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로 넘어갈 때면 집사람과 둘째가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휴지를 달고 삽니다. 그래서 몇주 전부터는 거의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밀대에 캐치맙이라는 먼지 잘 잡는 걸레를 붙여서 밀고 다닙니다. 매일 그렇게 해도 매일 그만큼 나오는 먼지를 보게 됩니다.
서양의학에서는 병이라는 것을 외부의 원인으로 돌려 원인제거에 집중합니다만 전통의학에서는 스스로의 면역력의 문제로 보아왔습니다. 물론(勿論) 외부적 원인이 있기에 병이 생기는 것이야 당연한 사실이지만 같은 환경에서 병세가 나타나고 안나타나고는 결국 각자 자신의 면역력의 문제입니다.
알레르기라는 것이 몸의 면역력의 저하에 따른 병원체에 대한 과민반응이라고 합니다. 크게 병의 원인이 될만한 것이 아닌데에도 내 면역력이 떨어져 있다 보니 내 몸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해서 병세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수행을 하고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사람의 마음이 악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길에서 사소한 교통질서나 공중도덕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 표독하게 욕을 뱉으며 지나칠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데도 그 정도 반응이니 직접 피해를 받으면 어떨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어느 훼도자의 죽음에 우리 손에 죽었어야 한다며 술렁이는 종도들에게 “너희는 분노하느냐? 나는 불쌍히 여긴다.” 하신 바 있고 차경석 종도를 받아들이실 때에는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서야 나를 따를 수 있다” 하셨습니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돌을 던져 단죄하려는 대중들에게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자는 돌을 던지라.” 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남의 악행에 대해 자비심이 없음은 결국 자신이 악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기에 나오는 과민반응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기에 남의 죄에 가혹할 수 있는 것이고 생명의 근본을 모르기에 나는 저런 나쁜 사람과 다르다는 교만심이 나옵니다.
작은 그릇의 물은 작은 충격에도 출렁입니다. 작은 악에도 과민하게 감정이 소용돌이 치는 것은 내 마음이 근본에서 고립되고 분리된 한 종지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에 연결됨을 모르는 분리감은 결국 나와 남을 갈라 촉급하고 긴장된 경쟁관계로 상극의 삶으로 귀결됩니다. 근본에 연결된 사람은 여유롭습니다. 내 마음을 파서 나의 근본을 느껴가다 보면 너와 내가 남이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삶을 넘어선 영원함을 느끼기에 자연히 어짐이 우러나오며 안심안신(安心安身)이 되어갑니다.
선천은 각자라는 분리감 속에 불안하게 살아가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상이요 후천은 태을이라는 우리 모두의 근본으로 연결되어 안심안신(安心安身)하는 동귀일체(同歸一體)하는 세상입니다.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어 나의 근본을 느껴 스스로 변화해 가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의 부딪침에
뒤돌아보고 또 돌아봅니다.
어름밑의 출렁임을 보지못하고
어름위의 평평함에 한가롭습니다.
독기와 살기로 닫힌 마음의 문입니다. 독기와 살기를 풀어없애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심중 태을의 길이 보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태을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심중 태을을 밝혀 태을도인으로 재생신되어 태을궁으로 원시반본하여 태을일통되는 후천개벽기에 태을도인이 되는 그날이 후천의 생일날입니다.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반응합니다. 움직임이 없다면 생명이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반응해야 하기에 어떤 마음을 내어 반응하고 행동하는냐가 관건입니다.
최선이라고 말들하지만 마음 길의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로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