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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 수덕사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 주요문화재 :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수덕사
*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 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창건설화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고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창건과 중창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554~597년(백제 위덕왕) - 지명법사가 수도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
601년(백제 무왕 2) - 혜현법사가 수덕사에 처음 주석하며 <법화경>을 독송하고 <삼론>을 강론함.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수덕사는 관련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다행히도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여러 유물이 남아있어 대가람으로서 융성하였던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재덕숭산 사유취적불운이루(在德崇山 寺有翠積拂雲二樓)“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는 대웅전 이외에 2개의 누각이 있을 만큼 대가람의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浮椽)보수와 풍판(風板)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근대
이후 1962년 비구, 대처 통합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비상총회에서는 새로운 종헌(宗憲)을 의결하였고, 그 해 3월 25일 공포된 종헌에 의하여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본사로 승격하였으며, 현재 수덕사는 충남 일대의 50여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1984.11.29. 중앙종회의 의결로 수덕사는 근대선풍을 진작한 선지종찰임이 인정되어 총림(叢林)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름을 덕숭총림(德崇叢林)이라 하고 초대 방장에 혜암스님을 추대하였다.
오늘날
덕숭산 내에는 정혜사(定慧寺)능인선원(能仁禪院) 에서는 수십여명의 선객들이 참선에 매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 )에서는 백 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밤낮으로 화두에 여념이 없다. 또한 매달 음력 그믐날에는 사부대중들이 모여 철야정진을 통한 선수행(禪修行)을 실천하고, 여름철에는 선실천 수련대회를 갖는 등 선의 생활화와 선풍진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과거 강원(講院)을 운영했던 전통을 되살리고, 부처님의 법을 후학에게 전수할 목적으로 1996(불기 2540)년 개설된 수덕사 승가대학(수덕사 강원)에서는 여러 학인들이 청강과 강론에 전력하고 있다. 수덕사 승가대학은 불교전통방식의 수업내용과 더불어 현실에 맞는 불교사 및 외전(外典)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 49호)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 49호 ]修德寺 大雄殿 <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건립되었다. > 고려충렬왕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목조삼세불 좌상 일괄
만공대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歸政寺’로부터 옮겨 온 불상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육계의 구분이 불분명한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네모꼴의 각진 얼굴에는 근엄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인다.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가늘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ㆍ눈ㆍ입ㆍ코의 표현, 양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약사불이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비해, 아미타불은 약사불과 손의 좌우가 바뀌고 약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하여 조선 인조 17년(1639)에 守衍 비구를 비롯한 7명의 畵員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판편,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는 대좌형 須彌壇은 고려시대 心源寺 대웅전 佛卓과 그 장엄수법이 동일한 것으로, 金剛杵ㆍ揷花甁ㆍ牧丹ㆍ雲波 등 眼象 조각에서 고려시대 불탁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이 수미단의 기초는 좌우 일반형 탁자와 달리 대웅전 마루 저면 약 30cm 지점의 초기 평면과 동일하며, 그곳에서부터 육각의 저대석이 탁자를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성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수미단은 유일하게 대좌형 수미단을 육각과 장방형으로 각기 구성하고 있어 공예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쾌불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 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수덕사 노사나괘불은 현종 14년(1673년) 4월에 수덕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三身佛(석사ㆍ비로자나ㆍ노사나) 가운데 報身인 盧舍那佛을 그린 것이다. 이 괘불은 보신 노사나불이 法身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해 석가불의 化身으로 나타나 기타 성중들에게 설법을 하는 靈山會上을 묘사한 것이다.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독존으로 십이대보살, 십대제자, 사천왕상 등이 노사나불 주위에서 조화롭게 장엄하고 있어 그린 괘불로 현재까지 밝혀진 노사나괘불은 신원사괘불(1644년)과 수덕사 괘불 2점 뿐 이다.
삼층석탑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2층으로 위층은 4매의 돌로 面石을 조립하였으며, 각면에는 隅柱와 撐柱가 표현되어 있다. 지붕돌과 탑신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은 5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으나 2․3층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면에서는 1단의 받침으로 그 위에 탑신석을 받고 있으며,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갔다. 相輪部에는 寶輪만이 남아 있었으나, 擦柱ㆍ寶蓋ㆍ覆鉢ㆍ露盤을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上臺甲石과 지붕돌 및 3층 몸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갖춘 석탑이다.
