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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수>의 삽입곡 "Auld Lang Syne", 촛불이 하나씩 꺼지면서...맨 아래 동영상에
<애수>의 명장면들이 줄줄이 나옵니다.꼭!!
< 영화 애수(Waterloo Bridge) >
마빈 르로이 감독은 마이라와 로이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기까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우연한 사건들을 교묘히 배치하여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비비안 리의 청초한 모습과 로버트 테일러의 중후한 남성미는 이후 만들어진 숱한 비극적 러브스토리의 전형적인 인물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특히 비비안 리는 마이라 역을 통하여 성녀(聖女)와 창녀(娼女)라는 양극적 이미지를 훌륭하게 연기하여 비평가들로부터 금세기 최고의 여배우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로이와 마이라가 춤출 때 흘러나오던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6·25전쟁 중에 피난지인 부산과 대구에서 처음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재개봉되었으며, 이 영화의 영향으로 마스코트가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 테마 음악,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
1788년에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번스에 의하여 작사,작곡되었습니다. 곡명은 ‘그리운 옛날’이라는 뜻이며, 한국에서는 ‘석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노래는 전세계적으로 이별할 때 불리고 있으나 내용은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지요.
“어릴 때 함께 자란 친구를 잊어서는 안 돼. 어린 시절에는 함께 데이지를 꺾고 시냇물에서 놀았지. 그 후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 다시 만났네. 자아, 한 잔 하세.” 하면서 다시 만 날 수 있게 되기를 빌며 헤어질 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0년을 전후하여 애국가를 이 곡조를 따서 부르기도 했습니다
< 애수 줄거리 >
안개 자욱한 런던. 워터루 브릿지 앞에 한 대의 차가 멈추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군복의 신사가 내립니다. 그는 알수 없는 회환의 눈물을 담고 브릿지 난간에 기대인 채 손에 쥔 작은 마스코스를 내려다 봅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옛 사랑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듭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휴가를 받아 돌아온 런던에서 내일 다시 부대로 돌아가야하는 25살의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은 공습경보에 놀라 허둥대는 한 처녀를 도와 지하철로 대피합니다. 혼잡한 대피소 안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는 두사람.그가 다시 전쟁터로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된 처녀는 로이에게 작은 마스코트를 주며 행운을 빌어 줍니다.
그날 밤. 올림픽 극장에서 올가 키로바 발레단의 공연을 관람하던 로이는 낮에 만났던 처녀를 무대 위에서 발견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이라 레스터. 발레단의 무희였지요. 다시 만난 반가움은 기쁨,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설레임으로 한 걸음씩 다가가던 두 사람은 서로 더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로이의 청혼을 행복하게 받아 들이는 마이라. 그들은 온 세상을 얻은 듯 기쁨에 들뜨지만, 미처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로이의 출정 명령이 떨어집니다.
실망스런 마음을 감춘채 워터루 브릿지 역에서 로이를 떠나 보낸 마이라는 공연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완고한 발레단에서 해고 되고 맙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일. 그러나 로이가 있어 행복한 그녀. 어느날 로이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마이라의 신변을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약속장소에 갔던 마이라는 우연히 전사자 명단을 보게 되고, 그 안에서 로이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로이를 잃음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마이라. 그녀에겐 현재도 미래도 없었습니다. 죽음 보다 더 캄캄한 삶을 하루 하루 살아 갈 뿐인 마이라는 거리로 몸을 내던집니다.
전쟁에 지친 남자들에게 웃음과 몸을 팔며 살아가던 그녀는 그 날도 워터루 브릿지역에서 오늘 밤 자신을 살 만한 남자를 찾아 역전 앞을 서성거립니다. 때 마침 기차가 도착하고 수 많은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리고 그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마이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와 그녀를 부등켜 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로이는 그렇게 마이라에게 돌아온 겁니다. 얼굴을 매만지며 많이 야위었다고 걱정해주고 어떻게 알고 마중나왔느냐고 신기해 하는 그를 그녀는 말없이 바라보며 눈물만 짓는데...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세월을 슬퍼하는 마이라와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는 로이. 행복한 결혼식을 앞두었지만 로이의 사랑을 받아 들일수 없는 마이라는 그를 떠나 안개 자욱한 밤에 워터루 브릿지를 거닙니다.
그 옆을 셀수 없이 지나가는 군용 트럭 들의 눈부신 헤드라이트. 한 순간, 그 눈부신 빛 속에 마이라의 눈물 젖은 모습이 멈추었고.. 그리고 귀를 찢는 경적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구는 마스코트.
한해를 마감하는 올드랭 사인의 구슬픈 멜로디가 흐르고...주인 잃은 작은 마스코트만이 차가운 보도 위에 남겨졌습니다.
[ 비비안 리의 가슴 시린 이야기 ]
"이 배우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면 연기력은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이 배우만큼 연기력이 뛰어나다면 아마 외모는 다음 문제가 아니겠는가?" (뉴욕 타임즈)
"그녀는 우아하고 경이롭게 움직이는 무용수 같은 델리케이트한 눈부신 난초다." (테니시 윌리암스)
이같은 말은 아마 헐리우드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우는 일생동안 이러한 찬사 속에서 살았고 배우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한 평생을 사랑과 이별로 점철된 파란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헐리우드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됐고, 아직도 기억되는 전설 중 하나가 됐지요.
