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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결혼후 포교당을 하면서...
포교당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서 이것 저것(전통찻집 등)을 하고 있는데 어느 노보살님 한테서 전화가 왔다.목포의 삼학사라는 사찰에 포교당을 할려구하니 스님을 소개하여 주시라고 삼학사 주지 스님께 부탁을 하니 저를 소개하여 주어서 전화를 드린다고 하셨다. 노보살님을 만나고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니 보살님은 산에 개인 사찰을 하시고 계시는데 시내에서 포교당을 하고 싶어서 스님을 모시고 싶다고 해서 결혼전 포교당과 불교 용품점을 하면서 손님이 와도 꼭 사시기도를 드리고 "관음회"라는 불교 수행단체를 운영하는 등으로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는 모습이 삼학사 노스님의 눈에는 포교사지만 좋게 보이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소개를 받았다고 하면서 장소는 목포 선창쪽에 있는 구 한국은행 터에 위치한 건물의 2층으로 약 50평 가량되였다.그곳은 시장통이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공간이였다.부처님을 모시고 인연되시는 주변의 스님 분들,신도님 들과 더불어 포교당 이름을 "용주사"라 명명하고 개원식을 하고서 정말 열심히 거의 포교당에서 염불 소리가 끊이질 않게 기도하고 기도를 하니 주변의 상인들과 더불어포교당이 기도하려 오는 신도들로 열기가 대단하였다. 그 해 추석에 차례상을 부처님께 올리고서 영가단과 붙어있는 방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녘에 포교당 노보살님이"불이여"하고 외치는 것이다.원래가 몸에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속옷바람으로 자는데 그날도 속옷 바람으로 일어나서 법당을 보니 불이 법당 창문쪽 천장의 연등에서 불이 붙어서 퍼지고 있었다. 아차하는 생각에 전기 누전으로 생각하고서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의 분전함으로 달려가서 전원을 내리고서 다시 법당으로 올라오니 몇초 사이에 불은 이미 법당 전체를 삼키고 숨을 들이쉬니 정신이 아찔하였다.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쉼을 안쉬고서 2층 배란다로 낮은 자세로 가서 뛰어내렸다. 잠시후 소방서의 싸이련 소리와 소방차가 금방 왔다. 돌이켜 생각하니 영가단의 영가님들이 이미 불을 감지하고서 알려주었다는 생각과 그후 젊은 나이에 한번은 98년도에 불교 용품점이 불이나서 약 5.000 만원 정도 피해를 보고 다시 목숨으로 해서 불을 두번이나 맞으니 너무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서 마음을 정리하고서 아직 불교 포교당을 할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서울로 올라와서 결혼하여 처자식이 생겼으니 직장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지금의 직장을 선택하여 다닌지 벌써 10 년이 넘었다. 불교를 접하면서 늘 생각되는 부분은 禪의 이치에서 볼때 시공을 초월할수 있다는 81년도 겨울 그해 겨울은 정말 추었다.禪에 대한 서적을 두루 보고서,그당시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선관련 서적으로는"경허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공성의 피안길"과 스님은 조계종으로 출가를 하시어 태고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시고 비구로써 지금의 법륜종의 종정 큰스님으로 계신다.스님이 요즘 참선을 한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냐고 물으시기에 상황을 이야기하여 드렸더니 빙그래 웃으시면서 스님께서 공부하실때 무인도에서 3년간 정진을 하셨는데 그때 동해 바다에서 막 떠오르는 해를 관하는(日出觀)을 하셨다면서 일출관을 하시라고 하셨다.일출관을 하는 방법은 벽을 향하여서 좌선을 하고서 앉은 자리에서 벽을 향하여 손벽을 뻐쳐서 벽과 손바닥이 닿을등 말등한 자리에서 지금 보이는 벽이 벽이 아니라 동해 바다에서 막 떠오르는 해가 떠 오른다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슨 경계가 오며는 매일 점검을 받으라고 하셨다.그렇게 해를 관하면 정말 둥그런 해가 떠올라서 점 점 커져서 나중에는 자기 몸을 둘러싸서 우주와 하나가 되어서 우주의 실상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다음날 부터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스님이 지도하여 주신데로 면벽 참선을 하고서 해를 관하기를 하루에 8시간 이상씩 바람이 천불전 마루 바닥에서 들어오는 법당에서 정진을 하였다.그러기를 3일째 되는날 그날도 저녁에 참선을 하려고 천불전 법당을 여는 순간 엄청나게 커다랗게 타오르는 불덩어어가 천불전 가운데에서 다음날 스님을 알현하고서 저녁에 일어난 경계를 말씀 드렸더니 경계가 괭장히 빨리온다고 하시면서 계속 열심히 하라고 하시였다.정말 그 타오르는 불덩이를 보는 순간 아 정말 이러한 세계가 있구나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정말이지 비록 마음으로 지어진 상에 의한 해덩어리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도인이 된 기분이였다. 수덕사의 만월대는 우리나라의 대자유인 선지식 경허큰 스님의 법제자 만공스님이 달을 가지고 놀으셨다는 만월대가 있다.달을 보았으면 나중에는 놓아 버리라는 만월대,계속 하나의 상에 걸려있으면 더 이상 공부가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그러한 상태는 하나의 방편이지 공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러한 해 덩어리는 거의 몇 달간을 저녁에 길을 가며는 앞에서 늘 조그만 모습으로 따라 다녔다.해 덩어리를 경험한 체험은 나의 신앙 생활에 커다란 믿음으로 자리를 잡고있다. 거기서 생각되는 부분은 출가를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였다.해서 생각되는 부분은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빠른 시일에 효도를 하고서 나중에 출가의 길을 가자는 생각이였다.그래서 다시 시작한게 권투였다. 3.군종병으로 생활... 청훈의 꿈을 안고 올림픽을 목표로 아마추어 권투 선수 생활을 시작한 권투는 올리겠습니다.이후 군 영장이 나오고 대학을 전자과를 다닌 관계로 특기병 훈련소인 논산 훈련소로 훈련 교육을 받고서 배치돤 곳은 후방의 해안을 낀 정도로 부대의 분위기가 살벌했다. 날마다 사역에 이등병은 고참들 보는 앞에서는 세면도 못하는 거의 날마다 사실 군법당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스닝으로 계시다 군에가서 전방 소총수로 수덕사가 인근에 있어서 책을 통하여 본 경허스님과 만공 큰스님의 초상화등도 특히 경허 스님이 참선 수행자를 위하여 무궁화 꽃으로 직접 쓰셨다는 불교 포교에 있어서도 화두선및 염불선등 불교의 선불교가 꽃을 피우면 불교를 믿지말라고 하여도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법회시에는 스님을 초청하여 초청 법회도 하였다. 군에 있을때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과 큰 스님을 많이 친견하러 다녔다. 아무리 먼 공간에 큰 스님이 계서도 물어 물어 인연을 맺으러 찾아 뵈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얻는데 있으나 현실적으로 중생들이 지금 제대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나중에 포교당을 하되 주존불을 4.능인선원과 인연 그리고 발전상... 군에서 재대 신고를 하고서 군 문을 나설때의 마음은 섭섭합과 아쉬움 그리고 84년 7월에 재대를 하여 그해 9월에 "대한교과서(주)"에 입사를 하여 사무실이 연지2달 가량된 약 50평 가량의 포교당이였다. 도와 드렸다. 특히 약간의 손재주가 있어서 법당의 장엄적인 부분에 거의 도맏아서 하였다. 법당 천장에 설치된 연등의 제작 그리고 법회를 알리기 위하여 설치하는 프랑카드 등등지금은 프랑카드를 관할 구청에 신고후 설치가 가능하는데 그당시는 신고없이 관세음보살의 정근의 부분도 우리나라 국악의 오음과 관세음보살의 소리가 오음이라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는 저절로 염불 속에서 단전 호흡이 되어서 염불선이 된다는 설법은 그당시 광장히 새롭게 피부로 와 닿는 기도법이라고 생각 되였다. 그리고 각종 광고 매체를 통하여 초청 법회 행사를 알리고 하니 주변에 다른 사찰에 그러기를 2달 가량 되니 기독교 개신교 계에서 비상이 걸렸다. 그 당시 상익상가 4층의 능인선원 법당은 80 평으로 사는데 1억이 필요하였는데 그당시 능인선원에 오시는 신도들의 층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층의 신도 분들이 아무튼 신도님들의 층이 높아서 보살님들도 거의가 대졸자라서,2류 대학을 나온 분들은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어놓고,불교에 대한 공부 의지가 정말 대단하였다. 매주 발행되는 주보에는 교리,경전 해석등과 더불어 신도님이 운영하는 사업 소개와 더불어 신입 신도들을 모두 소개하는 공간과 더불어 각종 법회 알림등으로 채워졌다.그리고 신도 관리 에서는 구단위로 지역을 나누워서 각 지역의 장들이 그지역의 한번은 송광사 서울 포교당 삼청동 입구의 "법련사"에서 법정 스님이 설법을 하시러 오셨는데 저는 그당시 법련사 불일회보 주간으로 계시는 송광사 구산 스님의 상좌이시고 지금은 전남보성의 "대원사"의 주지 스님으로 생활 포교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시는 현장스님과 속가의 같은 동향으로 군 시절인 82년도에 해인사를 들렸더니 현장 스님은 해인사의 해인지를 맏아서 발간하시고 계시였고 문서 포교에 남다른 열의를 보이시던 분이라 해인 강원 졸업후에도 불일회보를 송광사 지묵스님과 함께 이끌어 가고 계시였던 터라서 자주 법련사를 들려서 불교 관련 출판물을 직장의 영업적인 차원에서도 수주를 하여 보고,또한 스님을 도아 드릴려구 자주 들렸는데 그날도 법정스님의 설법을 들으려고 능인선원 일요법회가 끝나자 바로 법련사에 들렸더니 바로 능인선원의 지광스님이 모자를 푹 쓰시고 법정 스님의 설법을 들으러 직접 오신 것이였다.그러한 열정에 그저 감탄을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님 혼자서 여러 부분을 하시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스님은 3~4명 분의 목을 하시는 체력도 정말 대단하시어 불보살님의 가피속에서 가능한 그러한 신심이 있으시기에 그분들이 부처님의 가피가 그야말로 넘쳐서 잘 사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스님은 특히 기도를 하실때 매월 1~3일간의 신중기도는 꼭 하시였고 보통 기도 시에도 주존불을 관세음보살님을 모신 관계로 관음 정근을 포함하여 모든 정근을 30~40분은 정말 힘있는 정근으로 하시였으며 특히 신중기도에 아주 강한 믿음를 보이시어 신중님들의 가피를 늘 생각하고 믿어 의심치 않으신 듯 하였다. 그리고 신도님들의 영가 기도 또한 한분 한분 지극 정성으로 하시어서 믿음을 주시였다.그리고 틈틈이 자연스럽게 능인선원에 필요한 각종 모임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웠는데제가 고등학교때 "화랑단"이라는 불교 학생회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바로 실천으로 옮기시어 지금의 능인선원 중고등부의"화랑단"이 탄생하였지 않나 생각된다.스님은 불교 포교의 현실적인 감각이 아주 정말 타고 나신 듯 하였다. 그리고 방생법회와 순례법회도 꼭 1달에 1번 정도는 가져시어 신도들의 유대강화를 그리고 불교 법회시에는 가능한 신도들에게 와 닿겠금 반야심경을 한글화 하시고 그리고 끝임없는 기도속에서 능인선원이 신도들 모두의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시는 듯 하였다.그래서 기도 법회와 더불어 부처님의 환희심을 심어 주시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부처님 법을 공부할수 있도록 능인선원 신도 한평 사기 운동을 전계하시면서 또한 각 각의 신도들이 부처님을 한분씩 모시는 부처님 만불 모시기 운동을 하시였다.부처님 모시기는 그당시에 한분을 모시는데 20만원 이였는데 부처님을 모시는 공덕과더불어 20 만원중 많은 부분은 지금의 서초동 능인선원을 건립하는데 커다란 힘을 작용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스님은 자신감으로써 포교를 하셨고 강남의 현실적인 신도들의 상태를 파악하시어 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법회와 불사에 참여하겠금 하시는것 같았다. 5.해인사에서 생활... 포교국장 스님으로 계시는 여연스님(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자연 "竹露茶" 단지로 가장 규모가 큰 보성 대원사 주지스님과 茶의 차성으로 추앙 받으시는 초의 선사가 머물렀던 해남 대흥사의 茶 성지 일지암에서 10년 이상 머무르시다가 지금은 조계종 식사를 하고서 앞으로 맏게 될 서점과 함께 딸린 방으로 와서 혼자 있으니 조금전의 그 뒤로는 스님들도 직원이라는 사실을 아시고서 후원에서 함께 공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아무튼 생활 하는데 조심하여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서 다음날 여연 스님을 뵈니 해인사 부근에서 살고 있는 이제 갖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을 소개하면서 업무를 도와 줄 것이라고 하면서 같이 근무할 것이라고 했다. 해인사는 여름철에는 하루에 찾아오는 관광객이 줄잡아 20 만명이 넘는 우리나라를 해인사의 포교국에서 관리를 하는 관계로 매일 재고 파악을 하였고,서적과 물품만 파는것이 아니라 해인사 안내와 더불어 불교에 대하여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답변하고 사찰을 안내도 하였다.또한 저녁 늦게 해인사에 오시는 분들 중에는 하룻밤 머물고 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어서 원주 스님에게 이야기를 하여서 일반인을 위하여 마련된 객길로 안내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가람에는 원래가 객이 머물다 가는 객길이 언제고 준비가 되어서 일반인도 3일 정도는 머물다 갈수가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아시는 분들은 이용을 하시는것 같았다.이곳에서 이익금은 포교국과 강원의 학인 스님들에게 쓰여지고 있었다. 해인사는 낮에는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하고 저녁이 되며는 완전한 산중의 고찰로 해인사에서 공부하시는 강원의 스님들은 참으로 순수하신것 같았고 더불어 해인사 저녁이면 가끔 학인 스님이신 원종스님 과는 아주 마음이 통하여서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인근의 초등학교에서 하는 불교 대학생회의 캠프에도 동참을 하였다. 가끔 조금은 괴팍하신 스님들도 계셨고,선원에서 안거중이신 스님들도 가끔 오시는데 하루는 선방의 젊은스님들과 팔씨름을 하여 보았는데 제가 팔씨름을 조금 하는 편인데 역시 선방에서 마음을 닦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마음뿐만 아니라 팔씨름도 대단하였다. 해인사의 행자님 중에는 동향에서 오신 행자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연세가 50 세가 해인사는 주변에 상가와 전답이 많아서 가계는 세를 주고 전답 또한 소작을 일부는 그리고 산새가 깊어서 호랑이도 살수 있고 몇 십년 전에는 호랑이들이 스님들의 밤길을 안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엿다.그리고 해인사는 다 아시는 희랑대사 라는 분이 해인사에 모기가 매우 많아서 법력으로 희랑대사 스님만 다 빠라 먹으라고 모기들에게 피 공양을 하시면서 뒤로는 다시는 스님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셨다는데,그래서 인지 정말로 모기가 별로 없었다. 