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이 아리랑인 이유
우리 민족은 아리랑 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찡하게 다가오는 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부터 민요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불리워져 왔으며, 심지어 분단된 한국에서 조차 남과 북이 이념을 초월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리랑’의 정확한 뜻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리랑의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즉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아, 그거”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말로는 설명하기 좀 곤란한 그 무엇이 곧 ‘아리랑’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아리랑’이라는 말 뜻을 한 마디로 말하기는 곤란하겠지만 굳이 쉽게 풀어서 얘기한다면 ‘곱고 그리운 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고개’라는 것은 한국과 같은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 범위를 차단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낭군님들을 전쟁터로 혹은 삶의 전선으로 떠나보내는 우리 여인네들의 고독한 ‘한’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표현이 바로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라고 하겠습니다.
◇ 상주에는 ‘아리랑고개’가 있다
그런데 우리 상주엔 경북에서 유일하게 ‘아리랑 고개’라는 것이 있습니다(혹자는 전국에서 ‘아리랑고개’는 상주밖에 없다고도 합니다). 우석여고 옆 철도 건널목에서 천주교 공원묘지로 넘어 가는 작은 고갯길이 바로 ‘아리랑 고개’인데, 이름만 들어도 벌써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숨겨져 있길래 하필 그 슬프고도 슬픈 뜻을 가진 ‘아리랑 고개’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리랑고개 현재모습. 도로명에 의한 새 주소명도 아리랑고갯길이라고 돼있다.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길 건너편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이 농민군들이 묻힌 공동묘지다.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상주지역에 숨어 들어와 포교활동을 하고 있던 해월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척왜양창의(의를 내세워 왜놈과 서양을 배척한다)’를 대의명분으로 내걸고 전라도 지역에서 혁명을 일으킨 한참 후인 9월 18일 드디어 전국일제 기포령을 내립니다. 상주에서도 함창 예천 등지의 농민군들과 합세하여 9월22일 상주읍성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상주읍성을 점거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왜군을 끌어들인 관군에 의해 9월28일 드디어 읍성을 내주고 농민군들은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정부에서는 그 해 10월 17일 승지벼슬을 지낸 정의묵을 영남소모사로 임명하고 농민근들에 대해 일제 소탕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일본군과 민보군 그리고 소모군에 의해 잡혀온 농민군들은 소명의 기회도 없이 태평루와 남사정에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처형된 농민군의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끌고 상주읍성 북문(현무문)을 지나 냉림천(현재의 북천)을 건너 풍양으로 가는 길목인 현재의 우석여고옆 고갯길을 넘어 천주교 공동묘지 맞은편 야산에 묻어 주었습니다. 이 고갯길을 넘은 시신은 다시 돌아 오지 못한다 하여 아리랑고개라고 불리워 졌으며 상주지역 서민들의 한이 담겨져 있는 고갯길이라 하겠습니다.
◇ 상주에는 ‘상주아리랑’ 이라는 민요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상주에는 ‘상주아리랑’이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민요를 하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 노래 이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우리 상주지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주아리랑’은 1930년대 매일신보 등에도 ‘상주아리랑’ 또는 ‘상주아리랑 타령’으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가사만 전해오고 곡이 없었는데, 1950년대에 김소희명창이라는 분이 ‘상주아리랑’을 불러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상주문화원 발행 ‘상주민요’라는 책에는 약 10곡 정도가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등에 올라와 았는 ‘상주 아리랑’에 대한 해석은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와요/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지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사설에 중모리, 엇모리장단으로 불린다고 돼있습니다. 사설의 내용으로는 1928년 경북 상주 지역에서 30가구가 간도지역에 이주하는 상황이 보도되고 있어 얼핏 이러한 상황을 노래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또 지난해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축제에서는 김희철씨라는 분이 ‘상주아리랑’ 이라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서 CD로 보급한 바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상주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내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이 보다 더 유명한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채련요)’가 있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처자야
연밥줄밥 내따줄게 내품안에 잠들어라
잠들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
공갈못 노래비
삼한시대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공검의 공갈못을 소재로 한 민요입니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어느때 부터인가 ‘상주 모심기노래’로 잘못 알려 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던 이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는 상주를 대표하는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알려지게 됐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상주 모심기 노래’로 알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상주모심기 노래’는 따로 있고 ‘서보가’도 있다
상주시내에서 문경쪽으로 3번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세천 맞은편 오른쪽에 초산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상주민요마을’로 지정된 마을인데 이 마을에 가면 아직도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와 ‘상주 모심기 노래’가 엄연히 따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 상주시내에서 남장동쪽으로 가다보면 다리 하나를 건너게 되는데 그 곳이 ‘서보 다리’입니다. 옛날에 그 곳에 서보라는 보(洑)가 있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지금까지 이 보를 소재로 한 ‘서보가’라는 민요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 맺음말
우리 상주에는 ‘상주 아리랑’도 있고 ‘공갈못 연밥따는 노래’도 있고 ‘상주 모심기 노래’도 있으며 또 ‘서보가’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이렇듯 우리 상주지역은 문화유산도 많고 소중한 민요도 많이 간직한 아주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 상주 사람들은 남의 떡만 크다고 생각하고 우리 지역 문화는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상주시청 게시판에는 ‘영천에는 영천아리랑이 있는데 상주에는 왜 상주 아리랑이 없을까’라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한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지역의 문화를 다듬고 가꾸는 일은 바로 우리 상주 사람들의 몫이라 하겠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다녔지만 이렇듯 역사의 의미가 담긴 곳이라는 것을 잘 몰랐지요. 상주에 대해 더 많이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