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世孫(10세손) 金蔕(김체)의 아들 金位(김위)와
金珠永(김주영)兄弟(형제)代(
대)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金光世(김광세)와 金光存(김광존)의
兩大山脈(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金光世(김광세)는 中郞將(중랑장)을 지내고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에
追贈(추증)되고 그의 아들 金鏡亮(김경량)이 大將軍(대장군)에 올랐고,孫子(손자) 金須(김수)는 三別抄(삼별초)의 亂(란)때
殉節(순절)하였으며, 金周鼎(김주정)은 高麗(고려) 忠烈王(충열왕)때 同知密直司事(동지밀직사사)를
歷任(역임)하였다. 金須(김수)의
孫子(손자)인 金光載(김광재 : 文貞公(문정공) 金台鉉[김태현의 셋째아들]는 恭愍王(공민왕)때 亂政(란정)이 始作(시작)되자
杜門不出(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廬幕(여막)을 짓고 居喪(거상)하니 王(왕)이 그의 孝誠(효성)을
嘉尙(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靈昌坊孝子里(영창방효자리)라는 旌標(정표)를 세우게 했다. 世宗(세종)때에 工曹判書(공조판서)를 지낸 金禮蒙(김예몽)의 아들
金性源(김성원)은 世祖(세조)때 東國與之勝覽(동국여지승람)을 編撰(편찬)했고,孫子(손자) 金絿(김구)는 中宗(중종)때 趙光祖(조광조)의
革新政治(혁신정치)에 同助(동조)한 少壯派(소장파)로 金淨(김정),金湜(김식),韓忠(한충)等(등)과 더불어 己卯名賢(기묘명현)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筆法(필법)과 名文章(명문장)으로 外交文書(외교문서)를 執筆(집필)했고 그가살던 仁壽坊(인수방)의 마을 이름을 붙여 仁壽體(인수체)란
筆體(필체)가 生(생)겨났다. 黨籍譜(당적보)에 依(의)하면 金絿(김구)는 中國(중국)사람들이 自己(자기)의 글씨를 貴重(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世上(세상)에 남은 것이 別(별)로 없다고 한다.中宗(중조)때의 右議政(우의정) 金克成(김극성)은
30餘年間(여년간)벼슬에 있으면서 經綸(경륜)과 計策(계책)이 非常(비상)하여 朝廷(조정)에서 名聲(명성)을
날렸다.
金光存(김광존)의 人脈(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玄孫(현손) 金稹(김진)이 大提學(대제학)에 올랐고,金稹(김진)의 曾孫(증손) 金若采(김약채)에서부터
朝鮮時代(조선시대)의 命脈(명맥)이 이어졌다. 高麗末(고려말)에 文科(문과)에 及第(급
제)한
金若采(김약채)는 大司憲(대사헌)을거쳐 忠淸道都觀察使(도관찰사)를 지냈고,그의 同生(동생) 金若恒(김약항)은 恭愍王(공민왕)때
大司成(대사성)으로
使臣(사신)이되어 明(명)나라에 갔다가 表文(표문)이 恭遜(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皇帝(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揚子江邊(양자강변)에 流配(유배)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皇帝(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家族(가족)에게 屍體(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女(여)종이 夫人(부인)이라고
핑계하고 南京(남경)까지 가서 屍體(시체)를 찾아왔다."慵齋叢話(용재총화)"에 보면 金若恒(김약항)의 아들金處(김처)는
아버지가 外國(외국)에서 죽었으므로 衝激(충격)을 받아 미친 病(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詩句(싯귀)를 길게 읊으면서 暫時(잠시)도
쉬지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金虛(김허)는 벼슬이 副正(부정)에 이르렀고 孝誠(효성)이 至極(지극)하여 어머니 喪(상)을 當(당)하자
廬幕(여막)벽에다가 孝經(효경)의 喪親章(상친장)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읽고 눈물을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年 同安(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悲慘(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金若采(김약채)의
曾孫子(증손자)金國光(김국광)은 成宗(성종)때 左議政(좌의정)이되고 佐理一等功臣(좌리일등공신)으로 光山府院君(광산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
일찍이 黃喜(황희)가 그를 한番 보고 큰 人物(인물)로 認定(인정)하여 自己(자기)孫女(손녀:少尹皇甫 신의 딸)로서 아내로 삼아 주었고"작게
成就(성위)할 사람은 아니다"하고 그를 對(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世祖(세조)가 詳定局(상정국)을열어 當時(당시)의 學文(학문)이
뛰어난 臣下(신하)를뽑아 朝宗(조종)의 옛制度(제도)를 參酌(참작)하고 時代(시대)의 事情(사정)에 맞게 가려내어 "經國大典(경국대전)"을
編撰(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業積(업적)을남겨 世祖(세조)가"國光(국광)같은 사람은 참으로 文(문)과 武(무)를 兼備(겸비)한