해인사 경내의 해탈문에 서점이 있다보니 전국에서 한소식 했다는 분들이 가끔 학인 스님들과 선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데 그러한 선의 이야기중에 하루는 해제에 가람의 대중이 법당에 다모인 상태에서 큰스님이 사자좌에 오르시어서 주장자를 3번 바닥에 두드리고서 잠시후 "알겠는가"하였다,대중들은 한참 조용하고,지나가던 신장님이 법당문을 확 차고서 너는 아느냐"했다는 알듯 모를 듯하게 표현되는 선의 세계를 표현한 이야기로 웃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인사에 들어가서 나올때까지 꼭 대중 스님들과 함께 새벽 기도는 꼭 참석하였고 틈틈이 여러 법당을 들려보며 각 법당에 모셔진 불보살님 전에서 참회와 발원도 하였다.해인사는 강원이 있어서 새벽 기도시에는 강원의 학인스님들이 돌아가면서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을 스님들이 날마다 번갈아 가면서 독송하였고 해인사의 산새가 위풍이 있어서 인지 스님들의 새벽 기도의 염불도 패기와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때는 스님들의 염불 소리에 머리가 꼿꼿이 스는 경우도 있었는데 큰 가람에서 대중스님들과 함께 새벽 기도를 하는게 어떻게 보며는 일반인들에게 가장 신심을 일으키게 할 것 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여연 스님은 스님의 방이 종무소 건물에 있어서 가끔씩 차를 함께 한잔씩 마실 수 있었고 차도에 대하여 여쭈기도 하고 어깨 넘어로 배우기도 하였는데,역시 여연 스님이 내어 놓으신 茶는 같은 차와 물을 사용 하시는데도 맛이 확실히 다른 듯 하였다. 그리고 가야산 해인사의 호랑이로 불리우는 성철 큰스님도 한달에 한번 수좌 스님들과 함께 큰법당에서 법문을 위하여 내려오시어 서점에 한번 들리시기도 하셨는데 정말 큰 체구에 도풍을 느낄 정도의 당당함이 스님의 눈속에 담겨 있는듯 하였다. 그리고 일타 큰스님은 거의 안내려 오시어서 몇 번 찾아 뵌적이 있다. 그리고 선원은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하는데 해인선원에서 방부를 들여서 참선 수행을 하시는 선원도 선원의 수좌 스님의 특별한 배려로 방문을 하였는데 원래 이곳은 팔만 대장경을 옮길려구 많은 예산을 들여서 만들고서 목판 장경을 옮겼더니 목판에 이상이 생겨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옮기고 이곳을 스님들의 선원으로 사용하여서 인지 아주 좋게 선원이 되여 있었다. 그리고 선원의 노스님들이 기거하시는 건물이 있어서 가보았더니 연노하신 노스님들이 많이 계셨다.스님들 말씀에 이곳에 계시는 노스님들 중에는 드러내지 않는 흉륭하신 도인 스님이 신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우리나라의 수행하시는 스님들이 연세가 들어서 노스님이 며는 편안히 수행 정진을 하실수 있겠금 모든 시설을 갖춘 전문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해인사는 가람이 큰 총림이다 보니 큰스님이 많으신 관계로 어떤 큰스님을 그러한 해인사 생활이 몇달이 지나니 확실히 출가를 하던지 아니면 다시 도시에서 사회 생활을 하던지 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다시 서울에서 불교 활동과 구룡사와 인연 ... 해인사에서 생활후 다시 서울에 와서 능인선원 스님께도 인사를 다시 드리고서 새벽 기도를 다시 시작하면서 불일 출판사의 현장스님께 마음의 진로를 이야기 하고서 불일서점에서 잠시 근무하면서 일을 도와 드렸다.불일 서점이 있는 불일출판사는 송광사 서울 포교당의 법련사에 딸린 공간으로 삼청동 입구에 지금도 있다.그곳에서 잠시 현장 스님을 도우고 있다가,지금 봉은사에 계시는 명궁 스님의 소개로 "성문 스님이 관할하는 전국청년승가회"소속의"월간 법회지에서 사람이 필요로 하다기에 들린 곳은 혜화동의 가정집을 개조한 사무실의 공간이였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영업적인 일을 하였는데 주로 월간"법회"지를 홍보하고 회비를 수금하는 영업부 일이였다.월간 법회지가 내용 면에서 아주 참신하고 좋아서 모든 종단에서 구독을 하여 주었다.월간 법회지 근무를 하면서 서울 지역의 사찰은 오토바이를 타고서 정말 많이도 다닌것 같다.주로 조계종단의 사찰만 인연이 되어서 줄곳 다녔는데 이곳을 통하여 다른 불교 종단도정말 규모 면이나 운영적인 면에서 아주 사찰을 잘 운영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렵게는 구 중앙 발물관의 위쪽에 위치한 산속의 사찰로 부터 새로이 개척을 하는 구룡사와 새로운 인연은 15년 이 한참 지난 1999년도에 다시 서울에서 지금의 직장 마땅히 청년회 회장을 하려는 사람이 없던 차에 불교 활동을 하였던 부분에 대하여 약간 피력 하였더니 다른 사람은 회장을 맏을 사람이 없고 하니 회장을 안 맏아주면 청년회가 해체 된다면서 협박(?)을 하기에 참으로 난감한 마음으로 이미 오래 전에 목포에서 보현정사 청년회 회장도 지내고 조계종포교사로 포교당과 목포지역의 대학생 불교 연합회 지도 법사도 근 8 년간 하였던 마당에 아무리 큰 통도사 서울 포교당 구룡사 청년회 회장이라지만 조금 나이든 상태에서 맏게 되는게 마음이 선듯 내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 구룡사의 정우스님은 98년 조계종 분규때 총무원장 선출 건과 관련하여 종정스님이셨던 통도사 월하스님 문중의 "개혁회의측" 대표자 격으로 부상되셨고,또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의 문중의 월주 스님이 "총무원 측"의 위치에서 백양사 문중의 대표로 부각되면서 미묘히 작용되는 부분에서 서 계셨고 승적 마져 조계종에서 박탈당하는 상황이였고,나중에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은 1998년의 조계종 분규사태와 관련 99년 1월 방장자격을 상실한 월하 스님이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에 2001년 재 추대됐다.이에 따라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은 6일, 주지 직무 대행 현문 스님에게 주지 임명장을 수여했다.현문스님 통도사 주지 임명은 방장 월하 스님의 추천에 의해 이뤄졌다.그러한 종단의 대내적 상황속에서 청년회 마져 존속의 기로에서 나에게 다가왔고,조금의 고민 끝에 불법 문중에 무슨 힘의 논리 라든지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어느 편에서도 서지 않는 마음에서 이러한 불교의 흐름의 상황속에서 청년회가 없어 진다는게 말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통도사 서울포교당 개포동 구룡사의 청년 회장을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승락하고서 활동을 하였고 다시 대불청 서울지구와 대불청 중앙의 이사와 의전 위원장까지 하게된 계기가 되였는데 그러한 구룡사와 인연의 부분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다시 올려 보겠습니다.사실 두분 스님들은 어느 면에서나 훌륭하신 분들인데 지금의 조계종의 부분에서는 언젠가는 그러한 싸움(?)이 다시 살아날 불씨가 아직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언젠가는 해결 되어야 하는 조계 종단의 문중간의 미묘한 부분에서 정말 커다란 마음으로 승단이 서로 화합하는 묘책이 생겨서 불교의 혜명이 온 법계에 항상하기를 늘 바랄 뿐이다. 아무튼 86 년경에 조계종 포교사 교육을 함께 받았던 지금은 비구니 스님이 되셨는데 같은 동년배의 간사님(정우 스님은 지금의 구룡사를 일으키실때 스님이 동국대학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동국대학교를 나온 참신한 인재를 지금의 구룡사를 창건하시면서 기용하여 매일 그러한 간사들과 아침에 회의를 통하여 구룡사를 함께 구상하셨다고함)과 함께 포교사 교육을 받게되는 계기가 되어서 차 한잔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러한 구룡사 정우스님의 포교적인 발상을 알 수 있었다.하여서 능인선원에서 보고 느낀 점을 쭉 이야기를 통하여 전달 하였더니 법회 의식적인 면에서 제가 전한 내용이 반영되였는지 그뒤로 지금의 5층 법당을 건립을 위하여 불사를 하는 중에 앞에 가건물을 지어서 구룡사가 법회를 장엄하게 하셨는데 법회의 의식의 부분 구룡사의 정우스님은 그전에는 다른 곳에서 포교당을 하시다가 개포동의 지금의 아무튼 그시절 부터 지금까지 능인선원과 구룡사는 선의의 경쟁을 같은 지역에서 어느 스님이 더 포교를 현대적으로 잘 하시는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이루워지고 있다고 생각된다.구룡사는 능인선원이 막 지금의 능인선원을 건립할려구 권선을 할 무렵에 시기적으로는 먼저 지금의 구룡사에 터를 닦고 계셨다.지금에 와서 구룡사와 능인선원을 신도적인 차원에서 비교를 하면 능인선원은 신도분들이 조직적인 체계속에서 이루워지고 있고 구룡사는 특별한 신도회가 구성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각종 법회와 행사가 체계적으로 이루워진다고 생각되였다. 아무튼 월간 "법회"지에 근무를 하면서 서울 사찰은 산비탈길에 있는 곳도 다녔던 기억이 난다.그 무렵 사실 지금도 열악한 불교 환경은 불교 활동을 하면서 불교의 단체에서 직업으로 갖는 것은 현실성이 사실 미미하게 이루워지는게 사실이다.그래서 아주 특별한 신심과 자기적 희생 정신이 없으면 불교 집안에서 근무하는게 현실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다.그러다 보니 참신하게 오르지 부처님을 향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불교 활동을 하다가도 현실적인 면에서 다른 일반 직장에 비하여 보시금이 너무나 적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게 지금의 우리나라의 불교권의 직장 문화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저 또한 그러한 현실적인 면에 봉착하여서 선택 할수 밖에 없어서 백제약품을 잠시 다니다가 불교 용품점의 매력을 느껴고 점 더 수행적인 면에서 하나의 세계를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수행의 방편으로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 만독을 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서 일단 여건이 허락하면 불교 용품점을 운영하면서 시간이 나는데로 10 만독을 할려는 마음을 가졌으며 10 만독을 회향 할려면 하루에 100 독씩 꾸준히 하며는 3년만에 10 만독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고 더 독송하는날 덜 하는 날을 계산하여 5 년을 잡고서 매일 100 독씩 할려는 마음을 가지고 100 독씩을 하여 나갔다. 아무튼 그러한 과정에서 기회가 되며는 신묘장구대다리니를 독송을 하면서 불교적인 삶의 가지고자 생각 하다보니 불교 서적및 용품점을 고향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어 매형에게 자금을 요청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7.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및 자료"금강원"개원... 불교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부분은 자기적인 확실한 믿음과 더불어 감히 최고로 인정 할수있는 부분이 있어야 나중에 어느 곳에서나 막힘이 없는 법회를 이끌 수 있고 불법의 인연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한 입장에서 볼때 저는 나름데로 몇가지의 수행을 하다보니 성품이 定적인 면과 動적인 면이 함께 내제 되여 있어서 저의 수행에는 염불법이 맞겠다고 생각하고서 나름데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염불법에 대하여 잘하는 염불 수행자가 되어보겠다고 다짐을 하고서 염불 쪽에 관련된 서적과 염불을 위주로 수행하시는 큰 스님들을 친견 키로 하였고,그러한 마음으로 청화 큰 스님과 인연의 부분은 다음에 다시 올리겠습니다.염불 쪽에서도 천수다라니를 일단 10만 독을 5년을 목표로 회향하고자 하였다.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우리나라의 휼륭하신 스님들이 많이 수행하셨고 근래의 스님들도 많이 수행하시는 부분으로 실로 신기하고 묘한 커다란 불보살의 가피와 힘이 담겨진 비밀 스러운 자연의 소리음 이라고 생각되였다.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많이 독송하면 식이 맑아져서 전생을 알수 있는 숙명통이 저절로 열린다고 하며 근래에는 송광사의 구산 큰스님도 대표적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을 많으실 때는 마음으로 관하시어 하루에 1만독도 마음으로 하셨다고 하며,불광사의 광덕 큰스님은 하루에 4천 독을 독송하셨으며,그리고 경허 스님의 큰 법제자인 수월 스님은 7일간 신묘장구대다라니 그래서 불교의 6통 중에서 불법과 금생에 다행히 인연이 되였는데 최소한 숙명통 정도는 하여야 겠기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에 100독씩 꾸준히 하여갔다.그러한 다라니 독송과 불교적인 삶을 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려가서 매형께 불교 용품점에 대한 매력을 피력하고서 자금을 구할 수 없냐구 요청을 하였더니 매형께서 사업에 대한 계획서를 자세히 적어서 구체적으로 제시를 하시라구 하셨다.그래서 구체적인 사업 계획서를 가지고 매형께 드렸더니 읽어 보시더니 그럼 같이 운영 하자구 하셨다. 매형께 감사히 생각하고서 가계 터를 알아보는 마당에 개인 택시업을 하시는 고향의 큰 형님의 친구 분을 만나서 인사를 하고서 어떻게 지내느냐구 하시기에 가계를 알아보고 있다고 하였더니 그럼 그 분의 가계가 비워있으니 하면 어떻겠냐구 하시어 매형과 함께 그곳을 가서 위치를 등을 보니 괜찬을것 같아서 그곳에서 "금강원"이란 상호로 불교 전문 서적및 용품점을 개설하였다.참고:(염불 수행을 하시는 분들의 신심을 일으킬 수 있는 신묘장구 대다라니와 관련된 경전적 자료와 큰스님 들의 법문을 참고로 올림니다) 진언수행은 염송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간경, 염불과 통하고, 관법과 염법을 계율 수행과 관련된 "신묘잔구대다라니"의 경전의 문구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이 신주(神呪)는 가지가지 이름이 있으니 일명 만약 산이나 들에서 경을 외우고 좌선을 할 때 산에 사는 도깨비나 잡된 귀신들이 진언(다라니)은 일반적으로 수행 중의 장애를 없애고 선정과 지혜의 힘을 길러주는 천수10만 독송으로 도 이루신 또다른 큰스님으로는 백용성 스님으로 3 .1 운동 "산하대지와 삼라 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믿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함으로써 이번 생애에 영원히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염불은 일심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마음을 정토에 두는 도”라고 결정하였다.원효성사 저술(무량수경종요),번역:정목 스님(정토원)의 "원효의 새벽이 온다" 펌 주문이란 것도 그냥 그렁 저렁한 말이 아닙니다.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의 음(音)이며 우주의 멜로디입니다.실은 다 비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실상자리인 명나라 때 4대 고승들이 주로 염불 화두 이른바 나무아미타불 화두를 했습니다. 화두를 할 때는 나무(南無)를 빼고 합니다. 우리가 소리를 낼 때는 여섯자 음조인 나무아미타불이 잘 들어맞아요. 그래서 여섯자로 하는데 화두할 때는 "아미타불"로만 합니다. 먼저 깨달음을 전제로 하고 닦아 나가야 참다운 참선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그리고 끝없이 야기되는 고통 속에서 번민하는 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통과 불안의 늪에서 헤메이는 민중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안심(安心)과 희망(希望)입니다.