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사 전광제의 묘표(忠淸都事全光濟의 墓表) : 산양면 우본리(법현산)
公諱光濟字明兼號三白堂姓全氏竺山人自羅麗著爲巨族至諱元發文科仕至兵部尙書封竺山府院君子孫貫焉累傳至諱仁參奉號箕溪諱夢井引儀號暎蓮堂諱纘參奉贈工曹正郞號四友堂蚤遊退陶先生門屢被奬高祖以恪贈監察曾祖瀚護軍祖世衝考僖大贈吏議淑人載寧康氏渶女南溪應哲曾孫以肅廟丁丑十二月二十一日生公骨相雄偉甚不凡人皆期以遠器未成童遭母喪哭踊拜如成人焉及長從淸臺權先生學多聞旨訣尊信而究竟至於師門備盡事一之禮傍治擧業景廟壬寅升膠庠英廟癸亥廷試文科奉列大夫行忠淸都事居官淸愼仁摩義煦洽有治績焉己巳丁外憂喪制一遵家禮無憾服後無復進取意雅爲山水優遊域內諸名勝歸而構小堂於白雲山下扁以三白盖取其淸白之義也日與同門諸益盃觴嘯詠不知老之至可謂日成世甘遯之君子人也乙酉正月初六日壽終于寢享年六十九葬于法峴山午向原會者以送之配淑人宣城李氏鳳天女墓雙封生一男一女男萬采通德郞女高裕承旨萬采二男二女男熙復熙益俱通德郞女張胤錫趙時中高裕二男夢鱗夢根熙復一男一女男聖女鄭宗裕熙益一男永以下不錄嗚呼公以豪邁耿介之姿早得賢師而依歸又際日成時而蜚英宜若無蘊不著而過於廉故只一外臺而止不無慨恨於世道耳公所著不爲不多而累經怯灰殆乎杞宋無徵其爲後輩之歎惜顧何如也公祀孫在國甫來責以賁隧之文辭以頹敗寡諛竟不獲略加豕亥系以銘銘曰
蹟公平生首尾內蘊未展外臺奚貴我採輿誦昭示片石不窮宙子孫千億
丁酉 秀月 下瀚
豊山 柳承佑 謹撰
仁川 蔡鴻淵 謹書
七代孫 炳泰
八代孫 在玉 謹竪
<譯文>
公의 諱는 光濟요 字는 明兼이며 號는 三白堂이다. 姓은 全氏요 竺山人이다. 新羅와 高麗때부터 著名하여 巨族이 되었더니 諱元發에 이르러서 文科에 올라 벼슬이 兵部尙書에 이르고 竺山府院君을 封하니 子孫이 貫을 삼았다.
累傳하여 諱仁에 이르니 參奉이요 號는 箕溪이다.
諱夢井은 引儀니 號는 暎蓮堂이다.
諱纘은 參奉으로 贈工曹正郞하니 號는 四友堂이다. 일찍이 退溪先生門下에서 受學하여 여러 차례 장려하고 자랑함을 입었다.
高祖는 以恪이니 贈監察이고 曾祖는 瀚이니 護軍이고
祖는 世衡이고
考는 僖大니 贈吏曹參議이다.
비는 淑人載寧康氏渶의 따님이요 南溪應哲의 曾孫女며
肅宗丁丑(1697) 十二月二十一日 公이 誕生하시니 骨相이 뛰어나게 커서 심히 비범하니 사람들이 모두 將來에 有爲한 人物이 되리라고 期待하였다.
어려서 어머니 喪을 당하였는데 슬피 울며 절하고 꿇어앉음을 어른과 같이 하였다.
자라남에 淸臺權先生(주1)을 따라서 受學하여 많은 要旨를 들어서 높이 준신하여 끝까지 探究하고 師門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섬기는 禮를 갖추어 다하고 한편으로는 科擧보는 공부를 익혀서 景宗壬寅(1722)에 成均館에 오르고 英祖癸亥(1743)에 廷試文科에 급제하여 俸列大夫忠淸都事를 歷任하니
官에 있을 때는 淸廉하고 謹愼하여 仁으로 撫摩하고 義로서 품어서 두루 治績이 있었더니 己巳에 父親喪을 당하여는 喪制를 하나같이 家禮를 遵守하니 여한이 없었다. 喪을 마친 뒤에 다시 官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한가하게 山水를 즐기고 한가롭게 域內의 여러 名勝地를 찾더니 돌아와서는 白雲山아래에 小堂을 세우고 懸板하여 三白堂이라 하니 대개 그 淸白하다는 뜻을 取한 것이다.
날마다 同門의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며 詩를 읊어서 늙는 줄을 모르니 가히 숨어 삶을 즐기는 君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乙酉(1765) 正月初六日正寢에서 考終하니 享年이 六十九歲이더라.
法峴山午向原에 장사하였는데 會葬하는 사람들이 禮로서 送終하였다.
配는 淑人宣城李氏니 鳳天의 따님이라. 墓는 雙墳이다.
一男一女를 두시니 男에 萬采는 通德郞이고 女에 高裕는 承旨이다.
萬采는 二男二女를 두셨는데 男은 熙復과 熙益이니 모두 通德郞이고 女는 張胤錫, 趙時中이다.
高裕는 二男을 두었는데 夢鱗, 夢根이다. 熙復은 一男一女니 男은 聖요 女는 鄭宗裕이고 熙益은 一男이니 永다. 以下는 記錄하지 않는다.
아! 公은 호탕하고 德望있는 모습으로 일찍이 賢師를 얻어서 의지하여 따르고 또 밝은 時代를 만나서 華麗하게 솟아오르면 마땅히 쌓인 知識이 나타나지 아니함이 없으련마는 淸廉함이 지나친 듯 하다.
그러므로 다만 外臺하나만으로 그치니 世道에 슬프고 恨스러움이 없지 않더라.
公은 著述한 바가 많지 아니하다 할 수 없더니 여러 차례 火災를 겪으므로 거의 徵驗할 수 없으니 그 後輩된 이의 歎惜함이 돌아보건대 어떠하겠는가? 公의 奉祀孫在國甫가 와서 墓碑文을 부탁하거늘 老衰하고 寡識하므로 사양하다가 마침내 얻지 못하여 대략 誤字만 손질하고 이어서 銘을 하니 銘에 이르기를 公의 平生行蹟에는 終始정성스럽더라. 안으로 쌓임을 펴지 아니하니, 밖으로 官廳이 어찌 貴하다 하겠는가? 내가 여러 사람의 칭송함을 골라서 碑에 새겨 밝게 보이리라. 宇宙가 다하도록 돌결 일지 말고 子孫들이 千億年오래도록 傳하기를…….
丁酉 秀月 下瀚
豊山 柳承佑 謹撰
仁川 蔡鴻淵 謹書
七代孫 炳泰
八代孫 在玉 謹竪
[출처]전광제(全光濟) 본(本) 축산(竺山) 자(字) 명겸(明兼) 호(號) 삼백당(三白堂)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주1)권상일[ 權相一 ]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만경현령(萬頃縣令), 장령(掌令), 울산부사(蔚山府使),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학문은 이황(李滉)을 좇았으며, 이황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四七說)을 조술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상일 [權相一]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