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 장 지각 있는 죄인들이 가지는 의문, 이에 대한 답변
지각 있는 죄인들은 자신의 죄와 비참한 상태를 확실히 알고 있으며, 진노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며, 느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높이며,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강하고 끊임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자들이며, 그들의 모든 근심을 그리스도께 맡긴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사탄과 불신앙이 가로막는 몇 가지 낙심케 하는 것들로써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약속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것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지각 있는 죄인들이 내놓는 의문과 항변, 즉 반대입니다. 여기에 대해 대답하겠습니다.
1.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
1) 믿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비밀
①믿기 전에 선택에 대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기 전에는 자신의 선택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은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믿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②믿기 전에 선택에 대해 안다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이것을 시도하는 것은 소 앞에 수레를 두는 것이며, 결과를 과정보다 앞에 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문을 열지 않고 발을 내디디고 나가려는 것과 같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지 않으면서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의 구원은 야곱의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 사다리는 수많은 발판으로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가장 높은 발판이 바로 선택입니다. 반면에 가장 낮게 있는 발판은 바로 믿음입니다. 가장 낮은 발판을 밟지 않고 어떻게 가장 높은 곳을 밟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낮은 발판인 믿음에서 시작하십시오. 그러해야만 조금씩 선택의 발판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주제넘고도 불합리한 의문
①그것은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선택의 여부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주제넘은 일입니다. 믿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비밀로 정하셨습니다. 믿기 전에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비밀로 간직하시는 한, 당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선택된 자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주님께서 불신자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시는 비밀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어야 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그것은 드러난 의무이며, 율법과 복음이 명하는 바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부르심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전에 선택의 확신을 찾는 것은 당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당신이 찾는 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부르심을 바라보며, 그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 당신에게 속한 첫 번째 의무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믿음으로 그 부르심에 답할 때에 각자의 부르심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해지고 난 다음에야 그분의 선택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낙담
1) 무가치하다는 느낌의 가치
①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배제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으로 당신을 밖으로 몰아낼 구실을 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스스로를 몰아내려고 이것을 사용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낙심되는 말을 하지 않으시는데, 왜 당신은 이것으로 인해 낙심하십니까?
우리는 탕자가 얼마나 무가치한 사람인지를 그의 말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가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방해하거나 아버지(그리스도)가 자신을 껴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행한 무가치함으로 짐을 지고 있었음에도 그의 아버지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기쁘게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더 이상은 낙심케 하지 마십시오. 겸손하고 낮아진 죄인의 슬픈 마음은 이 애정 어린 말씀으로 인해 기쁨을 회복하고 즐거워 뛸 것입니다.
②스스로를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아오지도 않을뿐더러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사람은 영접하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지도 않습니다. 비록 그들이 믿으려고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아 주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닐뿐더러 그분의 영광은 그런 방법으로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여기서 자신이 가치 있다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가운데서 어떤 가치를 찾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보일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 가치는 믿기 전에는 가질 수가 없는 것으로서 오직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③무가치한 자들을 받아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는 그분의 위대하며 인자한 계획과 부합합니다. 가장 무가치한 자들을 은혜 가운데로 받아들이실 때, 그분의 계획과 목적은 증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입니다. 이는 그분의 은혜의 부유함과 거저 주심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그분의 은혜를 영광스럽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분의 넘치는 은혜의 부유함을 보이는 것이 그분의 설정이고 목적이며 그분의 계획이자 이익입니다. 그러므로 무가치함이 자신을 낙심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그것은 자신을 격려케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④그리스도의 은혜의 계획을 성취함에 있어서, 그분께서는 가장 무가치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가치한 자를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만약 당신이 더 가치 있는 자였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거부하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셨을 것입니다.
⑤자신의 무가치함은 다른 어떤 것보다 당신을 그리스도 앞에서 보다 자격 있는 자로 만듭니다
이것은 당신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무가치한 존재만큼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을 자는 없습니다.
