -1936년~42년: 싱가포르 명문 래플스 학교와 대학교에서 공부. -1942년 2월15일: 일본, 싱가포르 점령. -1942년 2월18~22일: 일본 군대가 싱가포르인 약 5만~10만명을 학살. 리 전 총리 이 장면을 목격함. -1943년~44년: 일본 정부의 선전을 담당하는 '호도부'에서 영어 편집자로 일함. -1946년: 영국 정치경제대학(LSE) 입학. -1947년~49년: 캠브리지대학교 법학과 입학. -1947년 12월23일: 같은과 재학생 콰걱추(柯玉芝)와 결혼. -1950년: 영국에서 변호사 시험 통과 후 귀국. 그의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만들어 변호사로 활동. -1954년 11월: 인민행동당(PAP)을 공동 설립하고 사무총장이 됨. -1955년 4월: 입법평의회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인민행동당 입법평의회 51석 중 43석 차지. 싱가포르 영국에게서 제한적인 자치권 획득. 리 콴 유 35세의 나이로 자치정부 총리에 오름. -1963년 9월16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 싱가포르 주정부 총리가 됨. -1965년 8월9일: 싱가포르, 정치적 회오리와 연방의 허약함을 강조하는 인민들의 폭동으로 연방에서 떨어져 나옴. 싱가포르 총리가 됨. -1967년 8월8일: 싱가포르,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타이 등 5개국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초대 의장국이 됨. -1968년~72년: 리 전 총리, 세계적인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를 이끄는 법을 제정하고 노동연대와 회사에 '화합'을 당부함. 한 가구 2자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함. -1971년: 영국군 싱가포르에서 최종 철수. -1975년: 세계적인 허브 공항으로 발돋움한 창이국제공항 건설 승인. -1990년 11월28일: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고촉통(吳作棟)이 총리로 오름. -1990년~2004년: '선임장관'으로 정부의 조언자 역할을 수행. -2004년 8월: 첫째 아들 리센룽 총리가 됨. 리 전 총리 '고문 장관(Minister mentor)'이 됨. -2010년 10월2일: 콰걱추(柯玉芝) 여사 별세. -2011년 5월: 총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승리 리센룽 총리 재집권, 리 전 총리 고문 장관에서 물러남. -2013년 2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불규칙한 심장박동으로 치료를 받음. -2015년 2월5일: 폐렴 증세로 입원했지만 병세가 악화돼 집중 치료를 받음. -2015년 3월23일: 91세의 나이로 타계 ------------------------ ========================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타계…향년 91세 2015.03.23 21:37[중앙일보]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싱가포르 총리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리 전 총리가 오늘 오전 3시18분 싱가포르 종합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며 “(아들) 리셴룽 총리가 매우 슬퍼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 전 총리는 지난달 5일 폐렴으로 입원한 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다. 그는 2008년부터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말년에는 말초신경 장애 등 여러 질병과 싸워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성명을 발표해 리 전 총리의 타계에 깊은 애도를 전하고 리 전 총리의 가족, 싱가포르 국민과 정부에 위로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리셴룽(李顯龍) 현 싱가포르 총리(3대)의 아버지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1959년-1990년까지 31년간 총리를 지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2004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와 2004년~2011년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지내며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콴유가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취임한 1959년은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자치정부로 승격한 해다. 그는 싱가포르인들에게 취임 일성으로 ‘국가 생존’을 강조했다.『리콴유와의 대화』를 지은 저자 톰 플레이트는 리콴유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존’이라 평가했다. 서울보다 약간 큰 영토에 인구 530만의 싱가포르. 영국에서 갓 독립한 신생 정부의 최대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식 ‘사회 민주주의’를 내걸었다. 시장을 완전 개방해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면서 금융 분야를 키웠고 자본주의를 꽃피웠다. 그러면서도 토지 국유화를 통해 국민의 86%에게 공공 주택을 제공했다. 그는 ‘클린 앤 그린(Clean & Green)’을 강조했다. 깨끗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였다. 1994년 리콴유는 장관 등 고위 공직자의 연봉을 사기업 임원 못잖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했다. 청렴하고 뛰어난 공직자를 양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싱가포르 거리에 껌자국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클린 앤 그린’ 정책 덕이다. “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한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리콴유는 태형(볼기를 때리는 형벌)의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싱가포르에선 지금도 태형이 집행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일당독재)가 공존하는 싱가포르를 ‘잘 살지만 숨막히는 감옥’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일각에선 리 전 총리를 ‘동남아시아의 독재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싱가포르의 번영에 초석을 놓은 지도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 리콴유의 강한 리더십 아래 움직인 결과, 싱가포르 경제는 번영의 길을 걸었다. 리콴유 취임 첫 해 400달러(45만 원)에 불과하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그가 퇴임한 1990년 1만2750달러로 30배 이상 늘었다. 2014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만6113달러(세계 8위)다. 2000년 출간된 리콴유 회고록『일류국가로의 길(From the third world to first)』처럼 3류 국가에서 1류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리콴유 전 총리는 일찍이 저출산ㆍ고령화를 겨냥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1983년 결혼을 알선하는 사회개발부(Social Development Unit)를 설립해 미혼 남녀의 만남을 정부 차원에서 도왔다. 3~4명의 자녀를 출산하는 고학력 여성들에게는 세금ㆍ교육ㆍ주택을 지원하는 정책도 도입됐다. 2013년에도 리 전 총리는 “싱가포르에서 최대 문제는 저출산”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20~21세기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자 아시아 경제 기적을 촉발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우리의 존경을 받는 원로이며 지금도 쉼없이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의 평가처럼 리콴유 전 총리는 은퇴 후에도 왕성한 행보를 보였다. 72세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할 만큼 최신 동향에도 깨어있었다. 2013년『한 남자의 세계관』이라는 대담집을 내기도 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설립한 국제 협회에 헨리 키신저 등과 함께 등록해 회원으로 활동했다.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 피츠 윌리엄 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정치인이 되기 전엔 변호사로 일했다. 리 전 총리는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째 아들 리셴룽 총리는 2004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다. 리셴룽 총리의 아내이자 리콴유의 며느리인 호칭(何晶)은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의 최고 경영자를 맡고 있다. 둘째 아들 리셴양(李顯陽)은 싱가포르 최대 회사인 싱텔(싱가포르 텔레콤)의 최고 경영자다. 딸 리웨이링(李瑋玲)은 싱가포르 국립 신경 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잘못되면 무덤에서라도 일어나겠다(1988년)”고 말했던 리콴유 전 총리는 국가에 대한 애정은 컸지만 자신이 우상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사후에 자택이 ‘국가 성지’로 지정될까 염려해 자신이 죽거든 집을 허물라는 지시도 내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