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6학년 합동체육으로 반별 축구와 피구시합을 한다.
축구 예선 세 경기하느라 수업도 제대로 안된다.
어느 반에서 간식에 붙여 우리들 먹으라고 떡 등을 보내왔다.
먹고 나서 부끄런 줄도 모르고 남은 떡 몇 개와 음료수를 챙긴다.
하교하며 아이들 몇이라도 5.18묘지에 데려가고 싶은 생각을
하다가 그만둔다.
차를 소태역 환승 주차장에 세우고 옷을 갈아 입는다.
2시를 넘어간다.
카메라 건전지를 사며 망설이다 캔 맥주 하나도 넣는다. 맥주 하나값이 1250원이다.
무등중 운동장에는 한낮의 더위 속에 야구 선수들이 소리 지르며 달리고 있다.
고압선 철탑을 오르는 길 옆에 누군가가 호박 모종을 심어 두었다.
지나다 보니 나무 곁에 고추 모종도 보인다.
누가 왜 심었을까?
정자에 앉아서 차 한모금 마시고 바로 간다.
몇 명의 등산객이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고 있다.
봉우리 하나를 지나 내려가는 길에 무등산이 환하게 보인다.
여름은 아직인데 뭉게 구름이 파란 하늘에 한가롭다.
중봉 위로 구름 그늘이 드리웠다.
새인봉도 가까워 보인다.
시골에서 지게질 할 때, 쉬어가라는 곳처럼 누군가 흙을 다듬어 두었다.
그 곳에 방석을 꺼내 깔고 앉아 떡을 먹는다.
당시를 볼까 하다가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본다.
예판 김상헌과 이판 최명길의 어전 주장을 천천히 읽는다.
청 황제와 용골대가 조선 묘당에 보내는 서신을 다시 본다.
산행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시간을 20여분 지체한다.
다시 일어나 길을 걷는다.
취나물 몇 개가 보인다.
마디가 몇 개 올라 부쩍 컸다. 욕심을 내어 꺾는다.
이제 땅바닥만 쳐다보고 간다.
사람의 욕심이란 구제불능이다.
산에서 책 몇 줄 보느라 하늘의 한가로운 구름과
저 푸른 나무들의 이야기를 놓치더니
이제는 풀에 눈이 팔려 땅만 쳐다보다니.
결국 몇 개 꺾지도 못하고 서인봉에서 길 가에 버리고 만다.
사람들이 많으니 이젠 꺾지도 못할 거니---
진즉 버릴 것을.
아에 쳐다보지 말 것을.
서인봉 벤취에는 각각이 폼을 잡고 건너편을 내려다 보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 샘에서 물을 마신다.
4시 37분을 지나고 있다.
올라가는 이는 없고 모두 내려온다.
중봉으로 바로 오를까 하다가 가본지 오래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장불재 길을 잡는다.
나이 지긋한 분이 지금 올라가 어디까지 가겠느냐고 한다.
서석대까지 간다하니 해가 길어졌다고 한다.
나이 먹으면 볼 것이 많아진다.
장불재는 한가하다.
안양산을 지날 때 본 것처럼 입석대와서석대가 가까운데,
저 멀리로는 푸르스름하게 희미하다.
혹시나 기대하는 지리산 만복대나 반야 노고는 보이지 않는다.
입석대를 길에서 보고 바로 오른다.
서석대에는 아무도 없더니 숲 속에서 한 사나이가 올라오며
사진찍으러 왔느냐고 묻는다.
아닙니다. 라고 대답한다.
맥주를 먹고 남은 떡을 먹는다.
6시다. 해는 아직도 서쪽 하늘 반허리에 걸려있다.
지리산에서 7시 20분 무렵 넘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이젠 35분을 넘을 거라고 짐작한다.
한 바퀴를 돌며 셔터를 눌러본다.
나의 폼 잡고 술 마시는 것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찍는다.
저 천왕봉 등 정상의 세 봉우릴도 군사시설을 벗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를 한다.
이제 군사도로 쪽을 향해 내려온다.
중봉 복원지를 새삼 다시 본다.
중봉에 오르니, 서석대 올랐을 때 지나쳤던 젊은이 둘이
사진을 찍고 있다.
중머리재 토끼등 천제단 길을 묻는다.
운동화에 보통 손가방을 든 그들이 늦은 시각 불안하여 따라오라고 한다.
산에 땀 흘리니 또 익숙한 사람과 술 한잔 할까 했던 생각을
떨치고 그들을 안내하기로 한다.
나도 천제단을 이정표만 보고 못 보았던 곳이라 가보고 싶기도 하다.
중봉에서 걸음을 재촉하여 중머리재에 이르니 사람이 몇 있다.
백운암터 쪽으로 길을 잡아 봉황대 쪽으로 내려오다
이정표를 만난다. 천제단은 평평한 땅 위 한켠에 돌무더기를 쌓고
제단 형상을 두었다.
연진회 미술회에선가 쇠붙이로 천제단 글씨를 앞뒤 한자와 한글로 붙여 두었다.
토끼등을 거쳐 내려오는 길에 왼발을 접질러 넘어진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뻐기다가 그런 거라고 혼자 웃는다.
스무살 넘어갈 무렵 두더지 구멍에 빠져 접질른 발은 오른쪽이었는데,
이제 왼발도 그리되었으니 공평하게 되었다.
발이 아프면 달리기도 못하고 산에도 못하고
체육 수업도 하기 싫어질 것이고, 배구도 못할 텐데, 걱정이다.
걱정을 앞당길 필요가 없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나을 수도 있다.
난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돌아다니고, 술 마시고 산에 갈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믿으려 한다.
청년들은 조선대 공대를 다니며 문화인류학 교양과정의 교수가
무등산을 돌고 사진을 찍어 제출하랬단다.
2학년인데 군대를 다녀왔다.
경기도 고양과 전북 부안의 보안이 고향이랜다.
사람은 허방이 있음을 알면서도 빠진다고 말하고 장광설을 붙인다.
발목은 쉽게 고통이 가시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와 식당 주인에게 우릴 부르라 한다.
들어가 동동주 2병, 소주 한병, 보리비빔밥을 먹는다.
계곡의 추위에 난 겉옷을 입는다.
그들의 고맙다는 인사에, 광주에서는 무등산을 더 가보고
꼭 틈을 내어 5.18 묘지에 가보라고 한다.
차는 그대로 소태역에 두고 학동 증심사역에서 지하철을 탄다.
남한산성을 몇 쪽 읽으니 금방 쌍촌역이다.
조심조심 발을 떼며 오름길을 올라 집으로 온다.
한결이가 한강이랑 애기 게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