이는 바로 정열의 배우, 비비안 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 하느님, 배우가 되게 해 주소서 "
1913년 인도, 프랑스인과 영국인 사이에서 또랑또랑한 여자 아이 비비안 리가 태어납니다. 어렸을 때 부터 배우가 꿈이었던 비비안은 항상 교회에 가면 "하느님, 제가 세계를 움직이는 유명한 배우가 되게 해 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비비안의 꿈이자, 환상이었고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 되던 해에 비비안은 집안의 강권에 못 이겨 31세의 허버트 리 홀만이라는 원숙한 남자와 결혼하고 맙니다. 비비안은 이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임신까지 했지만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했고 12살 차이나 나는 남자에게 일생을 바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현명한 아내, 자상한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배우 를 꿈꿔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비비안의 우상은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였습니다. 비비안 스스로 "올리비에는 내 삶의 등불" 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비비안은 올리비에를 사랑했고, 존경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은 배우가 되겠다는 비비안의 열정에 더더욱 불을 지폈고 결국 비비안은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준비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톱 스타 로렌스 올리비에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신예 비비안 리는 사적 모임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당시 올리비에는 유명 여배우 질 에이몬드와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비비안 역시 딸을 두고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에서 이것들은 조금의 장애물도 되지 못했습니다. 올리비에는 유달리 남다른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던 비비안에게 첫눈에 반하게 됐고 영화 <무적함대>에서 같이 공연할 것을 제안합니다.
< 배우로서의 첫 걸음마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렌스 올리비에를 만남으로써 비비안은 가정도 버리고 배우의 길에 매진하게 됩니다. 주체할 수 없는 끼와 자유분방함을 감출 수 없었던 비비안은 올리비에와 불타는 사랑을 했고 그를 따라 곧장 헐리우드로 날아갑니다. 그 당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빗 오 셀즈닉은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할 배우를 찾기 위해 2년 반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오디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이빗 오 셀즈닉은 이 오디션으로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었지만 2년 반 동안이나 적합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이었습니다. 셀즈닉은 감독 죠지 쿠커와 함께 수백명의 여배우를 만나 봤지만 항상 결과는 엉망이었고 "미모 뿐 아니라 스칼렛의 강렬함을 지닌 여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베티 데이비스, 캐더린 헵번, 조안 크로포드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계속되어 거론됐지만 셀즈닉의 대답은 항상 "NO!" 였을 정도니 말입니다. 그렇게 덧없는 시간이 정신 없이 흘러가던 중 셀즈닉은 형 마이론이 한 여성을 오디션 장에 데려온 것을 보았습니다. 초록빛 고양이 눈에 18인치 허리를 가진 강렬한 카리스마의 여성 -마치 스칼렛 오하라의 현신인 듯한 여성- 바로 비비안 리 였던 것입니다.
마이론은 셀즈닉에게 비비안 리를 선보이면서 이런 말을 던집니다. "자, 스칼렛 오하라를 만나보게나." 25살, 비비안 리는 이렇게 자신의 배우 인생 중 최고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 최고의 여배우로 우뚝 서다 >
당시 무명의 배우였던 비비안 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최종 주인공으로 낙점되자 헐리우드에선 미스 캐스팅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우선은 노마 셔려, 베트 데이비스, 캐서린 햅번 등 당대의 모든 여배우들과 진 아서, 수잔 헤이워드, 폴레트 고다드 등 장래가 촉망되는 신예들을 모두 제쳐두고 결정된 황당한 캐스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셀즈닉의 소신은 확고했고 비비안 역시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책으로만 100번 넘게 읽었던 비비안은 영화 속에 그대로 스칼렛 오하라 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투영시켰고 남자 주인공이었던 클라크 게이블과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입니다.
스칼렛 오하라와 비비안 리는 까탈스럽고 예민한 성격을 많이 닮아 있어 영화 촬영 중에 많은 일화를 낳았는데 특히 키스씬 도중 클라크 게이블의 입냄새 때문에 촬영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간 일은 유명한 일입니다. 이 정도로 비비안은 스칼렛 오하라 라는 배역에 심하게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캐스팅 후 "이 영화는 망했다!" 라는 헐리우드의 분위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개봉과 함께 급반전 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비비안 리는 그 자체가 스칼렛 오하라였고 신비스러운 매력과 날카롭고 아름다운 외모, 터질 듯한 연기력으로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결국 193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비안은 베트 데이비스, 아이린 던, 그레타 가르보, 그리어 가슨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여우 주연상을 수상합니다. 이미 예정되었다 할 만큼 언론에서는 "비비안이 여우주연상 인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비비안 역시 오스카의 여주인공이 됐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죠.
