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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호 : 전 국방대 교수, (예) 해병대대령
1. 미국해병대의 위상
미국해병대는 미국해군의 일부이지만 실제로는 미군이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준 4군 체제로 운용되고 있어 미해병대는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특수조직으로 성장 발전해 왔다.
문민우위인 미국의 국방조직을 보면 국방장관 밑에 차관과 차관보가 있으며 차관과 차관보 중간 지위로 육해공군의 민간인 장관이 위치한다. 이들 장관 밑에 민간인 차관과 차관보가 있으며 차관과 동격으로 각군참모총장(4성)이 존재하며, 해군의 경우 해군참모총장(CNO)과 동격으로 해병대사령관(CMC)이 있다. 그리고 합참의장(4성)은 미군현역중 최고위직이지만 각군 총장보다 상위이다. 육해공군의 전 전투작전부대(cmbatant command)는 합참의장이 행정지휘나 작전지휘가가 아닌 전략지시(strategis direction)를 하는 다음과 같은 10개 통합군(unified command) 내지 특수군(specified command)으로 편성되어 있다.
각 통합군은 전 세계를 전구로 나눠 지역책임(Regional Responsibilities)을 담당하며 육해공군 및 해병대로 혼성된 다음 6개 사령부(괄호 안은 영어 부대완전명칭 및 약호, 주둔기지명 및 사령부 위치)를 두고 있다.
① 아프리카 사령부(United States Africa Command - USAFRICOM, Kelley Barracks, in Stuttgart, Germany) ② 중앙사령부(United States Central Command - USCENTCOM, MacDill AFB, in Tampa, FL) ③ 유럽사령부(United States European Command - USEUCOM, Patch Barracks, in Stuttgart, Germany) ④ 태평양사령부(United States Pacific Command - USPACOM, Camp H. M. Smith, in Honolulu, HI) ⑤ 북방사령부(United States Northern Command - USNORTHCOM, Peterson AFB, in Colorado Springs, CO) ⑥ 남방사령부(United States Southern Command - USSOUTHCOM, Doral (Miami), FL) 그리고 전 지구적 특수기능책임(Functional Responsibilities)을 담당하는 다음 4개 특수군 사령부(specified command)가 미국 본토에 공존한다. ① 합동군사령부(United States Joint Forces Command - USJFCOM, Norfolk, VA) ② 특수전사령부(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 - USSOCOM, MacDill AFB, in Tampa, FL) ③ 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 USSTRATCOM, Offutt AFB, in Omaha, NE) ④ 수송사령부(United States Transportation Command - USTRANSCOM, Scott AFB, in St. Clair County, IL)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최근까지 합참의장을 해병대가 담당한 바 있으며, 중동과 서남아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전구로 하는 중앙사령부 사령관을 해병대장성이 담당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오바마 정권하에서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를 주관하는 대령령안보특보가 해병대사령관 출신(제임스 존스)였다는 사실을 전제 할 때, 미해병대의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백악관과 국외의 모든 미국대사관의 경비를 해병대가 책임지고 있으며, 해군함정의 신변보호책임자가 바로 해병이란 사실은 해병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상승의 전통이 그 당위성을 뒷받침해 준다.
