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조선시대) 60名(명)의 文科及第者(문과급제자)와 많은
官職者(관직자)를 輩出(배출)하여 家門(가문)의 隆盛(융성)을 누린 海州鄭氏(해주정씨)는 代表的(대표적) 人物(인물)로 贊成(찬성)을 지낸
鄭易(정이)를 비롯,吏曺參判(이조참판) 鄭錫堅(정석견), 判敦寧府事(판돈녕부사) 鄭孝俊(정효준)等(등)을 꼽을 수
있다.
鄭易(정이)는 1383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左正言(좌정언), 司憲持平(사헌지평),參知議政府事(참지의정부사)等(등)을 歷任(역임)하고 1411年 漢城府尹(한성부윤)으로 正朝副使(정조부사)가
되어 明(명)나라에 다녀와서 大司憲(대사헌)이 되었다.그後(후)忠淸道觀察使(충청도관찰사),禮曺(예조)와
刑曺(형
조)
및 戶曺(호조)의 判書(판서), 大提學(대제학)等(등)을 거쳐 1419年 判漢城府事(판한성부사), 議政府贊成(의정부찬성)에
이르렀다. 鄭孝俊(정효준)은
1623年仁祖反正(인조반정) 後(후) 敦寧府都正(돈녕부도정)에 올랐으며 1656年 海豊君(해풍군)에 封(봉)해졌다.그後(후)다섯 아들이
모두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官職(관직)에
올랐다. 燕山君(연산군)時節(시절)
亂世(란세)에 踪跡(종적)을 감추어 버린 逸話(일화)의 主人公(주인공) 鄭希良(정희양)은 金宗直(김종직)의 門人(문인)으로서 燕山君初(연산군초)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檢閱(검열)을 거쳐 湖堂(호당)에 들었다. 그는 일찌기 王(왕)에게 諫言(간언)하여 戊午士禍(무호사화)가 일어나자 金海(김해)로 流配(유배)되어
3年만에 풀려나왔다.마침 母親喪(모친상)을
입어
故鄕(고향)에서 侍墓(시묘)살이를 하던 中(중)踪跡(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 後(후)
甲子士禍(갑자사화)때 선비들이 禍(화)를 當(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先見之明(선견지명)에 歎服(탄복)했다고 한다.그는 詩文(시문)에
能(능)했고 陰陽學(음양학)에도 正統(정통)하였다. 鄭希亮(정희양)
外(외)에도 1756年 庭試文科(정시문과)에 乙科(을과)로 及第(급제),驪州牧使(여주목사)로 善政(선정)을 베풀었고 그後(후)
大司諫(대사간
),都丞旨(도승지),大司憲(대사헌)等(등)을 거쳐 工曺判書(공조판서)에
이른 鄭運維(정운유)等(등)이 있다. |
첫댓글 동래정씨 하동정씨 온양정씨 ..경주정씨..압해정씨도 있다네요.
우리네 성씨 본관이 참 너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