범부로부터 현성에 이르기까지 일체 중생을 섭수하여 한생명(一心) 무량광명 진언을 깨달음의 방편으로 삼는 종단에서는 명호 그 자체가 형상(Form)이다. “진언을 중요하게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진언은 우리 불교 깊숙이 들어와 “진언수행은 몸, 입, 뜻으로 하는 만큼 입으로만 외우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고. 또한 흥선 대원군은 중국에 귀양가 물없는 곳에 유폐되어 갖은 고통을 겪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자료를 좀 더 자세한 자료를 보며는 현생에 지은 우리의 업은 돌아보면서 “참회하옵니다” 대비심다라니는 대비신주 또는 대비주라 하며 현행천수경에서는 성철 큰스님(돈오돈수-頓悟頓修주장)같은 선을 위주로 하시는 스님도 제자 이상의 경전적 자료와 큰 스님및 선지식 들의 체험에 의한 법문을 통하여 볼때 8.금강원"개원 후 활동 그리고 고비... 상호를 생각하는 마당에 송광사의 현장 스님은 "보리수"로 하자고 제안하셨고 그리고 불서및 불교 용품은 주로 불일에서 많이 거래를 하였고,직접 불교 용품 그리고 원목으로 둥그런 차상을 크게 만들어서 오시는 분들에게 무료로 하동 그리고 "금강원"을 하면서 일반 신문에 쉽게 불교 교리를 알리고자, 일반 신문의 그리고 "금강원"안쪽에는 조그마한 개인용 기도실을 만들어서 새벽 기도부터 당시에 보현정사 청년회의 회원은 등록 회원이 100명이 넘었고 매주 확고한 믿음으로 의식부터 시작하여 청년회의 법회 내용을 수행 위주로 그러던 차에 불교신문에 조계종 포교사를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서 사실 불법에 무슨 자격증이 필요하고 불법의 세계를 표현하고 알리는 마당에 조계종 포교사로 등록을 하고서는 각종 일반 법회에 초청 법사로 법회 활동과 그러던 차에 불교 공부를 하시는 분들 중 "금강원"을 찾아온 같은 포교사님들이 그런데 부처님이 법을 전할때 한길을 둘이 가지말라고 하셨던,부처님이 전도를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기를 2개월 가량 지난 상태에서 그 선배 분은 계속 분인의 속으로 불교일을 하면서 다시는 둘이서 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금강원"에서 사용하던 불교서적및 용품을 제가 다시 가지고가는 9.보문사 나한 석굴전에서 기도 가피,다시 금강원 활동... 우리나라의 불교권의 부처님 기도 가피력의 영험이 있다는 몇 군대의 불보살님께 오로지 의지하는 마음으로 강화도 보문사에 도착하여 그렇게 가게의 주인되시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다시 가게를 알선하여 그 분들은 제가 그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서 그런것 같다면서 그러한 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불보살님의 가피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할수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젊음 불자들 위주로하여 주변에 인연되시는 젊으신 그리고 "금강원"의 공간에서 경제적으로 당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관음회"는 매일 예불과 더불에 일주일에 1~2번의 교리 공부와 순례법회 그 당시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좁은 공간에 많이 오시어서"금강원"밖 그러한 가운데 시인이시며 茶에 남다른 세계를 가지고 계시는 석성우 그리고 부처님오신날 행사등에는 "금강원"의 프랑카드를 도로의 중요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큰 스님들의 선지식 친견기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던 차에 좀 더 큰 공간으로 포교당을 알아보는 마당에 미국에 있던 그 석굴의 공간은 목포의 남농 기념관과 향토 문화관 사이에 있는 (기도 수행처로 강화 보문사를 알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보문사는 635년(선덕여왕 4)에 회정(懷正)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649년 (보문사 석불전의 나한님)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낙가산에 있는 사찰. (보문사 창건 전설) (깨어진 옥등잔 전설) 그래서 그 석굴을 개발하여 안쪽에 부처님을 조성하여서 10.시내 금강원 정리후 석굴 도량 불사... 포교당을 점 더 넒은 공간으로 알아보는 마당에 인연이 되어 친구가 그곳 입암산에 있는 석굴 정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이고,친구가 시주를 그래서 석굴 작업을 위하여 주변에 집이 필요해서 알아보니 바로 밑에 커다란 그리고 이곳에 처음 집을 지어서 살았던 일본인(福田)이 얼마나 멋을 아는 그런데 일본이 패망후 일본인이 떠난후 이집에서 살아온 우리나라의 사람들은 방 안의 기둥도 향나무의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서 기둥을 세우고 아궁이에서 집의 구들장으로 되여있는 큰방은 연탄 보일러 아궁이로 다시 직접 바꾸고 참고로,대구 팔공산에 갓바위가 있듯이 목포에도 바위의 모양이 스님의 삿갓 그런데 입암산 금강원 개원식을 일주일 남겨놓고 그곳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시내 금강원은 목조로 된 전통 일제시대의 2층 건물로 2층에서는 할아버지 한참을 찾으니 아! 불이난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것은 날마다 사람들이 금강원을 찾으면 차를 직접 내어주기 위하여 사용하던 불이난 전날 그날도 저녁 늦게 사람이 찾아와서 차를 한잔하기 위하여 커피 그날 퇴근길에 전원을 뽐고서 퇴근을 하여야 하는데 그만 잊고서 그냥 퇴근을 나중에 몇년 후에 알게된 사항인데 원래 그러한 경우 가전제품을 공급하는 그래서 그런지 금강원에서 취급하던 불교 관련 모든 물품은 거의 그대로 있는데 금강원 불이 났다는 광주권 뉴스에 5,00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로 뉴스로 보도 갓바위 입암산 금강원 개원을 일주일 남기고서 일어난 화재라서 입암산 "금강원" 그러한 가운데 갓바위 입암산 "금강원"개원식은 정해진 날짜에 목포지역의 그리고 이모님이 화주를 맏으셔서 여러 방면으로 화주를 하여주셨고,특히 시내의 금강원은 그러한 화재로 다시는 일어서기 힘든 상황에서 선배분이 가게를 그동안 "나의노래"를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11.입암산 석굴 불사하면서... 시내의 금강원을 정리하면서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그저 저의 생각으로는 나중에 금강원을 크게 발전을 시켜서 정말 매형에게 그래서 삽과 곡갱이를 들고서 매일 석굴을 개발할려고 법당으로 사용하는 그리한 가운데서도 부처님 오신날 행사등에는 앞에 있는 남농기념관 개발하고자 하는 석굴은 자연적으로 생긴 석굴인데 일제 시대부터 그래서 그때까지 돌로 막아진 부분을 제거하고 앞쪽에 자연적으로 그러한 가운데 바로 밑에 커다란 석축으로 만들어진 창고가 있었는데 그렇게 석굴 안쪽과 바깥쪽의 쌓인 흙들을 퍼내기를 아마 8t 짜리 덤프 그렇게 근 2년 반이 넘게 대중 속에서의 고독감에 혼자서 허공을 쳐다보며 정말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 길을 가면서 그래도 우리나라에 재가 불교의 그러한 가운데 저 보다도 더욱 고생하시는 분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님이셨고 석굴의 작업을 하면서 굴에서 나온 다듬어진 내모난 돌로는 석굴로 그전에도 석굴 작업을 하면서 저녁에는 석굴에서 목청껏 염불을 하면서 그렇게 만 2년 반의 세월을 석굴 기초 작업을 위하여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그렇게 파고 들어간 상태에서 바위에다 직접 부처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일단계로 손수 할수있는 부분을 하고서 산 주인으로 계시는 친구 친구의 어머님은 교회의 집사님으로 이곳은 교회의 기도처로 생각하고서 어떻게든 친구의 어머님을 설득을 할려고 하여도 통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래서 그동안 옆에서 석굴 작업을 위하여 도와준 미술 후배들이 고마운 이 몸이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고서 주먹을 그동안 2년 반동안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마음은 온 몸을 석굴에서 저녁에 벽을 보고서 좌선을 하고 있으면 환청으로 군인들이 여러 그리고 일주일에 한팀이나 두팀 정도는 평균적으로 무속인들이 어떻게 그들은 거의가 내림신을 받은 사람들로 자신에 들린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삶이 정말 어려워도 일단 그러한 세계에서 그리고 남자 무당을 법사라고 하는데 그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의식을 행할때 그렇게 하루 하루 석굴을 개발하면서 미술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손이 다친 순간 손이 다친 상태에서 후배 녀석에게 달려가서 한방을 날렸더니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지칠데로 지쳐있는데 그러한 경우를 당하니 정말 너무나 억울하여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친구가 바로와서 달래면서 그무렵 석굴 밑에 법당으로 사용하는 금강원을 하루는 주인으로 있는 모 그래서 그곳에서 인연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나올려구 시내에 다시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때 너무나 성급히 석굴 작업시에 친구가 시주를 석굴의 친구는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제가 석굴을 개발하면서 한번씩 그래도 비록 허공에 법당을 만드는 격이 되였다고 하여도 불보살님을 12."나"의 노래"1부 마치며 그리고 "나의 노래 불교 공부를 하면서 불교는 종교성과 더불어 철학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등이 표현되어서 초심자가 불교을 접하는 계기에 따라서 달리 해석을 하고서 불교를 접근 할수있고 그러한 가운데 잘못 전달이 되며는 불교가 너무나 어렵고 형이상적으로 표현될수 있는데.그러한 부분은 불교을 한쪽 으로만 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두선의 장점인 空의 계념을 파악하고서 염불선의 장점인 굳건한 믿음으로 숙업의 업장을 함께 제거하면서 수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다시 말해서 불교를 이해를 할려며는 空의 개념을 파악 할수있는 간화(화두)선의 세계를 이해를 하고서 현상계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인 내세관과 더불어 부처님의 일대기등의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신앙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부처님 법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설하신 근기법이라서 각 각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야 하며 깨달아도 깨달음의 차이에 각 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전생의 습에 의한 업은 부처님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그래서 저는 깨달음에 있어서는"돈오점수"쪽이라고 생각하고 화두선과 염불선을 함께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따지고보면 화두선이나 염불선이 같다고 생각할수 있으나 진언 수행등의 타력적인 부분으로 업장을 녹이면서 자력적인 화두선을 하면 좀 더 빨리 그리고 정확히 깨달음을 얻을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일단 부처님의 경전의 말씀과 실질적으로 체득하신 큰스님들의 말씀을 일단 믿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수승한 마음으로 이루워진 불법의 만남이라면 불보살님들도 호법을 하여 주실거라 생각합니다.참으로 좋은 시절에 어떤 면에서는 아주 마음 공부를 하기가 어려운것이 보고,느끼는점 마음을 현혹하는 부분이 많이 접하는 시절이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수없이 많은 분들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한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복을 받은 시대에 우리는 함께 호흡하면서 사는데 불법을 선택하고 정법을 선택하고 그리고 실참 수행을 하는것은 본인의 판단에 의한 선택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찰나와 같은 이시대의 불법의 만남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이 미묘한 법의 성품을 알고자 한다면 결정코 참 복인이라 생각됩니다.그래서 현실적인 불교의 사상인 그야말로 늘 기쁨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청화 큰스님의 말씀되로 空의 계념으로는 극락의 세계가 있다 없다 지금의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그래서 아마타부처님을 모시는 염불 도량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나의 끝업는 노래도 이제 인연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아미타불"을 불러보고 싶습니다.그것은 모두가 이생에서는 늘 즐거웁고 환희로움이요,금생을 인연을 다할때는 기쁜 마음으로 또 다른 인연처인 극락정토로 향할수 있는"아미타불" 염불법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 보면 극락의 세계를 오랜 발원과 참회 수행을 통하여 48가지의 원력으로써 만드신 아미타 부처님의 전생이신 법장 비구로써 수 없는 윤회속에서 원력으로써 수행을 하시면서 48가지의 원을 세워서 발원을 하시면서 행하신 18번째 서원에"십념왕생원"이라는 즉 죽음에 임하여 "아미타불'을 열번만 불러도 누구나 극락 정토에 갈수 있고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결정코 정각을 이루지 않겠다고 하셨다.그런데 이미 전생에 법장 비구이신 아미타 부처님은 극락 정토에 상주하고 계시니 그러한 발원은 당연히 이루워지는 것이라서 누구나 "아미타불을 임종시에 열번만 지극한 정성으로 염하면 갈수 있는데 과연 죽음에 이르러서"아미타불"을 열번 염송하실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가능할지 의심스럽고 살아 생전에 "아미타불"을 늘 염송하는 상태에서나 죽음의 순간에도 "아미타불"염송이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이제 나의 수 겁동안의 윤회의 끝없는 노래는 오르지 환희로움으로 "아미타불"을 모두가 함께 불러서 무량수여래불의 세계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불교적인 삶을 선택하여 살아온 세월이 어쩌면 한낱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도 늘 불법의 인연에 감사드리며 수행과 더불어 함께하는 장애가 살아가는 시절의 여러 인연되시는 분들과 지혜로써 극복하여 긍극에는 모두 성불 하옵길 바라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甫剛 金永萬- 평상시에 아미타불 염불을하면 내가이제 발원하여 바라옵나니 본래없는 무명업장 참회하오니 아미타불 아미타불 불러만봐도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불만으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2부는 조금 시간을 두고서 큰스님 분들의 친견기를 위주로 그리고"나의 노래"12-1로 해서 아미타불 수행관련 자료를 몇 편을
삼학사 주지 스님은 그당시 90 이 넘으신 노스님으로 지금은 열반 하셨지만 일제 시절에 일본에서도 스님으로 공부를 하시고 포교적인 열정이 대단하신 노스님이셨다.