2)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불신앙
①믿는다는 것은 특권일 뿐만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②불신의 상태에 더 오래 있을수록, 그리스도 앞에 나아올 때 더 무가치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의도적으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가치함이 당신을 믿지 못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무가치함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면, 그는 그 강의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아마 그 강의 수위가 가장 낮을 때 건너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가치함도 지금은 가장 낮은 단계에 있지만 당신이 기다릴수록, 당신의 무가치함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커질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면, 지금 시도하십시오.
③불신앙은 무가치의 최고봉입니다
불신앙은 다른 무가치함 모두를 당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며, 모든 무가치함을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정의를 격노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무가치함입니다.
④주님께서는 믿는 것 이외에는 당신의 다른 가치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제시하신 대로 그분을 충성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이, 주님께는 선하심과 신실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무가치함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으십니다.
3. 왜 내게 공포심이 없는가 하는 의문
1) 믿음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공포
①법적인 공포는 믿음과 회심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부분도 아니며 구성 요소도 아닙니다. 공포는 시작할 때부터, 그것이 존재하는 한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포들은 믿음이 시작되자마자 끝나 버립니다. 공포가 사람을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만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믿음의 단계 안에 있는 것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②공포는 믿음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유발하는 효과적인 원인이 아니며, 보조적인 원인도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믿음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만드는 원인도 아닙니다. 공포는 단지 준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공포는 율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믿음은 복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이나 율법의 효과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2) 믿음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님
①어떤 약속의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법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만 믿음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대체로 이것이 믿음에 선행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믿음에 선행하기는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 속에서 법적인 공포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데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의문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②법적인 공포와 낮아짐이 일반적으로 믿음에 선행하지만, 그 정도와 기간은 다양합니다
그 공포와 법적인 낮아짐 아래에 있는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빨리 통과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 정도, 즉 그 높이와 깊이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갑니다. 삭개오와 루디아가 사울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겸손했다거나 공포에 떨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겪게 되는 공포의 정도로 당신이 고민하며 아파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신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준비가 되지 못한 것으로 쉽게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③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준비를 당신의 공포의 높이와 낮아짐의 깊이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영향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법적인 낮아짐의 목적은 당신을 그리스도께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단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수단일 뿐입니다. 만약 목적이 달성됐다면, 그 수단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리스도께 적합한 자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첫째, 자신이 의지하는 모든 것, 자기 스스로의 의로움으로부터 빠져 나온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보고 느낍니다.
둘째, 모든 죄와 결별하고, 전에 자신이 사랑하며 죽기까지 육체적인 정욕을 추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을 미워합니다.
셋째, 그리스도로 인해 목말라하며 배고파하여,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넷째, 거룩함과 마음의 정결함과 생명을 사랑하여,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순전한 마음으로 따르기를 원하며 진실하고 공정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 자신의 낮아짐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에 준비된 자로 지금까지 이끌려 왔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4. 왜 내게는 눈물 어린 부드러움이 없는가라는 의문
1) 부드러움의 다양성과 성경적 부합
①마음과 의지의 부드러움, 감정의 부드러움, 표현의 부드러움이라는 세 가지의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마음과 의지의 부드러움은 의지가 유순하여져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쓰기에 편리하게 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뜻에 순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설득되지 않으려는 완고하고 딱딱한 마음은 굳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녹는 것과 누그러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과 그분에 대한 감정적인 설교를 듣고서 자기 마음이 이상하게 녹아지는 것 같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러한 마음은 굳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당신이 딱딱하다고 여기는 왁스도 불에 데우면 녹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딱딱하다고 표현합니다. 반면 약간의 온기로도 유연하게 되고 유순하게 되는 것을 부드러운 왁스라고 부릅니다. 그 부드러운 왁스로 당신은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거나, 어떤 모양을 쉽게 찍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유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그분의 손 안에서 그분께서 만지시는 대로 변하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에 뻣뻣하지 않고, 그분의 뜻과 의도에 순복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감정의 부드러움은 슬픔과 애통으로, 죄나 하나님께 불명예일 때에 쉽게 흥분하면서 끌어낼 수 있습니다. 표현의 부드러움은 눈물과 우는 것으로, 이것은 얼굴빛의 부드러움을 말합니다.