2. 미국해병대의 역사와 전통
미해병대는 1775년 미국 대륙회의가 상륙용 병력으로 함대에 승선 복무할 해병 2개 대대를 모집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창설되었다. 해병들은 미국의 모든 전쟁에 참전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최선두에서 싸웠다. 해병들은 1775년 이후 외국 해안에 300번 이상 상륙했고 미국의 모든 주요해전에 참전했다. 미국해병대는 1947년에 제정된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과 1952년도의 개정법률에 의해 사령관이 합동참모회의 상임위원으로 합참의장 및 육해공군참모총잠과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
미해병대는 국가안보법의 특수 규정에 따라 육해공군과는 달리 유일하게 해병대만 행정부에서 임의로 조직을 개편못하게 한 “3개 사단(division)과 3개 항공단(air wing) 그리고 지원부대(force troop)”을 보유하도록 되어 있으며, 현재 동해안 캠프 리준에 있는 제2사단과 지원부대, 서해안에 캠프 펜들톤에 있는 제1사단과 지원부대 그리고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제3사단과 지원부대가 주력 전투부대이며, 이들 부대는 해병원정부대(MEU), 해병원정여단(MEB) 그리고 해병원정군(MEF)으로 각각 기동편성되도록 되어 있고, 기타 교육훈련부대와 군수지원부대, 경비부대 등이 전국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미해병대의 상징(emblem)은 서반구가 닻줄이 얽힌 닻 위에 겹쳐 있고 그 위에 날개를 편 독수리가 올라가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미해병대의 표어는 '셈페르 피델리스'(Semper Fidelis:라틴어로 '항상 충실하라'는 뜻)인데, 이것은 존 필립 수자가 작곡한 해병대 행진곡의 곡명이기도 하다. 아마 그보다 더 사람들의 귀에 익은 것은 〈해병찬가 The Marines' Hymn〉일 것이다. 미국의 군대에서 가장 오래된 악대인 해병군악대는 백악관에서 거행되는 모든 국가적 행사에서 연주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미해병대의 공식적인 상징색(象徵色)은 주홍색과 황금색이지만, 짙은 녹색도 반공식적인 상징색으로 인정받는다. 칼라가 꼿꼿이 세워진 해병의 정장인 청색 제복은 유명하지만, 짙은 녹색의 평상복은 해병대가 본래 경보병대였음을 알려준다. 18, 19세기 제복의 높은 가죽 목덮개에서 유래된 꼿꼿한 칼라에서 해병의 전통적인 별명인 '가죽 목'(leathernecks)이 생겨났다. 해군의 진형에서 해병은 전통적으로 영예와 고참의 자리가 되어 있는 전선의 우측이나 종대의 선두에 배치되는 특권을 누린다.
특히 주목할 것은 조선조 당시의 신미양요에서의 미국해병대의 한국 상륙은 인상적이다. 1871년 6월 10일 미국 군함 5척(기함은 프리깃함인 콜로라도호, 순양함 2척, 전함 2척)이 85문의 대포와, 2,23명의 미해병대 1개 중대병력을 싣고 1871년 5월 16일 일본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면전쟁이 최종목적은 아니고, 무력시위를 하여 개항을 하게 하려는 포함외교가 목적이었다.
조선군은 강화도에서 어재연 장군과 동생 어재순을 비롯해 240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로 잡혔으며, 미해병대는 3명 전사, 6명 부상을 입었다. 미국을 이 전쟁을 weekend war라 칭하며 3명이 미국최무공고훈장인 medal of honor를 탔다. 그러나, 미군은 군함의 무력시위로 개항을 하게 하여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전통적인 포함외교의 목적달성은 실패하여, 시장개방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철군했다. 4년 뒤인 1875년 9월 20일에 운양호 사건이 발생하며, 이를 구실로 일본이 군함을 보내 포함외교에 성공한다. 즉,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여 조선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 이는 1876년 2월 27일 체결된 강화도 조약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현대의 국제법으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다. 미해군사관학교(아나포리스) 박물관에는 이 학교 출신인 당시 중대장 달톤 대위가 강화도 전투에서 노획한 많은 전리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6.25전쟁 당시의 장진호 혈전과 흥남철수작전을 결코 잊지 못한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제1해병사단이 북한으로 진격중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포위되어 전투기능을 상실할 정도의 극도로 지친 부대를 대량출혈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흥남항을 통하여 상륙철수를 감행하면서, 북한 피란만 다수를 남한 지역으로 탈출하게 한 역사적 전투이다. 이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해병제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비극적인 후퇴 작전이었다.
1950년 11월 영하 40℃의 혹한에서 18일간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전사의 2대 동계전투이며,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미군 사상 최악의 희생을 기록했던 장진호 전투에서 미네소타주 출신 미군이 만해도 4,000명 이상 숨졌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좁은 배에 콩나물같이 싣고서 탈출시킨 대역사를 말한다. 이 후퇴작전이 비극적인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이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살아남은 미해병대 전우의 모임이 유명한 “Choshin Few“이다.
