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지나간 자리
2004년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이슈가 됐고 인구에 회자되었던 작품 중 하나를 고르라면 배우겸 제작자인 멜깁슨 감독이 만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한 장면)
이 영화에 반(反)유대주의가 녹아 있는지 또는 종교적인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영화를 평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2천년도 더 된 역사에는 '입김'이 섞일 수 밖에 없을 뿐더러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 뒤에는 정치적 입장이 있었다는 걸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멜깁슨은 성서에 나온 내용 그대로 유대인 사제장들과 그에 동조하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오히려 로마의 빌라도는 예수에게 자비를 베풀고 싶어하는 고뇌에 찬 위정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니콜라스 노토비치'에 의해 1887년에 티벳에서 발견된 '이사전(Issa傳)'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끝까지 이사(예수가 인도 등지에서 활약하던 때의 이름)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빌라도의 정치적 술수에 희생된 것으로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로마가 죽였든 유대인들이 죽였든, 결국 사건의 핵심은 역사적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으로 귀착되며 그것은 인간 예수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무시무시한 고통이요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완전히 종교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이 영화를 관람할 수는 없겠지만-특히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더욱-종교적인 도그마를 걷어내고 이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광기와 무지, 비겁함과 외면이 어떻게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지를 극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예수의 수의(壽衣; shroud of turin)
영화는 예수가 부활하여 동굴 밖으로 나가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예수의 시체를 감쌌던 수의만이 놓여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익히 아는 예수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문제는 밖으로 걸어나간 예수가 아니라 관속에 남아 있던 바로 그 수의다. 왜 예수 사후 2000년도 더 넘은 이 시점까지 그 수의의 진위를 밝혀 내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는 것일까?
 (좌측: 1988년 촬영된 성의/ 가운데: 1988년 찍은 보관함 사진/ 우측: 1898년 세쿤도 피아 촬영 성의)
이태리의 토리노 대성당에는 지구상 최고의 보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물(聖物)이 조심스레 간직되어 있다. 그 보물이란 바로 '예수의 수의'인데, '예수의 壽衣'란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한 후, 그의 시체를 감쌌던 옷감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옷이 최고의 보물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30여년전 프랑스의 한 시사잡지가 전 세계의 저명인사 100여명에게 "지구 최후의 날에 무엇을 가지고 도망 가겠는가?"라고 물어보니 이 수의를 가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는데에서 유래한다.
공개된 예수의 수의
19세기 말 이태리의 고고학자인 '세쿤도 피아(Sekundo Pia)'는 우연히 토리노 대성당에 들어가 이곳의 여러 유물들을 사진촬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예수가 입었다는 수의도 촬영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찍은 사진의 필름에 예수의 얼굴로 추측되는 인물화가 그린 듯이 나타난 것이었다.
'세쿤도 피아'가 사진을 촬영하기 전에도 이 유물에 그리스도의 얼굴과 신체의 윤곽이 어렴풋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널리 퍼져 왔지만 그런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증명된 것은 이 젊은 고고학자가 찍은 사진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필름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잘못 찍혔든가 아니면 가공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후 1931년 이 수의는 다시 한번 사진으로 찍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적인 사진사에 의한 촬영이었다. 그 결과 수의에 나타난 사람의 형상은 맨 처음 세쿤도 피아가 찍었던 필름에 나타난 모습과 일치하였다. 사람들은 필름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 이상 의심할 수 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수의에 대한 관심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특히 세계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가일층 고조되었다. 최근에 와서 첨단 과학의 힘을 빌린 조사에서도 토리노 대성당의 이 수의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분명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찔린 형상 그대로..
이 옷감은 세마(細麻 ; 가는 마)로 알려져 있으며, 세로 길이가 약 4m, 가로 폭이 약 1m 정도의 크기로 되어 있다. 이 옷감은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즐겨입던 것으로써 마에 면과 린넨을 섞어 비스듬한 무늬로 짠 것이다.
