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
아시다시피 이제 시(詩)가 죽어가는 시대이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고, “시 같은 건 죽어도 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도 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관객들에게 그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 감독 이창동
[ DIRECTOR ]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밀양>
그의 울림은 센세이션이 된다
감독 이창동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서민들의 아픔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이창동 감독.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고통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아니 더 아프고 힘들게 전해진다
하지만 그 아픔들을 다시 들여다 보면 놀랍게도 일상적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이 가장 힘든 시련이라 생각한다. 그 지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영화는 고통스럽지만 잔인하리만큼 현실적이다.
그의 다섯 번째 작품 <시>가 완성 되었다
왜 <시>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답한다.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우리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극적으로 본인에게 ‘시는 무엇인가’는 곧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같다고.
그의 속 깊은 곳에서 숙성시켜온 오랜 질문.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대신해서 표현해 주고 싶다는 이창동 감독. 그러기에 영화 <시>는 그 어떤 작품보다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 ABOUT CHARACTER ]
비웠기에 채울 수 있었던,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가 말하는 ‘미자’
처음에 그들이 생각한 미자는 서로 조금 달랐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이 만들어낸 미자와 윤정희가 그리려고 한 미자. 그러나 촬영이 시작된 순간, 미자는 하나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윤정희는 자신의 역할이 본명과 동일한 ‘미자’라는 것에 놀랐고, 이창동 감독은 <시>를 위해 미자가 아닌 다른 이름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윤정희의 남편인 백건우는 말한다. 미자가 어쩜 이리도 윤정희와 닮았느냐고…
‘미자’는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60대의 나이지만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가진 미자. 그러나 그 내면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가 숨어 있다.
이창동 감독은 그 동안 너무도 많은 작품 활동으로 본인만의 연기 스타일을 형성해온 윤정희이기에 그런 미자 연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윤정희란 배우는 마음이 열려 있어, 자기 본연의 것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고 말한다.
속으로는 강하고 어떤 절절함을 품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 모습. 이것이 이창동 감독이 말하는 윤정희와 미자의 닮은 점이다.
윤정희 또한 미자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백지 상태가 되어 이창동 감독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윤정희는 타고난 순수함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가슴속으로 삼키는 ‘미자’로 다시 태어났다.
[ PRODUCTION NOTE ]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도전
<시>의 새로움
이창동 감독은 질문을 품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본인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 이창동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시>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한달 동안 한편의 ‘시’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받는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시’는 도전이다.
감독의 전작인 <초록물고기>의 ‘막둥이’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밀양>의 ‘신애’ 이들은 모두 영화 속 사건의 중심이 된다. 모두 어긋난 세상, 무심한 시선의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시>의 주인공은 다르다. ‘미자’는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 <시>에서 그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어찌 보면 제 3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행태들을 바라본다. 이 영화에서 오히려 가해자 혹은 피해자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바라보는 입장인 ‘미자’의 가슴에는 참을 수 없는 응어리가 맺힌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미자’는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외침을 감행한다.
이창동 감독은 진실을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그의 냉철한 통찰력은 무감각해져 있거나 잊고 있었던 현실을 현실보다 잔인하게 묘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깊은 고통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는 영화음악의 선곡에 신중하기로 유명하다. 같은 편집 본일 지라도 영화음악은 때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단 한 곡의 음악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강물소리를 메인 테마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운드 만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영화<시>에서의 일상적인 소리들은 그 어떤 거장이 작곡한 영화음악보다 힘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대한민국 대표 감독 이창동,
그의 이름만으로 프랑스 선투자 유치하다
“감독 이창동은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영화로 부각되는데 이바지했다”(LA TIMES)는 찬사를 받으며 해외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창동 감독. 그 명성은 그의 다섯 번째 작품 <시>가 크랭크 인을 들어가기 약 10개월 전, 달랑 트리트먼트 한 장으로 프랑스의 디아파나(DIAPHANA)로부터 $350,000의 투자를 유치하게끔 하였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 <밀양>을 프랑스 내 배급하기도 했던 디아파나(DIAPHANA)의 사장 미셸 생장은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에 대한 신뢰와 <시>의 임팩트 있는 스토리라인에 반해 한 장의 트리트먼트를 읽는 즉시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디아파나(DIAPHANA)는 1989년에 창립되어 현재 제작, 배급, 부가판권 시장을 아우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화사이다.
