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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할아버지 후손 모임인
소영회 5月월례회에 여행하다/개평마을 .겁외사
언 제 ; 2017년 5월 13일
갔는곳 ; 함양 지곡 개평마을,산청 겁외사
남계서원에서 배향 참배 후 청계서원을 탐방하고
일두 정여창 마을인 개평민속마을을 순회하면서 마을의 정취며
옛 선현들의 살아온 발자취를 느끼며 옛문화를 다시금 채취하는 기회를 가지며
뜻깊은 곳으로 여러가지 이야기꽃으로 15세기의 선비문화를 옆보는 아름다운 시간을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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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지곡 개평마을 입구를~~
===함양 개평마을===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339번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자 500여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개평마을은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유서 깊은 고택이 많이 남아 있다.
양반 고장을 지칭 할 때는 좌 안동, 우 함양 이라는 수식어가 달라 붙듯이 함양 역사는
안동 못지않은 양반 고장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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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과 솔송주문화관도~~
개평이라는 이름은 두개의 하천 사이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풍천노씨 대종가는 세조 때 청백리
송재 노숙동(1403~1463) 선생께서 경남 창원에서,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모집
사위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이사를 오면서 지은 집으로 옛날 재목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여 70여년전에 중수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남부 지방의 특징인 개방형으로서
사대부집 답게 'ㅁ'자형으로 배치 되었고 곡간은 초가 였으나 기와로 보충하였다.
선생은 풍천 노씨로는 처음으로 함양에 들어와 살게된 중시조이며, 세종때 벼슬을
시작한 이후 호조예서 참판 등 수많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
세조때는 청백리로 녹선 되었고 상호군으로 보하여졌으며, 1701년 숙종때 함양의
도곡서원에 배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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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의 설명문도~~
개평마을은 함양군 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반촌이다.
정여창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한 것은 물론 상당수의 유명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신라 때 최치원이 함양 태수였던 것을 비롯해 김종직, 박지원 등이 지방관리로 함양을
거쳐 갔다. 이처럼 많은 명사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므로 영남 유림의 본산을 꼽을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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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 일두 정여창선생은~~
가족 및 친족 제도로 반영되는 문중의 범위와 성격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크게 다르다.
고려 시대는 불교 의례와 비종법적인 친족 체제가 기본이었는데, 조선 전기에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점차 성리학적인 예제로 개혁되는 과도기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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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송주문화관 입구를~~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변화는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차등 상속 때문에 일어난다.
장자 상속이란 재산을 장자에게 몰아주고 제사를 전담하게 하는 것이므로,
같은 혈족 중에서도 제사를 주도하는 종가를 중심으로 주도권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이성 친족이나 방계 친족은 마을 조직에서 서서히 이탈해
동족 마을의 위상을 더욱 크게 한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개평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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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는 에쁜 석등도~~
개평마을은 도숭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도숭산 뒤쪽 천황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주맥이 셋 있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향해 함양읍의 토대를 마련하고, 하나는 북으로 향해 안음현의
토대를 마련하며, 마지막 하나는 두 줄기의 가운데로 향해 도숭산을 거쳐 개평마을의
기를 형성한다. 이 지형이 '介(개)'자 모양이라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개평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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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 내부에~~
개평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경주 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풍천 노씨도 입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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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 설명문도~~
남사마을에서 나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양반들도 맥을 못 춘다는 개평마을로 향한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두 정여창(1450~1504)과
옥계 노진(1518~1578)이 배출된 전형적인 양반 씨족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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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문 대문채도~~
개평마을은 함양군 내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반촌이다.
정여창 같은 대유학자를 배출한 것은 물론 상당수의 유명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신라 때 최치원이 함양 태수였던 것을 비롯해 김종직, 박지원 등이 지방 관리로 함양을
거쳐 갔다. 이처럼 많은 명사의 발자취가 남겨진 곳이므로 영남 유림의 본산을 꼽을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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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도~~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변화는 장자 상속을 기본으로 하는 차등 상속 때문에 일어난다.
장자 상속이란 재산을 장자에게 몰아주고 제사를 전담하게 하는 것이므로, 같은 혈족
중에서도 제사를 주도하는 종가를 중심으로 주도권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이성 친족이나 방계 친족은 마을 조직에서 서서히 이탈해 동족 마을의
위상을 더욱 크게 한다.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개평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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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절의 흥선 대원군의 글씨란다~~
개평마을은 도숭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도숭산 뒤쪽 천황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주맥이 셋 있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향해 함양읍의
토대를 마련하고, 하나는 북으로 향해 안음현의 토대를 마련하며, 마지막 하나는 두 줄기의
가운데로 향해 도숭산을 거쳐 개평마을의 기를 형성한다. 이 지형이 '介(개)'자 모양이라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개평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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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세가"라는 글하는 집을~~
개평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경주 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풍천 노씨도 입향했다.