거기에는 예수의 얼굴은 물론 가시관에 입은 이마의 상처 자국과 휘어진 코, 찢어진 오른 쪽 눈꺼풀, 다섯 째와 여섯 째 늑골 사이에 찔린 창살 자국 그리고 손목에 못박힌 자리까지 그대로 새겨져 있다한다. 기존에는 못이 예수의 손 바닥에 박힌 것으로 알았으나 이 수의의 공개로 손목에 박혔음이 입증되어 공식적으로 정정되기도 했다.
엷은 미색의 이 수의에 나타난 형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남자 주인공은 180cm 정도의 키에 머리는 어깨까지 늘어 뜨리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는 형상과 상처뿐만 아니라 채찍으로 맞은 자국까지 리얼하게 나와 있어서 그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자국들은, 원래가 그런 색깔인지 아니면 변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모두가 노란색으로 음각이 되어있다.
그처럼 채찍질과 못질로 인해 수의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지만 어떻게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형상이 수세기 동안 지위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인지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수의에 대한 여러 논란
수의가 유명한 만큼 그 진위에 논란도 끊임없이 전개되어 왔다. 심지어 서양에는 <성의학(聖衣學)>이라는 학문 분야도 있어서 이 수의에 대한 연구만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중세 시대에만 해도 무려 40여개의 수의가 돌아다녔다고 하니 당연히 그 진위에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학자인 "슈발리에" 신부는, 비밀리에 그 수의의 예수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해서 큰 문제를 일으켰었고 현대의 일부 과학자들도 그 성분을 분석해 보고는 단순 화학 반응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예수 시절 시체에 바르는 향료와 인체에서 분비되는 땀과의 화학반응으로 마치 퇴색한 사진같은 영상을 얻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편에선 물감을 쓴 흔적이 없고 아무리 확대해 봐도 사람이 그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분석도 있다.
심지어는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성당의 ‘발레스트레로’ 추기경은 세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성의가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된 결과 약 14세기 정도의 것으로 공표되어지기도 했다.
한편 스위스에서는 이 수의에 묻어 있는 먼지를 분석해 본 실험도 있었는데 그 먼지의 정체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자라는 레바논 삼나무의 꽃가루였다고 하며 예수 생존 당시의 연대로 추정된다고 보고되었다.
이러한 실험 결과야 어찌되었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의 성의가 진짜라고 믿고 싶어하며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기적이 없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이라도 하나 붙잡을 것이 진정으로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수의의 수난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무덤에 묻을 때 감쌌던 수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누가 복음과 요한 복음 등 기독교 바이블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감쌌던 수의가 그의 텅 빈 무덤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유명한 수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13세기 경에는 프랑스로 옮겨졌다가 15세기 후반기에 안전한 보관을 위해 이 수의를 샹베리에 있는 부속 예배당을 지은 루이 1세에게 바쳤다. 그런데 1532년 이 부속 예배당이 화재를 당하고 말았다.
그 때 수의는 불행 중 다행히 작은 은제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자리에 약간 불탄 자국을 남긴 채 그대로 보존될 수가 있었다.
수의는 수녀들의 정성스런 손질로, 불탄 자국이 수선된 후 은밀히 보관되어 오다가 1572년 이태리의 토리노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1997년 4월 11일 토리노 대성당에 원인모를 불이 일어나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의 도움이 있었던지, 성의는 무사하게 옮겨 졌는데 두 번의 화재에도 이 수의가 구제된 것을 보고, 많은 신자들은 이것 자체도 기적이라 하여 기도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미래보다 더 예측을 할 수 없는 것이 과거라고 했던가? 장구한 시간의 강을 타고 넘나들며 지금까지도 전 인류의 관심을 끌고 있는 예수의 수의는 오늘도 여전히 아무 말없이 순례객들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이한우 [참고문헌] 한국의 유산 21가지 (이종호, 새로운 사람들) 신의 무덤 (리차드 앤드류스-폴 쉘렌버거, 넥서스)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홀거 케르스텐, 고려원) 세계의 불가사의 (나이절 분델,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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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세요. 하나님의 계획하심인지 우리는 예측이 안되니 보고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두고 볼일이네요.감사합니다. 샬 롬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