1997년 첫 공동제작 작품인 <웨스턴>이 칸느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고 2000년에는 칸느 감독상을 받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과 장이오무 감독의 <해피 타임즈> 를 개봉하는 등 프랑스 관객들이 접하지 못하는 제 3세계의 영화소개에 앞장 서 왔다.
2004년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 수상작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005년 칸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 2006년 칸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배급하였다. 2007년에는 칸느 심사위원상 수상작 <퍼세폴리스>를 공동제작 및 배급하였고 2008년 칸느 각본 수상작 <로나의 침묵>을 배급하였다.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이어 2009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를 배급하는 등 프랑스에서 한국영화의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이창동 감독이 직접 쓴 특별한 로고, <시>
아마추어의 솜씨인 듯 꾸밈없으나 정성을 다해 쓴 듯한 느낌이다.
길게 내려간 세 번째 획에선 슬픈 여운이 느껴진다.
영화 <시>의 로고는 이창동 감독의 친필이다. 그의 필체에서, 이번 영화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드러난다. 3번의 획을 통해 이창동 감독이 묘사하려 했던 세상 ‘시’. 그 찰나의 순간은 미자의 가장 뜨거운 순간과도 흡사하다.
3번의 획이 완성되는 동안, 미자는 시를 쓴다. 한 번의 획에서 그녀는 시상을 떠올리고, 두 번의 획을 통해 마침내 펜을 든다. 그리고 세 번째 획. 그 마지막에서 미자는 자신의 시를 가슴에 품는다.
긴 여운을 남기는 듯한 필체. 그것은 이창동 감독의 한 편의 시와도 같다. 단 한 개의 글자로 완성된 이창동 감독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순수 사진 대표 작가 ‘구본창’
한국 영화 대표 감독 ‘이창동’을 만나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 활발한 활동 중인 순수 사진 계의 대표 작가 구본창.
그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시> 포스터 작업에 참여했다.
특히 자신의 작품세계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작업에만 참여하는 구 작가에게 포스터 촬영이란, 단순히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닌 작품활동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구본창 작가는 영화 <시>의 포스터 촬영에서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었다. 미자의 ‘한(恨)’과 수수께끼와 같은 마지막, 그리고 현실과 다른 꿈을 가지고 산다는 것. 구본창 작가는 배우 윤정희의 깊은 눈빛을 통해 이 모든 것을 표현했다.
<시>에서 만나는 특별한 조연들
하나, 김용택 시인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시>에서 미자가 다니는 문화센터의 시 강사는 바로 ‘김용택’ 시인이다. 우리 나라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섬진강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김용택 시인이 영화에 도전한다. 실제 시인이 시 선생님으로 출연하는 것. 이것만큼이나 가장 확실한 캐스팅이 어디 있을까. 생애 첫 연기에 도전하는 김용택 시인의 유쾌한 ‘시’ 강좌가 기대된다.
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김희라
김희라는 <마부> 등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故김승호의 아들. 1969년 영화 <독 짓는 늙은이>로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연예인 2세 시대를 화려하게 열었던 장본인이다. 이후 김희라는 <깃발 없는 기수> 등의 수많은 영화를 통해, 김희라만의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 김희라는 특히 액션연기의 일가를 이루며 박노식의 뒤를 잇는 액션 명배우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 <시>에서 김희라는 미자가 간병하는 ‘강노인’으로 등장한다. 그가 맡은 배역은 한마디로 ‘무력해진 ‘마초’이다. 권위의식, 지배욕, 남성주의를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 이창동 감독이 김희라를 택한 이유이다.