칠층석탑
역대방장스님
혜암현문스님
스님의 속명은 순천順天, 법호는 慧庵이다.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강릉 최씨인 최사홍崔四弘과 전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7년 출가하여 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보암保庵을 은사恩師로, 금운錦雲을 계사戒師로 하여 15세에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운수행각을 하다가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에 머무르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벽초경선스님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면서, 말로써 가르치지 않고 행行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칭송받았다. 성은 마씨馬氏이고, 호는 벽초碧超 , 법명은 경선鏡禪이다. 아버지는 정식正植이고 충청남도 청양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13세 때 탁발 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수덕사로 출가,만공선사께 삭발 수계 후 만공스님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의 명산을 다니면서 수도하였다. 그 뒤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어 1940년부터 30여년 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며 수행자들의 공부를 돌보기 위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고,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천팔십 돌계단을 쌓았다. 1985년에 덕숭총림 德崇叢林 2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선사께서는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알 것을 강조했던 스님은 평생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스님의 선농일여사상 禪 農一如思想은 세간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 1986년 5월2일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수덕사에서 입적하였다.
수덕사의 선지식
경허선사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는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 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 大乘의 실천자였다.
< 스님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서 중생교화와 불교중흥에 이바지한 위대한 선승이다. >
이후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동학사의 만화강백 萬化 講伯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이로써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 一代時敎뿐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스승인 만화강백 萬化 講伯의 뒤를이어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후 오로지 영운 靈雲선사의 "나귀 일 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無)이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유유자적 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에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하였으며 56세에 만공스님에게 전법게 傳法偈를전한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甲山 웅이방雄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니 세수 世壽 64세,법랍 56세였다.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선수행 禪修行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킨 그의 문하에는 근대 한국불교 선문 禪門을 빛낸 만공 滿空, 혜월 慧月, 수월 水月등이 있다.
만공선사
스님의 속명은 도암 道 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 이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 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 金仙臺를 짓고수 년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 衲子들을 제접하며,수덕사 修德寺, 정혜사 定慧寺, 견성암 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 禪學院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 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 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선원(정혜사 능인선원)
선禪은 붓다의 마음이요, 교敎는 붓다의 말씀이다. 붓다의 마음인 선은 자신의 마음을 가리켜 (직지인심 直指人心)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며 (견성성불 見性成佛) 문자를 세우지 않고 (불립문자 不立文字) 문자 밖의 소식을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 敎外別傳)것을 지침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자기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임을 일깨우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수행법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을 이끌어 주는 곳이 바로 선찰인바, 선의 으뜸사찰(禪之宗刹 )임을 내세우는 수덕사는 선법禪法을 사찰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경허·만공선사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 선禪의 여명을 밝힌 선의 종찰 수덕사에는 덕숭총림선원이 있다. 덕숭총림선원 산하에는 만공선사께서 주석하셨던 정혜사 능인선원을 비롯하여 비구선원인 개심사 보현선원, 향천사 천불선원이 있고, 비구니선원에는 견성암선원과 보덕사선원이 있으며, 이 중 견성암선원은 일엽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원들에는 많은 선객들이 안거철 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참선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덕사는 오늘날까지 선지종찰의 가풍이 이어지는 현대 선의 종찰로도 이름이 드높다
견성암 법회선사
‘성의 굴레’ 깨고 성불 빗장 열다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호젓한 솔밭길을 5리쯤 오르니 견성암이다. 멀리 보면 돌담 너머로 옹색한 듯하지만, 정작 ‘견성’(성품을 봄·깨달음)의 자리는 툭트여 넘침도 모자람도 없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구니 수좌(선승)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오고가는 니승(여승)들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는 듯하다. 다시 수덕사에서 20여리 떨어진 가야산 보덕사 선방 옆 연못 위엔 단아한 부도탑이 서 있다.
“맑은 시냇물로도 그 깨끗함을 견줄 수 없으며/
날으는 백설로도 그 소박하고 청결함을 어찌 비교하랴/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후라도
/이처럼 진실되고 성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어느 누가 당대의 문장가 탄허 선사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한 니승이었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역사 이래 정치와 종교의 지배자였던 남성의 편견과 업보론, 여성의 자기 비하 등이 만들어낸 이런 ‘정신적 감옥’은 여성 출가자가 넘어야할 첫 관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500년 동안 ‘남존여비’의 인습에 묶여 있던 뒤끝의 여성들이야 두 말할 나위가 있었을까. 90여년 전. 그럼에도 덕숭산에 25살의 한 니승이 찾아왔다. 훗날 덕숭산의 비구니총림이 된 견성암의 초대 총림 원장 법희 선사(1887~1975)였다.