才士(재사)이다" 하고 "事知第一(사지제일)"이라는 親筆(친필)을 써주며 稱讚(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便殿(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自己(자기)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金國光(김국광)의 同生(동생) 金謙光(김겸광)은 成宗(성종)때
李施愛(이시애)의 亂(란)을 平征(평정)하는 데 功(공)을 세워 佐理三等功臣(좌리삼등공신)으로 光城君(광성군)에
封(봉)해졌다. 金國光(김국광)의 아들
金克紐(김극뉴)는 大司諫(대사간)을, 金克福(김극복)은 贊成(찬성)을 歷任(역임)하였다. 金兼光(김경광)의 아들 金克逼(김극핍)은 燕山君(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甲子士禍(갑자사화)에 連累(연루)되어 高山縣(고산현)으로 流配(유배)되었고 權臣(권신) 金安老(김안로)의 彈劾(탄핵)을 받아
一生(일생)을 歸養地(귀양지)에서 生活(생활)했었다. 金克紐(김극뉴)의 孫子(손자)金鎧(김개)는 明宗(명종)때
戶曹判書(호조판서)에 오르고 淸白吏(청백리)에 祿選(녹선)되었으며,曾孫(증손) 金繼輝(김계휘)는 宣祖(선조)때 大司憲(대사헌)을 歷任(역임)하고
性理學(성리학)과 禮學(예학)에 能通(능통)하여 國事(국사)가 있을 때마다 諮問(자문)에 應(응)했다. 金繼輝(김계휘)의 同生(동생)金殷輝(김은휘)가 일찍이 草野(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光海君(광해군)이 世子(세자)로서 東宮(동궁)에 居處(거처)하게 되자 世子嬪(세자빈)의 아버지인 柳自新(류자신)이
宮中(궁중)의 西軒(서헌)에 居處(거처)하고 있었다.그러자 金殷輝(김은휘)는 그의 無禮(무례)함을 論責(논책)하면서 王鳳(왕봉 : 漢나라
聖帝(성제)의 外三寸(외삼촌)으로 政權(정권)을 잡아서 無禮(무례)한 行動(행동)으로 임금의 居處(거처)인 宮庭(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古事(고사)에 比較(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避(피)하였다고 한다.特(특)히 그는 宋翼弼(송익필)이 아버지인 宋祀連(송사련)의 잘못으로
世論(세론)의 憎惡(증오)를 받아 滅門(멸문)의 窮地(궁지)에 몰리자 10年 同安(동안)이나 먹여 살려 宣祖(선조)의 잘못으로 累(누)를 입는
賢良(현량)들을 그늘에서 救援(구원)하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家門(가문)에 名門(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張本人(장본인)이다.1548年(明宗
3年)
大司憲(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當代(당대)에
8文章家(문장가
)로
이름난 宋翼弼(송익필)에게 禮學(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李栗谷이율곡)에게
性理學(성리학)을 傳受(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雙壁(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領首(영수)가 되었다. 天性(천성)이
謙遜(겸손)하며 어질고 厚(후)하여 自然(자연)히 도(道)에 가깝고 學文(학문)하는 方法(방버)은 한결같이 種子(종자)와 朱子(주자)를
法(법)으로 삼아 世上(세상)살이의 華麗(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當時(당시)의 禮(예)에 關(관)한 質問(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仁祖反正(인조반정)때 맨 먼저 掌令(장령)에 任命(임명)하면서 安車[안거: 늙고 病(병)든
사람이 便安(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親書(친서)를 보내 불렀으나 應(응)하지 않았으며 病(병)든 몸으로 여러 勳臣(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始終(시종) 삼가하여 임금의 德(덕)을 잘 輔導(보도)하며 묵은 弊端(폐단)을
改革(개혁)하고 刑罰(형벌)을 愼重(신중)히 하며 公道(공도)를 넓히고 私私(사사)로이 가까운 內侍(내시),宮女(궁녀)等을 警戒(경계)하며
廉恥(염치)를 尊重(존중)하고 儉約(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임금이 그의 才能(재능)과 德望(덕망
)을
政治(정치)에 利用(이용)하고 싶어 焦燥(초조)해 했다고
한다.벼슬은
嘉義大夫(가의대부)로 刑曹參判(형조참판)에 그쳤으며 83歲(세)에 連山(연산)에서 生(생)을 마치며 後孫(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遺言(유언)을
남겼으니,"첫째 影幀(영정)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둘째 내 子孫(자손)이 數十代(수십대)에 이르더라도 誼(의)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經書辯疑(경서변의)" 8卷(권),
"疑禮問解(의례문해)" 8卷(권), "近思錄釋疑(근사록석의)"1卷(권), "家禮集覽(가례집람)" 3卷(권), "喪禮備要(상례비요)"
1卷(권)等(등) 總21卷(총21권)의 著書(저서)는 韓國(한국)의 禮典(예전)으로 評價(평가)된다.