뭐니 뭐니 해도 미해병대를 상징하는 가장 정서적인 자극을 주는 것은 미해병대 찬가를 부를 때이다. 지금도 해병대를 키우는 도시인 버지니아주의 정든 Quantico란 소도시에서 필자가 미해병대의 고된 훈련을 받으며 그 당시 부르던 이 군가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사격술에 능한 해병대 하사관 교관단이 CIA의 특등사수 자격부여훈련을 이곳에서 시킨다.
Marines Hymn 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 We fight our country's battles In the air on land and sea. First to fight for right and freedom, And to keep our honor clean. We are proud to bear the title of United States Marines. Our flag's unfurled to every breeze From dawn to setting sun. We have fought in every clime and place Where we could take a gun. In the snow of far off Northern lands And in sunny tropic scenes. You will find us always on the job The United States Marines.
Here's health to you and to our Corps Which we are proud to serve. In many a strife we've fought for life And never lost our nerve. In the Army and the Navy Ever look on Heaven's scenes, They will find the street are guarded By United States Marines.
(몬테주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 우리는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네. 첫째로 정의와 자유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우네. 우리는 미합중국의 해병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네.)
(새벽부터 황혼까지 우리의 깃발은 펄럭인다네. 우리는 총을 잡을 수 있기만 하면 어디서라도 싸워왔네. 북방의 설원에서도, 눈부신 햇살 비추는 열대의 풍경에서도 언제나 근무중인 우리 미합중국 해병대를 볼 수 있다네).
(당신과 우리가 자랑스럽게 복무하는 우리 부대여 영원하라. 수없이 한결 같이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싸웠고 결코 용기를 잃은 적이 없다네. 육군과 해군이 (죽어서) 천국의 풍경을 볼 때에도 그들은 그곳의 거리를 지키는 미합중국 해병대를 보게 되리.)
1775년 11월 10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 대륙 의회가 2개 대대 병력의 ‘대륙해병대’(Continental Marines) 창설을 결의, 미국 해병대가 탄생한다. 그 해 4월 19일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가 충돌하면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최초의 해병대원들은 술집인 ‘탠 터번’에서 모병되었으며, 초대 해병대 사령관 ‘사무엘 니콜라스’ 소령도 정규 군인이 아닌 술집 주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미해병들은 지금도 3W를 자부한다. Whiskey, War, Woman이 그들의 낭만이라고 한다. 술도 좋아하지만 전쟁에서 항상 이기고, 여자도 화끈하게 사랑한단다 !
초창기 해병대의 주 임무는 상륙작전이 아니라, 함선의 호위와 함상 백병전이었다. 미국 해병대원들의 별칭인 ‘레더 넥’(leather-neck, 가죽 목)이 여기에서 유래했는데, 적과 붙들고 뒹굴며 백병전을 벌일 때 목을 물어뜯기는 일이 다반사여서 목의 경동맥이나 울대를 보호하기 위해 가죽 띠를 목에 두르고 다닌대서 붙여졌던 별명이다. 8년간의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실전 경험을 쌓은 미 해병대는 2천명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1783년 파리협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은 미국이 해군 전함들을 매각하면서 해병대는 해체된다. 하지만 15년 뒤인 1798년 7월, 주변국가와의 분쟁에 동원할 일종의 긴급동원 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아담스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 해병대는 재창설되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미 해병대는 미국의 해외 진출에 첨병으로 활동한다. 미 해병대 찬가의 1절 ‘몬테주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라는 가사에 등장하는 몬테주마는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의 멕시코 요새중의 하나로, 미 해병대가 점령하면서 그들의 깃발을 게양한 곳이고. 트리폴리의 해안이라는 구절은 1801년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 해병대를 파견해서 전투를 벌인데서 유래하고 있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고수해 오던 일본의 개항을 위해 페리 제독이 동원한 흑선에 탄 대원도 200명의 미 해병대원들이었다. 중국 의화단의 반외세 봉기 때 55일간 포위된 북경에서 미국 공관을 지킨 것도 미국 해병대였다.
