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을 배경으로 민중의 고달픈 삶을 서정적으로 표현해 한국 현대시 최고 수작 중 하나로
꼽히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의 무대는 어디일까? 정답은 ‘없다’이다.
사평역은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공간이다. 전국적으로 사평이란 지명을 쓰는 곳은 많으나,
기차역 중 사평역이란 곳은 철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곽시인은 상상의 역임을 분명히 밝혔으나 호사가들은 사평역 모델 찾기에 열을 올렸고,
갑론을박 끝에 도달한 곳이 바로 전남 나주에 있는 남평역이다. 시인의 고향인 광주와 지척인 데다
역사(驛舍)가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워 시인의 눈길이 머물 만한 곳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펌)
사평역에서 / 곽 재 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