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년 1월 3일,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문 처분을 받는다. 그 당시 성직자에게 파문은 성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교회에는 출석도 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장례식도 치를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참으로 치명적인 벌이었다. 이 사건은 훗날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여는 계기가 된다.
종교의 근대가 시작되다
마르틴 루터의 성직 박탈이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의 효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루터의 혁명적인 정신은 르네상스 이상으로 근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 발달로 육체가 근대화되었다면, 르네상스로 정신이 새 옷을 입었고, 프로테스탄트 탄생으로 영혼이 비로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반하여 면죄부 판매 설교사 테첼이 작성한 <106개조 반박문>을 들고 대항하는 마르틴 루터
프로테스탄트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마르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 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틴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이 이 시기에 터졌다. 1505년 7월 2일, 마르틴이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 바로 옆에 떨어진 순간 마르틴은 하늘의 무섭고도 은혜로운 힘을 느꼈다. 그는 땅에 엎드리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불렀다.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마르틴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달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1507년 사제(司祭)가 되었고,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교로 옮겼으며, 1512년에는 신학박사가 되었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1515년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열 곳을 감독하면서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구원을 어떤 개인의 손에 일임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돈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니···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免罪符) 판매 등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전격 게시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교회의 일에 대한 비판은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루터의 항거는 당연히 폭풍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즉각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애당초 학자들 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천둥이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듯이 삽시간에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을 강타했다. 95개 논제 발표 후 약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주장을 소개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루터의 주장은 오히려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 온 세상에 전해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수많은 루터의 추종자가 생겼다.
루터의 적대자들에 대한 풍자화(후기 목판화,1520년에서 1530년경, 게르만 민족 박물관, 뉘른베르크)_예영커뮤니케이션 제공
1519년 7월, 성직자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은 루터가 교황의 눈 밖에 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파문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에크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불온한 주장을 교황에게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은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에서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 모두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12월 10일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파문은 루터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터의 마음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면죄부의 오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서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이끄는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 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개혁 운동의 논리적 귀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히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1524∼1525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 연하의 전직 수녀와 결혼을 하다
당시 유럽의 정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독일과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잡고 근대국가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튀르크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신봉하는 루터의 개혁 운동도 일방적으로 억누를 수 없었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카를 5세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독일 양 진영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한 프로테스탄트 측 제후들과 황제와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장기간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루터파 교회는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루터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하느님께 반항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자유로운 군주’이자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모든 직업은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을 든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이 교황과 그 일당과 싸우고 있다(후기 목판화, 루터 박물관, 비텐베르크)_예영커뮤니케이션 제공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의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3분의 1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사나이 마르틴 루터는 1546년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찬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