풍천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은 과거에 급제하고 개평마을을 지나다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잤다고 한다.풍천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이 함양에 입향한
내력은 전설적이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을에 입거한 김점이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깨어났다. 무언가 길조가 있다고 느낀 그는 하인을 시켜 주변을 살피게
했고, 종바위 위에서 자고 있는 노숙동을 발견했다. 김점은 그를 불러오게 해 융숭하게
대접했고 추후에 사위로 삼았다. 김점은 정복주의 사위이고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다.
즉, 하동 정씨가 먼저 개평에 입향하고 사위인 김점의 사위로 풍천 노씨가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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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발자취도 담아 보고~~
개평마을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양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문효공 옥계 노진이 배출된 이후부터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당하는 고난을 받았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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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창과 일두의 설명이~~
옥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박사, 전적,
예조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으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수찬,
교리, 지평, 부응교, 직제학, 형조 참의를 거쳐 도승지, 진주 목사, 충청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선조 8년(1575)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했고 그 후에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저서로 『옥계문집』이
있으며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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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습도 담아 카톡으로 왔길래~~
하동 정씨의 경우 서인에서 노론으로 일괄적인 흐름을 보이는 반면
풍천 노씨는 주로 남인이었지만 서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즉 하동 정씨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공고히 했지만
풍천 노씨는 학문적 실천과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는 풍천 노씨가 하동 정씨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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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소나무가 집을 지킨다는 말이~~
이런 차이는 양 문중의 중앙 정계 진출은 물론 개평 마을에서의 활동 영역에서도
은연중 엿보인다.우선 하동 정씨가 풍천 노씨보다 건축 활동에서 우위를 띤다.
하동 정씨의 대지 규모는 풍천 노씨보다 월등히 크다. 하동 정씨가 마을 내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갖고 있고 풍천 노씨는 이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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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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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가신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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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노씨 종가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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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휴식하시는 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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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이 많은 여사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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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많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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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보내온 나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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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붉은색 아스팔트 도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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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노씨대종가 설명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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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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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마당에 정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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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가운데 화초용 양귀비가 활짝 피어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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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은 들잔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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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을 맛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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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여사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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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산 겁외사 일주문일까?~~
겁외사(성철<이영주>스님)
1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 1993년11월4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일어났다.
다헤어진 누더기 한벌과 검정고무신 불교의 핵심사상을 간추려 놓은 낡은 노트와
메모지들을 남긴 채 우리곁을 홀연히 떠난 성철스님 그 열반에 세계의 이목과
온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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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뒷편 벽해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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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이영주)스님 생가 전체를~~
그리고 다비식을 마친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함께 숨쉬며 이시대를 살다간 부처였음을 알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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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동상도~~
성철스님 문도회에서는 우리 시대의 큰스승을 그리워 하는 온국민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여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생가터에 기념관, 시간밖의 절이이라는
뜻을 지닌 "겁외사"를 지어 그 가르침을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1. 성철스님의 유품 및 유필 자료전시
2. 올 곧은 수행정신과 무소유의 삶
3. 엄격한 가정교육과 꼿꼿한 선비정신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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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의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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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의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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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태연씨)아재 내외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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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십이계명도~~
성철스님 12계명
아녀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신도의 시주물에는 몸도 가까이 않으리라.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가지 않으리라.
냄새 독한 채소는 맡지도 않으리라.
고기는 이빨로 씹지도 않으리라.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좋고 나쁜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절을 할때는 여자 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다른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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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채 들어가는 혜근문도~~
"중이 안 되면 내가 죽을 것 같습니다"" 한
가정의 장남이자 가정을 이룬 성철스님은 출가를 결심했다.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찾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눕지 않고 면벽수도 하는 ‘장좌불와’ 8년, 토굴 수행 10년 등 끊임없는 수련과
정진의 길을 걸었던 성철스님은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새해 법문을
남기고 1993년 입적했다. 그가 태어난 생가에 겁외사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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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은고거" 본채를~~
겁외사 성철스님은 1912년 4월 10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했던 스님은 크면서 책을 많이 보기로 유명했다.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를
보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는데 스무살 나이에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등을 섭렵했다.
배우면서 익히기에도 어려운 책들을 스님은 혼자 배우고 익히며 체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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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 건물들도~~
묵곡리에 대숲과 밤나무숲이 있었는데 스님은 이 숲을 찾아 책 읽기를 즐겼다.
스님이 책을 읽으면서 적은 낙서 중 한 구절이 '영원에서 영원으로'라는 글인데
이때부터 아마도 '영원'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정립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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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되는 데 이 한 권의 책이 스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스님은 스스로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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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은은 성철 부친 이상언의 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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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건물 뒷쪽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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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이자 가정까지 이룬 성철스님이 스님이 되겠다고 하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아내를 끝까지 설득, 결국 출가하게 됐다.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자유'를 찾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처음 찾아간 절은 지리산 대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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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있는 대웅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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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온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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