충남 공주 탄천면에서 태어난 법희는 세살 때 아버지를 잃고 네 살 때 할머니 등에 업혀 계룡산 동학사 미타암에 맡겨졌다. 경북 김천 청암사에서 경전을 공부하던 그가 ‘덕숭산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허의 법제자 만공 선사를 찾아왔다. 홀로 3일을 쉬지 않고 걸어 녹초가 된 그가 덕숭산 정상 정혜사로 들어서자, 만공이 “이런 수좌가 올 줄 알았다”고 기뻐하며 입실(참선 제자로 받아들임)을 허락했다.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
‘남존여비’ 인습딛고
만공과 당당히 ‘법’ 겨뤄
비구니 선맥 주춧돌
만공은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천재였다. 당시 덕숭산엔 가는귀가 먹어 대중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한 니승이 있었다. 만공은 그 니승을 몰래 산 속으로 불러내 자신의 계략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다음 날 수많은 대중들이 수덕사 대웅전에 모인 법문 때였다. 법좌에 오른 만공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숨을 죽인 대중들 앞에 주장자를 높이 들었다. 그 때 그 니승이 대중의 뒤에서 일어나 벼락 치듯 “할”하고 외치더니, 법당 안을 조용히 세 바퀴 돌고선 물러나 앉았다. 만공이 “네가 드디어 알았구나”라고 (깨달음을)인가하니, 대중들은 ‘어떻게 저런 바보가 깨달을 수 있을까’란 생각에 의아해했다. 만공이 한참 설법을 하다가 이번엔 조용히 단주를 들어올렸다. 대중들은 그 뜻을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그 니승이 나와 만공에게 3배를 하고 물러앉았다. 만공은 “그것 봐라, 틀림 없지 않느냐”며 인가를 재확인해주었다. 저런 바보도 깨닫는데, 자신들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으니, 다른 비구, 니승들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덕숭산은 분심과 의심으로 넘쳐 흘렀고, 누구도 잠을 자려하지 않고 용맹 정진했다. 니승들은 결코 얻기 어려운 참선 기회를 놓칠세라 잠을 잘 수 없었고, 비구들은 그런 니승들에게 뒤지면 어쩌랴 싶어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심으로 정진하던 법희가 30살 되던 해. 드디어 마음이 홀연히 열려 만공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근대 비구니 선맥의 주춧돌이 놓여졌다. 북한산 승가사를 오늘의 거대 사찰로 키운 상륜 스님(76)은 출가한 날부터 스승 법희를 한 방에서 모셨다. 승가사에 이어 불사 중인 용인 원삼면 법륜사로 찾아갔다. 밤 12시면 일어나 활동을 시작해 새벽에 하루 일을 다해버려 늘 주위를 놀라게 하는 그의 부지런함은 스승을 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자신은 스승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스님(법희)이 잠을 두 시간 이상 자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낮엔 늘 울력하고 도량의 풀을 뽑았는데 얼마나 일을 했던지 손가락이 크게 휘어져 있었지요. 달 밤에도 남몰래 텃밭에서 호미질을 했고, 자는가 싶어 보면 늘 앉아 참선하고 있었지요.”
그대여 웃어주소서
으시러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것을 보았다잖아요 ** 속명 김 원주 법명 일엽**
1986년
넉넉한 집안 목사의 딸로 태어난 김 원주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 졸업 3.1운동 직후 도일 동경 영화학교 졸업 후 귀국 신여자라는 잡지를 창간 신문화운동 신여성운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시인으로...
당시 사회적 도덕율을 넘어서는 과감한 글과 처신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뭇 남성 편력으로 지탄과 은근한 부러움을 받았다, 당시 일본 무사계급의 막후 실력자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아들을 한명 낳았다
윗 시는 상대에게 넘치는 정열로 쓴 사랑의 시로 알려진다
뜨거운 정염을 불태우던 사랑이 끝나자 허망함을 달래지 못하여 당시 만공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수덕사에서 발심 견성암에서 법명 일엽으로 비구계를 받는다. 훗날 자신의 회한에 찬 젊음을 가감없이 표현한 "청춘을 불사르고"를 발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조촐한 한옥이던 견성암에서 발심정진하시다 열반 후 오랜 풍상에 허물어지고 현대식 불당으로 중창 불사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조계종단의 명실상부한 비구니 강원이 됬다
** 유 홍준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참조 **
<지심귀명례>에서 <지심>은 지극한 마음으로 다른 마음이 아닌 누구나가 나타낼 수 있는 일심을 말하는 것으로써, 하나로 모아진 마음 모든 번뇌가 비어 있는 순수한 마음이요 공(空)한 마음을 말합니다.