②눈물과 우는 것과 같은 표현의 부드러움은 성경이 말하는 마음의 부드러움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안색의 부드러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드러운 마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의 일반적이고 부수적인 성질입니다. 마음이 극도로 딱딱하면서도 눈물이 있을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반대로 부드러운 마음이 언약의 축복으로도 눈물이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부드러움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눈물은 나이와 마음의 본성적인 기질과 육체의 표정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표현의 부드러움이 부족하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의 마음이 딱딱하다고 쉽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생각과 그것의 사악함과 불명예 때문에 조금도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딱딱한 마음의 특징에서 나오는 결핍을 의미합니다.
2) 유순한 순종이 곧 부드러운 마음
①부드러운 마음의 분명한 증거를 찾는 길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직접적인 방법이며, 현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며, 이전의 굳은 마음이 제거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는 방법입니다. 주님과 성경이 명한 마음의 부드러움은 주로 그리스도의 뜻에 순응하느냐에 있으며, 그분께 쉽게 설득되느냐, 그분께 유순하게 복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뜻은 당신이 그분께 나아오며, 그분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에 순응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죄, 그리고 세상적 육체적인 정욕 모두를 버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것들에 당신의 과거는 끈끈하게 연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순종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받으셨듯이, 당신도 주님을 받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순종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분께 맡기라고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의 현재의 의무입니다. 당신은 이것에 설득당하시겠습니까? 지금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부드럽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설득당할 수 있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②당신이 믿기 전에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이 나타나는 감정의 부드러움을 억지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감정이 누그러지는 것과 애통의 물줄기는 믿음 앞에 선행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입니다. 마음을 찌르고 애통의 가지가 나오며, 애통의 물줄기가 풍성하게 흐른다면 그러한 자는 찔림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찔림 받으신 그리스도를 보는 믿음의 눈은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그 마음이 애통으로 녹아내리고 슬픈 울음으로 흘러 나옵니다. 믿음의 눈이 찔림 받으신 그리스도를 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볼 때에, 그 사랑의 고귀한 표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열기가 그의 마음에 도달하고 그리스도의 빛과 의로운 태양의 빛이 영혼에 파고들 때에, 그 마음은 녹고 부서지며 슬픔의 물줄기가 흐르게 됩니다. 마음의 녹음은 믿음에 따르는 것이지 믿음에 앞서지 않습니다.
5. 내게 주어진 자비의 시간이 이미 끝났다는 낙심
1) 자비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슬픈 종소리
①자비의 시간에는 분명히 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자비의 시간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 시간은 결정되어서 주님께서 그 시간을 거두시면, 죄인 자신들은 처량한 처지에 버려지고, 자신의 완고함에서 빚어지는 슬픔의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완고하게 저항하며 의도적인 거절로 주님을 격노케 하여, 주님께서 그 죄인을 소망 없는 자, 치료할 수 없는 자로 간주하시도록 할 때, 그 시간은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는 더 오래 인내하지 않으시고, 더 이상 노력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죄인을 그 자신이 택한 정욕에 버려 두십니다. 그러고는 그를 영적 심판 아래로 데려가십니다.
은혜의 시간, 은혜의 기간이 있음을 에스겔서 24장 13절에서 말씀하신 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정결케 하시려는 목적으로 여러 수단들을 제공하시는 동안, 그들을 정결케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수단들을 거절하고 무효화하면, 그 시간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 시간이 끝이 나면, 당신은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봉해 버리십니다(겔24:14 참고).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시간을 가지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거절하시는 시간을 가지십니다(잠1장 참고). 주님께서 부르시고 손을 펴시는 그 시간이 자비의 시간입니다.
