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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홍의 아동문학통신 / 119〕서평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마음속의 괴물
한아의 장편 아동소설〈콜라 요괴〉
김 문 홍
넘어야 할 큰 산, 아버지
어느 누구에게나 가슴속에는 뛰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그 극복해야 할 대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것이 어느 누구에게는 해결 불가능한 과제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족 중의 누군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 강재에게는 아버지가 그 대상이다.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S. 프로이트는 아동발달단계 과정 중 3세에서 6세까지의 사내아이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시기의 사내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아버지라는 존재가 뺏어 간다고 느끼며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거세 콤플렉스’를 경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게 되면 아버지를 증오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동일시의 대상으로 느끼며 성장해 간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강재 역시 아버지를 뛰어 넘어야 할 극복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버지를 증오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 윤리적 규율과 자신에게 극복해야 할 의지와 힘이 부족한 것을 인식하고 아버지를 기피하고 외면하게 된다. 강재에게는 아버지의 고약한 술버릇이 바로 극복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버지에게 맞서서 그러한 장애물을 극복할 의지와 힘이 모자라 늘 안타깝고 불만이다.
“띠띠띠띠띠띠.”
현관문에서 소리가 났다.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셨습니다.”
기계음이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다 발딱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빨래를 개다 말고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살배기 강지도 침을 질질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띠띠띠띠띠띠.”
또다시 소리가 났다.
“강재야, 강지 데리고 얼른 방에 들어가.”
엄마는 개던 빨래를 한 번에 둘둘 말아 안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씨! 오늘도?”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쾅! 쾅!
안 봐도 뻔하다. 아빠가 현관문을 말로 걷어차는 소리다.
“이런 버릇없는 문 같으니! 주인도 몰라봐? 꺽.”
현관문 너머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아빠는 술에 취했다. (7-10쪽)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모두(冒頭) 부분이다. 술에 취한 아빠의 비틀거리는 위험한 귀가로 가정의 행복이 위태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단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 자꾸만 틀리는 아버지의 행동은 가정에 대한 무관심을, 그리고 굳게 닫힌 채 아버지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현관문은 가족의 완강한 거부의 몸짓을 상징하고 있다. 아버지는 술만 취해 들어오면 고함을 지르며 세간살이를 마구 집어 던지고, 심지어는 이를 만류하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강재는 방문을 굳게 닫은 채 두 귀를 틀어막으며 아버지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주인공 강재는 이런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설 의지와 용기가 없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넘어야 할 큰 산이고, 극복해야 할 위험한 장애물이다. 그러면 그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 위험한 현장에서 벗어나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위험하고 불안한 존재이다. 이 작품 속의 아버지는 주인공 강재에게 동일시의 듬직한 대상이 아니라, 기피해야 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다. 그럴 때마다 강재는 꿈을 꾸거나 환상에 빠지게 되는데, 자신이 ‘콜라 요괴’라고 부르는 흉측한 존재가 나타나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괴물과의 싸움
이 작품의 ‘콜라 요괴’는 아주 상징적인 존재이다. 주인공 강재가 위기에 처하거나 곤란한 지경에 빠질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그런데도 그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면서, 그러한 존재가 왜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는지 그 원인 규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강재는 항상 끈적끈적한 콧물을 질질 흘리는 비염을 앓고 있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 강재는 그러한 비염의 원인이 콜라 요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①
한 뼘 정도 크기인 녀석은 투명한 회색 빛깔 젤리로 된 인간, 아니 요괴처럼 생겼다. 녀석은 새끼손가락만 한 콜라병을 항상 옆구리에 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콜라 요괴’라고 부른다.
콜라 요괴는 폴짝폴짝 뛰어 내 얼굴 위로 가뿐히 내려앉는다. 그러고는 병 속에 든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 뒤, 취한 듯 비틀거리며 내 코를 향해 다가온다.
얼굴 모양이 선명하진 않지만 나는 콜라 요괴가 씩 웃었다는 걸 안다. 기분 나쁜 웃음이다. 콜라 요괴는 이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콜라를 몇 모금 더 마신다. 그러더니 갑자기 병을 기울여 내 콧속에 콜라를 들이붓기 시작한다. 작은 병에서 콜라가 콸콸 쏟아져 나와 내 콧구멍 속으로 사정없이 들어간다.