셋, 맛깔 나는 연기 ‘안내상’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배우 ‘안내상’. 그는 오랜 무명 생활을 벗고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미 영화 <오아시스>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홍종두의 친형역할로 이창동 감독과 호흡을 맞춘 안내상이 다시 한번 이창동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요즘엔 TV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로 수많은 아줌마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그가, 영화 <시>에서 또 어떤 맛깔스러운 연기를 선보이게 될지 주목해 볼 만하다.
[ SPECIAL : 영화 속의 詩 ]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하나 짓네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 비평사, 1997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시던
엄마 기억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 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내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퍼내고 퍼내어도
자꾸만 차 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그 것, 그 쬐끄만한
물푸레 나뭇잎 만지는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조영혜
십일월
당신의 등에선
늘 쓰르라미 소리가 나네
당신과 입술을 나누는 가을 내내
쓰르라미 날개를 부비며 살고 있네
귀뚤귀뚤 나도 울고 싶어지게
쓰르람쓰르람
눈부비며 살고 있네
이제껏 붉던 입술은
낡은 콘크리트 벽안의
박제 된 낙엽처럼
바시시바시시 떨고 있네
지난 여름 손톱에 핀 봉선화 져 가도록
당신의 등에서 자꾸 쓰르라미가 울고
귀뚤귀뚤 나도 따라 먹먹해져서
당신과 포개어 가만히 누워 보고 싶네
-조영혜
장미 가시의 이유
날 훔치려 말아요
내 안의 가시
온 몸 소름으로 돋는 날
더딘 맥으로 밀어내는 저 대궁의 우울
자결을 꿈꾸는 검붉은 미소 보아요
내민 손 거두어 주세요
수레바퀴는 구르기만 하던 걸요
어여쁘단 말로
꺾으려 하지 말아요
아프단 말 대신 자꾸 키워지는 가시
붉은 입술을 지켜야 하는 필사의 무기
소리 없는 눈물
그건, 무던히도 견디어 준 인내의 꽃
모르나요
겹겹의 붉은 물결이 잠시 흔들리는 것은
단지 내 안의 오월 탓이란 걸
이젠 정말
비가와도 가지려 하지 말아요
수레바퀴는 그냥 구르기만 해요
-조영혜
<자료: Daum 영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양미자 할머니가 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아네스의 노래를 듣고 울었습니다. 느닷없는 울음이었습니다.
밋밋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가운데 갑자기 감정의 복받침이 터져나왔습니다. 영화속에서 양미자 (윤정희 분) 할머니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소리내어 울때처럼 영화내내 가지고 있던 슬픈 감정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네스의 노래 후반부를 눈물속에서 다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을 뒤져서 아네스의 노래를 읽어보니 또 눈물이 흐르네요.
한 감독의 영화를 다 보는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죠. 하지만 이창동감독같은 명감독이 만든 영화라면 찾아가서 보기도 합니다.
소설가 출신의 이창동감독. 솔직히 초록물고기때만해도 소설가가 영화도 만드네 하면서 신기해 하면서 봤습니다.
그러나 문인출신 답게 영화에서 다루는 수많은 은유와 사회고발을 미려하게 다루는 모습에 감탄을 했습니다.
영화 초록물고기는 신도시개발에 밀려 쫒겨나는 원주민들의 삶이 불도저에 분해되는 모습을 다루었고 영화 박하사탕은 한 인간이 한국사회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파괴되는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영화 오아시스는 우리가 내려보던 사람들의 순수함과 우리의 편견어린 시선의 폭력을 담았습니다.
사실 많은 기대를 안했습니다. 영화 밀양 참 좋은 영화죠. 그러나 제가 달달한 영화만 많이 보고 자극적인 영화에 중독되어서 인지 이창동감독스타일의 사회고발적인 영화가 먹힐까? 하는 의구심이 솔직히 최근에 들었습니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박찬욱감독같이 자극적인 영상이 많은 영화가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시를 보고서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한국사회의 부도덕함을 시로 고발하다.
영화 예고편을 보신분들은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지만 그래도 줄거리를 살짝 적어보겠습니다.