金長生(김장생)의 禮學(예학)은 아들 金集(김집)에게 이어지고
宋時烈(송시열
),宋浚吉(송준길)에게
傳承(전승)되어 朝鮮(조선) 禮學(예학)의 泰斗(태두)로 禮學派(예학파)의 主流(주류)를 形成(형성)했다. 金集(김집)은 어려서부터 性品(성품)이 남보다 特異(특이)하여
忠信孝悌(충신효제)로서 몸을 세우는 根本(근본)을 삼았으며, 理致(이치)를 探求(탐구)하고 敬(경)를 主張(주장)하는 것으로 道學(도학)의
터전을 삼았다. 1646年(仁祖24年)山賊(산적)柳濯(류탁)等(등)이 亂(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柳濯(류탁)이 말하기를'金丞旨(김승지:金集)의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臣下(신하)들에게 이르기를 "凶惡(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避(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
金長生(김장생)을 40餘年間(년간) 모셨는데 그 父子(부자)의 法度(법도)를 지켜 아들이 質問(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端正(단정)히 앉아서 對答(대답)한 것이라든지, 各床(각상)과 各房(각방)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法(법)이 없었다는 逸話(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吏曹參判(이조참판) 金槃(김반: 金集의 同生)의 아들 金益熙(김익희)는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斥和論者(척화론자)로서 和議(화의)를 反對(반대)했고 王(왕)을 護衛(호위)하여 南漢山城(남한산성)에 가서
督戰御史(독전어사)로 싸웠으며
,그의 同生(동생)金益兼(김익겸)은 丙子胡亂(병자호란)때 어머니
徐氏(서씨)를
데리고 江(강)에 들어가 城(성)을 死守(사수)하다가 陷落(함락)되기
直前(직전
)에
金尙容(김상용)과 함께 南門(남문)에 올라가 自爆(자폭)하여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고 光源府院君(광원부원군)에
追封(추봉)되었다.
肅宗(숙종)때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의 主役(주역)인 金益勳(김익훈:金槃(김반)의 아들로 金益兼(김익겸)의 同生)은 己巳換局(기사환국)으로 南人(남인)이
政權(정권)을 다시 잡자 江界(강계)로 流配(유배)되었다.顯宗(현종)때의 禮曹參判(예조참판)金益炅(김익경)은 죽은
仁宣王后(인선왕후)에 對(대)한 慈懿大妃(자의대비)의 服喪(복상)問題(문제)에 宋時烈(송시열)等(등)과 함께 大功說(대공설)을 主張(주장)하다가
陽城(양성)으로 歸養(귀양)갔다.仁敬王后[인경왕후 : 肅宗(숙종)의 妃(비)]의 아버지인
金萬基(김만기)와 孝子(효자) 西浦(서포) 金萬重(김만중)은 金益兼(김익겸)의 아들로서 兄弟(형제)가 나란히
大提學(대제학)을 歷任(역임)한 名臣(명신)이다.