<귀명례>는 생명의 원천인 일심을 회복해 가지라는 말씀으로, 마음을 지극히 모아 절을 하면 저절로 생명의 원천인 일심을 회복해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따라서 지심귀명례는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귀의하고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삼계의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가르치시는 스승이시여, 온갖 생명들의 자비이신 부모이시며, 우리들의 참다운 근본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삼계도사>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일컫는 말로써, 삼계의 중생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을 말합니다. 여기서 <삼계>는 생사윤회하는 중생의 세계로서,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의 셋으로 나누어지며 이들 세계는 중생의 속성인 삼독(三毒) 곧 탐욕(탐貪)과 분노(진瞋)와 어리석음(치癡)의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나타냅니다. <삼계> 중에서 탐· 진· 치의 삼독이 가장 많고 가장 저열한 세계는 욕계인데, 이 욕계는 탐욕이 많아 정신이 흐리고 거칠며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어리석게 살아가는 중생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욕계에 속하는 세계로는 지옥 · 아귀(餓鬼) ·축생(畜生) · 아수라(阿修羅) · 인간의 세계와 28천으로 나누어지는 하늘나라 중 사왕천(四王天)·도리천(?利天) · 야마천(夜摩天)·도솔천(도솔천) ·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육욕천(六欲天)으로 나누어지며, 이 가운데 지옥이 가장 짙은 삼독의 기운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계이고, 타화자재천은 탐욕이 극히 미세한 중생들이 사는 세계이며, 우리가 사는 인간계는 스스로가 하기에 따라서 삼독심(三毒心)을 극복할 수도 있고 삼독 속에 더욱 깊이 빠질 수도 있는 선택의 의지를 지닌 존재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색계>는 비록 욕심은 떠났지만 아직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는 미세한 진심(瞋心)과 치심(癡心)이 남아있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이 색계는 모두 하늘나라에 속하는데, 범천(梵天)에서부터 대자재천(大自在天)까지 18개가 있습니다.
<무색계>는 탐욕과 진심이 모두 사라져서 물질의 영향을 받지는 않지만 아직 ‘나(我)‘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게 되는 정신적인 장애, 곧 치심이 남아있는 세계입니다. 이 무색계는 중생이 사는 세계 가운데 가장 깨끗한 세계로서, 미세한 자아의식으로 인한 어리석음만 떨쳐버리면 완전히 해탈하여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사생자부>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일컫는 말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을 사생(四生)의 자부라고 합니다.
<사생>은 모든 생물이 생겨나는 형식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태생(胎生) · 난생(卵生) · 습생(濕生) · 화생(化生)으로 중생의 세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태생은 인간이나 짐승 등 모체의 태에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난생은 새 종류 등 알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습생은 물기가 있는 습한 곳에서 생겨나는 벌레 등을 말하며, 화생은 의지하는 곳이 없이 변화하면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시아본사> 역시 석가모니불을 일컬으며, ‘우리의 근본 스승’이란 뜻입니다. 상하 동서남북에 두루 계시고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제석천궁을 덮어 드리운 그물, 그 그물에 달린 구슬에 비춰진 구슬 그림자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저 바다처럼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시방삼세>에서 <시방>은 공간적인 개념으로써 동· 서· 남· 북· 사방과 동남· 동북· 서남· 서북의 사유(四維)에다 상· 하를 합하여 열 가지의 방향을 나타낸 말로써 모든 공간을 다 포함하며, <삼세>는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써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이르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어느 곳 어느 때라도 부처님은 항상 있다는 말입니다.
