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39)8·18 '대구사수의 날'
1950년 8월 18일은 대구로선 최악의 위기이자 최후의 항전기회였던 ‘대구사수의 날’이다. 8월 15일, 왜관을 점령한 인민군은 17일에는 포항, 성주, 거창에까지 밀려왔다. 대구시내에 난데없는 박격포가 날아와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나 하면, 밤이면 팔달교 너머로 먼 포성도 가끔 들렸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인민군의 공세가 워낙 거세어 임시수도 대구도 곧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이에 그동안 ‘천도불가’를 호언해오던 정부와 미8군사령부는 17일 밤 긴급회의 끝에 부산으로 ‘천도’키로 결정하고, 18일 새벽 은밀히 움직였다. 덩달아 “비전투원은 조속히 피난시키라“는 긴급 ‘소개령’도 새어나온다. 이날 밤 공교롭게도 만취 끝에 회의에 불참, 18일 아침 7시쯤 장관실(도지사실)로 달려온 조병옥내무부장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중대회의에 참석 못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놓진 자책감에 못지않게, 왜 이런 패배적인 결정을 내렸느냐는 반발심 때문인 듯 했다. 잠시 후 장관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뜻밖에도 조준영(趙俊泳)경북경찰국장의 목소리였다. “유석!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결정이오? 즉각 취소토록 하시오!”
도경국장이 내무장관에게 감히 “유석(維石)!”하고 호를 부르며 고함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나라가 망하고 나면 무슨 놈의 군대이고 경찰이냐”는 항변과 함께, 계급관계를 떠나 같은 한양 조씨로써, 일찍부터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유석은 조국장의 장형인 조근영(趙根泳. 미군정 경북경찰총수)과, 중형인 제헌의원 조헌영(趙憲泳. 조지훈시인의 부친)과도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런 인연 등이 얽혀 전북보안과장이던 조준영은 불과 닷새 전인 8월12일부로 경무관으로 승진되면서 경북도경국장에 취임한 터였다.
조준영은 일경출신 부하들로부터는 간혹 고지식한 인물로 비쳤으나 선비기질의 우국지사형 인물임은 누구나 인정했다. 당시 공석이던 과장을 대리해 도경사찰과 부과장으로 갓 부임해 있던 최석채(崔錫采·뒷날 원로 언론인)경감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조국장이 때마침 도경국장에 취임해 있었던 것이 대구로선 참으로 행운이었다.”고 뒷날 회고한 바 있다. 조국장의 격정적인 항의에 자극받아, 조장관이 ‘대구소개령’ 취소요청을 위해 워커 미8군사령관에게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워커에게 유석은, “대구에서 철수하면 부산도 지켜낼 수 없다. 경찰력만으로 라도 대구를 사수할 테니 즉각 ‘소개령’을 취소하고, 8군사령부의 후퇴도 재고하기 바란다.”고 애써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소개령’이 취소됐으니 즉시 취소사실을 공포하라”는 장관의 전화를 받은 조국장은 “나는 수성교 쪽을 맡을 테니 최과장은 신암교 쪽으로 가시오” 하고 말했다. 최경감이 형사 2명을 대동하고 스리쿼터에 올라 신암교 쯤에 이르자, 공포에 질린 피란민들이 물밀듯이 밀려가고 있었다. 군중 속엔 밀짚모자를 눌러 쓴 국회의원들도 보였다. 그는 신암가도를 달리며 메가폰으로, “소개령은 취소되었소! 대구는 까딱없으니 모두들 귀가하시오!”라고 거듭 외쳤다. 한 시간 넘게 외쳐대자 사태는 진정되었다.
이날 두 조씨의 발 빠른 반전(反轉)작전이 없어서, 시민들의 공황심리를 막지 못했더라면 대구의 방어망은 뚫렸고, 대구가 무너졌다면 전세의 역전은 불가능했을 거란 게 정설이다. 저마다 살려고 달아난 텅 빈 도시를 등지고는 아군의 ‘필사즉생식(必死則生式)’ 전의가 생길 리 만무했던 것이다. 8.18 ‘대구사수의 날’을 계기로 아군은 낙동강교두보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고, 이를 고비로 반격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8.18을 기억하는 시민은 거의 없지만 조병옥과 조준영은 각각 휴전 후 야당으로 출마한 국회의원선거와 민선 대구시장 선거에서 대구시민들의 보답성 지지를 받아 가볍게 당선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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