②그 시간의 길이는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이 초청의 시간이 때로는 길고, 때로는 짧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좀 더 진행될 수도 있고, 좀 더 짧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 기간이 때로는 나중에 올 수도 있고, 때로는 갑자기 올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의 시간이 짧거나 길다고 장담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시간이 지났다고 여기며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결론을 내려야 할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는 있습니다. 은혜의 시간이 만기가 되었다는 몇몇 표시가 그들에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표시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표시들입니다. 몇 가지 예들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오래되고, 알고 있는 죄를 의도적으로 짓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계속, 그리고 알고 있는 죄를 지으며, 그것도 오래도록, 또한 의도적이고 완고하게 계속 죄를 짓고, 그렇게 하려고 작심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도 그것이 죄로 보이며, 죄의 위험과 사악함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는 아무렇지도 않을 때를 말합니다. 이것이 확실한 표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표시는 은혜의 시간이 만기가 되는 것 같은 위험한 표시입니다.
두 번째로는, 은혜의 수단들이 경멸과 거절로 인해 철회된 때입니다. 이는 곧 촛대가 옮겨진 때입니다. 영광이 떠났고, 복음의 빛이 꺼진 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그 은혜의 날이 지나갔음을 분명히 보여 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람이 이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멀어졌을 때에도, 그 수단들은 그들로부터 철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떠나 버렸을 때, 그 은혜의 날은 만기가 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성령님께서 죄인들에게 더 이상 노력을 쏟지 않으실 때, 그들은 버려진 것입니다.
③이런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도, 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할 만한 충분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첫 번째에 거절되었다고 해서, 그 은혜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만일 그분께서 첫 번째 거절에 그렇게 하신다고 정당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와 인내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그분의 대사들을 계속해서 보내셔서 간청하고 귀찮게 조르며, 그 죄인을 설득하여 화해하도록 하시며, 그분과 화평하도록 하십니다.
2) 죄인 스스로가 정할 수 없는 마감 시간
①시간이 지났다는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그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대체로 이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관심은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끔 합니다.
죄의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사탄은 그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잠이 깨지 않도록 그들을 지키는데 열심을 냅니다. 죄악의 날이 바로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음에도 자신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깁니다. 이처럼 안일한 마음이, 대홍수 바로 전의 사람들처럼 그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이 오거나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잠자는 영혼의 상태는 그날이 만기한 것이라는 징후입니다.
②은혜의 수단들에 부지런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은혜의 시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③성령님의 사역에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다면 그에게는 아직 가능의 매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순종하면서 성령님의 숨결과 역사를 따르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면, 이것은 앞에 설명한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그분의 임재를 바라는 곳에서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을 환영하며, 그분의 역사와 숨결을 사모하고 받아들이기에 준비된 영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이런 열정들은 성령님께서 들어오신다면 환영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④성령이 일하는 동안에는 마감 종이 울리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임재를 느낀다면, 그 시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는 강력한 가능성이자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실 때, 죄인의 화평과 관련된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빛을 마음에 들여보내실 때, 그분께서 양심을 일깨워 죄와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게 하실 때, 또한 말씀이 마음과 양심을 통해 자신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이것은 성령님께서 아직 떠나가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며, 그분께서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분께서 함께하시는 모든 시간은 바로 은혜의 시간입니다.
⑤이전의 잘못에 대한 슬픔이 남아 있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이전에 거절한 것으로 인하여 슬퍼할 때입니다. 마음이 이전에 저항한 것으로 피를 흘리기까지 고민할 때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날이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⑥성령님께서 더 이상 영혼이 거절하고 거부하지 못하도록 압도하실 때입니다
이는 곧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을 압도하여, 스스로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할 마음을 가지게 하실 때를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시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영혼이 반대와 거절의 원인과 고민하며 씨름할 때, 시간은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경우라면, 당신의 시간은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끝이 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3) 늦었지만 뛰어 들어오는 자에게는 아직도 열린 문
이 질문에서 가장 쉽게 나오는 방법은 믿는 것입니다. 시간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에 당신이 들어오기만 하면, 당신에게는 자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그리고 많이 거절을 했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분에게로 오는 자는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격려가 되는 예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
6. 그릇된 두려움이 가져오는 낙심
지각 있는 죄인이 믿음으로 나아감을 막는 또 다른 방해물은 엉뚱하게도 자신은 안전하다는 그릇된 안도감과,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입니다.