<제망찰해>에서 ‘제망’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고 있는 그물을 말하며 그 그물의 가로세로 줄이 서로 만나는 그물코에는 각각 한 개씩의 영롱하고 투명한 보배구슬이 달려 있고 구슬들은 이쪽 저쪽 구슬을 비추고 저쪽 구슬이 또 이쪽 구슬을 서로 비추어, 마침내는 그물에 달린 수많은 구슬에서 서로 비추이는 모습이 무한한 세계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찰해’의 ‘찰(刹’은 국토· 땅을 나타내는 말이고, ‘해(海)’는 글자 그대로 바다입니다. 따라서 <제망찰해>는 ‘제석천의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과도 같이, 부처님께서 모든 땅과 바다에 지극히 아름답고 찬란한 빛이 되어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상주일체>는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항상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타야중>은 ‘모든 부처님에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은 결국 ‘일체 공간과 시간을 모두 채우는 많고 많으며 항상 계시는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 드립니다’를 뜻합니다. 시방세계에 두루 계시고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계시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제석천궁(帝釋天宮)의 구슬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저 바다처럼 넓고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달마:범어인 Dharma의 음역으로써 불법)에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큰 지혜로 모든 불보살님의 스승이 되신 문수사리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보다 큰 실천과 행동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보현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대자대비로 모든 중생을 두루 살피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해 주시려는 큰 서원을 가지신 지장보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네 번째의 지심귀명례는 승가에 대한 예배인데, 승가는 비구, 비구니를 일컫는 말입니다.여기서 문수보살은 지혜가 출중한 보살로서 부처님의 지혜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고, 보현보살은 실천이 수승한 보살로서 이름 끝에는 항상 행(行)자가 붙습니다. 지혜와 행으로 대별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결국 지혜는 실천으로 걸러져야 하고, 실천은 지혜를 동반한 것이라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천상이나 극락에 안주하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세에서 괴로움을 겪는 인간에게 해탈을 이룰 수 있게끔 도와주는 보살이며 발고여락(拔苦與樂: 불·보살이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얻도록 해 주는것)하는 자비의 화신이며 현세의 구제자이다. 대원본존 지장보살은 처음 발심한 이래 오로지 중생제도를 위한 힘을 길렀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서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뛰어드는 일조차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분으로, 성불을 포기하고서라도 중생 구제의 대원(大願)을 세우신 본존(本尊)이시며,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보살이며, 파지옥(원래 지옥이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며, 중생의 악한 마음, 지극한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의 보살로서 현세의 안락과 내세의 안락을 함께 보장하는 보살이다.
마지막의 제존보살마하살은 위의 사대보살을 위시하여 여타 다른 보살의 지위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함께 일컬어서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도를 깨닫은 분들을 성문(聲聞)이라 합니다. 성문에는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의 나한을 말하는데, 영산회상(會上)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부촉을 받은 열 분의 큰 제자님들께, 열여섯분의 나한(아라한:깨달은 자)님과 오백나한님(열반에 들지 않고 말세 중생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라한)님께 귀의합니다.
또한 외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인연의 법칙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존재인 독수성현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독수성을 緣覺 또는 獨覺이라고도 하는데, 이 분들은 부처님과 달리 자기만의 깨침을 목표로 삼아 산림(山林)에 은둔하여 세상 사람들을 지도하지도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천이백 분의 모든 성현들과 한량없이 자비하신 여러 성현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으옵니다.
다섯번째의 지심귀명례 역시 승가에 대한 것인데, 보살님 다음으로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 대한 예배입니다.
<영산당시>는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영축산에서 최후 십여 년 동안 법을 설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시기는 부처님의 일생 중에서 가장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부처님의 교화가 최고로 빛을 발했던 시기입니다.