양미자 할머니는 중학생인 외손주와 살고 있습니다. 이혼한 딸은 부산에서 혼자 돈을 벌고 살고 있구요. 한마디로 21세기 한국의 신풍속도인 조손조모가정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어머니들 참 불쌍하십니다. 자식낳고 뼈빠지게 길렀더니 딸이 아이낳으면 그 손주까지
돌봐야 합니다. 제 거룩하신 어머니도 당신들의 어머니도 손주를 봐주고 있습니다.
생활형편은 좋지 못합니다. 생활보호대상자이고 몸이 불편한 노인(김희라 분)의 간병도우미로 생활비를 법니다.
양미자(윤정희 분) 할머니는 이런 팍팍한 일상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언제나 소녀같은 마음으로 꾸미고 자신을 가꿉니다.
스틸샷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 행색이 생활보호대상자라고 보이나요? 돈 많은 마나님으로 보이죠. 그러나 꾸미고 다닌다고 부자는 아니죠. 이 영화에서 양미자 할머니가 저렇게 화사하게 꾸미고 다니는 모습은 소녀같은 마음을 반영하고 자존감을 나타내는듯 합니다.
저는 삶이 너무 힘들때 영화를 미친듯이 봅니다. 그냥 닥치는대로 영화를 보면서 현실을 잊고자 합니다. 영화는 몰핀주사같습니다. 현실을 잊는 2시간짜리 몰핀주사죠. 하지만 양미자 할머니는 시가 그 몰핀주사입니다. 삶은 너무나 힘들지만 시를 생각할 때만큼은 저 여고시절 소녀로 돌아갑니다.
양미자 할머니는 지역 시강좌 포스터를 보고 국민학교때 선생님에게 시인이 되도 되겠다는 칭찬한마디가 생각났고 시강좌를 듣습니다.
시강좌의 과제는 1달후에 꼭 시 한편을 적어오는것이었죠.
이후 미자 할머니는 어디를 가나 시상을 생각하고 수첩에 메모를 했습니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죠.
손주녀석과 손주 친구들이 한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을 했고 그 여학생은 남한강물에 투신합니다. 영화 시 타이틀롤이 올라갈때 여학생의 시체가 둥둥 떠있는 모습이 함께 보여질때 이 영화가 곱디고운 시(時)같은 영화가 아니구나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가해자 6명의 부모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각자 합의금 5백만원씩 내고 합의를 하자는 내용이었죠. 이 사건은 교감선생님. 죽은 여학생 담임, 학생주임과 6명의 학부모와 두명의 경찰만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입단속만 잘하면 이 강력한 카르텔은 깨지지 않고 합의금 3천만원만 죽은 여학생 어머니에게 주면 잘 해결될듯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 울분이 솓더군요. 아니 죽은 여학생 어머니를 찾아가서 석고대죄를 하고 눈물로 호소하고 죄지은 자식놈을 데리고 가서 용서를 구하는게 순서죠. 합의금이요? 그건 법적인 내용이고 법이전에 도덕적으로 사죄를 해야 합니다. 화가났습니다.
그러나 세상 현실을 따져보죠.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가해자는 경찰이 수사를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은 가해자 얼굴도 못봤습니다. 그리고 가해자 가족이 나와서 민형사 합의를 하자고 만나자고 합니다.
가해자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합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보험회사가 마무리 짓습니다. 가해자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현장검증때 뿐입니다. 이후 가해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구 이야기냐면 제 할머니가 몇년전에 오토바이에 의해 사망했던 사건 내용입니다. 이해는 합니다. 저 또한 교통사고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기도 했으니까요. 그때 잠도 못자고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출근도 하지 않고 병원에 달려가서 머리숙여서 사죄를 했습니다.
남들은 그깟 작은 사고로 남자가 벌벌 떠냐면서 보험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뭘 그리 신경쓰냐고 핀잔도 주더군요.