나는 콧구멍이 따가워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너무 괴로워서 몸을 바동거린다.
얼마나 콜라를 들이부었을까? 드디어 내 콧구멍에서 콜라가 흘러넘친다. 그제야 콜라 요괴는 작은 병을 다시 옆구리에 끼고 비틀비틀 가슴 쪽으로 내려간다.
(16-17쪽)
②
그날 밤, 콜라 요괴가 또다시 날 찾아왔다. 콜라 요괴는 벌컥벌컥 콜라를 마시고 취한 듯 비틀거렸다. 그러다 내 콧구멍에 콜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확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코에서 콜라가 넘쳐흐르자 콜라 요괴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녀석이 사라진 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코를 풀었다. 낮에 대수에게 맞은 코가 욱신거렸다. 눈물이 찔끔 났다. (60쪽)
위 인용문 ①, ②는 주인공 강재가 ‘콜라 요괴’와 씨름하는 장면이다. 그에 맞서서 싸우는 것이 아닌 일방적인 패배의 싸움이다. 콜라 요괴는 주인공 강재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일어날 때에만 어김없이 나타나는 존재이다. 어떻게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콜라 요괴는 강재의 새벽 녘 꿈속에, 아니면 강재의 환상 속에서만 나타나는 귀찮은 존재이다.
인용문 ①은 아버지가 술 취해 귀가하여 집안을 어수선하게 만든 다음 날 새벽녘에 나타나 강재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장면이다. 여기에서의 콜라 요괴는 이중적 기능을 존재로 상징되고 있다. 하나는 그것이 술 취한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술 취한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못 하는 자신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상징일 수도 있다. 콜라 요괴는 일종의 정신적인 질병의 신체적 반응일 수도 있는데, 마음이 불안하거나 불만으로 가득 찼을 때 나타나 그를 괴롭힌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당당하게 맞서서 그러한 행동을 시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일종의 작은 징벌일 수도 있다.
인용문 ②는 같은 아파트 같은 동 위 아래층에 살고 있는 친구 대수와 싸움하고 난 뒤에 나타나는 신체적 반응의 장면이다. 대수와 크게 싸우고 난 그날 밤에 나타난 콜라 요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의 콜라 요괴는 친구와 대화로 문젯거리를 해결하지 못하고 주먹다짐으로 해결한 강재에게 내리는 일종의 윤리적 징벌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의 콜라 요괴는 징벌과 심리적 치유라는 두 가지 기능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강재는 윤리 도덕적으로 위험하거나 불안한 상황을 겪을 때에만 콜라 요괴를 만난다. 일방적 패배로만 끝나는 콜라 요괴와의 씨름을 통해 강재는 사회 윤리적 징벌을 당한다. 그런데 콜라 요괴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강재는 정신적으로 개운해지는 일종의 해방감을 맞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시학》에서 비극의 효과로 규정한 ‘카타르시스’와도 흡사하다. 관객들은 비극을 관람하게 되면서 무대 위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극적 환상에 빠지게 된다. 주인공이 운명에 의해 좌절당하고 결국은 파국을 맞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을 흘리고 나서 심리적인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를 ‘정화’(카타르시스)라고 부른다. 주인공 강재는 콜라 요괴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일종의 정신적 해방감,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되는 것이다.
리듬감 있는 문체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
문체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물의 캐릭터는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프랑스 ‘반소설’ 운동의 기수인 소설가 로브 그리예는 “한 작가가 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기존의 인물 초상화 전시장에 또 하나의 인물 초상화를 전시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는 한 작가의 창작 능력은 곧 인물의 형상화에 다름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그만큼 작품의 창작에서 인물의 형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말일 것이다.
“야, 이강재!”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앞에 앉은 대수가 내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왜? 박, 제, 수!”
나도 지지 않고 한 자 한 자 눌러 말했다.
“너, 내가 왜 재수야?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여기 내기 먼저 앉았어. 딴 데 가서 앉아, 이강재!”
“싫어, 여기는 내 지정석이라고! 난 여기 앉을 거야. 아니꼬우면 네가 딴 데로 가든지, 박재수!”
대수가 눈을 쭉 찢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보란 듯이 자리에 풀썩 앉았다.
“재수라고 부르지 말라고!”