特(특)히 金萬重(김만중)은 遺腹子(유복자)로 태어남을 平生(평생)의
恨(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尹氏(윤씨)의 곁을 한 番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爲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動物(동물)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逸話(일화)가 有名(유명)하다.南海(남해)의 流配地(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九雲夢(구운몽)"은
富貴功名(부귀공명)이 一場春夢(일장춘몽)이란 內容(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慰勞(위로)하기 爲하여 썼다고
한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中宗(중종)의 딸 惠順翁主(혜순옹주)와 婚姻(혼인)하여
光川尉(광천위)에 封(봉)해진 金仁慶(김인경)과 李滉(이황)의
門人(문인)으로 安東地方(안동지방)의 學文隆盛(학문융성) 唱道者(창도자)로 알려진 金彦璣(김언기)가 有名(유명)했고, 典籍(전적)
金世愚(김세우)의 아들 金硅(김규)는 明宗(명종)때 文科(문과)에 壯元(장원)하여 벼슬이 判尹(판윤)에
이르렀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의
名將(명장)金德齡(김덕령)은 忠節(충절)로 家門(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人物(인물)이다.그는 1567年(明宗22년) 光州 石池村(석지촌)에서 金鵬燮(김붕섭)의 아들로 태어나 性理學(성리학)의 大家(대가)인
成渾(성혼
)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硏磨(연마)하였으며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長城縣監(장성현감) 李貴(이귀)의 薦擧(천거)로
翼虎將軍(익호장군)의 號(호)를 받고 義兵(의병)을 整頓(정돈)하여 宣傳官(선전관)이 되어 權慄(권율)의 揮下(휘하)에서 數次(수차)에 걸친
戰爭(전쟁)에 功(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勇猛(용맹)으로 名聲(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李貴(이귀)가 그를 薦擧(천거)하는 글에 "智惠(지혜)는 功名(공명)과 같고
勇猛(용맹)은 關羽(관우)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年(宣祖 29年) 李夢鶴(이몽학)이 鴻山(홍산)에서 反亂(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討伐(토벌)하려다가 이미 鎭壓(진압)되어 途中(도중)에 回軍(회군)했음에도 不拘(불구)하고
李夢鶴(이몽학)
과
內通(내통)했다는 辛景行(신경행:當時忠淸道巡察使從事館(당시충청도순찰사종사관)의 誣告(무고)로 鞫問(국문)을 받다가 獄死(옥사)했다. 그가
臨戰(임전)했을 때는 恒常(항상)鐵槌(철퇴) 두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百斤(백근)이나 되어 八道(팔도)에서 그를 神將(신장)이라
불렀고, 倭軍(왜군)들도 그의 勇猛(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亂中雜錄(난중잡록)"에 依(의)
하면
倭將(왜장) 加藤淸正(기요마사)는 그 名聲(명성)을 듣고 몰래 畵家(화가)를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참으로 훌륭한
將軍(장군)이다"하고 恒常(항상)戒嚴(계엄)하였고,뒤에 金德齡(김덕령)이 죽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이제
兩湖(양호)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金萬壽(김만수),
金千壽(김천수),金百壽(김백수),金九壽(김구수) 4兄弟는 義兵(의병)을 일으켜 劉克良(유극량)의 軍隊(군대)와 長湍(장단)에서 合勢(합세)하여
臨津江(임진강) 戰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웠으며,
金光運(김광운)과 金斗南(김두남)은 晉州(진주)戰鬪(전투)에서
壯烈(장렬)하게
殉節(순절)하였고,宣祖(선조)때 大北(대북)의 指導者(지도자)였던
金質幹(김질간:吏曺 參判을 歷任)은 "童蒙訓說(동몽훈설)"을 著述(저술)한 金震羽(김진우),
湖南(호남) 8文章(8문장)의 한 사람인 金公善(김공선) 等(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外(외)
宣祖(선조)때 葡萄詩(포도시)로 中國(중국)에까지 名聲(명성)을 떨쳤던 金潁南(김영남)과 肅宗(숙종)때 隸書(예서)에 能(능)했고
"玉山遺稿(옥산유고)"를 남겼던 金宇亨(김우형:工曺判書를 지내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金搢(김진)은 定州牧使(정주목사)를 지내고 볼모로 審陽(심양)에 갔다가 杜門不出(두문불출)하고 學文(학문)에만
盡力(진력)했다. 英祖(영조)때
謁聖文科(알성문과)에 及第(급제)한 金陽澤(김양택)은 副提學(부제학)과 大司成(대사성),右議政(우의정)을 거쳐
1776年(英祖52年)領議政(영의정)에 올랐으며, 金相福(김상복)은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하고 領中樞府事(영중추부사)에
轉任(전임)되었다.
韓末(한말)에
와서는 禁衛大將(금위대장) 金箕錫(김기석)과 學文(학문과)과 德望(덕망)이 높아 士林(사림)의 推仰(추앙)을 받았던 金志洙(김지수) 等이
家門(가문)의 脈(맥)을 이었고, 金在豊(김재풍)은 親露西亞派(친러시아파) 勢力(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國權(국권)을 回復(회복)하는데 앞장서서
韓末 風雲(한말 풍운)에서 古節(고절)있는 大人(대인)으로 推仰(추앙)받았다. 金翼鉉(김익현)의 아들인 金永悳(김영덕)은 國運(국운)이
기울어가는 韓末(한말)에 죽음으로써 韓日合邦(한일합방)을 反對(반대)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一生(일생)을 바친 金永肅(김영숙)과 함께
名門(명문) 光山金氏(광산김씨)를 더욱 빛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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