3. 한미해병대의 특이성과 공유가치
제1차 대전때는 유럽전선에서 육군의 일부로 참호전을 치루었던 미 해병대에게 상륙작전이라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것은 1930년대 무렵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현실화 되면서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일본의 위임 통치령과 일본 본토에 상륙할 필요성이 대두 되었고, 미 해병대는 피와 죽음으로 얼룩질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 본토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미 해병대는 1942년 과달카날 상륙작전 때부터 대일전의 선봉에서 태평양 전쟁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 미 해병대의 규모는 총 7개 사단 48만으로 팽창되어 있었다.
제2차 대전 이후 미 해병대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고(2개 사단, 7만 5천명 수준), 한 때 ‘해병대 무용론’까지 대두되어 부대의 존폐문제까지 걱정해야 했지만, 한국전쟁은 미 해병대에게 소생의 기회를 제공했다. 세기의 역사를 바꾼 인천 상륙작전과 최악의 혈전 장진호전투 등에서 선전한 해병대는 다시 한번 미국의 최정예 철제부대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된 것이다.
현재 상륙작전이 주임무인 미 해병대는 ‘신속대응군’ 혹은 ‘긴급전개 부대’로 해외에서 벌어지는 각종 분쟁에 미국이 가장 먼저 파견하는 부대이다. 그래서 미국의 소방대인 911부대란 이름이 부쳐진 것이다(한국 해병대를 119라고도 하듯이). 그래서 미국 해병대의 움직임이 뉴욕 주가에까지 영향을 미친고 해서 ‘월스트리트 경찰대’라고 불리기도 한다.미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는 곳이 과거 대영 제국의 ‘레드 코트’(영국 육군의 별칭)가 주둔하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어떤 문명 비평가의 지적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한다.
미국해병대는 미군의 타군(육군이나 공군)보다 타국적의 해병대 특히 한국해병대를 형제 해병이라 하면서 좋아 한다. 흔히 한국 해병대를 우리가 “개병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애칭이 아니라 술먹은 개와 같다는 혹평일 것이다. 개는 영리하고 의리가 있는 애완동물이지만, 성경에 보면 주인의 상 밑에 부스러기를 주어먹고 먹은 것을 토해내어 반추하는 등 추한 면을 내세운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해병대“의 개자가 개(dog)가 아니라 개선문이란 단어의 개(凱)자라고 주장하면서 승전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애쓰기도 한다. 미 해병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태평양 전쟁 시 미 육군의 지휘를 받고 상륙작전을 한 사례로 꼽고 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시 한국육군 17연대의 미해병제1사단 배속을 거부하고 한국해병1연대를 수용했던 것이다.
흔히 그들은 미육군을 DOGGY ARMY, REAR ECHELON이라고 혹평한다. 개의 부정적 이미지를 내세워 육군을 높이 평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투시 선두돌진을 싫어하고 후방으로 빠져 안전을 도모한다는 혹평인 것으로 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해병대는 신미양요때는 한국군과 강화도에서 혈전을 벌였고, 태평양전쟁때는 일본군으로 끌려간 한국인과 남양군도에서 싸우면서 일본군의 조기항복을 촉진한 한국인 병사덕분에 희생을 들 수 있었고, 한국전쟁시앤 한국해병대가 미해병대에 작전배속되고 베트남전쟁에서는 작전지도를 받으면서 시종 대공전선에서 함께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한국 예비역 해병들에껜 “한번해병은 천국까지 해병”이란 강력한 기독교적 메시지가 있다. 해병대의 역대 지휘관에는 김씨기 많았던 바(김석범, 김성은, 김대식, 김동하, 김연상.....), 미해병대 고문관이 KMC를 Kim's Marine Corps라고 평하기 까지 했으며, 이들 대부분이 독실한 크리스찬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도 신앙전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옛 해병대사령부 자리에 국방부 방위사업청과 홍보관리소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 기지를 해병대 사령부로 휴전직후 처음 건설 할 때, 제일 높은 꼭대기에 교회부터 먼저 지었다. 불행하게도 해병대 사령부기 1973년에 해군에 폐합됨으로서 이 보금자리가 현재의 기념관만 남기고는 모두 국방부 재산으로 이관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작지만 너무도 튼튼하게 잘 지어져서 그후 여러 부대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창고나 군악대 연주실 등으로 사용해왔는데, 건물 내부 시설물은 없어 젔으나 구조물은 튼튼히 보존되어 있었다. 약 10여년전에 해병대 예비역 기독장교 모임인 해병선교회 요원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 서둘러 국방부와 교섭하여 자체 모금한 1억원이 넘는 돈으로 이 교회를 리모데링한 현대식 건물로 재정비하고 필요한 비품을 갖춰 예배장소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교회 건물은 국방부에 기부체납하고 그 관리는 해병대 사령부가 맡도록 행정절차가 취해진 것이다. 지금도 100여명의 예수믿는 노병들이 매주 2회씩 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표어가 “한번 해병은 천국까지 해병”이다.