<수불부촉>은 부처님의 직접적인 부탁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즉 부처님께서는 최후의 열반 후에 어떻게 법을 전하고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부탁을 제자들에게 내린 것입니다. 여기서 <십대제자>는 부처님의 부촉을 직접 받은 많은 분 들 중 열 분을 이르는데, 지혜제일 사리불(사리자로 반야심경과 법화경의 주인공), 신통제일 목건련(목련존자로서 신통을 얻은 g 지옥에서 고통받는 어머니를 천도했다는 지극한 효도의 이야기로 유명함.), 두타제일 마하가섭(소욕지족少欲知足의 두타행을 실천한 분) 천안제일 아나율, 해공제일 수보리(금강경의 주인공), 설법제일 부루나, 논의제일 가전연, 지계제일 우바리, 밀행제일 라훌라, 다문제일 아난타입니다.십대제자에 이어 십육성인, 오백성인, 독수성인, 천이백성인들께 그리고 석가모니불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의 많고 많은 그야말로 ‘무량’자비성중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수양이 높고 도를 많이 닦은 성인을 이르는 말로써, <나한>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나라 인도와 중국,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부처님의 법의 등불을 전해 받고, 전해 주신 모든 위대하신 조사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종풍을 드날리신 천하의 모든 종사님께 귀의합니다. 먼지처럼 많고 많은 모든 훌륭한 선지식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서건동진 급아해동>에서 서건은 인도를 말하며, 동진은 중국을 일컫고, 해동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이르는 말인바, 불법이 삼국을 거치면서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전등>은 삼국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법의 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전해졌다는 것입니다.또한 불법을 전한 많은 훌륭한 도인 스님으로 ‘조사’와 ‘종사’와 ‘선지식’이 있습니다. 이 때 조사는 가장 덕 높은 스님의 칭호이고, 다음으로 높은 스님을 일컬어 종사라고 하며, 그 다음으로 훌륭한 높은 스님께 쉽게 쓸 수 있는 칭호가 바로 선지식입니다. 선지식은 부처님이 말씀한 교법(敎法)을 전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시방 세계에 두루 계시고 과거?현재?미래에 항상 계시는 모든 승가께 귀의합니다. 제석천궁(帝釋天宮)의 그물에 달린 구슬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모든 스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해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승가>는 범어의 상가(Samgha)를 음역한 것입니다. <승가>는 그냥 줄여서 승(僧)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개개인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단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리’라는 뜻으로 중(衆)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이 때 <승가>에는 출가 승려인 비구, 비구니 뿐만 아니라 사미, 사미니 모두를 말하며, 이들은 부처님과 진리를 따라 올바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화합된 단체를 말합니다.
<승가>란 진리와 더불어 살려는 어진 이들의 집단입니다. 개인의 생사해탈은 물론이거니와 남도 그렇게 하여 하나로 화합할 때 바람직한 <승가>가 됩니다. 또한 <승가>에는 강압적이고 구속적인 것이 아닌 자율적인 행위의 덕목으로 삼아 수행을 도와주는 계율이 있습니다.
오직 원하옵나이다. 한량없고 다함없는 삼보님이시여, 대자대비로 저희들의 귀의와 예배를 받으시고 삼보님의 무한한 가피력을 언제나 내려주소서. 부디 원하옵나이다. 이는 불교적인 의식 뒤에 나오는 중생계(대중)의 일차적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피력>에는 현훈가피(顯熏加被)와 명훈가피(冥熏加被)가 있는데, 현훈가피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게 영향력을 받는 것이며, 명훈가피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영향력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온누리 모든 중생들, 나도 남도 다함께 부처님의 깨달음 이루기를 원하나이다.
<명훈가피력>에 이어지는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불교인의 기본 정신과 자세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만이 불도를 이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불도를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 목표인 것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깨달음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성불하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는 항상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구절이 따라다닙니다.
오분법신향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다섯가지를 오분법신향 또는 오분향이라 합니다. 이 오분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킵니다.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으로써, <정>은 ‘안정’의 뜻으로 풀이됩니다.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말합니다. 개인의 안정은 물론 집안의 안정과 나아가 사회의 안정까지를 통틀어서 말합니다. <정향>은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안정을 얻을 것이며, r런 사람에게서 저절로 향기가 뿜어 나논다는 의미입니다.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말합니다. 이 때 ‘혜’는 반야를 말하며, 곧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볼 수 잇는 지혜가 반야입니다. 선정을 통하여 마음의 물결이 고요해지고, 고요함 속에서 모든 번뇌의 찌꺼기들이 가라앉으면 물은 차츰 맑아지고 맑아진 물은 다시 밝아지고, 밝아지면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물 속까지도 여실히 관찰할 수 있게 되는바, 이렇게 안과 밖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는 지혜가 반야입니다.
이와 같이 <계향>, <정향>, <혜향>을 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이라고 하며, 이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을 말합니다.
<해탈향>은 해탈에서 얻어지는 향기를 말합니다.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바,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견>이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하며,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는바, 이는 불교가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법(傳法)을 통한 중생제도가 필수적임을 나타냅니다.
<광명운대>에서 광명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오분향이 불교인의 인격완성에서 오는 다섯가지 덕을 말한다면, 광명은 광명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써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하는 삶을 나타냅니다.
