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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종가 직계도
외 후손 인동 장달수 편
15세 희삼(希參) 1507년(중종 2 정묘)∼1560)
자는 사로(師魯), 호는 칠봉(七峯),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성주(星州)사람이다.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치정(致精)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 계공(季恭)의 딸이다. 김취성(金就成)·이광(李光)·송희규(宋希奎)의 문인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이조(吏曹)·병조(兵曹)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또 사옹원정(司甕院正)에서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치(白雉)와 기맥(歧麥)의 상서가 있었고, 어사(御使)의 상신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천곡(川谷)의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장자: 우홍(宇弘) 자는 면부(勉夫) 호는 이계(伊溪) 光州牧使
차자: 우굉(宇宏)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부제학. 충청감사
삼자: 우용(宇容) 자는 정부(正夫) 호는 사계(沙溪) 감찰
사자: 우옹(宇顒)
16세 우옹(宇顒) 1540(중종 35)∼1603(선조 36).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시호:문정(文貞)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573년(선조 6)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서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여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1582년홍문관직제학이 되고, 이어서 대사성·대사간을 거쳤으며,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 해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였으며,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쳤다.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573년에는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 이념과 위정자의 정치 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 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 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과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령(學令)·독법(讀法)·치경행재(置經行齋)·택사유(擇師儒)·선생도(選生徒)·공사(貢士)·취사(取士)의 「학제칠조(學制七條)」를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여 1573년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했으며, 이듬해에는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한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사액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 1579년에는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언송응형(宋應泂)에 맞서 이이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또한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등 33인을 천거하였다.
관직 생활 동안 수시로 시무책을 올렸는데, 1594년 6월「시무칠조」, 7월에 「시무사조」, 9월에 「시무팔조」, 이듬해「시무십육조」, 1597년에는 여지(勵志)·택상(擇相)·택장(擇將)·임관(任官)·연병(鍊兵)·적량(積糧)·신상(信賞)·필벌(必罰)의 「중흥요무팔조(中興要務八條)」를 올렸다.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는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사자: 효가(孝可)
17세 효가(孝可) 1578년(선조 11 무인)~1653년(효종 4 계사)
자는 공계(公繼) 호는 졸정(拙亭)
생부는 감찰 사계(沙溪) 우용(宇容)
관직 감찰(監察)
묘지위치 墓山峴巳向合窆校尉公墓下
장자: 욱(頊)
사위: 성초벽(成楚璧)
사위: 노형필(盧亨弼) 대군사부. 도사.
사위: 노사영(盧思永) 문과
18세 욱(頊) 1602년(선조 35 임인)~1655년(효종 6 을미)
