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수암골 드라마세트장
수암골. 청주시 동쪽에 위치한 산동네이다. 요즘 이 동네는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승용차에 관광버스까지 몰려들어 좁디좁은 동네길에는 교통체증이 빚어지기도 한다.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촬영지 중의 한 곳인 탓이다. 여행객들은 '팔봉제빵점'에 들어가 단팥빵, 크림빵, 소보로, 보리봉빵을 하나씩 사 들고 수암골 골목골목을 누비며 이집저집 벽마다 그려진 벽화를 감상한다. '요즘 세상에도 이런 동네가 아직 남아있네' 감탄하며 추억과 향수에 젖는다. 수암골을 찾는 여행객 중에는 중국인, 동남아 관광객들도 간간이 섞여 있다.수암골의 행정 명칭은 청주시 상당구 수동. 그러나 내비게이션에 수암골이라고 쳐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우암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면 길은 수암골로 이어진다. 비탈졌지만 아스팔트로 곱게 포장된 길을 타고 언덕을 오르면 TV에서 자주 봤던 2층짜리 팔봉제빵점 건물이 오른편에 있고 맞은편에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구멍가게 '삼충상회'와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간이포장마차, 그 옆으로는 주차장이 자리를 잡았다. 수암골 여행이 시작되는 이 길에서는 무엇보다 조망이 시원하다. 서쪽으로 향해 서면 고층빌딩들과 아파트들이 우뚝한 청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면 시곗바늘이 1960∼70년대로 되돌아간 듯한 풍경들이 가슴으로 달려든다. 굽이진 오르막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모습의 세상이 공존한다.
- ▲ 수암골은 억울할 수 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빵’이 아닌 벽화마을로 입소문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그림과 숨바꼭질해보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위부터 시계방향 으로 팔봉제빵점, 벽화‘먹보의 입속’, 추억의 빵 세트.
'빵은 카운터에서만 팝니다. 방부처리 해두어서 만지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카운터에서는 단팥빵, 소보로, 크림빵, 보리봉빵, 슈크림빵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값은 개당 1500원. 1970년대 빵을 재현했기에 지금의 제과점에서 파는 빵보다 조금씩 크다. 평일이면 저녁 7시, 주말이면 오후 4시 무렵에 준비한 빵이 바닥난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단팥빵, 크림빵 사랑은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임에도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차 한 잔, 팥빙수 한 그릇 맛보고 싶다면 2층으로 올라간다. 통유리창이라 청주시가지 모습이 시원하게 보인다. 카페매니저 이은(27)씨는 "6회부터인가, 이 건물이 TV화면에 비친 이후 주말에는 빈자리가 없어서 되돌아가는 손님들이 많다"고 말해준다. "드라마 촬영은 대개 금요일에 이뤄지는데 그때에는 출연진들의 휴식 장소로 이용돼 카페 영업을 못하지만 어쨌든 청주의 유명한 관광지가 됐으니 행복하다"고 덧붙인다.
사실 팔봉제빵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이 건물은 지난 3월 수암골에 등장했다. 지하 1층은 도자공방, 1층은 W갤러리, 2층은 W카페였다. 수암골이라는 산동네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팬시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 제작진에게는 극과 극을 이루는 모양새가 입맛에 어울렸던 모양이다. 6월 중순 촬영장 개조작업이 시작됐고 마침내 1층 갤러리는 제빵점으로 멋들어지게 둔갑했다.
팔봉제빵점을 나와 길 건너편의 삼충상회로 이동, '추억의 골목여행-수암골 아트투어'라는 팸플릿 한 장을 집어들고 수암골 벽화마을 탐사여행, 골목길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30여점의 벽화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숨어서 여행객들과의 숨바꼭질을 즐 긴다. 먼저 보게 되는 벽화는 삼충상회 담벼락의 '숨바꼭질'과 맞은편의 '꽃을 사랑하는 호랑이'. 이어서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다 보면 '골목길 지도', '먹보의 입속', '아이스케키 가게', '뚱보가족', '발레리나', '상상의 골목길', '바닷가 풍경', '피아노 길' 등등 다양한 벽화를 감상하게 된다.
한 가지 아쉽다면 수암골을 찾는 여행객들을 반갑게 맞아주던 삼식이라는 이름의 수컷 개가 요즘 보이지 않는다는 것. 지나가는 사람들을 아는 사람마냥 대해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에도 모습을 비쳤던 삼식이는 촬영 중에 짖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당분간 괴산군으로 보냈다고 한다.
청주의 마지막 달동네인 수동 수암골이 벽화마을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2년 전인 2008년. 과거의 수암골은 어떤 곳이었을까. 삼충상회 앞 간이포장마차에서 만난 윤여정(53)통장이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6·25전쟁 직후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 당시에는 난민수용소라고 했습니다. 이름이 좀 그래서 1960년대 초반부터는 평화의 존이라고 했다가 2000년대 중반에 와서야 수동 수암골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드라마 '카인과 아벨', '제빵왕 김탁구' 촬영지 이전 수암골은 살림살이는 비록 남루했어도 울타리 없이 넘나들며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도 알 만큼 인정이 넘쳐나던 동네였다. 웃샘에서 밤새워 가며 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고 아침이면 공동화장실에서 줄을 서가며 일을 보던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벽화마을로,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수암골 주민들은 너무나도 많이 찾아오는 여행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마침내 전에 안 보이던 호소문이 벽화 한구석에 나붙었다.
'저녁 9시 이후에는 관람을 자제해주세요.'
수암골 주민들의 숙원도 하나 있으니 여행객들이 이용할 공중화장실을 지어달라는 것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옛날에 쓰던 공동화장실이 지금은 공중화장실로 변하긴 했는데 마을 입구에서 너무 멀어 가는 도중에 일 보게 될 수도 있시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