명절에는 소방서가 비상 대기를 하는데 그날은 동네 남자분이 일찍 일어나서
마당을 쓸으시다가 법당 건물에 연기가 나서 바로 119로 신고를 하신 것이다.
불은 소방차를 이용하여 금방 진화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간 법당은 아찔하였다.
정말 몇 분의 간격으로 법당 전체가 다 타고 방음 천장벽도 열기에 떨어져 있었다.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
불이 나기전 추석 몇칠 전부터 저녁 늦은 시간에 포교당의 방에서 쉬고 있으면
아무도 없는 벽 하나 사이로 있는 영가단의 벽을 누가 몇칠간을 치는 것이다.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불나기전에 노보살님에게도 그이야기를 하였는데.
분명히 그것도 크게 주먹으로 치는 것이였다.
기도속에서 화재의 위험성을 나의 안에서 환청으로 들릴수도 있었겠다 생각된다.
그때 화재의 원인을 아직도 모르는데 그 당시에 어린이들이 땅에다 치며는 올라가서
터지는 폭죽으로 인하여 발생하지 않았나 추축할 뿐이다.지금도 마음이 나태하려지면 이미 나는 그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보며다시 초발심을 돌이킨다.
2.일출관 그리고 환희심...
생각을 늘하였다.그래서 참선을 하며는 禪을 통하여 과거의 시간으로돌아갈수 있겠다는 생각을 늘 하였다.중학교 때부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학교 공부보다는 철학서및 사상서를 읽기를 좋아했다.아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약 3일에 2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고 생각한다.고등학교때 독서주간에 도서관 연람실 자료를 근거로 전학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다고 다독자 상도 받았다.그래서 책을 통하고 법문을 통해 들어본 달마대사를 禪을통하여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선을 하기로마음을 먹었다.
선의 자세와 선의 세계를 소개한 "선으로 가는길"이란 선관련 서적이라고 생각된다.
참선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서 목포의 보현정사(지금 법륜종 중앙 교육원)의 천불전에서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참선을 무박으로 철야 정진을 하고 있었다.
몇칠 후 지금 법륜종 종정 스님이신 정각 큰스님께서 저를 스님방으로 불러셨다.
활 활 타오르는 것이다.그 불덩어리를 보는 순간의 환희심은 격어보지 못한 사람은 형형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환희심이요.신비함이였다.한참을 타오르는 불덩이는 몇칠간 않자있던 자리에 않자도 벽에서 한참을타오르더니 사라졌다.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접어야 했다.권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화가 되면
창설 미사일부대 였다.이곳은 말이 후방이지 말로 들은 전방과도 비교가 안될
아무 죄도 없이 단체로 몇달 먼저 들어온 고참들로 부터 주먹으로 가슴을
맞는 등의 구타의 연속,특히 친구들 보다 약 1년 정도 늦게 군대에 입대하니
사회에서 친구 또래의 고참들로 부터 그야말로 한주먹도 안되는 녀석들이
돌아가면서 가슴을 치니 정말 힘들었고 그것도 사회에서 권투를 하고서
맞지는 않고 살아온 마당에 정말 참기 힘든 창설 부대의 이등병 생활을 마치고
첫 휴가 신고를 하는데 대대에서 대대장으로 부터 전화가 오기를 휴가 신고를
하고서 대대를 들리라는 것이다.
하여서 대대에가서 대대장을 만나니 그간 고생하였다고 휴가후 대대 군종병으로
생활하라는 것이다.
원래 사병은 인사 이동이 없는데 파견 형식으로 법당을 만들다 시피하신 분이
제대 후에도 적극적으로 저를 지지하여 근무가 이루워졌다.
이 법당은 그분이 근무하면서 빈 막사를 이용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힘을 기울려서
이루워진 공간으로 사단에서는 유일한 법당이였다.
그래서 인근의 다른 연대에도 군법당이 없는 관계로 저희 부대 군법당(慧星寺)에서
법회를 함께 보았다.
근무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나중에 속퇴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부처님을 모시니
이건 부처님의 가피라 생각하였다.
대대에서의 군종병 생활은 180도 바뀐,부처님께 그저 감사하는 생활이였다.
군법당이 대대에 있다보니 군종병이 법당을 맏아서 이끌어 가야하는 상황이
되여서 책임감을 통감하며 특히 불교 교리및 의식의 공부를 많이 한것 같다.
군법당에서 장교들과 사병 그리고 인근의 지역 불자가 함께 법회를 하다보니
군이라는 특수한 계급 사회에서 불교를 알리는게 참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보현정사의 정각 큰스님께 어떻게 하면 설법을 잘 할수 있습니까
하고 여쭈니 자신감을 가지고 확고한 신념으로 정법을 알리겠다는 마음으로
설법을 하면 설사 그법문이 약간 미숙하여도 정법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스님의 그 말씀에 자신감을 가지고서 법회를 진행하니 법회로가 장 되였다.
스님은 73년도 부터 고등학교 불교 학생회(화랑단)을 만드시어서 불자이면서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시고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학생회
법회를 지금까지 이끌어 주시고 저는 화랑단 4기에 해당된다.
뵐 수 있었고 특히 경허,만공 스님이 주석하셨고 말년에 만공 스님의 법제자
마벽초 스님이 주석하신 수덕사내의 정혜사의 주지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수덕사의 가풍등을 배우는 기회가 되였다.
"念弓門"의 글씨는 선의 세계에 빠져있는 나에게 참으로 와 닿았다.
참선 수행자는 화두 참구 하기를 궁사가 괴녁을 향하여 시위를 겨누듯이
오르지 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 하시라는 글귀와 만공 스님의 "百草是佛母"라는
모든 번뇌 망상을 굳이 버릴려고 하면 더욱 생기니 그 번뇌 망상 마져도 부처님의
어머님,깨달음의 근원으로 알라는 글귀가 너무나 와 닿았다.
불교와 인연이 되어서 공부를 하면서 정말 불교의 맛을 느낄수 있었던 것은 참선
수행과 도서관을 찾아서 알게된 禪의 세계를 통하여 정말 전체적으로 파악이
되는 듯 하다.
정혜사 스님은 요즘 기도처로 유명한 간월암은 만공 스님이 공부하신 곳으로
1달간 수행하면 모두가 견성 할수 있는 아주 좋은 도량이라고 소개를 하여
주시기도 하였다.
그당시에 수덕사 말사인 인근의 정암사의 주지 스님은 군포교에 대단하신
열의를 보여 주시어 자주 법회를 하여 주셨다.
시간이 나며는 직접 군법당을 장엄하기 위하여 남들이 자는 시간에 법당에
들려서 법당 분위기에 맞게 페인트 등으로 법당을 장엄도 하고 오르지 부처님의
빽만 믿고서 새벽 도량석과 가능한 새벽 예불도 부대에서 올렸다.
군종병 이다보니 종교 활동으로 밖에 자주 나가서 군에 필요한 불서와
물품을 인근 수덕사 등에서 보시를 받아서 부대에 제공도하고 함께
매주 갖는 일요법회가 끝나면 다과회를 하면서 군인 불자 상호관에
유대 강화도 하였다..
군에서 찾아뵌 큰스님으로는 서옹,청화,성철,혜암,일타,혜암(수덕사)송담,
서경보,강석주,법정 큰스님등 이시고 송광사의 구산 큰스님은 송광사로
찾아 뵙고자 갔으나 출타 중이시라서 몇칠 후 부대에 들어오니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지식과 인연은 공부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군에서의 종교 활동은 어떻게 보면 불교를 종교로 갖게 할수있는 아주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조금한 포교 차원에서 신경을 쓰면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할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 군법당과 교회를 비교하면 지금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차로 교회가 편중 되여있다.
아파하고 필요한 부분을 치유하여 주겠금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불교 포교 방식은 다시 한번 많은 생각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부분은 다시 한번 지금 사람들의 근기에 맞게 쉽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여러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을 위한 포교가 제시되어야한다.
법당의 운영을 수동적으로 스님의 의식 집전에 따라서 하기보다는 함께
수행하고 함께 참회 발원할수 있도록 이루워 져야하고 조용히 화두를
참구하는 공간과 더불어 목청것 목탁을 칠수있는 시민 염불당의 필요성을 느낀다.
군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생활을 하다보니 불교의 포교관이 정립이 되는것 같았다.
관세음보살로 모시겠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나중에 직장 생활을
위하여 인연이 된 능인선원 지광 스님이 군에서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포교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런데 지금 다시 포교당을 운영한다면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실 것이다.
사회에서 무엇이든지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 받을때 돌아가신 아버님의 임종을 지커보지 못한
불효자,늘 죄송하게 생각하며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 재대 인사를 드리고
아버님의 묘소에 들려서 술 잔을 올리며 꼭 아버님께 못다한 효도를 어머님께
하겠다고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다짐을 하였다.
강남의 말죽거리여서 인근에 집을 구하고서 주변의 포교당을 찾으니 성열 스님이
운영하시는"강남포교원"과 칠보사 석주 큰스님이 상좌들에게 맏겨서 운영하시는
"칠보사 포교원"그리고 지광 스님이 운영하시는 "능인선원"이 있었다.
하여서 다녀보니 나와 인연 인듯한 곳으로 능인선원을 다니기로 하였다.
그당시 능인선원은 서초동 무지개 아파트앞 2층 건물의 2층에서 이제 법당 문을
회사에서 끝나면 능인선원에 들려서 이제 생긴 포교당 이다보니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동안 불교 학생회와 청년회 그리고 군에서 배우고 읶힌 불교 생활 전반적인
부분을 몸을 아끼지 않고 하면서 벽에 불교 사진 등을 거는 등의 일을 하다가 쓰는 망치의 파편이 눈에 2번이나 박혀서 수술도 하는등 어느 때는 밤을 세우고서도
설치가 가능하여 능인선원 기사분과 같이 육교 밑과 거리마다 설치도 하고,시간만
되며는 능인선원에 가서 선원의 잡다한 일들을 도와 드리니 지광 스님께서 앞으로
능인선원의 계획등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손이 필요하니 능인선원에서 기거하면서
직장에 다니면 어떻겠나구 하시기에 집을 정리하고서 능인선원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였다.
스님은 포교적인 열정이 대단하시어서 매주 일요법회와 각종 기도법회 사시기도
새벽기도 그리고 매주 신문의 간지로 주변의 몇군대 신문사에 연락을 하여 능인선원
주보를 보내고,우리나라에서 법력이 높으신 큰스님을 거의 1달에 3번 정도는 초청을 하여서 초청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은 스님이 직접 꼭 법회를 주관하시면서 해박한 불교적인 교리를
현실적으로 잘 풀어서 싶게 전하시고 유창한 영어로도 가끔 설법에 섞어서 표현을 하니 강남의 지식층의 불자들에게 아주 좋게 표현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였다.
다니고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불자들이 한분 두분 모이더니 개원후 거의 2~3달 만에 자연히 능인선원의 신도가 되어서 능인선원에 오시는 신도님들이 법당은 말할것도 없고 법당을 올라오는 개단에서 부터 건물 주변에 꽉 찰 정도로 법비에 목말라하는 신도들로 가득하였다.
몇칠후 기독교 단체에서 아예 능인선원이 있는 건물을 통체로 사버린 것이다.
갑자기 내몰리는 상황에서 신도님 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권선을 하니
신도님들은 너나 할것 없이 서로 큰 마음을 내어서 얼마후에 강남역 부근의 삼익상가 4층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였다.