자 신백(愼伯) 호는 사월당(沙月堂)
인조(仁祖) 2년(1624) 진사시 합격
인조(仁祖) 17년(1639) 문과급제
관직 평안평사. 정언. 지평(持平)
묘지위치 墓州西松石巳向合窆
장자: 정석(庭碩)
차자: 정혁(庭奕) 자는 미경(美卿) 통덕랑
삼자: 정익(庭翊) 자는 익경(翼卿) 진사
사위: 이영진(李頴鎭) 감역
사위: 조하망(曺夏望)
사위: 이형무(李亨茂)
사위: 이해식(李海湜)
19세 정석(庭碩) 1624년(인조 2 갑자)~1670년(현종 11 경술)
자는 덕경(德卿) 호는 사촌(沙村)
생원시 합격
묘지위치 墓沙月丙向合窆
장자: 세신(世臣)
차자: 세량(世良)
사위: 이지장(李志長)
20세 세신(世臣) 1642년(인조 20 임오)~1682년(숙종 8 임술)
자는 사휴(四休) 호는 송정(松亭)
묘지위치 墓曼里丙向合窆
장자: 남수(南粹)
사위: 이익복(李益馥) 본관 전의
21세 남수(南粹) 1661년(현종 2 신축)~1731년(영조 7 신해)
자 자순(子純) 호 월강(月岡)
묘지위치 墓文貞公墓右丙向合窆
장자: 수해(壽海)
차자: 수천(壽天) 자는 장숙(長叔)
삼자: 수원(壽元) 자는 인숙(仁叔) 호는 사 와(四▩窩)
사자: 수대(壽岱)
사위: 정숭유(鄭崇儒)
22세 수해(壽海) 1681년(숙종 7 신유)~1701년(신사)
자 구숙(久叔)
묘지위치 墓松石持平公墓下辰向上下墳
장자: 대성(大成)
23세 대성(大成) 1713년(숙종 39 계사)~1733년(영조 9 계축)
자 윤집(允集)
생부 수원(壽元)
묘지위치 墓松石通禮公墓下辰向
장자: 종섭(宗爕)
사위: 이지원(李知遠) 본관 재령
24세 종섭(宗爕) 1738년(영조 13 정사)~1799년(정조 23 기미)
자 이중(理仲)
생부 以慶
묘지위치 墓沙月松䑓峰癸向
장남: 훈(壎)
차남: 식(埴)
삼남: 경(坰)
사위 이종한(李宗漢) 본관 재령
25세 훈(壎) 1765년(영조 41 을유)~1810년(순조 10 경오)
자 화수(和叟)
묘지위치 墓蔓里文貞公墓左巳向
장남: 형직(馨直)
사위: 하경우(河慶遇) 본관 진주
사위: 장병섭(張秉燮)
26세 형직(馨直) 1795년(정조 19 을묘)~1869년(고종 6 기사)
자 중거(重舉) 호 사서(沙棲)
묘지위치 墓竹山先妣墓后庚向
장자: 도영(道永)
사위: 장유원(張裕遠) 본관은 인동 홍문관 교리
27세 도영(道永) 1829년(순조 29 기축)~1862년(청종 13 임술)
자 치박(穉博)
묘지위치 墓蔓里癸向
장남: 호림(頀林)
사위: 이원로(李源魯) 본관 전의
사위: 이극준(李極埈) 본관 성주
사위: 송기동(宋基東) 본관 여산
28세 호림(頀林) 1842년(헌종 8 임인)~1896년(고종 33 병신)
자 악여(樂汝) 호 하강(下岡) 초휘:서림(書林) 생부는 지영(趾永) 개암 후손
묘지위치 墓沙月村後巽向
장남: 창숙(昌淑)
사위: 하홍규(河弘逵) 조부 겸락(兼洛) 방어사(防禦使)
사위: 이우(李佑) 본관 성주
사위: 이영로(李泳魯) 본관 전의
사위: 미상
29세 창숙(昌淑) 1879(고종 16)∼1962. 유학자·독립운동가·정치인.
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
일제의 감시 아래 한때는 우(愚)로 개명하였고, 일제의 고문으로 다친 뒤에는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호림(頀林)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곽종석(郭鍾錫)과 이승희(李承熙)의 문인이다.
3·1운동 후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해 두 다리가 마비되어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정치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승만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6·25 한국전쟁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李始榮)·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여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끝내 이승만정권과 투쟁하였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심산만초(心山謾草)』와 『벽옹만초(躄翁謾草)』, 자서전인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가 있다. 1973년 김황(金榥)이 이들을 편집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심산유고(心山遺稿)』를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부인 인동 장씨는 문강공 여헌 장현광의 후손 장지화(張志和)의 따님이다.
장남: 환기(煥基) 1909-01-21 ~1927-12-20 애족장 수훈 -무후
차남: 찬기(燦基) 1915-05-05~ 1945-10-10 애족장 수훈 - 위(暐)
삼남: 형기(炯基) -창. 서. 양. 정
사위; 장세형(張世泂) 문강공 여헌 후손 증조부는 이조참판 인원. 조부는 승지 원상. 아버지는 진사 지창
아들: 경익(배 의성김씨 학봉 후손 검재) -손자: 달수
아들: 순익(배 나주 정씨 우담 후손 줄포)-손자 : 형수 영수
사위: 이동립(李東立) 본관은 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