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祿光(김녹광)의 아들 金宏(김굉)이 監察御使(감찰어사)를
지내고,金宏(김굉)의 아들 金萱(김훤)(號는屯村)은 當代(당대)의 名臣(명신)으로 名聲(명성)을 떨쳐 名門(명문)의 地位(지위)를
굳혔다.金萱(김훤)은 高麗(고려)元宗(원종)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1269年(元宗10年)使臣(사신)으로 元(원)나라에 가서 元帝(원제)의 힘을 빌어
權臣(권신)林衍(임연)一黨(일당)의 逆謀(역모)를 沮止(저지)시켰고, 이듬해 金州(금주 : 只今의 金海) 防禦使(방어사)로 나가
三別抄(삼별초)의 亂(란)을 平征(평정)하는데 功(공)을 세워 禮部郎中(예부낭중),都護府使(도호부사) 等(등)을 거쳐
左諫議大夫(좌간의대부),門下贊成事(문하찬성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 門下省(문하성)에 屬(속)했던 正2品(정2품(의 官職(관직)에
이르렀으며, 文章(문장)과 글씨로 名望(명망)이 높았다. 金萱(김훤)의 두 아들 中 맏아들 金南物(김남물)은
安東府使(안동부사)를 지냈으며, 金開物(김개물)은 忠肅王(충숙왕)때 司憲府持平(사헌부지평)을 歷任(역임)하고 詩(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能(능)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工曹參議(공조참의)를 歷任(역임)한 金次文(김차문)과 經筵官(경연관)의 參贊官(참찬관)을 거쳐 通政大夫(통정대부)에 追贈(추증)된
金次武(김차무) 兄弟(형제), 尙州牧使(상주목사)金敬寶(김경보)와 江陵府使(강릉부사)金大根(김대근),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된
金希曾(김희증)이 有名(유명)했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家門(가문)을 크게 일으킨 人物(인물)은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名將(명장)金太虛(김태허)를 들 수 있다.그는 金希曾(김희증)의 아들로
태어나 1580年(宣祖13年)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고
玉浦萬戶(옥포만호)로 있다가 密陽府使(밀양부사)에 이어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蔚山郡守(
울산군수)로서 逆戰(역전)의 武功(무공)을 세웠고,亂(란)이
平征(평정)된 後(후
)宣撫1等功臣(선무1등공신)으로
都摠管(도총관),護衛大將(호위대장)을 거쳐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에
올랐다.그의 아들 金守謙(김수겸)도 아버지를
따라 戰功(전공)을 세워 2等功臣(2등공신)에 冊祿(책녹)되고 安東營將(안동영장),中樞府事(중추부사) 等(등)을
歷任(역임)했다.工曺參議(공조참의)
金次文(김차문)의
曾孫子(증손자)金琦(김기)는 壬辰倭亂 (임진왜란)때 判官(판관)으로
義兵(의병)을 일으켜 東萊城(동래성) 戰鬪(전투)에서 府使(부사) 宋象賢(송상현)과함께 壯烈(장열)하게 殉節(순절)하여 禦侮將軍(어모장군),
訓練院正(훈련원정)에 追贈(추증)되었다.襄武公(양무공)金太虛(김태허)의 四寸(사촌)인
金太乙(김태을)은
벼슬을 除授(제수)받았으나 辭任(사임)하고 돌아와 學文(학문)으로
一生(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金壽仁(김수인)도 光海君(광해군)의 悖倫(패륜)을 慨歎(개탄)하여 故鄕(고향)으로 돌아와
嶺南儒學(영남유학)의 重鎭(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金太乙(김태을)의 學文(학문)을 이었다.
韓末(한말)에 와서도 廣州金氏(광주김씨)는
金振聲(김진성),金錫昌(김석창),金相潤(김상윤)을 비롯한 많은 抗日鬪士(항일투사)를 輩出(배출)하여 忠節(충절)의 傳統(전통)을 이어
家門(가문)을 더욱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