1) 용서받지 못할 죄의 특성
①그리스도와 그분의 계명을 거부하고 부정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악명 높은 죄인으로 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오는 것이며, 또한 그분의 방법과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며, 그분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②그들은 저주하고 비난했습니다
이 죄는 마태복음에서 ‘훼방하는 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12:31-32 참고). 이것은 불경스러운 말로 그리스도께 치욕을 주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을 훼방하는 것은 곧 성령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고 증거되는 아들을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그분 자체와 그분의 일과 그분의 계명을 반대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성령님의 빛과 증거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③미움과 악의가 이 죄에 담겨 있습니다
미움과 악의는 죄가 진행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분의 진리를 미워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난 것으로서 그들이 이를 드러내어 저주로 표현했을 때, 이 죄는 참으로 흉악했습니다.
④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조명과 회개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히브리서 6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6:4-6). 히브리서 10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그 진리를 거스려 죄를 고의적으로 짓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10:26).
2) 용서받지 못할 죄로 착각하는 죄들
①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이 모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께 사랑을 보여야 했고, 주님께 붙어 있어야 했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쳤고, 그분을 버렸으며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했습니다(마26:56, 막14:50 참고).
②성령님의 조명에 저항하는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닙니다
성령님께 저항하던 사람들이 회심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행7:51 참고). 성령에 반대하는 것이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면, 이 세상에 용서를 받을 자가 누구겠습니까? 저항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③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사람들을 핍박하는 모든 것이 이 죄는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분의 자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7. 약속 적용의 근거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
①약속의 적용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양심의 가책이 서 있는 기초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 자체이지, 어떤 제안이나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제시할 수 있는 약속이 없다고 해도, 당신의 믿음에는 대상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약속 안에서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를 껴안을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대상이 되시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그리스도로 발견되고, 주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에서만이 아니라, 말씀의 다른 부분에서도 계실 수 있습니다. 복음 전체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합니다. 이에 비해 약속은 복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약속이 유일하고 중요한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믿음의 중요한 대상이 됩니다.
②어떤 조건도 붙지 않은 절대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자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사48:9, 렘33:8, 미7:18, 겔36:26, 계21:17). 설사 조건의 결핍이 지각 있는 죄인의 조건적인 약속을 적용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조건이 없는 약속을 조건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며 적용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입니까?
③성실하고 정직한 조건의 최저 수준이라도 약속에 대한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완전함은 율법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약속에 대한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완전함도 복음 아래에서 받아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완전함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할지라도 용납이 됩니다. 복음은 진실하다면 최소의 수준이나 큰 결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약속을 가질 수 있습니다.
④어떤 하나의 약속에 대한 조건을 가진 사람은 모든 약속에 대한 자격을 가집니다
이는 어떤 특별한 경우의 약속을 제외한 모든 약속을 말합니다. 왜나하면 어떤 하나의 약속의 자격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의 약속의 조건을 가진 사람은 은혜의 언약 안에서 인정된 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계약을 하고 연합한 자는 모든 규정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됩니다. 이것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⑤자신이 분별하지 못하더라도 조건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조건의 최소의 수준은 분간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눈이 있어야만 합니다.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자격들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반면에 겸손한 자들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자기 스스로 쉽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실수를 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더 많은 빛을 가진 사람들과 상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보다 공정한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판단을 위해서 한두 가지 질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모든 죄를 버렸습니까? 당신은 모든 죄악된 방법을 반대하기로 결심하였습니까? 당신은 모든 죄에 대해서 자백하고 애통해하며 반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약속의 조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즐거워하시는데 당신이 그분께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샛길이 아무리 즐거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샛길을 떠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르신다면 당신은 마음을 다해 그분께 나아갈 것에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약속의 조건입니다.
⑥조건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그 조건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