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운주사(표기는 雲住寺가 정확하다고 하지만, 運柱寺, 運舟寺, 運柱寺로도 쓴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많은 비밀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일대에는 석불 1백여기(基)와 석탑 30여기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운주사는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관군에 패퇴한 길산이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세우려다 실패한 장소로 묘사되면서 80년대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후에도 수많은 소설과 시에서 민중의 통한과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간직한 장소로 그려졌다.
이는 운주사의 건립 설화로 전해지는 천불천탑의 이야기와 맥이 닿아있다.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미륵의 새 세상이 열린다는 예언을 실천하려던 이 지역 민중들은, 마지막 거대한 와불(누워있는 부처)을 거의 완성할 무렵 새벽닭이 울어 일을 마치지 못한 채 한을 남기고 떠남으로써 운주사의 수많은 탑과 불상들이 남게 됐다는 이야기다. 운주사는 특히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으로 처절한 희생을 강요당한 전라도 사람들의 저항의식과 좌절된 심정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인식돼 이 지역에서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 절이다. 또한 이 곳은 비구니(여승)들만 거처하는 절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과 불상들
운주사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수많은 설화에도 불구하고 건립 연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절이다.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이 절을 세웠으며, 보통의 절에서는 한 두기뿐인 불상과 탑들이 왜 이곳에는 수십개씩 흩어져 있는지 아무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남대 박물관의 발굴조사팀은 84년부터 91년까지 네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운주사에 대한 이해의 가닥을 조금 잡을 수 있었다.
그간의 연구성과를 종합해볼 때 건립 연대는 11세기까지 올려잡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불상과 석탑은 양식이 다른 것들이 섞여있어 일시에 제작됐다기보다는 세월에 따라 여러번 고치고 증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석탑의 건립 연대는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신라 말의 선승인 도선이 운주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도선이 생존했던 시기는 828년부터 898년으로 운주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의 권위를 빌어 운주사의 신비감을 더하려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된다.
운주사의 석탑은 1941년 조사에서는 22기로 기록돼 있으나 현재 일부라도 남아 있는 탑은 21기이다. 골짜기의 평지에 거의 일렬로 배열된 탑이 13기, 좌측 산록에 4기, 우측산록에 4기 등이다. 천불천탑의 설화가 말해주듯 운주사에는 거대한 와불과 더불어 크고 작은 석불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석불은 현재 남아있는 것만 해도 약 1백여기가 넘는다. 2-4기씩 무리를 지어 불상군을 이루거나 한기씩 흩어져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북두칠성을 옮겨 놓은 칠성바위
운주사는 문화사적으로 신비스럽지만 과학적으로 볼 때도 상당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 하나의 비밀이 서쪽 사면에 놓여있는 일곱 개의 거대한 바위다. 이른바 칠성석 (혹은 칠성바위)으로 불리는 이 돌들은 누가 보기에도 북두칠성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1940년대 일본인 학자에 의해 칠성석과 북두칠성과의 관계가 언급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를 탐구해보았다.