서초동의 한 노보살님이 1억을 쾌척하시구,또 다른 분이 능인선원의 대형 뻐스
한대를 바로 시주하시는등 많은 분등이 권선에 동참하시였다.
나중에는 바로 옆에 20평 짜리 개척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들여서 100평의
공간으로 법당이 이루워졌다.
교회에서 건물을 사는 통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많아서 그당시 군 장성의 별을 세워보니 13개나 되였다.
하루는 신도들과 법당에서 연등을 만들고 있는데 사복 차림의 군에서 사령관님 1호차운전병을 법당에서 만나기도 하였는데 무슨일로 왔냐구하니 저기 않아계시는 보살님이 사령관님의 사모님 이시라는 것이다.
경에 커다란 원력을 새운 사람이 커다란 원과 신심으로 불교를 이끄며는 불보살님 께서 거기에 맞는 인연들을 보네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지광 스님에게는 있으신것 같았고 확인 할수 있었다.
신도를 관리 하겠금하고 지역 법회를 통한여 각 가정에서 법회를 볼 수 있는 가정
법회도 병행 하시였다.그리고 초청법회와 더불어 수계법회도 하셨는데 지금의 지광스님의 법명도 서경보 스님을초청하여 수계법회를 하시면서 다른 법명에서 다시 스님도 받으셨다.
또한 신도들로 하여금 여의도 순복음 교회등에 교회 신도로 파견하여서 잘 되어가는
교회의 전도 방법을 배워 오겠금하고,스님 또한 유명하신 스님이 어느 것에서 법회를 하신다하면 바로 가시어서 설법하시는 스님의 설법 방법을 파악하시구 법회가 잘 되는 방법을 배우시는 등의 포교에 대한 노력을 그야말로 포교를 포교 전략으로
생각하시어 능인선원에 적용하시였기에 오늘의 능인선원이 가능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일들이라 생각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매일 함께 새벽 법회를 보다가 저의 기도하는 부분을 인정하셨는지
새벽 기도는 스님이 여러가지로 어려우시니 저보고 집전을 하시라고 하시어서 새벽
기도는 제가 맏아서 하고,사시 기도는 스님이 꼭 신심이 우러나겠금 하시였다.
그당시에 제가 새벽 기도를 집전하여도 함께 따라주신 보살님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새벽 기도에 오시는 보살님들은 우리나라 대기업의 회장 사모님,혹은 어머님이 많으셨는데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운전을 하고서 새벽 기도를 위하여 삼익상가의 법당을 찾으셨다.
자연스럽게 이끄시였다.그리고 불교대학을 3개월 과정으로 개설하시어 법비에 목말라 하시는 강남 지역의 불자님 들을 능인선원으로 힘을 모으는 계기로 삼으셨다.
"염송문"이라는 부분을 넣어서 한줄은 법사인 스님이 선창을 하며는 다음 줄은 신도들이 선창한 부분에 맞게 후렴 식으로 따라서 하였는데 신도들과 스님과의 관계및 전체적으로법회에 함께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기에는 아주 좋은 불교 의식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주 들린 법련사에서 현장 스님이 합천 해인사에 해인사 포교국 소속의 불교 서적과 용품점을 해탈문 바로 옆에 개설을 하였는데 초대 책임자로 갈 생각이없냐구 하시기에 몇 칠간 생각하다가 스님들의 세계도 알겸 수행 공덕도 될 듯 하여 다니던회사를 그만 두고서 스님께 말씀 드리고 해인사로 향했다.
서울서 생활을 하다가 스님들의 세계인 해인사에서 생활을 위하여 해인사로
가게된 동기 중에는 茶 관련 서적을 통하여 "禪茶一如"라는 선의 세계와 차의 세계를
하나로 본다는 문구가 너무나 멋지고 차의 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함도 작용하였다.
그당시 해인사 포교국장으로 계시는 여연 스님이 茶에 대하여 글을 쓰시고 직접
차를 재배 하시는등 茶에 대한 전문가 스님이시기에 茶에 대하여 여연 스님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함께 작용하였다.
해인사에 도착하니 저녁 공양시간이 되였다.
대변인으로 계신다)께 인사를 드리니 스님들이 공양하시는 후원에서 공양을 하라고
하시기에 후원으로 들어가서 공양을 할려구하니 선원에서 참선을 하시는 수좌 스님이 버럭 화를 내시면서 일반인이 함부로 후원에 들어와서 식사를 한다고 텃세(?)을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섭섭하고 눈물이 핑 돌정도로 가슴에 와 닿았다.
광경을 목격하신 강원의 젊은 학인 스님 두분이 오셔서 해인사의 스님들 분위기와
어투가 조금 거세니 이해를 하라면서 마음을 달래 주었다.
대표하는 법보 수행 총림이라서 어떻게 보면 포교의 황금 단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그래서 해인사 사중 회의를 통하여 관광객을 상대로 포교의 필요성을 느껴서 불교 전문서적과 용품점을 판매를 하여서 포교도하고 이익금을 포교사업에 쓰기로 하고서 해인사 경내의 해탈문의 건물에 불교서적및 용품점을 개설하였다.
업무 파악은 서울에서 현장 스님이 법련사의 불일 출판사와 서점을 맏으셨고 가끔 직장에 다니면서 그곳을 도와 드렸고 나름데로 불서를 조금은 읽었기에 금방 파악되엿다.
변하였고,가끔 강원 스님들이 들려서 함께 불교적인 이야기와 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여연스님이 강원의 학인스님들께 불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소개를 하여서 학인스님들이 공부를 많이 하셨다면서요,하면서 말을 걸어 오시는 스님들도 계셨다.
공간이 모두가 주인이라는 자유인의 마음으로 사시는 모습이 출가자의 길을 한번
갈까도 생각하여 보았다.
넘으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동향에서 원래는 조계종 스님이셨는데 다른 종단에서 활동을 줄곳 하셨는데 은사 스님(지금 조계종 종정 법전 큰스님)이 다시 해인사로 들어와서 행자 생활을 하지 않으면 스님의 제자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하시어서 스님 생활을 몇 십년간 하시다가 행자로 들어오신 분도 계셨고,그 스님은 합동 수계식때 다른 행자들은 사미계를 받았는데 이스님은 조계종 비구계를 받았고,해인사 행자실의 군기가 엄청 강하여서 고참 행자들에게 군기를 많이 받았는데 스님의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알고서 수계식때 군기를 주었던 고참 사미 스님들이 다 들 피해서 도망갔다고 나중에 고향에서 만나서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신 스님도 계셨다.
주어서 경작을 하고 있었는데 여름에 씽씽한 과일과 산딸기등이 넘처날 정도로
풍족하여서 공양이 올라오면 두루 두루 한상 가득히 나누워 먹었다.
그리고 해인사는 여름에도 불을 때야 만이 잘 수 있을 정도로 깁은 산중이어서 저녁에는 추울 정도이였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서 가야산 정상을 올라가 보았더니 완전히 구름 속의 산봉우리로 정상이 되여 있었고 산길을 한참 찾아보니 해인사로 들어오는 길이 정말 아득하였다.옛날에 이러한 가람을 이루도록 노력하신 분들의 정성과 불심이 없으면 불가능 하리라 생각되였다.
성철 큰스님과 더불어 큰스님들께 법거량을 한답시고 오시는 분들도 더러는 있었고
禪에 관심이 많은 저로써는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강원 스님들과 더불어 기새가 당당한 해인사에서 대웅전 법당을
참배할때 어간문(법당의 가운데문)은 절의 큰 스님이나 주지 스님만이 출입이 가능하는데 어간문으로 들어가서 나와서는 올래는 이문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야기하는 괴짜(?)도 있었다.
해인사는 대중의 아침 공양을 엄청 빨리 하여서 새벽 예불이 끝나고 조금후에 바로 대중공양에 들어가서 마치면 학인 스님들은 가람의 청소를 함께 하시였다.
茶는 차맛과 더불어 물맛도 중요한데 해인사는 사용하는 모든 물이 자연 생수이다.
이러한 깊은 산속에서 나오는 생수를 사용하여서 인지 그때의 茶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특히 다기도 취급을 하였는데 해인사 입구의 마을에 다기 가마을 가지고 계시는 영남대 도예과 김종희 교수님의 다기를 오래전 부터 해인사 스님들은 사용하시어서 그 다기를 주로 취급하였고 차는 여연 스님이 직접 만드는 "여연차"와 하동 쌍계사의 조태연가 에서 조태연 할아버지가 만드신 茶를 주로 취급하였고 불교 전문 서적은 제가 필요한 부분을 파악해서 각종 불교 출판사에 주문을 하며는 바로 화물로 보내 주었다.
혜암 큰스님은 작은 체구이셨는데 연로하신 법랍인데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자주 뵐 수 있었다.
한번은 일타 큰스님이 기거하시는 지족암에 들렸더니 상좌 스님이 손에 잠들어 있는
다람쥐를 보여주시는데 정말 어린아이 처럼 고이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그림처럼 포근해 보이는게 스님과 다람쥐의 모습 속에서 꼭 다른 세계에 오는듯 하였다.
모시느냐에 따라서 해인사 어느 큰스님 문중식으로 스님들이 출가를 하여서 어느 큰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시느냐에 따라서 문중이 결정되고 앞으로 스님 생활을 하는데 평생 아주 많은 영향으로 작용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하여서 고향의 후배를 다음 후임자로 소개를 하고서 약 4 개월만에 "수좌는 3개월" 이라는 선방 스님들의 이야기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해인사에서 여연스님과 강원 학인 스님들의 아쉬움의 눈빛을 멀리하고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능인선원 스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송광사 포교당 불일서점과 성문 스님이 운영하시던 월간 법회 지와 종로 5가의 백제약품에서도 근무를 하였다.
서초동의 구룡사 등도 갔다 왔는데,그당시 구룡사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즈그만
가정집에 부처님은 마당에 비닐하우스를 이용하여 모시고 계셨고 정우스님은 건물의 이층에서 지금의 구룡사를 구상하셨는지 커다란 차상에서 차를 즐기시고 계셨다.
생활을 하면서 근 15년 만에 능인선원을 들려서 정말 불심과 환희심으로 일구워진
능인선원을 둘려보고 지광 스님과도 인사를 나누고서 능인선원을 들려서,바로 앞에
있는 구룡사를 지난 날을 생각하며 들렸는데 마침 청년회 회장이 임기가 다 되어서
청년회 회장을 선출할려는 법회에 참석하였다.
참회문을 발표하고 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에서 능인선원에서 하시는 염송문의 부분이 들어가 있었고 능인선원과 마찬가지로 법회용 법요집을 임시로 필요한 부분만 만들어서 가끔씩 들려본 구룡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공간에 터를 잡고서 개척 포교당을 하시고자 커다란 원력으로 매일 108 참회와 기도를 신도님들과 함께 가건물의 법당에서 기도와 법회를 하시면서 위쪽에는 5층 법당을 장엄하게 불사를 하시고 계셨다.특히 구룡사는 스님의 기도 정진속에서 우리나라에서 법력이 있으신 큰스님 100 분을 모시고 법회를 봉행하는 100 고좌 법회를 100 분의 스님을 초청하여 하셨는데 아마 그 법회가 지금의 구룡사의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되였다.그리고 부처님을 일만불 모시는 만불 불사를 병행 하시였다.그야말로 한번씩 들려본 기도시의 정우 스님의 모습은 오르지 기도에 몰림하여 참회 기도를 정말 간절하고 간절한 음성으로 신도들과 하시고 계셨다.
친견하신 큰 스님이 청화 큰 스님이셨다.
대비주를 독송하여 천수삼매를 얻으시고서 '잠을 쫓았다'는 말씀데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 되었다고 한다.
통해 삼매를 얻고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에 참선 수행과도 통하며, 원하는 바를
이루므로 기도와도 통한다. 또한 진언을 하는 동안에는 삼업청정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인 바
수행자의 행이 부처의 행이 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진언 수행자는 먼저 몸과 마음으로 진언의 참뜻을 체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광대원만(廣大圓滿)이며, 일명 무애대비(無 大悲)며, 일명 구고다라니(救苦陀羅尼)며, 일명 연수다라니(延壽陀羅尼)며, 일명 멸악취다라니(滅惡趣陀羅尼)며, 일명
파업장다라니(破業障陀羅尼)며, 일명 수심자재다라니(隨心自在陀羅尼)이니
이와 같이 받아 가질지니라.만약 지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명구를 외우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신인에게 우러러 기도한다면 구하고 원하는 바를 따라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은 뜻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금강삼매경론> 권 하, 진성공품)
괴롭히고 어지럽혀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는 자가 이 다라니를 한 편 외우면 이
모든 귀신들이 모두 다라니의 위력에 사로 잡히게 된다. 만약 법다이 외워 지녀서
뭇 삶들에게 크나큰 자비의 활동을 일으키는 자는 내가 마땅히 모든 착한 신들과
용왕, 금강밀적(손에 금강저를 들고 법을 옹호하는 천신)에게 분부하여 그 사람을
보호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않도록 하되 마치 눈동자를 보살피듯 하도록 하겠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기능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지송되는 다라니을 살펴보면서 위신력을 알아보면. 이 다라니에는 갖가지 이름이 있으니 그 한 이름은 '넓고 커 원만함(廣大圓滿)'이며, 한 이름은 '걸림없는 크나큰 자비(無碍大悲)'이며, 한 이름은 '고통을
구제해 주는 다라니(救苦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목숨을 늘려 주는 다라니
(延壽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나쁜 삶의 길을 없애는 다라니(滅惡趣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원을 채워 주는 다라니(滿願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뜻을 따라 자재한 다라니(隨心陀羅尼)'이며, 한 이름은 '높은 수행의 지위를 빨리 뛰어
넘는 다라니(速越上地陀羅尼)'이니 그 이름의 뜻처럼 그렇게 받아 지니라. 대비심 다라니는 능히 삼계의 뭇 삶들을 크게 이익되게 하니 온갖 걱정거리와
고통이 몸에 감긴 자도 이 다라니로 다스리면 낫지 않은 자가 없다. 이 신묘한 다라니를 잘 받아 지니면 말라 죽은 나무에서도 오히려 새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기거든, 하물며 뜻이 있고 앎이 있는 뭇 삶들이겠는가. 몸에 병환이 있을 때 다라니로 다스려서 낫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대비심다라니경>
당시 33인의 한 사람 이었던 백용성 스님은 은사 스님이신 수월스님의 말씀데로
천수대비주를 외워 수행의 기틀을 바로잡은 고승이시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까 "
그러나 당대의 대 고승인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 대비주를 외울 것을 권하였다.