<주변법계>는 온 우주의 세계에 두루두루 펼쳐져 있다는 말로서, 진리의 구름덩어리가 온 법계(온 우주)에 두루 가득하여 없는 곳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공양시방>에서 공양이란 흔히 꽃·음식·초·향·음악·춤·의복 등 부처님께 이바지하고 도와주는 모든 사물과 행위를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께 올리는 모든 것을 공양이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양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양이란 말을 씁니다.시방은 불교의 공간개념을 나타내는 말로써 온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써, 여기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항상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량불법승>은 한량없는 불·법·승 삼보라는 말로써, 불?법?승은 부처님과 진리와 불교단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곧 이 말은 온 인류, 모든 만물에게 모든 진리의 빛이 펼쳐지도록 한다는 뜻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온갖 만물에게 진리의 빛이 골고루 펼쳐져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향을 올리는 진언(참된 말)으로써, 여기서 향은 부처님이나 불보살의 완성된 인격체를 다섯 가지 덕으로 표현한 오분법신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향을 꽂음으로써 우리도 부처님처럼 우대하고 원만한 공덕을 갖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향을 하나 꽂더라도 <계향>, <정향>, <혜향>, <혜탈향>, <혜탈지견향>의 마음으로 꽂아야 하는 것입니다.
<옴>은 모든 진언의 모체가 되는 진언 중의 진언으로서 모든 법문의 어머니이며, 상대를 지극히 찬탄하는 극찬구(極讚句)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며, 상대를 섭복(攝伏)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옴>은 우주의 핵심이며, 피안에 이르는 범선(帆船)이며, 우주와 삼라만상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와 삼라만상은 <옴>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아라>는 <바즈라>라고 하며, 일명 ‘금강(다이아몬드)’이라고 하는데, 금강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으며, 금강으로는 다른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써, 금강과 같은 견고한 지혜를 금강반야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지혜는 그 어떤 탐진치 삼독이나 번뇌 망상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 그 자체를 깨뜨릴 물건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도비야>는 ‘소향존(燒香尊)에게’라는 말이고, 끝의 <야>는 ‘~에게’라는 위격조사입니다. 소향존이란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강과 같은 지혜의 향을 사루는 분이 소향존입니다. 그 소향존은 지혜로, 광명으로, 오분법신으로 무장된 소향존입니다. 급강의 지혜가 마음 속에 간직된 소향존이기 때문에 그 향으로써 이 세상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도량석
사찰에서의 하루는 도량석(도량을 푸는 의식)의 시작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새벽 3시(寅時), 대기 중에 정기(精氣)가 가장 충실하게 가득 차 있으며, 진리와 합일하기에 가장 좋은 이 시간에 모든 것을 깨우는 목탁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립니다.처음에는 여리게, 차츰 크게 두드리기를 세 번,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온다는 것을 부드러운 달에서 강한 해의 기운으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화하여 목탁소리는 작은 소리로 약하게 두드리다가 차츰 크게 두드립니다. 목탁소리에 천지만물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눈을 뜸과 동시에 찾아오는 중생의 번뇌를 잠재우고, 마음을 일깨워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스님은 목탁소리와 함께 천수경을 독송합니다.
먼저 구업(口業)을 맑히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시작으로, 모든 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경전의 문을 여는 개경게(開經偈)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대자비의 성자 관세음보살을 찬송하고, ‘대비심다라니(大悲心陀羅尼)’로써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관음의 자비가 충만되도록 합니다.
타종과 종성
이 소리는 지옥의 고통을 쉬게 하고, 모든 귀신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며, 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총림(叢林)의 사자후입니다.이는 중생의 번뇌를 해탈의 지혜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자비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종을 치는 스님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자비심을 이어받아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낭랑한 음성으로 종송(鍾頌)을 읊습니다
목어
목어는 수중의 생명에게 소리를 보낸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모두 소리를 통한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해 해탈성불을 염원하는 교화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물들의 법음을 예불 전에 행하는 이유는 땅위의 중생, 하늘을 나는 중생, 물 속의 중생, 저 지옥의 죄 많은 중생과 천인(天人)들까지, 모두 이 법회에 참여하고 함께 예배하면서 다같이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의 울림 속에는 나 한 몸만의 수행이 아닌 모든 중생의 수행, 나 하나의 성불이 아닌 일체 중생과 함께 성불하겠다는 지고한 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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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