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게 자신 없어서 주저주저 하다가 참가한 제주문학기행
함께 어울려 다녀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분들과의 만남과 의미 깊은 순교지 방문이 있었을 뿐 아니라
비가 내린다던 예보와는 다르게 날씨가 매우 청명하고 바다는 잔잔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내가 하는 말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2016년 5월 16일 아침에 청주공항에 모였다.
유인종 장로의 출발기도
JEJUair 7C 0851기에 탑승하기
제주공항에 대기 중인 삼호관광버스(기사: 이승갑)에 승차
아침을 대충 때우고 왔으니 먼저 식당으로...
"메뉴가 뭐였더라???"
참 맛있었다!
식탁교제의 즐거움을 아시나요?
임어당의 식탁이론
"아무리 사이가 꼬였어도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면 풀린다."
하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우리들이야 말해 무었하리!!!
여유롭고 은혜로운 우리들의 일정
진행을 맡은 박도훈 목사
환영의 인사: 유인종 장로
제주도선교사요 목회자요 순교자인 이기풍 목사를 아시나요?
영상관에서 잠시...
이기풍 목사 사모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딸에게 쓴 편지" 내용
편지를 똘똘 말아서 실을 감는 실패로 사용했더라네요.
같은 경내에 다른 순교기념비
"우리도 기념사진 한 장 남겨요!"
제주도 선교사, 순교자 이기풍 목사
그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던 중
1890년 어느 날 평양서문통 거리에서 전도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 피를 흘리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는 1894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뜨거운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안악, 신천, 해주 등지를 순회하며 조사로 시무했다.
또한 마펫 선교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에 신학생이 되어 길선주, 양천백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때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8년 봄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기념관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로서
숭의여학교를 다닐 정도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일제치하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그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
1936년부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가 미제의 스파이라면서 순천노회 산하의
오석주, 나덕환, 김상두, 김순배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체포했다.
노령에다 일제의 심한 취조와 고문으로 졸도하기도 했고, 결국 이기풍 목사는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했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이상은 기념관에서 들은 내용과 구글검색창에서 참고하였음: 이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