寶文閣提學(보문각제학)을 지낸 金褘(김위:金仲龜의 아들)와 郎將(낭장)金儀(김의)의 父子가 有名(유명)했고, 太子太保(태자태보) 金錫保(김석보)의 아들 金孝鐸(김효탁)은 太子詹事[태자첨사 : 東宮(동궁)에 屬(속)한 正3品(정3품)
벼슬]에 올라 左僕射(좌복야)를 歷任(역임)한 金琯[김관:金錫保(김석보)의
孫子(손자)]과 함께 名聲(명성)을 날렸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參議(참의)를 지낸 金澤(김택)의 아들 金光貴(김광귀)가 楊州牧使(양주목사)를 지냈으며,그의 아들 金規(김규)는 性理學(성리학)에 正統(정통)한 이름난 學者(학자)로 司僕寺正(사복시정)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故鄕(고향)인 金陵郡(금릉군)禦侮面(어모면) 德麻洞(덕마동)에 돌아갔다가 沃川(옥천)靑山(청산)의 淸凉山(청량산)으로 移舍(이사)하여 性理學(성리학) 硏究(연구)에 一生(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金規(김규)의 아들 金珏(김각)은 中宗反正(중종반정)에 功(공)을 세워
靖國原從二等功臣(정국원종이등공신)에 冊祿(책록)되고,德山縣監(덕산현감)을 지냈다.그밖의 人物(인물)로는 縣監(현감)金孟智(김맹지)와 吏曹參判(이조참판)金哲成(김철성)父子가 뛰어났고,金元錫(김원석)은 貧困(빈곤)한 家勢(가세)에도 父母(부모) 奉養(봉양)이 至極(지극)하여 孝行(봉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學者(학자)로 有名(유명)한 金樟(김장)은 金長生(김장생)의 門人(문인)으로 學文(학문)이 뛰어나 "訓蒙書知行方編(훈몽서지행방편)"을 著述(저술)하여,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 金相元(김상원)과 함께 家門(가문)을 代表(대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