돌들의 크기도 의미가 있다. 천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보기에도 별의 밝기에 따라 돌의 크기를 정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전남대 박물관 발굴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돌들은 두께가 29-35cm에 크기가 2백70-3백85cm로 엄청나게 큰 암반을 다듬어 놓은 것이다. 일곱개의 돌들 중 북두칠성의 국자 머리에서부터 5번째 별에 해당하는 돌이 가장 크다. 평균지름이 3백85cm, 두께가 45-56cm에 이른다. 가장 작은 것은 네 번째별에 해당하는 돌인데 평균지름이 2백32cm, 두께가 37-38cm이다. 이 돌의 크기가 나타내는 것이 별의 광도라면 과연 일치할 것인가. 신기하게도 북두칠성의 국자머리에서 5번째에 해당하는 별은 1.8등급으로 가장 밝은 별이고, 네 번째 별은 3.3등급으로 가장 어두운 별이다. 나머지 다른 돌들도 밝기 등급에 따라 정확히 크기가 정해지지는 않지만 대체로 일치한다. 아마 당시 사람들이 실감으로 느끼는 광도가 현대에 정확히 측정된 광도와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누워있는 부처는 북극성 자리
칠성석의 과학성이 빛나는 대목은 운주사의 여러 불상 중에서 중심불이라고 할 거대한 와불과의 관계이다. 하늘에서는 북두칠성 국자 끝의 두 별을 연결하면 북극 방향이 되고 이 선을 따라가면 북극성이 나타난다. 그런데 운주사의 칠성석에서도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국자머리의 두 돌을 연결한 선은 정북방향에 약 3도 정도 어긋날 정도로 비교적 정확히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 돌들이 가리키는 선을 따라 등성이를 올라가면 어김없이 거대한 와불에 이르게 된다. 다만 하늘에서는 두별의 간격을 다섯배하면 북두칠성에 이르는데, 운주사의 와불은 정확히 이 거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남대 박물관의 황호균 연구사는 이 칠성석을 가리켜 우리 민족의 문화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칠성신앙이라는 종교적인 의미와 정확한 천문관측이라는 과학적 의미가 교묘하게 결합된 유적이라는 것이다. 별의 밝기에 따라 돌을 다듬고 정북 방향에 중심불을 위치시킴으로써 북두칠성과 북극성의 관계를 그대로 구현해 놓은 유적이 바로 운주사의 칠성석과 와불인 것이다.
그런데 칠성석이 놓인 전체적인 모양을 잘 보면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보이는 북두칠성의 모양이 아니라 이것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북두칠성을 그리는 전래의 방법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 땅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모습이 아니라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탑 배치가 일등성 배치를 닮았다?
한편 최근 들어 “운주사의 탑 배치가 일등성의 별 배치와 일치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이 나와 관심을 모았다. 지난 4월3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알려진 이러한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담양의 성암천문대 부소장인 박종철씨다. 그는 현재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과정을 밝고 있다. 이미 10여년 전 칠성석과 와불의 관계에 대해 분석한 바 있는 박씨는 칠성석과 와불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운주사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천문학에 있다고 믿었다. 박씨는 이 주장을 더욱 구체화시키기 위해 운주사를 현지 조사하고 자료를 모으던 중 KBS ‘역사스페셜’ 제작진과 만나게 됐다. 역사스페셜 팀은 박종철씨의 획기적인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급기야 하늘의 일등성 배치도와 운주사의 탑 배치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TV에서 보여주는 운주사의 탑 배치도는 별들의 배치도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박종철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역사스페셜의 방송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주사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4월 3일 방송이 나간 후 4-5월에는 주말이면 하루 2-3천명의 방문객이 몰렸다고 한다. 때마침 중고등학교에서 수행학습으로 제시된 ‘문화유적 탐방’도 이 열기에 한몫을 했다. 운주사 주지 운공 스님은 “천문학자가 그렇다고 하고, 방송에도 나왔으니 중요한 유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또한 방송이 나간 후 박종철씨의 주장은 순식간에 광주 전남권의 지방신문과 잡지들에 특필되면서 기정 사실이 되고 말았다.
탑 위치는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전남대 박물관의 황호균 연구사를 찾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황호균씨는 운주사의 발굴조사에 참여했고 운주사에 관한 책까지 낸 사람으로 운주사 유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철저히 알고 있었다. 그는 천문학을 몰라서 확인도 반박도 못하고 있지만, 박종철씨의 주장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발굴팀이 운주사 학술조사 보고서에 실은 운주사의 탑 배치도는 ‘현재’의 배치도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표시된 위치는 12-13세기 탑이 세워질 당시의 위치가 아닌 것이다. 황호균씨는 도면의 11번, 12번 탑과 6번 탑을 지적했다. 11, 12번 탑은 원래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지금의 위치는 1800년대 자우 스님이 운주사를 수리할 때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또한 6번 탑은 인근 용강리의 노인정에서 1980년대 중반에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박종철씨는 11번 탑을 남쪽 물고기자리 포말하우트로, 6번 탑을 사자자리 레굴루스로 동정했다. 12번 탑은 원래부터 대응 별을 찾지 못했다.