"하느님, 유명한 배우가 되게 해주세요!" 어린 시절 그가 간절히 원하던 기도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단 하나의 사랑, 로렌스 올리비에 >
1940년 8월 30일. 비비안 리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결혼을 감행합니다. 두 명 모두 서로의 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면서까지 벌어진 파격이었기에 미국사회는 발칵 뒤집어졌고... 그러나 비비안과 올리비에는 꿋꿋했습니다. 그들은 배우로서 서로를 존경했고, 인간으로서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넘칠 듯한 예술혼과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열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비비안은 더 없이 행복해 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올리비에를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 때문에 비비안은 올리비에의 아이를 낳기 위해 열중합니다. 그러나 18인치의 가는 허리와 선천적으로 약했던 비비안의 몸은 임신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유산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비비안 리는 유산의 충격으로 상당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됐고 이후 평생을 정신 분열에 가까운 정신병을 앓습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 리의 우울증이 유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비안은 영화배우로서 끊임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을 쏟았고 51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통해서 생애 두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비안의 정신병은 조울증으로 확대되고 줄담배와 무리한 촬영으로 인해 결핵에 까지 걸리게 됩니다.
비비안의 이러한 심각한 정신병은 올리비에와의 부부 관계도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비비안은 항상 폭음을 일삼았고 53년에는 정신 착란 증세로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당시 정신병에 흔히 사용되던 전기충격치료는 비비안의 심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 치료가 수 십번 반복되면서 비비안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로 치닫게 됩니다.
비비안은 여전히 올리비에를 사랑했지만 막상 올리비에를 만나면 욕설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혼해 달라라는 말까지도 쉽게 내뱉고 했습니다. 결국 20년 가까이 가던 이 결혼은 1957년 올리비에가 조안 플로라이트를 만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고 60년 합의 이혼하면서 처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올리비에와의 결별은 비비안으로서는 인생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비안은 올리비에와의 이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에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올리비에를 찾았고 그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죠. 올리비에는 완전히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초라한 정신병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신 분열과 착란, 심각한 조울증에 시달리던 비비안 리는 1967년 7월 7일 향년 54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것은 고양이 한 마리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 죽음으로 사랑을 되찾다 >
67년 당시 암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죽음을 듣자마자 비비안에게 달려옵니다. 올리비에는 고양이 한 마리만이 그녀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는 것에 대한 애절한 슬픔과 그에 비례하는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싸늘한 시신 옆에 주저앉아 "비비안의 죽음은 모두 내 책임이다"라며 흐느꼈다고 합니다.
올리비에는 비비안이 죽은 뒤에도 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22년 동안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22년 동안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사랑을 갈구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비비안을 더더욱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 번째 부인인 플로라이트의 극진한 애정과는 상관없는 그 무언가였을 겁니다.
1987년 올리비에의 친구가 올리비에를 찾아갔을 때 그는 TV 속에서 비비안 리의 영화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비안의 연기를 말 없이 보고 있던 올리비에는 굵은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는가, 친구? 비비안은 내 사랑이었네....그건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진짜 사랑이었다구."
< 열정의 배우, 비비안 리 >
"우리는 결코 비비안 리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한 빛을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지닌 마력은 오직 그녀만의 소질이었습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외모와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영화배우로서, 스칼렛 오하라로부터 블랑쉬 드보아, 줄리엣, 헨리에테, 오필리아, 안티고네, 클레오 파트라 등에 이르기까지 비비안 리는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여배우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고 마는 열정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추도식의 조사 中)
비비안 리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간 배우입니다. 런던 증권가의 부호였던 아버지 덕에 유년시절 부터 상류층의 문화를 누렸고 배우가 되기 위해 헐리우드로 날아갔으며 로렌스 올리비에와 치명적인 사랑을 했던 그녀는 쓸쓸한 말년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가 아름답고 도도한 배우로서, 요염하고 날카로운 여성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것은 뛰어난 연기력과 아름다운 외모가 살아 숨쉬는 수많은 작품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작품 속의 비비안 리야 말로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 중 가장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비비안 리.....그녀는 진정한 배우였던 것입니다.
* <애수>의 명장면 모음
첫댓글 영화의 원제목이 "Waterloo Bridge"였지요. 영화처럼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비비안리의 비애가 여러 영화장면과 오버랩 되어 더욱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게 됩니다. 마빈 르로이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마음의 행로”와 “애수”는 엔딩이 정반대이면서도 두 영화가 주는 진한 여운은 매우 흡사하게 느껴졌지요. 또 한명의 불멸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의 영화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좋은 내용 즐감했습니다.
유총장(뫼두열 사무총장,식솔이 많다보니까 직함을 높여...)이 오랫만에 들어왔구려.
마빈 르로이 감독,그리어 가슨 주연의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도 왕년의
영화팬들에게 깊이 각인된 명화였죠.
이밖에 르로이 감독의 영화로는 <작은 아씨들>,<쿼바디스>가 생각납니다.오드리
헵번에 대하여는 영화<전쟁과 평화>를 올릴 때 소개할까 해요.오드리의 대표작인
<로마의 휴일>은 음악이 별로여서 고려를 하고 있지 않아요. 월말 산제 지낼 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