대수가 싫어할수록 자꾸 더 부르고 싶어졌다.
“박재수! 재수 없는 애한테 재수라고 하지 뭐라고 해? 훌쩍, 혹시 알아? ‘재수, 재수’하고 자꾸 부르다 보면 네가 재수 있는 아이가 될지.”
대수는 ‘탁’ 소리 나게 식판 옆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모르는 척 숟가락에 밥을 가득 퍼 담아 입에 넣었다. (46-48쪽)
위 인용문은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대수라는 친구와 급식 시간에 자리다툼을 하는 장면이다. 3학년 또래 아이들의 말투와 행동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는데, 마치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다. 그들이 쓰는 대화에 사용되는 또래 언어와 말투가 적확하게 포착되고 있다.
이 작품의 문체는 짧은 문장에 톡톡 튀는 듯한 구어체의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매사에 반항적이고 친구들에게 시비를 걸어 티격태격하는 강재의 성격이 톡톡 튀는 문체 속에 잘 형상화되고 있다. 문체 역시 주인공의 성격에 걸맞게 리듬감이 있는데, 문체만 몇 번 입속으로 되뇌어 보아도 인물의 성격이 눈에 잡힐 정도로 생생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글짓기로서의 문학의 힘이 잘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 강재는 정규 수업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유독 방과 후 글짓기 수업에는 친밀도가 높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담임선생을 비롯한 학교 선생님들은 강재를 문제아로 취급하고 있지만, 글짓기 선생님만은 강재의 숨은 능력을 찾아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글짓기를 통해 현실 속의 불만과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고 교정해 나간다. 작가는 한 아이의 마음을 정화시켜 나가는 문학의 치유 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잠재적 능력을 현실적인 공리적 잣대로만 평가하는 제도권 교육의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문학의 치유 능력은 주인공 강재의 잘못된 행동과 부정적인 사고를 교정하고 치유해 주는 강력한 심리적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교사의 칭찬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확립해 주고, 학습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심리적 기제로 훌륭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학습 심리학의 주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자신을 괴롭히는 콜라 요괴는 사실은 그 자신이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괴물이라는 기발한 착상이다.
앞으로 풀어야 할 몇 가지 남은 과제들
이 작가의 통통 튀는 듯한 리듬감 있는 문체는 주인공 강재의 성격을 적확하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유의미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박진감 있는 문체는 이 작품을 몇 시간 안에 금세 읽어나가게 할 수 있는 가독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체는 작품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따라 차별성을 보여야 한다. 여타 작품에서도 이러한 문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문체의 개성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지만, 이미 한 번 이러한 문체를 접한 독자들로서는 역시 똑 같은 문체에 식상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결말의 안이한 처리가 다소 마음에 걸린다. 아버지의 나쁜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엄마는 친정으로 의도적인 가출을 하고, 주인공 강재 역시 아래층에 있는 대수 집으로 짐짓 피신한다. 결국은 집에 잠시 들렸다가 나오는 사이에 복도에서 아버지에게 발각된 강재는 혼비백산하여 카레통을 쏟기까지 한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인해 아버지는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 작품은 아들인 강재에게 쓴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통해 아버지의 심경 변화를 쉽게 드러내는 안이한 서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그토록 나쁜 술버릇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으로, 아버지 역시 그의 아버지의 술버릇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인 데에도 그러한 영향 때문에 아버지의 술버릇이 고약해졌다는 것은 독자들이 주인공 강재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잘못 하면 왜곡할 수 있는 개연성이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아버지 역시 자신의 나쁜 술버릇을 교정하기 위해 또 다른 ‘콜라 요괴’ 와 그동안 싸우고 있었다는 장면이 삽입되었다면 나쁜 행동에 대한 당위성이 확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기존 제도권 학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서의 은유가 강재가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으로 긍정적 방향으로 안이하게 선회한 것 역시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몇 가지 과제에도 불구하고 한아 작가의 첫 장편인『콜라 요괴』는 기발한 착상으로서의 소재,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리듬감 있고 가독성이 높은 문체, 또래 아이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재미있는 플롯, 눈앞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캐릭터의 형상화 등은 신인 작가의 잠재적 가능성을 크게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이러한 작가의 독창적인 동화적 지평은 앞으로의 작품에 큰 기대를 걸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