이로써 탑 배치가 일등성의 배치와 일치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크게 감소된다. 혹자는 위치가 변한 탑은 21개 중에서 겨우 세 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도면에는 탑 기단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자리가 한곳 표시돼 있는데, 박종철씨는 이것을 작은개자리 프로키온으로 동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탑이 있었던 자리로 확인되는 곳이 이곳 말고도 세곳이 더 있다는 점이다. 황호균씨가 지적한 위치는 칠성바위 근처의 암반 위에 한 곳, 와불에서 내려오는 등성이에 두 곳이 더 있었다.
또한 황호균씨는 일제시대의 사진에는 나타나는데 현재는 찾을 길이 없는 탑이 있다고 말했다. 취재 도중 기자는 최문갑 사진기자와 함께 일제시대의 사진에 나타났던 탑의 위치를 찾아냈다. 이로써 새로 삽입돼야 할 탑자리는 모두 4곳으로 늘어났다. 만일 탑 배치가 일등성 배치를 닮았다면 이들 탑자리들도 밝은 일등성 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탑 배치도와 일등성배치도를 아무리 살펴도 유사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애매한 기준의 밝은 별
박종철씨의 주장에서 발견되는 또다른 문제점은 별자리의 밝은 별을 탑으로 동정할 때 기준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박종철씨는 일등성 정도의 밝은 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가 동정한 별 중에는 2.6등성의 뱀자리 알파별, 2.5등성의 안드로메다자리 알파별, 심지어 3.0등성의 황소자리 베타별도 들어있다. 이들은 비교적 밝기는 하지만 다른 별들과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눈에 띄게 밝은 별은 아니다.
또한 박종철씨는 0.4등성인 오리온자리 베텔규스, 1.3등성인 백조자리 데네브와 일치하는 탑을 동정하지 못했다. 이들이 매우 밝은 별인데도 이를 나타낸 탑을 찾을 수 없는 이유를 묻자, 박종철씨는 “원래 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일 수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없는 탑을 별에 맞추어 새로 찾아내기를 기다리기 보다 현재 탑자리가 남아있는 곳이 별과 일치하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기자는 탑자리가 있는 곳을 표시하고 옮겨온 탑은 없애보았다. 도면에는 원래 있던 세 개의 지점이 사라지고 4개의 지점이 새로 생겼다. 별 배치와의 유사성을 찾으려 한다면 이렇게 새롭게 위치를 표시한 도면을 가지고 해야할 것이다. 이 도면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살펴도 탑의 배치와 밝은 별의 배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시작점의 문제
또다른 문제는 박종철씨가 제시한 성도는 시작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이 쓰는 현대적인 성도는 시작점을 거의 대부분 3월 22일 춘분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박종철씨가 탑배치와 일치시키기 위해 변형한 성도는 시작점이 1월 19일에 위치해 있다. 왜 이 지점에서 성도가 시작돼야 하는지에 대해 박종철씨는 “탑배치와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탑 배치도와 유사한 그림을 얻기 위해 기준도 없이 임의로 하늘의 모습을 바꾼다는 것은 천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용납하기 힘든 생각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천문학에서 중요시하는 점은 동하지, 춘추분점이다. 특히 동양의 관념에서는 동지가 더 중요시 됐다. 만일 운주사를 세웠던 사람들이 천상의 질서를 지상에 구현하려 했다면 이들은 사찰에 들어섰을 때 동지로부터 펼쳐지는 하늘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아니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시작으로 하자면 춘분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종철씨의 성도는 양력 1월19일에서 시작한다. 이날은 ‘크게 춥다’는 절기인 대한(大寒)에 해당하는 날인데 이 날이 하늘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역사와 문화에 따라 다른 하늘
박종철씨의 주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점이다. 만일 하늘의 모습을 본뜬 탑을 세우려 했다면 그들은 고려시대의 천문관념에 따라 하늘을 그리려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천문관념에서는 밝은 별이라고 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밝은 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천문지식에 바탕한 생각일 뿐 전통천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요시된 별과 별자리들이 따로 있다.