"지금은 숙업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비주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 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대비주를 10만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웠다.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 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 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 지 엿새가 되었을 때,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 듯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無)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廓撤大悟)하였으며,
대각교운동을 전개하고 역경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던 것이다. 스님의 깨달음과 모든 활동에 10만 독(讀)의 대비주가 힘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그 자리에는 자비, 지혜,행복 또는 가장 청정한 범음(梵音)이 있습니다.영원한 우주의 멜로디가 있단 말입니다.
우위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청화 큰스님)
(無量光明)의 세계로 인도하는 진리가 정토문과 염불법에 담겨있습니다.
염불은 대승불교를 장엄하고 정토의 꽃을 피우는 씨앗입니다.
그것은 근기의 상중하를 막론하고 일체 중생을 포용하여 안심을 얻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수행 입니다.(정목 스님)
명호와 형상간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고.“진언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 이며
“진언을 근간으로 하는 밀교 수행은 몸, 입,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장을 녹임으로써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수행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비롯한 각종 경전과 의식에서 진언이 빠지지
않는 것에서도 이는 명백히 드러납니다.” 라고 하시고 또한
종석 스님은 “진언수행이 선방 등에서 마장을 없애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많이 수행되고 있지만 그 수행을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정확한 수인(부처님의 손 자세)과 ‘내가 부처다’라는 뜻을 새기면서 해야만 하며.
이렇게 세 가지가 한꺼번에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칫 깨달음이라는 목적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사찰 신도들에게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는 진언을
가르치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고 있는 스님은 “진언을 일심으로 수행하면 개인과
주변의 평화는 물론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밀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종석 스님은 “진언은 중생의 말이자 부처님의 말”
이라며 “이를 수지독송하는 공덕은 무량하다”고 강조했다.
종석 스님에 따르면 진언 수행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던 수행법으로 대승불교를
거쳐 다라니학, 다라니장이 삼학(三學)과 삼장(三藏)에 포함될 정도로
정통적인 수행법이라고 하신다.
가운데서 천수경을 읽고 생수를 얻어 주위 호위병들까지 살리는 기적을 얻었고,
이조때 낭파 스님은 거금도에 들어가서 천수 10만 독을 하고 물위로 걸어왔던 것이고,서울 사간동 법륜사 계윤화상은 천수경 10만 독으로 뇌종증을 치료하였고,광덕스님은 이 경의 은덕으로 폐결핵을 치료하고 그 보답을 위해 천수경을 수만권 을 엮어 무상보시 하였다함.
(천수경 강의 - 저자 한정섭)
라고 참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생에 지은 업은 쉽사리 지을 수가 없다.
의식 속의 업 절로 사라진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통하여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이 “전생의 업은 제거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다라니의
힘을 빌어야 한다.그래서 다라니는 신주(神呪)로 불린다.고 하셨다.
‘원본 『천수경』’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서 악업을
깨뜨리는 "파악업(破惡業)다라니"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모든 다라니는 악업을 깨뜨리는 다라니이다.(김호성 동국대 교수)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대비심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니
대비주는 관세음보살의 위신력과 똑같은 위신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비주를 염송하면 모든 액란에서 벗어나며, 관세음의 대비심을
얻어 자비와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의 진언은 근본적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술적 주문과는 격이 다르다. 그래서 불교의 진언을
명주(明呪)라고 하는 것이다. 범어로 비드야라고 하는데 무명을 아비드야라고
하는데 반하여 사용된 말이다.
들에게 늘 능엄주를 하시라고 하신 이유는 공부를 하며는 할수록 과거에 지은
업장이 빨리 오는데 본인이 다스릴 수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는 불보살님의 가피가 들어있는 다라니(진언)을 통하여 업장을 녹여야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나무아미"염불과 더불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수지 독송하는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간화선을 하는 수행자및 모든 이들의 숙업의 업장을
녹여 주어 구경 성불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저는 이양 나름데로 큰 뜻을 가지고서 운영하는 마당에 상호 중에서 가장 강하고
저에게 맞는것 같아서"금강원"이란 상호로 하자고 매형께 의견을 개진하니
매형도 흔쾌히 승락을 하시어서 상호를 "금강원"이라고 지었다.
제가 약간의 손재주가 있어서 "금강원"의 유리 진열장을 빼고는 책꽃이 부터
카운터까지 시작하여 모든 집기를 손수 원목을 사다가 밤을 세워가며
만들었는데 직접 운영하는 공간이다 보니 밤을 세워서 작업을 하여도
피곤한줄 모르고 만들어 나갔다.
생산자와 직거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나름데로 "금강원"의 분위기를 웬만한 차집 이상으로 꾸미고서 목포
지역의 각 사찰과 인근의 도서 지역의 사찰까지 안내장을 보내고 홍보를 하는등
개원식을 목포 지역에서는 처음 생기는 공간이라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함께
모두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를 하여 주셨다.
특히 전라도 지역은 조계종 본사가 많이 있어서 그에 속한 말사가 목포의 경우는
백양사와 해남 대흥사의 말사가 몇 군대 있는데 조계종 스님들이 연합하여서
방문을 하셨으며 조계종 감창국장을 역임하신 혜랑스님(당시,정광정혜원 주지스님),
얼마전 은혜사 주지스님을 역임하신 법의스님(당시 반야사 주지스님),조계종
원로 스님을 역임하신 법철스님(당시 달성사 주지스님)분 등의 스님들이 함께
와 주셔서 고맙기 그지 없었다.
쌍계사의 조태연가의 차를 위주로 직접 끊여서 차를 나누면서 불교의 교리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도 활용을 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잔을 마시며 오시는 분들마다 제공을 하였더니 더러는 생전 처음
마셔보는 그러한 茶 맛에 매료가 되어서 거의 매일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차 생활을 하다보니 약간씩 차의 맛에 취하고 차 맛을 약간씩 읶혀 갈 수
있었는데 차를 구입하고서 집에서 차를 내어본 친구들은 같은 차 인데도
제가 우려낸 차맛은 확실히 다르다고 찾아오곤 하였다.
불교의 교리적인 부분을 함께 밤을 새우며 여러 방향으로 토론도 많이 하였으며
특히 젊은 불자들의 쉼터로 자리 매김을 하였다.
간지로 넣기 위하여 각 신문사에 요청하여 불교의 주요 4대 명절의 의미와
불교의 대중적 사상을 알리고자 간지로 보급도 하였다.
신문에 넣는 간지에는 뜻을 함께하시는 분들의 보시를 받아서 하였으며
밑에는 보시를 하여 주신 분의 사업의 광고도 함께 넣어 드렸다.
사시기도및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시간이 허락하는 되로 하여갔다.
그리고 설사 물건을 구입하러 오시는 손님이 계셔도 꼭 사시 기도는 드렸고,
불교 서적과 용품을 판매하고 관리하는 것을 몇 군데서 경험한 것을 발판으로
도서 지역까지 홍보를 하고 멀리는 제주도에서 까지 물품을 구입하였다.
그렇게 "금강원"을 운영하면서 불교 활동을 위하여 목포의 보현정사에서
청년회 회장을 역임했다.
법당에 오는 청년 회원이 줄잡아 50~70명은 고정적으로 참석을 하여서
50평의 대웅전 법당이 꽉 찰 정도였다.
그때 전국적으로 청년회가 아주 잘 되는 곳으로 꼽는 조계사의 청년회와
비교를 하니 거의 같은 숫자의 청년 회원으로 청년 불자들이 참석하였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잘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며,지방의 청년회 로써는
어쩌면 획기적이였다.
하여가니 불교 수행에 관심이 많은 청년 불자들이 많이 참석 하였던것 같았다.
관련 서류를 갖추어서 접수를 하였는데 보현정사 정각 큰스님
(현 법륜종 종정스님)의 추천과 함께 태고종 덕암 종정 큰스님의 수계첩도
동봉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덕암 큰스님을 모시고 보현정사에서 수계식을 봉행한
적이 있었다.
무슨 포교사증이 필요하리요 마는 그래도 증명하고픈 현세의 흐름이다 보니
필요한 부분에서는 갖추워야하는 현실적인 면에서 접수를 하였다.
아무튼 조계종 포교사 서류 접수에서 합격을 하고서 포교사 교육과 시험을
통하여 증을 받았는데 포교사 증을 받으므로 묘한 기쁨과 함께 사면감도
느낄 수 있었다.
목포 지역의 대학생들의 불교 연합회(당시 목포에는 4개의 대학이 있어서 각 각의
대학교에 불교 활동을 위한 써클 룸이 갖추워져 있었고 부처님이 모서져있지 않는
학교에는 부처님도 모셔줌)의 연합 지도 법사로 요청이 와서 대불련 지도법사 등의
활동을 하였고 모 라듸오 프로에 부처님 오신날을 기리며 그날의 의미에 대하여
방송에 직접 출연 등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포교사가 스님들과 함께 구성되였는데 일반 제가 포교사 들만의
모임을 포교사단 내에서 다시 구성이 되였고 초대 회장님에 전국 신도회 회장과
대불청 중앙회의 회장님을 역임하신 선진규 포교사님이 선출 되였으며
전국의 20대 포교사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 제가 포교사단(호법포교사단)의 이사
요청이 들어와서 29살의 나이에 "호법포교사단"의 이사로써 승락을 하고서 매달
이사회의를 위하여 참석하는 등 활발히 활동도 하였다.
포교당을 점 더 크게 시내 중심가에서 함께 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여 와서 매형과
상의를 하였더니 매형이 흔쾌히 승락을 하시어서 목포의 2호 광장의 큰 사거리에
100평 규모로 "금강포교원"이란 상호로 다시 이전 개원식을 가졌다.
"금강포교원"의 구조는 앞쪽은 "금강원"에서 운영하던 불교 전문서적과 용품의
만들었고 안 쪽의 80평 정도는 부처님을 모시고 포교당의 법당과 숙식할수 있는
방과 부엌도 갖추었다.
선언 하시면서 염려하여 말씀하신 현상이 나타났다.
함께 하고자 하시는 분들의 구성원이 4명 이였는데 저를 포함하여 3명은
포교사이고 나머지 한분은 불교 공부를 개인적으로 하시던 분으로 4 명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 지역의 선배분 이셨는데 가장 나이가 많으신 선배님이 "금강포교원"
개원식과 더불어 삭발을 하고서 스님으로 나서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한 현실에서 포교당을 하는 이유는 불교의 정법을 알리고 불법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그 선배분은 약간 우리의 토속 신앙적 사고와
흔히 말하는 신기운이 있으신 분으로써 도저히 용납이 가지 않는 생각으로
불교를 전할려고 하였고,그러한 흐름으로 포교당이 운영이 되면 안하느니
못하는 현실에 직면하였다.
방식으로 밀고 갈려고하는 마당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그 선배분과 크게
언쟁을 벌리게 되였고 그날 저녁 4명이서 모여서 앞으로 진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니 지금은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상태에서는 함께 할수
없다는 생각에 의견을 같이 하고서,제가 일만원 권에 혈서로 "佛心"이라고 쓰게
되고 그 만원권을 그당시에 목포 기계고등학교에 근무하시면서 포교사로 함께
동참하신 포교사 선생님이 평생 간직하시로 하신다면서 간직하면서 나중에
다시 인연이 되어서 뜻을 함께 할때 같이 하여보자고 결의를 하고서
"금강포교원"은 2달만에 문을 닫게 되였다.
"금강포교원"이 생기니 목포지역의 기독교 계에서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 보는등
나름대로 불교도 저러한 모습으로 포교를 한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각인 시키는 효과는 충분하였으나 너무나 빨리 문을 닫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가웠다.
상황에서 집의 방에 가득히 쌓아 놓고서 생각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혔고 이렇게
끝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불보살님의 가피의 힘을 오르지 생각하면서 찾은 곳은
강화군 외포리의 한국의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한 보문사였다.
기도처에서 기도를 드리면 꼭 한가지는 소원은 이루워진다고 구전되어서
내려오는 공간 중에서도 강화도 보문사의 화강암으로 이루워진 석굴
"나한전"과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즉 대구
"갓바위 미륵부처님(관봉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431 호)",그리고 서울의
우이동 도선사의 "석불전"을 꼽는다.
그래서 그때의 심정으로는 오직 신심으로 일구워진 공간인데 그러한
지경에서 불보살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3일간 보문사 석굴전의 나한님 들에게 우치한 중생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다시 "금강원"을 열게 할수있는 가피의 지혜를 주십사하고
3,000을 하면서 참회에 참회를 하고서 목포에 내려가서 집에 도착하니
예전에 가게의 주인이신 큰 형님의 친구 어머님이 가게를 다시 하고
싶으면 다시 하라고 전화 연락이 왔었다고 어머님이 말씀을 하셨다.
처음의 장소인 "금강원"을 하였던 장소에 다음에 들어온 사람이 광고업을
하였는데 사업이 아주 잘 되어서 몇달 만에 큰 가게를 얻어서 나가게
되여서 가게가 비워 있었다.
가게의 주인 내외분은 가게를 얻을 돈이 없다고 하니 주변의 포목상을
하시는 불교 신자분을 직접 소개를 하여 주시였고 포목상을 하시는 분도
저를 신임하셨는지 흔쾌이 가게 전세금을 빌려주셨고 그리하여 다시
"금강원"을 개원하게 되였다.