4. 한국해병대의 현주소
미국해병대를 모방하여 1949년 4월 15일 300여명의 소수로 창설된 해병대는 현재 25,000명에 2개사단과 1개여단 및 여타 부대로 나뉘어져 있으며 포항에 제1사단, 강화지역에제2사단, 백령도에 제6여단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포항 사단은 국가전략기동예비로서 하시하처에라도 즉각 출동이 가능토록 전비태세를 고도화하고 있다.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은 영국 속담인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나왔다. 어느 나라에서든 뱃사람들은 근성이 있기 마련인데, 근성이 강한 영국 선원들은 ‘한번 뱃놈은 영원 뱃놈’이라는 뜻으로 이 속담을 사용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뜻으로 회자됐던 것인데, 미 해병대가 해병을 뜻하는 단어로 Marine을 선택하면서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이라는 ‘멋진’ 뜻으로 정착한 것이다.
반면 이 속담의 진원지인 영국에서는 해병대를 뜻하는 단어로 Commando를 선택했다. Commando는 ‘특공대’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아, 바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해병은 역시 해병(Marine)으로 불러야 제 맛이다. 미국에서는 해군 병사를 Sailor, 공군병사를 Air man이라고 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 해병’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해병대에 들어온 사람은 군복을 입은 때는 물론이고 벗은 후에도 해병으로 남는다. 이등병에서 사령관까지, 예비역에서 그 가족까지 모두 해병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병대에는 “아버지가 해병 출신이라서 해병대에 자원했다”는 병사가 유독 많다. 특전사 장교들은 보병사단과 특전사를 오가는 경우가 많지만, 해병대원들은 전역하는 그 날까지 해병대에 머문다. 이러한 동질감이 단결과 용감성을 낳았을 것이다. 지난날 군사정권 시 집권당이 던 민정당이 당원의 결집력을 보장하기 위한 표어로 “평생동지”란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영원한 해병”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어 은 것이라 한다. 경북 포항시는 한국 해병대의 주력이 있는 곳이다. 한국 해병부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베트남전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별명을 얻은 ‘청룡(靑龍)여단’일 것이다. 이 부대는 현재 해병대 제2사단으로 개편되어 육군수도군단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한강 하구와 김포반도에서 강화도까지 이어지는 휴전선 서측방 방어를 맡고 있다. 그러나 해병대를 아는 사람은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을 진짜 해병대라고 부른다. 왜냐 제2사단은 병력이나 장비가 불완전하여 상륙작전을 하기에는 구색이 맞지 않은 준 육군사단 형 사단으로서 그 기능이 지상군의 투입된 사단 임무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병대 1사단은 ‘해룡(海龍)’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해롱해롱’ 하는 해룡으로 들릴 수 있다고 하여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즐겨 사용하는 별칭이 ‘상륙사단’, 제1사단은 국내 유일의 준비된 상륙군 부대로서 유사시 오키나와에 있는 미해병대 제3상륙군과 연합상륙작전으로 북한 동해안에 상륙돌격을 감행하도록 한미연합사 작전계획에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연합사가 해체되면 이 계획도 무효화되고 만다. 한국군 단독의 사단급 규모 상륙작전은 함정소요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처지이니 미래의 한국해병대 위상과 존재가치가 매우 불안하다.