영화는 이런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여학생에 대한 사죄하는 장면은 없고 부모들은 골치아픈 일이 터졌다면서 자식들 장래걱정만 합니다. 합의만 잘된다면 모든지 다 해줄 생각입니다. 그 모습에 진정성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떨까요? 가해학생중 한명인 손주는 연예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낄길거리고 그냥 일상을 살 뿐입니다.
죽은 여학생의 사진을 식탁에 올려놓아 보지만 별 반응이 없습니다.
미자 할머니는 아득해 졌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시에 더 매달려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냄새맡은 지방신문 기자가 처음에는 사건을 세상에 알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 강력한 카르텔에 흡수됩니다.
미자 할머니는 이런 부도덕한 현실을 시로 고발합니다.
시를 더 이상 읇지 않는 단절된 세상. 시로 인간관계를 복원하다.
최근에 시를 읽은적이 언제인가요?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때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를 사서 읇조리고 에밀과 탐정들이란 소설로 유명한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집 마주보기를 읽으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혹은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절이 생각나네요. 80년대만 해도 시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분명히 있었는데 언젠가 부터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카테고리에 시가 빠져 버렸더군요.
시가 왜 좋을까요?
시가 좋은 이유는 많습니다. 시는 짧아서 좋습니다. 그러나 짧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수만자의 단어로 이루어진 소설보다 좋은 시 한편이 주는 감동이 더 클때도 있습니다. 시는 노래입니다. 수많은 은유와 숨은 그림이 많고 페부를 찌르고 지나가는 싯구에 눈물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네요. 은유법은 폐기된지 오래고 오로지 직설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나 너 좋아 라는 노래가사가 잘 팔리는 시대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요즘 유행가요 가사 들으면 천박해 미치겠다구요. 정말 요즘 노래가사들 그냥 일상대화를 담아서 노래라고 만드나 봅니다. 어떤 은유도 세련미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천박스럽습니다. 그냥 친구랑 술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를 노래가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 이런 모습이 현실이죠.
시는 관찰입니다.
영화에서 미자 할머니는 병원진찰을 받고 나오면서 한 어머니가 실성한듯 우는 모습에 관심을 가집니다. 딸과 통화하다가 그냥 끊을 정도로 그 모습을 보고서 간병도우미로 일하는 집에 가서 말합니다. 여기 중학교 여학생이 다리에서 뛰어내려서 죽었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도 그 말에 관심이 없습니다.
시강좌를 하는 시인은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그냥 보지 말고 관찰하듯 시간을 두고 애정을 두고 보라구요.
이 말은 사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물을 찍을때 그냥 찍은 사진과 10분동안 이리저리 둘러보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찍은 사진과 다릅니다. 물론 그 다름을 이해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지나가면서 찍은 사진과 1시간동안 관찰해서 찍은 사진의 차이점을 모르죠.
시는 짧고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을것 같지만 그 시가 아름다울려면 관찰과 관심이 많아야 합니다.
미자 할머니는 알치하이머 판단을 받고 기억력이 떨어져 가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세상 모든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죽은 여학생을 어느 누구도 관심없어 했을때도 관심을 가졌죠.
가해자 부모 6명중 미자 할머니를 뺀 5명은 우리와 같은 필부들 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식을 나무라기 보다는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죽은 여학생에 대한 묵념보다는 합의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자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돈은 없지만 이건 잘못된것이라고 조용히 항거했습니다.
죽은 여학생에 대한 반성과 추모는 없고 합의금만 얘기하는 가해학생 학부모들의 모습에 저런저런~~~ 손가락질을 하겠죠. 하지만 이 사건이 현실이 되면 누가 미자 할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요? 저도 블로거 나부랭이로 세상을 비판하지만 내 자식이 가해자가 되었다면 미자 할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자신감이 없네요.
아마 미자 할머니가 시를 썼고 시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영화속에서 말합니다. 시를 한번이라도 써본적이 있나요? 저는 말합니다. 한번도 써본적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꼭 한번 쓰고 싶고 매일매일 시 한편 쓰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구요.
흘러간 스타들을 복원하다
아쉽게도 윤정희라는 노배우를 잘 모릅니다.