주신 것은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가게가 빈 몇칠 사이 즉 제가 강화도에서
오로지 부처님께 의지하여 기도를 드리던 날짜 경에 새벽 예불 시간만
되며는 몇칠간 계속 두분이서 빈 가계의 공간에서 목탁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셨다.
상황에서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시고서 다시 연락을 주신 것이다.
없는 상황이 벌어져서 적극적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같은 자리에서 혼자서"금강원"을 하게 되였으며 얼마
후에는"금강원"의 공간을 반으로 나누워서 반은 가게로 활용하고 반은
분리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포교당으로 운영을 하였다.
학인 스님분 들도 인연이 되어서 자주 오게 되다보니 "금강원'자체적인
불교 수행"모임인 "관음회"를 만들게 되었다.
관음회의 구성원 중에는 운전하시는 분과 아마추워 권투 아시안 게임
금매달 리스트 출신의 친구와 동생등도 함께하는 등 불교를 알고 싶어도
동 떨어진 사찰의 공간 보다는 "금강원"의 공간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친화가 되는 듯 하였다.
경우는 필요하면 숙식도 제공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초청법회 등을 통하여 신심을 견고히 하였다.
그 당시에 초청 법사님으로 오신 분 중에는 현재 명성여고 교법사님으로
계시는 김형중 교법사님도 하루는 오시어서 땀을 흘리시면서 부처님의
사상을 열강을 하시기도 하셨고,포교사님 중에서 한의사로 계시는 분이
여러번 목포에 내려 오시어서 인연 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한방 치료를 하여 드리기도 하였다.
도로에서도 법문을 들어야 했고 그리고 공간이 시내 뻐스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에 있는 상가에 있다보니 지나가다가 들리기도 하였으며
국전 작가 출신으로 일중 선생님의 제자이시고 목포의 서예가이신
중당(김숙현)선생님을 모시고 서예도 함께 배웠다.
스님이 전화를 주시어서 "월간"다담지의 광주 전남 지사장을 권하시여
"다담"지의 광주 전남 지사장도 함께하였다.
공간에 설치도 하여서 불교를 간접적으로 알리기도 하였으며,법당에
사용할 연등을 미처 만들지 못한 사찰에는 관음회에서 직접 늦은 시간까지
회원들이 연등을 제작하여 사찰에 납품도 하기도 하였다.
수계 법회는 그당시에 곡성 성륜사에 계시는 청화 스님를 친견하고서
3,000배를 회원들과 법당에서 하고서 15명 가량이 단체로 법명을 받기도
하였다.
관음회를 통하여 같은 회원간에 결혼을 2쌍이 결혼을 하였으며,두 분은
출가의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친구가 자기의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귀국을 하여서 "금강원"에
마음을 달랠겸 자주 왔는데 한번은 자기의 아버님 산소에 가자고 하였고
함께 간 친구 아버님의 산소 위에는 자연 석굴이 약 20명 가량 들어갈수
있는 공간으로 있었는데 그 석굴을 보는 순간 이석굴을 석굴 법당으로
개발하며는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공간으로 직선 거리상으로는 약 50M 가량되고 석굴의 벽의 바위와
천장에 있는 바위가 분리된 상태로 되여 있었으며 들어갈수록 석굴
천장이 넒어지면서 높아지는 형태를 갖추웠다.
그리고 방향도 바다를 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덕여왕 3)에 어부들이 불상과 나한 ·천진석상 22구(軀)를 바다에서
건져내어 천연석굴 안에 봉안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설치하고 천연동굴 내에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하였는데, 탱주 사이에 21개의 감실(龕室)이 있어 거기에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석실은 지방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1928년에는 절 뒤편 절벽에 높이 32척 너비 12척의 관음상을 새겼다.
눈썹바위 바로 아래에는 지방유형문화재 29호인 높이 9.7m의 마애석불좌상
(관음상)이 새겨져 있었고,보문사 본전에서 눈썹바위까지 420여개의 가파른
계단을 으로 이루워져 있습니다.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있다.
양양낙산사와 금산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이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 곳에
와서 절을 창건하였는데,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고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절의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는데, 사람
모양의 돌덩이 23개가 한꺼번에 그물에 걸렸다. 고기를 잡지 못해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를 바다에 버린다. 다시 그물을 쳤는데 또 다시
바로 그 돌덩이들이 걸리게 되자, 어부는 또 다시 그 돌덩이를 바다에
버렸고, 돌이 두번이나 그물에 걸리게 되자 그만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낮에 그물에 걸렸던
돌덩이는 천축국에서 보내온 귀중한 불상인데, 바다에 두번이나
버렸다고 질책하고, 내일 다시 그곳에서 불상을 건져서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 날, 23개의 불상을 건져올린 어부는 꿈 속에서 노승이 당부한
대로 낙가산으로 불상을 옮겼는데, 현재의 보문사석굴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불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석굴이 불상을 안치할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굴 안에 단을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보문사의 어린 사미승이 부처님께 등공양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갔다.
나한전에는 보문사에 전해내려오는 귀중한 보물인 옥등잔이 있었는데,
사미승은 옥등잔에 기름을 부으러 가는 것이다.
사미승은 옥등잔을 내리고,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실수로 등잔을
떨어뜨리게 된다.
떨어진 옥등잔은 두조각이 나게 되고, 사미승은 혼비백산하여
법당을 빠져나와 구석에 주저앉아 훌쩍이게 된다.
마침 지나던 노스님이 사미승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일인지 물어보자,
사미승은 옥등잔을 깨게 된 일을 말하게 된다.
사미승과 노스님은 깨진 옥등잔이 있는 나한전으로 들어갔는데,
두동강난 옥등잔은 멀쩡히 불빛만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노스님은 옥등잔을 자세히 살펴 보았지만,
깨진 흔적조차 없이 멀쩡하였다. 이에 노스님은 "이것은 분명
나한의 신통력 때문이로다" 하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보문사 홈에서 펌)
석굴 도량으로 만들어 볼려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보여준 석굴을 보는 순간 오래도록 찾던 그러한 공간으로 느껴지고
이 공간을 온 열정을 다하여 석굴 도량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친구에게 석굴이 마음에 드니 어떻게 쓸수가 없냐구하니 친구는 그냥
석굴의 부분을 시주를 한다고 하였다.
사실 그 석굴이 있는 입암산은 순 바위로 산 전체가 형성이 되어서 그
석굴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워진 산이였다.
그런데 그 산의 굴이 있는 쪽 산능선을 중심으로 산 주인이 친구내 소유로
되여있었고 그 친구의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목포 인근의 섬과 땅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이름만 되면 다 아는
분들이셨다.
한다는 말은 그때의 상황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석굴을 저의 원력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위용을 자량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고자 원력을 세웠다.
그리하여 산 정상에는 해수관음상을 입상으로 크게 모시고,안으로 석굴을
파고 들어가서 약 50m 정도에 부처님을 화강암 석굴에 직접 조성하는 등
여러가지로 석굴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당산나무에 연못이 있고 사시사철 온갖 꽃이 피는 단일 규모로는 아마 목포
지역에서 아마 가장 좋은 2층 별장이 비워있었다.
그래서 주인을 알아보니 원래 주인은 우리나라의 모 제약회사의 회장님이
주인이고 관리인이 밑에 건물에서 화원을 하면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워있는 사연을 여쭈워보니 이집은 일제 시대에 복전(福田)이라는
일본인이 천년 만년 살거라 생각하여 온갖 정성을 들여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집이였고,예전에는 그곳을 지나가는 배들이 사철 피어있는 꽃과 더불어 특히
하얀 찔레꽃이 그 집의 주변에 만발하게 피였다고 나중에 동네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하셨다.
사람인가를 가름하는,일제 시대부터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茶나무가 정원에
크게 한 그루있고 돌담 옆에는 茶 나무가 쭉 차밭으로 늘어져 있었다.
차나무는 생리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식을 하며는 죽기 때문에 아마 그곳에서
자란 차나무는 일제 시대부터 자란 차나무라 여겨졌다.
집터가 강해서 누루지 못하여 늘 아프다든지 아니면 죽고 하는등 흔히 말하는
집터를 이기지 못하여 집은 늘 비워있었고 그냥 관리인이 관리만 하고있었다.
그집을 보니 완전히 절터였고 간판만 붙이면 절이였다.
그러한 흔히 말해서 집터가 강한 공간은 부처님이 좌정하시면 모든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되여서 어쩌면 저를 위하여 비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관리인을 통하여 그 비워져있는 집을 얻어서 수리에 들어갔다.
일본 사람들은 집을 지을때 방향등 풍수를 본다고 하는데 정말 그 집을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뚝으로 가는 부분도 커다란 둘을 다듬어서 이용하여 바닥에 놓는등 하나
하나를 볼때 정말 세밀하게 지어져있었다.
그렇게 집의 내부 수리를 직접 시내의 금강원은 직원을 한사람 두고서 날마다
자전거을 구입하여 타고서 와서 고쳐나갔다.
거실의 마루는 원래 다다미가 깔려진듯 하였는데 마루만 있는 것을 다시 두꺼운
스티로플을 이용하여 깔고 그위에 합판,다시위에 장판을 까는 식으로 만들고
도배와 페인트등 전체적으로 집은 아주 좋은 집인데 관리를 하지 않아서 손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였고,저녁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서 시내의
금강원에 들려서 늦은 시간까지 정리를 하고서 있다가 금강원을 찾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茶도 하였고 갓바위 입암산의 금강원이 거의 다 수리가 되여갈
무렵에는 그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바닷가에 있어서 이곳을 입암산 갓바위라고 한다.
2시경에 큰형님 에게서 시내 "금강원"에 불이 났다고 전화을 주셨다.
할머니 내외와 옆집에 또 다른 가게가 있었는데 집이 난 상태에서 상상을 하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야말로 아무 정신도 없이 일어나서 나서니 그곳은 외딴곳 이라서 택시도 없고
해서 큰길이 있는 곳까지 뛰어가서 택시를 겨우 잡고서 가보니 금강원 건물은
그대로 있고 사람들이 연기가 나오는 금강원의 건물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깜깜한 금강원의 내부를 보니 이미 소방서에서 화재는 진압한 상태였고 불이난
이유를 찾을수가 없었다.
서울서 자취를 하면서 구입하였던 커피 포트가 완전히 녹아있고 옆에 전축은
완전히 타버린 상태였으며 전축을 받혀주는 커다란 원목으로된 둥그런 원목
나무마져도 반 정도가 타 있었고 전축위에 선반에 서울 거래처를 다니면서
가지고 다니던 007 가방 마져도 일어나서 손을 뻗쳐서 닿을 높이에 놓았는데
그 가방마져 뜨거운 열에 가열이 되어서 완전히 쭈굴 쭈굴한 상태였다.
포트의 전원을 넣으니 몇년간 사용한 모 회사의 커페포트가 아직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퇴근을 하고서 아무도 없는 금강원의 공간에 커피 포트가 다시 작동이
되었고,그 커피 포트가 고장이 났던지 어느정도 열에서 바이메탈이 저절로
떨어져야 하는데 고장으로 인하여 계속 물이 끊고 다시 물이 없는 상태에서도
과열이 되고 그래서 빨갛게 열이 발생하여 옆에 전축을 포함하여 막 건물
전체적으로 번질려는 순간에 그나마 발견되어서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회사가 자체적인 보험에 가입하여 자체적인 결함으로 화재가 발생시는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때는 아무런 경황이 없이 화재의 원인이 된 커피
포트는 버리고 그저 빨리 정리를 하겠다는 마음 뿐이어서 한푼의 보상도 없이
그냥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으며,다음날 이야기를 들어보니.금강원을 지나던
불교 학생회 후배가,선배가 운영하는 금강원의 닫혀진 샷다의 구멍에서 시커면
연기가 무럭 무럭 나와서 불이다 싶어서 소방서에 신고를 하였고,소방서에서는
신고를 받고서 바로와서 닫혀진 샷다를 부수고서 보니 커피 포트에서 불이
벌거케 타고 있었고 다시 커다란 유리 문을 망치로 부수고서 불이 막 번지려는
순간에 소방 소화기로 불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연기로 과포화된 그을린 상태에서 압력이 강한 소방 수화기를 뿌리니 그을린
상태에 물기가 졌어서 그야말로 시커먼 그을림이 모든 물품에 붙어서 하나도
쓸모가 없는 상태가 되였다.
참으로 어떻게 꾸러온 금강원인데 하루 아침에 불이 나서 이러한 상황을 맞으니
넋이 나갈 지경이였다.
되였는데 실질적으로는 더 금전적 피해가 컸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렇게 불이 막 커질러고 할때 발견되어서 화재가 진압이 되여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인명 피해도 발생할뻔 했었다.
요즘도 어느 곳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가끔 그때의 기억이 나는데 물건이 있는데
쓸수 없는 상황은 안 격어본 사람은 모를 정도의 착참함이였다.
개원에 따른 기념품(작은 가방)등에 시내"금강원'전화와 입암산 금강원"전화
번호를 함께 적어서 만들었고 개원 법회 안내장 등에도 함께 넣었는데 도저히
다시 할려구 하니 피해가 커서 다시 할수없는 상황에 이르렸다.
스님들과 포교사단 재가자들의 모임인 "호법포교사단'의 2기 회장단에서
개원 법회때 회장님과 몇분이서 내려오시고 주존불로 관세음보살(좌불 3자)
님으로 모시고서 증명 스님을 모시고서 점안식을 통하여 신중전과 칠성탱화도
함께 모셨다.
고등학교 동창들도 방석을 30개 가량 동창들의 마음을 담아서 시주를 하는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법하게 부처님 점안식등 개원식을 마치고서 시내에
위치한 금강원에 들려서 아직 정리가 덜된 부분을 정리하였다.