한미연합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몰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던 1950년 8월17일 한 개 대대에 불과했던 한국 해병대는 경남 통영으로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해 인민군이 장악한 통영지역을 탈환했다. 이때 ‘뉴옼 헤럴드 터리뷴’의 마거릿 히킨즈 기자가 종군했는데, 그는 기사에 ‘그들은 귀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용감했다(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는 문장의 기사를 남겼다. 여기서 유래한 별명이 ‘귀신 잡는 해병’인데, 이 전통을 이어온 것이 바로 오늘의 주력 전투부대인 해병제1사단이다. 해병대 김성은부대(후에 1연대)는 통영상륙작전 1개월전에 낙동강 전선 서남단인 진동리(경남 창원군 진동면) 전투에서 북괴군 6사단을 격파한 전공으로 전부대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초유의 영광을 누렸다. 한국전쟁시 육군 27연대도 화령장전투(상주시 화서면)에서 북괴군 15사단을 대파한 전공으로 전부대 1계급특진의 영예를 얻은 바 있는데, 한국 해병대 제1연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게 되었던 것이다.
해병제1사단은 상륙작전만을 목적으로 하기에 포항시 북방의 넓은 기지에 전부대가 집결 출전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육군은 이곳에 일본열도로 진격해오는 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띄울 비행장을 건설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채 항복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 육군 부대가 진주하며 군정(軍政)을 펼쳤고, 6·25전쟁 때는 미 해병대 제1비행단이 이곳에 주둔했으며, 지금 해군항공단이 여기에 함께 자리잡고 있다.
휴전후 상당기간 한국에 계속 주둔했던 미 해병대 제1비행단이 철수한 1959년, 경기도 금촌에 있던 해병대 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옮겨왔다. 당시엔 포항이 작은 포구로서의 시골의 한 읍이었으나, 해병사단 주둔 후 포항 종합제철이 자리잡게 되면서 거대한 철강 공업단지로 포항이 면모를 일신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곳은 한국의 현직 대통령이 출생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해병대를 상징하는 빛깔은 피와 정열의 대명사인 진홍색이다. 해병대의 간판은 노랑바탕에 적색 글씨로 멀리에서도 눈에 잘 띈다. 장병들의 명찰도 붉고, 티셔츠와 트레이닝복도 붉으며, 예복의 바지 봉합선도 부대기도 붉은 색 일색이다. 원색인 적색을 많이 쓰면 ‘촌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붉은색 일색의 거대 군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일조점호와 일석점호 때 각 해병 중대에서는 붉은 티셔츠를 입은 구릿빛 사내들이 몰려나와 깃발을 들고 줄지어 뛰기 시작한다. 전국방방곡곡 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에까지 노랑색 바탕의 붉은 글씨로 된 해병전우회 간판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원해병의 심볼인 것이다.
육군보병사단보다 훨신 많은 병력과 장비를 가진(전차대대, 해안대대, 수륙양용차대대, 수색대대, 항공함포연락중대 등 ,육군사단에 없는 편제 보유, 사단 일반참모가 대령) 해병제1사단 요원들은 불철주야 전천후 훈련에 여념이 없다. 해안과 산야에서 그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수백 마리 붉은 용이 뒤엉켜 돌아가는 것만 같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이 내뱉는 함성과 땀내가 후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시커멓고 붉은 ‘적룡(赤龍)’의 기운. ‘무섭다’ ‘이것이 진짜 군대구나’. 사람에 따라 표현은 다르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세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웅혼(雄渾)함이 밀려나온다. 그래서 “아무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란 자부심이 넘친다. 미 해병대의 "The Marines are looking for a few good men who want to lead"과 같은 공세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특수 군사문화와 일맥상통한다.
