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youtube.com/watch?v=GWvFNVTZJQE
http://www.youtube.com/watch?v=fNqasWS95CI
* 아래는 동영상을 보면서 대충 정리한 글인데 글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것입니다.
일본 규수 다마나라는 곳에 에다후나야마라는 고분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온 칼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칼에 있는 한자를 일본학자가 잘 못 읽고 해석했다. 비슷한 임금이름이 적힌 다른 칼이 1968년 동경지방(이나리야마 고분)에서도 발견된다. 그 칼에도 마찬가지 같은 임금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도 잘못 읽었을 수도 있겠다 해서 추적을 시작한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일본에서는 이 두 칼에 나오는 임금 이름을 ’류랴꾸‘라는 일본천왕의 이름으로 잘못 해석하고는 "이 두 칼이야말로 일본의 나라지방에 아주 옛날부터 왕실이 있어 가지가지고 그 왕실이 5세기에 벌써 동경지방하고 큐슈지방까지 다스린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이다"이렇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으로 칼에 적힌 글을 보자.
'이나리야마'라는 고분이 교다라는 동에네 있었는데 동경에서 북쪽으로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그 동네에 무덤 떼가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이라고 하는데 이나리야마신사가 있어서 도굴을 면했다. 1968년경에 일본각처에서 고분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자기 동네도 파보니 유물이 수두룩 나와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115자 도금된 한자가 발견이 되었다. 471년에 만든 칼이다. 국보로 지정되고 역사학자들이 연구해서 해석한다. 75cm되는 칼인데 앞뒤에 글자가 빼곡히 있다.
* 이나리 야마 칼 글
<신해년 칠월에 적었다. 乎의 후왕(태수, 관리) 옛날 조상이름이 큰 어르신(오호비꼬, 295)이다. 그 아들이름은 머리가 되시는 마을의 어른이다. 그 이름은 고령가야의 우두머리였다. 가사비리(새로 생긴 동네)의 아들이 고확고(확고는 벼슬이름. 후왕, 태수, 마을을 다스리는 왕)였다. 세세로 장도인(근위병)으로서 섬겨왔다. 크신 개로대왕의 우두머리로서 섬겨왔는데 그 분(섬김을 받는 왕)이 크신 개로대왕(일본 왕 이름 가운데 유랴꾸라는 천왕이 있는데 다른 이름이 와까다께이다. 이 와까다께+루로 봐서 개루왕이다)이시다. 그 대왕이 관청이 사기궁에 있을 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백번 달군 칼에다가 이 근본을 적어 놓노라.>
☆ 일본학자가 잘못 본 2가지
벼슬 앞의 지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식으로 이두로 보면 4군데 나온다. 가야나라 4나라 가야이름.
천왕이름을 와가다께+루로 고쳐서 자기네 왕이름 바꾸었다.
다사기 확고 때(396년)에 수륙양면으로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 왔을 때, 일본으로 건너가 있다가 50여년 지난 후 개로왕 때 교 지방에 후로 지정한다는 말.
일본서기에 보면 “진구(369년)라는 여왕이 백제장수 시켜 가야의 7나라를 차지해서 백제에 하사했다. 더 서쪽으로 가서 현재 강진에 들렀다가 신미다래라는 나라를 쳐부수고 전라도 지방 4고을이 자연히 항복했다. 372년에 백제가 칠지도를 보내왔다.“고 기록돼있다.
고령가야(오가라, 대가야)에 가면 고분이 있다. 다라(보석 옥을 뜻한다. 무덤을 보니 백제 왕관이 나온다. 창녕 영산)
김해가야(남가라, 아리히시가라, 금관가야, 김수로왕 때부터 유명. 369년에 백제 땅) - 대성동 고분은 백제 확고 들의 무덤이다.
* 에다후나 야마 칼 글 (규슈 다마나 지방에서 발굴된 칼)
<하늘아래 천하를 다스리는 확000로(확가다기로=개로대왕)때에 섬기던 벼슬이름이 기리(칼 만든 사람)다. 8월에 큰 가마솥으로부터 만들어 4자 되는 칼을 80번 후리치고 해서 이 세상서 가장 좋은 칼인데 이 칼을 지닌 자는 자손이 은혜를 입을 것이고 칼을 잃지 말 것이다.>
<문헌학적 증거>
458년에 개로왕이 송나라에 보내는 상표문에 보면 <“좌현왕 여곤, 우현왕 여기”로 임명하고 싶다.> 흉노의 좌.우현왕 제도. 여는 백제왕실의 성, 곤은 개로왕의 아우(곤지, 고니끼)이다. 455년에 개로왕이 일본의 왕 노릇하다가 백제로 와서 대왕이 된다. 이때 곤(곤지)는 오사카 근처에 있었다. 461년에 여곤(곤지왕)이 개로왕을 보러 온다. 짐작에는 군사, 경제, 외교문제 의논하러 왔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와 일본관련 얘기는 한 마디도 없다.
일본서기에 <곤(곤지)이 돌아올 때 개로왕이 개로왕의 만삭이 된 왕비를 데려가는데 가는 길에 각가라섬(규슈 앞 섬)에서 사마(시마. 무령왕명)을 낳는다. 낳자마자 백제로 돌려보냈다. 고니기 동생이 일본 서울에 가니 아들이 5명 있었다>
5명의 아이가 있었다? 461년 돌아올 때 아들 5명이 있었다면 돌아오기 전인 458년에는 곤지가 일본에 다무로 책임자로 있었고, 그때 오사카남부는 백제의 다무로였다. 우현왕은 어디냐? 규슈 다마나지방이 우측이다. 규슈 다마나지방의 기리도 ‘여기리’인데 곤지의 곤을 한 글자만 땄듯이, 기리의 기도 한 글자만 따서 여기로 썼다.
왕관을 고서가리(고깔)
백제의 다무로가 있던 땅에는 고서가리(왕관, 금동관)을 하사했다. 이 금동관이 규슈 다마나에서도 무더기로 나온다.
아니라야마 고분에서 나온 칼 글에, 규슈 다마나 에다휴나야마 고분 칼 글에 송나라 문서에 명명백백히 다 적혀 있다.
첫댓글 실로 엄청난 기록에 가슴이 벅차오네요,확실하게 검증이 된것인지 의심도 가는것이 사실이구요.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는 나약하지 않았는데 멸망한 기록을 보면 안탑깝습니다.
쪽바리들이 정신좀차리고 대한민국에 예를 가춰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