제가 태어난후 스크린에서 거의 보지 못했지만 70년대 트로이카중 한명이었다고 하네요
저는 병태와 영자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나온 귀여운 얼굴의 이영옥이란 배우는 잘 압니다만 윤정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시에서 나온 이 노배우의 모습에서 참 곱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그 연기 하나하나가 얼마나 고운지
10대 소녀의 감성을 흠뻑 담고 계시더군요. 얼굴엔 주름살이 가득하지만 문학소녀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창동감독이 시나라오를 쓸때 윤정희라는 노배우를 염두해 두고 썼다는데 그 이유를 공감하고도 남습니다.
이 윤정희 배우와 함께 나온 노인병에 걸린 몸에 마비가 있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할아버지로 나오는 김희라의 연기는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잘 하시더군요. 실제 노환때문에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희라는 3840유격대인가요. 80년대만 해도 이대근과 버금가는 마초연기로 유명한 배우였는데 오랜만에 뵈서 너무 좋았습니다. 연기력은 정말 감탄의 연속이었구요
거기에 전원일기의 일용의 아내로 나온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배우도 나오는데 까메오같이 흘러간 배우들의 얼굴들이 참 반갑더군요.
그래서 그랬나요. 오늘 500석 규모의 극장에서 10명남짓 보는데 반이 중년아줌마들이 보시더군요.
여기에 국회의원 최문순과 진짜 시인인 김용택이 김용탁시인으로 나오는 모습 거기에 윤도현 밴드의 노래가 손주 컴퓨터에서 나오는 모습등 노무현과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도 있더군요. 한편으로는 이런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영화도 보수세력이 빨갱이 영화로 낙인찍는것 아닌가?
여러가지 시선을 담은 영화
명화들이 으레그렇듯 이 영화 길기도 길지만 (2시간 30분정도 함)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부도덕함. 변해가는 편의주의 사회. 반성을 모르는 사회. 노인들의 성문화, 모성애 등등 여러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 모성애를 안 다룰 수 없습니다.
미자 할머니가 보여주는 모성애는 교과서에 나올만한 모성애입니다.
우리어머니와 아버지들 그렇게 말하죠.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전에 세상을 떠야 한다구요.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운동해야 한다구요.
미자 할머니는 치매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식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내부고발자라는 시선으로 봐도 좋고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보시는 관객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러나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 자리만 마련해주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잘 추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할 뿐이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조심스럽네요
지금은 개봉중이라서 적지 않겠습니다. DVD로 나오고 시간이 흐르면 마지막 장면은 다시 다루어보도록 하죠.
마지막 장면은 미자 할머니가 쓴 시를 낭독하면서 끝이 납니다. 이 장면은 저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영화내내 사실 불편했습니다.
부러 현실을 외면하듯 꽃단장을 하는 미자 할머니가 불편했어요.
못살면 삶에 찌든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게 편한 이미지입니다. 그게 익숙한 이미지니까요. 그러나 이 할머니 자신의 현실을 외면한 듯 꽃단장을하고 영화배우처럼 꾸미는 모습이 인지부조화에 걸린것은 아닌가 혹은 현실과 이상을 분리되서 판단하나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모습이 자신에 대한 마지막 자존감에 대한 몸부림으로 느껴졋습니다.
항상 소녀같이 살고 싶었던 꽃다운 할머니는 결국 소녀가 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이 장면 제 평생 잊지 못할 시퀀스입니다. 지금도 그 시를 읇는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서네요
아네스의 노래
- 이창동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 시. 박하사탕처럼 입소문으로 커질 영화가 될 듯 하네요.
우리가 놓치고 가는 것들을 챙겨주고 지적하는 이창동감독의 지적질 정말 감사하게 봤습니다.
영화별점은 별 다섯개 만점에 다섯개 다 드립니다.
영화는 좀 지루한면이 있지만 마지막 시퀀스 그 하나로 별을 다 쏘아버렸습니다. 영화 마더의 마지막 장면의 감동을 1년만에 또 느껴보네요.
<자료: 블로그 '사진은 권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