한국해병대는 과거 전평시를 통하여 가장 충성스럽고(dedicated), 가장 잘 준비된(ready) 최강부대였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해병대의 군가에 “나가자 해병대”란 노래가 있다. 여기의 “나가자”란 말이 해병끼리 술잔을 건배할 시에도 애용되고 있는데, 그 뜻은 “나라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란 말위 첫 글자란다. 분명히 해병대는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을 우선시하고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시는 물론, 5.16혁명에서도 분명히 선봉에 섰으며, 심지어 지난 좌파정권기간중의 호국시위에서는 물론 맥아더 동상을 지키는데도 예비역 해병이 자발적으로 선두에 섰음이 사실이다. 필자는 1973년 경 캘리포니아주 센디아고에 있는 미해병대 신병 훈련소와 해군 신병훈련소를 동시에 견학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미해군신병훈련소는 신사놀음이고 미해병대신병훈련소는 지옥생활이었다. 미해군의 경우 훈련병이 수염까지 기르고 외출이 허용되는 등 파격적인 민주시민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와는 정 반대로 미해병대 훈련병은 머리를 완전히 빡빡 깎은 것은 물론이고 식사배식과 설거지 당번뿐만 아니라 화장실청소를 훈련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예산절감의 일환으로 생활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한 육체적 체벌을 받으면서도 감수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해군과는 대조적이었다. 여기가 혹시 한국 해병대 훈련소가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느낄 정도였다. 훈령병은 현대문명사회와 동떨어진 열악환경하에서 야만적인 지옥훈련을 통하여 최악의 경우 전장에서 생존 승리할 수 있는 잠재력을 함양한다는 차원에서 한미해병대의 동료의식과 공통분가 상호 용납된다고 보는 것이다.
5. 맺는 말 : 강하고 미더운 해병이 되려면
“미군의 통솔법 교범엔 리더십의 성과지표(indication)로 사기(morale)와 군기(discipline) 그리고 단결(cohesiveness)와 숙달(proficency)을 들고 있다. 사기는 목소리가 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자기 인식에서 나온다. 군기는 명령과 규정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고, 단결은 사기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숙달은 임무와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숙련도를 말한다. 해병대는 전원 지원병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소속의식과 자부심을 통한 높은 사기와 상경하애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 강한 엄정한 군기 그리고 해병가족이란 1차잡단적 단결심은 물론 고유임무에 수반한 전문성과 자율성 에 의한 능률적인 숙달은 타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것이 미해병대의 특수 리더십훈련에서 비롯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한국 해병대도 창조적 자기혁신의 리더십을 통해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사기와 군기와 단결과 숙달을 발휘할 여건을 충분히 부여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현실적 환경은 전혀 이를 뒷박침해 주지 못하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해병대 사령관(3성장군)이 4성장군 출신인 국방부장관과 현역 4성인 합참의장에게 불려가서 심한 질책을 받은 바 있다. “왜 해병대 문제를 언론 프레이 하는가”가 그 이유였다고 한다. 해병대의 부대발전과 관련한 학술세미나를 미해병대와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한국해병대의 공지기동부대로 중생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가 제시되었고 모두가 공감하였다. 한마디로 수도권 서측방을 지키는 해병제2사단에 헬리콮트가 한 대도 없으며, NLL을 연하여 4해 6도를 지키는 해병부대에서 국방개혁이란 미명하에 4천명을 감군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비가 제기된 것이었다.
전정권에서 NLL을 북한에 할양하려는 듯이 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한다는 미명하에 해상국경성인 NLL과 서해 6도를 안전보장할 수 없도록 병력을 4천명이나 감축토록 한 처사는 천부당만부당한 시행착오였음에도, 신정부가 아직도 이를 그대로 묵인하고 시정조치가 없음에 대한 예비역 해병들의 분노가 분출하였었다. 이 세미나는 해병대 사령관의 입신양명을 위한 선전도 아니고 정당한 조직발전을 위한 현상분석과 문제제기로서 합당한 처방모색의 자조적 노력이었다. 납세자인 국민이 이 사실을 몰라야 했단 말인가? 전 국방장관에게 묻는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태로 말미암아 해병대가 1973년 이전 체제로 환원되고 병력도 증강되면서 서북도서합동방위사령부까지 창설된 것은 현실적 해상국경선인 NLL을 수호하기 위한 불가항력적인 변화 발전이라 본다.