불에 그을은 물품을 정리하는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왠만하면 시내의 금강원을 다시 할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자금이 허락치 않아서
정말 마음으로 울음을 참으며 각종 40여개의 거래처에 사정의 이야기를 편지로
보내면서 사용 가능한 물품은 거래처로 보내고 나머지 외상 값은 돈으로
보내드렸다.
알아보기에 주인에게 소개를 하여드리고 마음으로 울면서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면
하여보겠다고 생각을 하였다.
시내의 "금강원"을 정리를 한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정말 아쉬워하였고 한순간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여 그렇게"금강원"은 문을 닫았다.
1부로 10편에서 끝내려다 글을 쓰다보니 내용이 많아서 11편까지
쓰고서 1부를 마치고 2부는 그동안 찾아 뵈온 큰스님의 친견기를
위주로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어서 글을 올려 볼까합니다.
늘 불보살님의 불은이 인연되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하소서...
멍할 뿐이였다.
특히 처음에 금강원을 개원할때 자금을 투자하신 매형에게 그렇게
미안할수가 없었다.
매형이 자금을 댈때는 가지고 계시는 시골의 전답을 정리하여 자금을
마련하셨는데 그 땅들이 몇년 후에는 몇배가 아닌 몇 십배로 땅값이
올라서 더욱 안타까웠다.
만약에 그 땅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나두었다면 십억대의 땅으로
환산되였는데 이를테면 금강원이 불이나서 십억대의 재산을 잃은
셈이 되였다.
그대로 전달해 드릴려구 했는데,지금까지 살면서 그때 일을 생각하면
늘 매형에게 빛을 진 마음이 든다.
그렇게 시내의 금강원을 정리를 하고서 수입원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르지 매진하는 부분은 입암산에 있는 기도처를 개발하는 것이였다.
건물과 약 30m 가량에 위치한 석굴에 시간만 나며는 올라가서 조금씩
조금씩 석굴 작업을 하였고 갓바위 입암산의 건물에 부처님을 모시고서
처음에는 상호를 "금강원"으로 쓰다가 나중에는 禪의 세계를 함께 알면서
알리는게 좋을듯 싶었고 그래서 禪 불교를 펼쳐보겠다는 마음으로 상호를
"금강선원"으로 바꾸워서 사용하였고 나무로 남농 기념관 옆에 "금강선원"을
들어오는 길에 나무 원목으로 크게 글씨를 새겨서 세워 놓았다.
앞쪽까지 부처님 오신날 연등을 설치하여 장엄도 하면서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알리면서 이곳에 사찰이 꼭 있어야할 자리인데 하면서 주변의
경관을 구경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불교연합의 지도 법사이다보니 대학생들이 입암산
"금강선원"까지 찾아와서 법회도 보기도 하였고,그곳에서도 茶 한잔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茶를 나누면서 불교적인 부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구를 돌로 앞부분을 막아놓은 석굴이라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일본인이 음식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쌓여진 흙들을 파내고 정말 혼자서 밥을 하여 먹으면서 어느때는
그냥 식사 때를 잊어 몰두를 하여서 넘기기도 하는등 조금씩 조금씩
석굴 작업을 하여갔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 후배들 두명이 그림 공부를 위하여
그 공간을 이용할려고 들어왔고 제가 그야말로 노예처럼 혼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감동을 받았는지 스스로 불교 신자도 아닌데 틈틈히
도아 주었다.
트럭으로 아마 100 여대 이상의 흙을 파내니 굴의 윤곽이 조금씩 들어났다.
울기도 하고,배가 너무나 고파서"금강선원"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가을에
수수를 잡고서 수수의 낱알을 먹을려니 수수밭 주인에게 나중에 빚을
갚아야하지 않으까 생각하여 참기도 하였다.
운동은 일어나야 하고 그러한 터전의 공간으로 이곳이 적합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한번씩 들린 친구들 중에 나의 생활을 이해를
못하는 친구는 자기는 한달에 몇 백만원을 준다고 하여도 "금강선원"의
공간에서는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그야말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고,겨울에 석굴 작업을 하면서 양쪽 귀에 동상이
걸리기도 하였고,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하여갔다.
"금강선원"에 오시지 말라고 하셔도 일주일에 꼭 한두번은 교통도 안 좋으신
데를 오시어서 먹는것 등을 챙겨 주셨고 아들이 칠 형제다 보니 그야말로
차라리 스님이면 아들이 많으니 아들 중에 스님도 하나있구나 생각하시는데
어머님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드신 상황에서도 다 큰 아들이 부처님 법이 좋아서
가는데 그져 깊으신 신앙심으로 이해를 하여 주시였고 저의 바램을 아시는 몇
몇 지인들이 어머님께 휼륭한 일을 하는 아드님이라고 그나마 칭찬을 하여
주시어서 제가 어머님께 조금은 안심이 되였다.
올라가는 돌계단을 만들고 주변에 나무도 심고하는등 오르지 석굴
법당을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흙을 파고 또 파내어갔고,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들어나서 저의 손으로 할수있는 부분은 어느정도
된듯하여 친구의 아버님과 함께 목재소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커다란
통 원목 으로된 목재등을 트럭으로 시주를 받아서 밑에서 부터 어깨에
혼자서 3m 터가 넘는 통나무를 이고서 그림을 하는 후배들과 함께 나무를
올려서 입구를 통나무로 막고 굴의 내부는 나무로 마루를 만들고서 이제는
일단계로 마치고서 기도를 정성껏 하여야 겠다고 생각하여 석굴에 나무로
불단을 만들고서 인연이 된 석불 부처님을 모시고서 날마다 기도에
들어갔다.
나름데로 염불의 소리에 아무리 악한 사람도 저의 기도 소리에 환희심을
낼수 있을 정도는 되여야겠다고 생각을 하고서 염불을 하였는데 석굴이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난 상태에서는 더욱 더 석굴에서 염불의 소리를
가다듬는 시간을 가졌다.
광산업을 하시는 분이 오시어서 석굴 작업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하셨는지
산 주인의 승락서만 받아오면 무료로 석굴을 50m~100m 정도 파준다고
하였다.
그당시에 광산의 기술이 발달하여 바위는 내모지게 발파 작업이 없이
약물처리로 작업이 가능하여 돌은 광산업을 하시는 분이 가지시고 굴은
무료로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머님에게 허락을 받고자 마음을 먹고서 비가 오는 어느날 석굴전에
삼배를 드리고 기도를 마치는데 저 밑에서 누가 올라오는 것이다.
가까이 뵈니 그분은 다름 아닌 친구의 어머님이셨다.
있었는데 이게 무슨일이냐고 하시면서 화를 내시는 것이셨다.
2년 반 동안에 틈틈이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였고 서류로는 받지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들도 친구가 석굴을 시주한 걸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어려운
작업을 만 2년 반 동안에 오르지 불심 하나로 하였는데 이제와서 안된다니,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주변에 인연되시는 분들이 딱한 사정을 듣고서 그럼 우리가 살테니 석굴을
파시라고 여쭈워 보라고 하시여서 의중을 여쭈우니 파는것 마져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친구의 어머님은 친구의 아버님 묘소가 바로 밑에 있어서 제가
석굴 작업을 하는것을 몇 번 보셨는데 그때는 아무런 말씀이 없다가 석굴이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나니 욕심이 생기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과 찹찹한 마음을 달래러고 겨울에 연탄을 사용하는 주막에 들러서
이 육신도 다 부질없는 것이데 또 다시 나의 어리석음으로 그저 앞뒤를
안따지고 석굴 불사에 뛰어들어서 고생을 고생데로 하고 참으로 이러한
지경에 놓인게 참담하였다.
연탄불의 타고있는 불판위에 그냥 올려서 지지고있는데 그 광경을 본 후배가
무엇하시냐고 하면서 손을 불에서 빼어내었다.
그러한 후유증으로 몇달간 손에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엄청 고생을 하였고
그때의 상처의 허물은 몇년이 지난 상태에서도 그때 얼마나 깊게 화상을
입었던지 허물이 벗겨지고 벗겨졌다.
부처님께 전신 공양이라도 바치고 싶은 불심이였는데 그러한 지경에서
참으로 난감하였다.
명이서 저쪽에서 처벅 처벅 군대 행열하는 발걸음으로 저를 행하여
걸어오다가 그쪽을 보며는 그 소리가 멀어지기도 하였다.
알았는지 전주등 전혀 목포를 모르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받들어 모시는
령들의 안내로 왔다고 하면서 저녁이 되면 와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유독 많았고,그런한 가운데 무속인들의 세계도 조금은 이해를
할수 있었다.
기도를 하여야 생활과 더불어 일들이 풀리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들이
모시는 령들이 바로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는등 참으로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들의 의지에 관계없이 남의 인생을 대신하여 사는 꼴이라서
그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벗어날려고 하여도 잘 되지 않는다고 안타가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읽는 경을 보니 정통 불교에서 주로 독송하는 천수경과 반야심경도 함께하는
남자 법사들도 있었다.
상태에서 저녁에 석굴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며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고
하루는 그날도 미술 공부하는 후배들과 석굴에서 좌선을 하고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동양화를 전공으로 그리는 후배가 임시 불단으로
만들어 놓은 곳으로 올라가더니 불단에 오줌을 누는 것이다.
이녀석이 달라드는 것이다.
해서 그 석굴에서 부터 시작하여 졸지에 후배 녀석하고 싸움이 벌어져서
치고 받고하면서 산 밑으로 계속 싸우면서 굴러서 나중에는 금강원이 있는
공간까지 내려갔고 다른 서양화를 전공하는 후배는 싸움을 말린다고
하면서 같이 그림 공부를 한다고 동양화를 전공하는 후배의 편에서 싸움이
벌어져서 2:1로 싸우는 결과가 되였고 제가 분이 안풀려서 그림을 그리는
공간으로 처들어 갔더니 문을 잠그고서 죽어도 안열어 주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고 갓바위 입암산에 들어 올때는 만약에 다른
이교도들의 장정들이 몇 명이서 달라든다고 하여도 몇명 정도는 상대할수
있는 마음의 자세에서 생활하여 왔는데 기도를 할수록 그러한 자신감은
더욱 생겼고 그야말로 하심하는 자세로 다혈적인 성질도 다 죽이고 살아가는
마당에 석굴 작업을 도와준 후배가 그렇게 나오니 그저 슬플 뿐이였다.
오늘은 그냥 넘기고 내일 낮에 그 후배랑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면서 달래
주었고.다음날 참참한 심정으로 있는데 어제 싸운 후배가 찾아와서 정말
죄송하다면서 무릎을 끊고서 비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상대를 하지 않으니 빗자루와 바개스에 물을 담아서 석굴에
올라가서 물로 청소를 하였다고 거듭 용서를 빌었고. 그날은 곡차를
한잔하고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객기(?)로 여기고 화해를 한 기억이
나기도 하였다.
제약회사의 회장님이 직접 오시어서 저의 사는 모습을 보고 갔고,다음날
건물의 관리인 으로 부터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 마져도 주인이 비워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건물 주인으로 계시는 회장님께 친히 친필 서신으로 젊은
사람이 종교적인 뜻을 가지고 고생하고 있으니 한번 도와 주십사하고
편지를 띄었는데도 도움이 없었고 오히려 빨리 나가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곳에서 생활 할수있는 방법을 여러각도로 강구를 하여도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포교당의 공간을 알아보았다.
한다고 할때 구두상으로만 확답을 받을께 아니고 서류로 직접 받아서
석굴 작업을 하여야 하였으며,산을 개발 할때는 늘 처처에 함께하시는
불보살님께 향하는 마음으로 조심 조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어보며는 반드시 시주를 한다고 하였는데 본인의 어머님이 완강히
나오시니 참 난감해 하면서 그동안에 정말 수고를 하여서 몇 백만원이라도
받으면 어쩨 겠냐는 심중이였으나 제가 그동안에 고생한 일들이 돈으로
해결될 부분도 아니고해서 단돈 한 푼도 안받고 거기 그대로 있는 석굴에서
하산을 하였다.
향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가행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현생에서도 부처님 법을 통하여 잘 살고 나중에 금생의 인연이 다 되어서도
현상계적으로 존재한다는 극락의 세계로 갈수있고 더 나아가서는 깨달음에
이룰수있는 수행법이 제시 되어야하고 그러한 수행법은 바로"아미타불"을
날마다 환희로써 늘 생각하고 그리면서 모든 이웃을 모두 "아미타불"로 보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수행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는 계념으로는 표현이 안되지만 현상계 적으로 보며는 분명코 극락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살아가는지 모른다,이에 맞추워서 불교의 수행적 포교관도 그저 어렵게
표현되는 간화선도 싶게 접근할수 있도록 연구되여야 하며,지금의
현실에 종교적인 자신감과 더불어 믿음을 심을수 있는 포교의 방법론이
제기 되어야하며 그러한 포교론으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다 잠시
잊혀진 "아미타불"염불법을 대중화 하는것이라 생각되며 늘 환희심으로
가득하도록 염송하겠금 불교적인 수행의 모습을 펼쳐야 하는걸로
생각됩니다.
(나의 노래)
언제든지 함께하는 불보살님이
기쁜마음 환희로써 보살피시며
긍극에는 극락정토 왕생케하네.
극락정토 스승이신 아미타시여.
대자비로 어여쁘게 여기어시어
인연되는 모든이들 함께하도록
반야용선 연화대로 인도하소서.
언제든지 기쁨얻고 환희롭도록
아미타불 협시불인 세지관음님
사바세계 정토토록 서원하시네.
극락정토 왕생하여 깨달음얻고
법장비구 서원으로 다시태어나
우주법계 청정하게 굽어살피사
부처마음 중생마음 하나가되어
공한이치 슬기롭게 깨달게되면
겁의세월 지내온길 세월도잠시
그동안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올리겠습니다.
정리하여 함께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올려 볼까합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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