박종철씨는 불탑들이 하늘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 하늘이 현재의 하늘인지 당시의 하늘인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고려시대 사람과 오늘날의 우리들이나 바라보는 하늘의 모습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1천여년 지나도 지구의 세차운동이나 별의 고유운동으로 별들의 위치가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박종철씨가 모두에게 똑같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늘은 그와 같은 서양천문학에 길들여진 사람이 보는 특별한 모습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천문학에 길들여진 사람이 보는 하늘은 또다른 하늘이다. 하늘의 모습은 그들이 지닌 생각과 철학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고려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 하늘에 헤르쿨레스가 괴물 메두사를 죽이고 피를 뿌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미원의 옥황상제를 동방의 청룡과 서방의 백호가 호위하고 있었을까. 만일 고려시대 사람들이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했다면 북극성과 북두칠성, 3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28수의 별자리이야기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만든 불탑의 배치가 현대의 서양 성도를 닮아야 하겠는가.
밝은 별은 중요하다?
3원 28수를 위주로 한 전통 천문관념에서는 밝은 별이라고 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동양에서는 사냥꾼에 쫓기는 하찮은 이리로 여겨졌던 천랑성(서양의 시리우스)이 밝다고 해서 강조돼야 할 이유가 없다. 28수의 별자리는 황도대 주변에 펼쳐져 있지만 각 별자리의 기준 별인 거성은 자기 별자리에서조차 가장 밝은 별이 아니다. 가장 밝고 화려한 서양 별자리로 알려진 오리온자리에서 13세기의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리온의 허리에 해당하는 일렬로 늘어선 삼태성일 뿐이고, 밝고 거대한 베텔규스나 리겔은 의미가 거의 없었다. 그 밝은 베텔규스와 리겔을 두고 오리온의 머리 위에 있는 희미한 세 별을 각(角)이라는 별자리고 삼은 것은 왜인가.
서양에서 전갈자리 안타레스가 밝은 별이어서 중요시 됐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전갈자리 안타레스를 중심으로 한 심수(心宿)와 전갈 꼬리에 해당하는 미수(尾宿)가 똑같이 중요했다. 만일 중요한 별의 위치에 탑을 세우고자 했다면 안타레스(심수의 기준별)에는 물론 전갈자리에서 12번째로 어두운 뮤(μ)별(미수의 기준별)에도 탑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식으로 보면 뮤별은 4등성 근처의 어두운 별일 뿐이다.
고구려의 천문관념을 연구한 종교학자 김일귄씨는 “12-13세기의 천문사상을 탑 배치와 연결시키고자 하면서 서양의 천문관념과 성도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백보 양보해서 만일 천문사상과 탑의 배치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3원28수의 전통별자리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기자는 적도대를 중심으로 한 격자형 성도는 물론 천상열차분야지도식의 전통 성도에서도 28수의 배치를 표시해 보았다. 그러나 공통점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또한 만일 별자리가 아니라면 중요한 별을 위주로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28수의 기준별의 위치를 표시해보았다. 결과는 역시 허사였다.
미륵의 새 세상을 기다리며
운주사의 탑 배치가 밤하늘의 일등성 배치와 일치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고 운주사의 비밀은 여전히 비밀로 남았다. 그러나 지금 남겨진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과장되고 왜곡된 주장을 사실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3일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운주사 건립과정과 천불천탑의 의미를 탐색했다. 칠성바위는 하늘의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바위의 크기는 별의 광도를 반영한다는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했다. 북두칠성의 방향과 중심불인 거대한 와불과의 관계도 재차 확인했다. 운주사 유적에는 고대의 천문 관념이 매우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었어야 했다. 제작진은 자신들이 천문학을 모른다는 이유로 박종철씨의 주장을 아무런 검증없이 방영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불천탑에 대한 오도된 생각을 퍼트렸다. 이제 운주사를 찾는 이들이 고려시대의 불탑을 앞에 두고 오리온자리와 시리우스 별을 연결시키는 코미디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견해로 남았어야 할 섣부른 주장이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보도된 대가다. 이 왜곡된 관념을 지워내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운주사가 한과 저항을 녹여내는 민중들의 안식처라면 그 안식의 힘을 설명하는데 한층 더 신중하고 철저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을 버리고 독단과 과장으로 나아갈 때 천불천탑이 약속한 미륵의 새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