지난날에는 해병대사령관도 4성 장군이었으며, 헌법상에 해병대사령관 임명도 국무회의에서 심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는 합참의장 및 각군 참모총장과 동일하였다. 비록 지금 해병대 사령관이 3성이지만 법적 근거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해도 3성중 최고위직급으로 예우하도록 관례화되어 있다. 이에는 못 미치지만 금번 국군조직법과 군인사법 등이 개정되어 해병대가 해군의 일부이지만 인사권과 예산권 그리고 상벌권을 해군으로부터 위임받아 독자적으로 군정기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다.
대만에 이어 3번째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잘 훈련된 수륙양용작전부대 보유로 말미암아 북한과의 비대칭 억제전력구조를 형성 가능한 한국군의 기능적 변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같이 쓸모 있는 해병대의 효용가치와 정체성을 화립하려면 수도군단의 작전통제하에 서부전선을 지키는 해병제2사단 완전해병사단을 만들어, 동해안의 해병제1사단과 대동소이한 국가전략기동예비대로 나란히 서해안에 집결 보유토록 할 것을 필자는 주장한다. 물론 그 자리엔 수도군단예하의 육군 1개사단이 투입되면 가할것이다. 현재는 해병제2사단이 김포반도와 강화도 및 그 서측방 5개도서를, 서북도서방위사가 백령도 외 동측 5개도서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다.
해병대 사령부가 위치한 화성군 발안 일대로 제2사단을 이동 집결시켜, 동서해안의 대북억제력을 균형 배비할 경우, 요새화된 적의 휴전선 종심배치가 후방해안으로의 신장 조절 될 것이며, 적에게 더욱 큰 연안방어 및 대상륙작전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는 적의 자원낭비를 강요할 수 있는 해병대의 존재가 갖는 효용가치이다. 이것이 해병대의 전문성과 자율성 그리고 특수성을 살리면서 전투부대를 유휴화시키지 않는 본연의 임무에 맞는 전력의 유지 운용이 될 것이고, 육군 수도군단의 지휘권 단일화와에 의한 수도방어태새 강화책이 될 것이다.
북한군사체제가 당분간 현상 유지하는 한 한반도의 장차전을 전제할 때, 동서 양해안에 우리의 상륙군을 배비함은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는 기정병용(奇正倂用)의 국가군사전략일지니, 해병대의 2개 상륙사단이 동서해안의 정 위치에서 3대 해상투사전력(해상항공력, 함포사격, 수륙양용전력)의 하나로 가용토록 그 편성과 장비 그리고 임무와 기능이 조속히 정상화 및 제도화되고, 필요한 교육훈련이 이에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해병대의 위기 탈출을 위한 그리고 한국의 안보위기극복을 위한 최선의 현실적 처방이 될 것으로 본다.
해병대의 존재가치 자체가 공세적 전투력의 기능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듯이 해병대가 존재함으로서 적의 공격이 좌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해병대가 없다. 왜? 헌법에 전력불보유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전력은 곳 공세적 군사력을 뜻한다. 일본은 방위란 말로 현존 공세전력을 방어위주의 군사력인 것처럼 자위대란 용어로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유수의 거대한 공세적 군사집단인 북한과 대항하려면 공세적 대응전력인 해병대가 카운트파터로 꼭 필요하다. 따라서 해병대가 나약해지도록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쟁에서 한국해병대는 널 미해병대와 함께 연합 및 합동작전으로 전투를 했으며, 상대적으로 육군보다 많은 피를 흘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미;래에도 형재해병으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려 하고 있다.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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