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나사렛이 존재 했었는가?
많은 회의론자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사렛이 1세기에 존재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잘 모르며 그러한 도전을 받았을 때 적지 않은 위험에 처한다.
프랭크 진들러(Frank Zindler, 미국 무신론자를 위한 잡지 발행인)는 “Where Jesus Never Walked(예수가 결코 걷지 않았던 곳)"라는 그의 논문에서 나사렛이란 지명이 구약성경이나, 사도 바울, 탈무드, 그리고 심지어 45개의 갈릴리 마을과 도시를 언급했던 요세푸스에 의해서도 언급되지 않았다고하며 나사렛의 생성 시기는 7세기 이후라고 주장하였다. 이 지명은 A.D.7세기경 쓰여진 어느 유대 문학 작품(시)에서 최초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주장은 신약성경과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주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의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스르엘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등성이 쪽에 자리잡고 있다. 우선 지형적으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고자 하되.”라는 누가복음 4:29 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 분야에 대해 오래 연구한 플로리다대학의 제임스 스트랑거(James Strange)박사는 1세기에 나사렛이 존재하였으며 인구 최대 인구 약 480명 정도, 가구수 20내지 30가구 정도의 아주 작은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그 근거로 마을 근처에서 발굴된 1세기 양식의 공동무덤 23개가 발굴된 사실을 들고 있다.그 무렵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시신은 마을 밖에서 매장해야 하였으며 자연스럽게 무덤들이 곧 마을의 경계가 되곤 하였다. 발굴된 무덤 중 2 개의 무덤에서는 1~4세기 때의 도기 램프와 유리그릇, 그리고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고고학자 잭 피네건(Jack Finegan)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를 통해 발간한 그의 책에서 “무덤들로부터... 나사렛이 로마 시대에 유대인의 확고한 정착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나사렛이 1세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도시라는 정황은 많다.
먼저,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감정되는 한 유대인 비문에 나사렛이란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
1962년 팔레스타인의 한 도시에서 발굴한 이 비석은 총 세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루살렘 함락 후 갈 곳을 잃은 24명의 제사장과 그들의 가족들이 새롭게 옮겨간 거처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비문은 역대상 24:7-19에서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제사장 24명 중 Hapizzez란 제사장과 가족들이 나사렛으로 이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두 번째 줄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나사렛(נָצְרַת)이란 단어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미지 출처 : '신약성서 고고학Ⅱ' (Jack Finegan) P.34
아마 이들이 이거해간 도시는 성전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 즉 회당이 있어 제사장이 집무를 볼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는 나사렛에 회당이 있었다는 누가복음 4:16의 보도와도 일치한다.
현재까지 이 비문만으로는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함락이 역사적으로 있었던 두 번의 예루살렘 함락 중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첫 번째는 A.D.70년 유대의 대로마 항쟁 패배 직후이고, 두 번째는 A.D.132-135년에 있었던 바 코흐바(Bar Kokhba)전쟁 직후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나사렛 실존에 대한 더할 나위없는 증거가 될 것이나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2세기 초에 나사렛이 적어도 회당을 가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참고 웹문서 : http://en.wikipedia.org/wiki/Nazareth 17번째 주석을 참고하라]
이 자료를 접한 후 앞서 언급한 진들러는 이 자료의 연대를 문제삼고 나섰으며 급기야 이 명각에 적힌 단어가 나사렛이 아닌게네사렛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게네사렛의 히브리식 표현은민34:11 등에 나오는 긴네렛(아래이미지) 이다.
두번째로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 박해자들이 종종 기독교를 가리켜 ‘나사렛 이단’이라고 비아냥 거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사도행전 24:5에도 기록된 바 있는 이 단어는 탈무드에 여러차례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켈수스(Celsus)와 같은 초기 회의론자들은 물론 이슬람에서도 자주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 표현은 말 그대로 기독교의 시작이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사렛 사람을 뜻하는 Nazarene라는 영어식 표현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인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이와 별개로 나사렛이란 단어를 지명이 아닌 예수 이전에 있었던 특정한 종파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이러한 주장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특정한 종파의 영향을 받은 한 종교지도자일 뿐이라는 것으로 비슷한 시도들은 종종 예수의 신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예를 들어 영어성경(NIV)의 Nazarene sect(행24:5)의 sect(분파)표현을 두고 나사렛이란 종파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나, 황도12궁을 일컫는 히브리 표현인 '나사롯(Nazaroth)'을 근거로 양력을 사용하였던 에세네파가 나사렛 분파의 모체라는 설이다.
첫번째 주장에 대하여-
지명과 분파명이 일치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성경에는 '단', '길르앗' 등 인명-족속-지명을 일컫는 단어가 서로 동일하게 사용된 사례가 많다. 즉, 나사렛이란 지역에서 시작한 종파를 나사렛 분파라고 일컫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학자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영남학파' 혹은 '기호학파'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다음의 질문을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1. '나사렛분파'라는 표현이 기독교 외에 다른 종파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 적이 있는가?
2. '나사렛분파'라는 종파가 예수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증거가 있는가?
3. 기독교를 공격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2세기 인물 켈수스는 왜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사람(Man of Nazareth)'라고 하였을까? 당시에 나사렛이란 도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빼놓지 않고 공격했을 그가 왜 나사렛을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두번째 주장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일찌기 실패한 시도임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에세네파는 요세푸스에 의하여 바리새, 사두개와 같이 유대의 3개 종파 중 하나로 구분되고 있으며 다른 유대인들이 에세네파를 이단으로 공격한 적은 없다. 에세네파는 기존의 유대사회와 스스로 격리되어 광야의 동굴에서 생활하였고 유대의 대로마 항쟁 때에 끝까지 항전하다 전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해사본을 기록하여 보존해온 주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이며 전문가들은 예수와 에세네 사이에서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에세네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천사무엘의 '사해사본과 쿰란공동체(대한기독교서회)'를 보라)
이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아래의 질문을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1. 에세네파가 나사렛이라고 일컬어진 사례가 단 한 차례라도 있는가?
2. 기존 유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에세네와 예수의 고유한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나사렛이 1세기에 존재하였다는 결론을 낼 수 있으며 비기독교 문헌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주목 받을 이유가 없는 너무나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갈릴리 출신의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라고 코웃음을 쳤던 배경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당시 역사가들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대상들은 과감히 기록에서 제외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고고학에서 그 유명한 "증거의 부재(不在)가 부재의 증거인가"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