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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만공 스님(1871~1946)은 구한말 선불교의 전통을 중흥시킨 경허 스님의 뒤를 이어 정통 선을 선양하고 수많은 후학을 길러낸 선불교의 선구자다.
스님은 선학원 설립을 통해 조선불교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찾고자 했고, 조선총독에게 불호령을 내리는가 하면,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천일기도를 봉행했다.
경허·만공선양회(회장 옹산 스님)와 덕숭총림 수덕사(주지 정묵 스님)는 그동안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만공 스님의 항일 행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오는 20일 충남 예산 덕숭총림 수덕사에서 개최한다.
수연 스님(견성암)은 미리 배포된 자료집에서 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 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을 인용해 "만공 스님이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한밤중에 삼청공원에서 한용운 스님을 은밀히 만나 독립자금이 든 봉투를 전달했다"는 새로운 증언을 소개했다.
또 간월암에서 했던 천일기도는 대외적으로 평화 기원을 표방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불공이었다며 "우리도 우리 고장의 자랑인 유관순 열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법문을 하실 때 나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경청했다"고 회고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만공의 정신사와 총독부에서의 선기발로 사건'이라는 발제문에서 1937년 일본 총독 미나미의 주재 하에 조선불교 진흥책을 논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 회의에서 만공 스님이 한 발언 전문을 소개했다.
만공 스님은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합해야 한다는 미나미의 주장에 대해 "전 총독 테라우치야 말로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조선 중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역대 총독들은 모두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김 교수는 "만공 스님의 발언은 한국 불교의 모순이 일제 식민지 불교정책에서 기인했음을 단언한 것이었다"며 "이런 전제에서 만공은 불교 운용의 자주, 자립을 하겠다는 기개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이외에도 이은윤 금강불교신문 사장 겸 주필, 황손 이석 씨, 이재헌 금강삼종대 교수 등의 발제가 있을 예정이며, 주경 스님(불교신문사 사장), 고영섭 동국대 교수, 홍현지 동국대 철학박사 등이 토론에 참여한다.
덕숭총림은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만공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정부 당국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hisunn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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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수덕사 학술대회서 재조명“日총독 면전서 불교정책 정면비판… 일제 저항정신 일깨운 중요 사건”
만공 스님(가운데)의 독립운동 행적을 소개한 수연 스님(앞줄 왼쪽)이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이 수연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원담 스님. 만공선양회 제공
‘한국의 선맥(禪脈)을 이은 만공 스님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20일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서 만공선양회 주관으로 열리는 ‘만공대선사 학술대회’에서 발표자들은 일제강점기 행적을 통해 만공 스님을 이렇게 재조명한다. 만공 스님이 만해 한용운 선사에게 독립자금을 여러 번 전달했다는 새로운 증언도 소개됐다. 만공 스님이 일본 총독의 면전에서 일제의 불교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일은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운 사건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 “만해 스님에게 독립자금 전달” 새로운 증언
학술대회에 소개된 새로운 증언은 수연 스님(90)이 만공 스님을 시봉(받들어 모심)했던 원담 스님으로부터 1942년 들은 이야기이다. 현재 예산 수덕사 인근의 견성암에 머무는 수연 스님은 만공 스님을 시봉했던 스님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이다.
“만공 스님이 간월암(충남 서산시 간월도)에서 천일기도를 시작한 1942년 8월 초순의 일이다. 만공 스님을 시봉했던 원담 스님으로부터 ‘우리 노 스님(만공 스님)이 실제 숨어있는 독립운동가’라는 말을 들었다. 원담 스님은 그 말을 할 때, 행여 누가 들을세라 주저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만공 스님이 한양에 갈 때마다 따라갔던 원담 스님은 ‘(만공 스님이) 총독부 회의에 참석했던 날도 그랬고, 선학원 고승 대회에 참석했을 때도 그랬는데, 밤에는 삼청공원에 있던 은밀한 장소에 가서 한용운 스님을 만나 독립자금이 든 봉투를 건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말했다.”
만공 스님은 만해 스님이 열반에 든 이후로는 서울에 가지 않았을 정도로 두터운 도반이었다. 수연 스님은 “간월암 천일기도는 대외적으로는 평화 기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기원하는 것이었다”며 “만공 스님이 우리 고장의 자랑인 유관순 열사나 윤봉길 의사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법문할 때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경청했다”고 전했다.
○ “총독 면전 호통, 일제 저항정신 일깨워”
만공 스님이 당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면전에서 호통을 치면서 일본의 불교 정책을 비판한 일은 정신적 독립운동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의 논문 ‘만공의 정신사와 총독부에서의 선기발로 사건’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37년 3월 11일 전국 사찰 31개 본산 주지와 전국 13개 도지사를 불러 불교정책에 대한 방침을 전달하고 건의사항을 듣는 회의를 마련했다. 이날 만공은 “청정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전 승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본받아 대처, 음주, 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계율을 파계하고 불교에 큰 죄악을 입힌 사람이다. … 정부에서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사건은 만해 스님의 수제자였던 금봉 스님(최범술)이 취재해 당시 잡지 ‘불교’에 기고했다. 만해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만공 스님을 만나 “사자후(만공 스님의 비판)에 여우 새끼들(일제)의 간담이 서늘했겠다”며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고 전한다.
김 교수는 “일제의 불교정책은 사찰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나 정치문제 논의의 장이 되지 못하게 하는 데 불교정책의 초점을 둔 중요한 식민지 통치정책이었다”며 “이를 비판해 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만공의 행적은 정신적인 독립운동”이라고 말했다. 만공선양회장인 옹산 전 수덕사 주지는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던 일제강점기에 총독을 향해 만공 스님이 휘두른 ‘마음의 칼’은 폭탄보다 큰 위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