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派(경파)
京派(경파)의 派祖(파조)인 金牧卿(김목경)은 高麗(고려) 忠定王(충정왕)때 曺頔(조적)의 亂(난)을 平征(평정)하는데 功(공)을 세워 金寧君(김녕군)에 封(봉)해졌으며, 當時(당시) 混亂(혼란)한 國政(국정)을 慨嘆(개탄)하여 政堂文學(정당문학) 李兆年(이조년)과 함께 累次(루차) 王(왕)에게 上疏(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俗離山(속리산)으로 들어가 世上(세상)과 因緣(인연)을끊고 餘生(여생)을
마쳤다.金牧卿(김목경)의 맏아들 金普(김보)는 恭愍王(공민왕)이 世子(세자)때 國家(국가)의 使節(사절)로서 중국(중국)의 北京(북경)에 갈때 侍從(시종)한 功으로 一等功臣(일등공신)의 號(호)를 받았다. 金普(김보)의 6世孫(6세손)金永堅[김영견 : 同知中樞府(동지중추부사)],金永瑞[김영서 : 縣監(현감)],金永貞[김영정 : 成宗(성종)때 大司憲(대사헌)],金永純[김영순 : 漢城判官(한성판관)]4兄弟(4형제)가 빼어났으며,肅宗(숙종)때 名臣(명신)金宇杭(김우항)은 金永貞(김영정)의 後孫(후손)으로 1713年(肅宗39年)右議政(우의정)에
올랐다.
四君派(사군파)
四君派(사군파)에서는 派祖(파조)인 金益卿(김익경)의 孫子(손자) 金振門(김진문)이 高麗末(고려말)에 禮儀判書(예의판서)를 거쳐 大提學(대제학)에 올랐으나 朝鮮(조선)이 開國(개국)하자 官職(관직)을 버리고 李穡(이색),朴自儉(박자검)等(등)과 함게 隱遁(은둔) 生活(생활)하여 節義(절의)를 지켰으며,그의 둘째
아들 金錘(김추)는 都摠管(도총관)을,넷째 아들 金錫(김석)은 贊成事(찬성사)를
지냈다. 막내 金肇(김조)는 世宗(세종) 때 集賢殿修撰(집현전수찬)을 거쳐 禮曺判書(예조판서)에 올랐으며, 直提學(직제학)을 歷任(역임)할 때 蔣英實(장영실)과 함께 簡儀臺(간의대),自擊漏(자격루),渾天儀(혼천의)等(등)을 만든 것으로 傳(전)한다.特(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蒙恩祭(몽은제)를 올리는 忠臣(충신)으로도 이름이 났고,世宗(세종)이 平素(평소)의 所願(소원)을 묻자 "百年(백년) 同安(동안) 날마다 御榻[어탑 : 임금이 앉는 諸具(제구)을 모시고 金葵化(금규화) 앞에 進退(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願(원)합니다"라고 對答(대답)한 것으로 "筆苑雜記(필원잡기)"에 傳(전)한다.
한便(편) 金振門(김진문)의 6世孫(6세손) 金克禧(김극희)가 名射手(명사수)로 李舜臣(이순신)將軍의 幕下(막하)에서 戰功(전공)을 세우고 閑山島(한산도)싸움에서 戰死(전사)했으며,그의 조카 金完[김완 : 鶴泉君(학천군)金克祧(김극조
)의 아들]은 逆戰(역전)의 名將(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南原大捷(남원대첩)에 功(공)을 세웠던 그는 1624年(仁祖2年)李适(이괄)의
亂(란)을 平征(평정)할 때 碧潼(벽동)의 城(성)을 死守(사수)했던 名將(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金宇(김우)의 아들 金汝峻(김여준)은 볼모로 잡혀가는 昭顯世子(소현세자 : 仁祖의 맏아들 仁烈王后(인열왕후) 韓氏(한씨)의 所生(소생)와 璘坪大君(인평대군)을 護從(호종)한 18壯士(장사)의 한 사람으로 中國(중국) 審陽(심양)에 갔을 때 玉河關(옥하관)에서 世子(세자)를 護從(호종)하고 소리내어울렸다는"月明飛雁(월명비안)"의 노래를 읊어 더욱
名聲(명성)을떨쳤으며,그의
勇力(용역)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決鬪(결투)를 申請(신청)해 온 淸(청)나라 將帥(장수
)禹巨(우거)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丙子胡亂(병자호란)의 屈辱(굴욕)과 人質(인질)로 잡혀가는
世子(세자)를 護從(호종)하는 悲哀(비애)等(등)百姓(백성)들의 怨恨(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其後(그후) 世子(세자)가 돌아와 卽位(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玉河關(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詩題(시제)에"月明飛雁(월명비안)"의 노래를 자주 出題(출제)하였다
한다.
宋象賢(송상현), 劉克良(유극량)과 더불어 三忠節(삼충절)로 일컬어진 金東光(김동광)은 淮陽府使(회양부사)로 在職時(재직시)壬辰倭亂(임진왜란)일어나
城(성)이 陷落(함락)되자 左右(좌우)를 避亂(피란)시키고 城(성)의 正門(정문) 앞에 朝服丹粧(조복단장)한 채 官印(관인)을 쥐고 端坐(단좌)하여 敵(적)에게 抵抗(저항)하다가 慘殺當(참살당)하여 禮曺參判(예조참판)에 追贈(추증)되었다.
三賢派(삼현파)
三賢派[(삼현파 : 判圖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의 1世祖(1세조)인 金管(김관)은 高麗(고려)에서 版圖判書(판도판서)를 歷任(역임)하고 學校(학교)를 建設(건설)하여 儒學(유학)을 振興(진흥)시키는 等(등) 나라에 많은 功(공)을
세웠으며,그의 玄孫(현손) 金克一(김극일)은 孝行(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金克一(김극일)의 아들 金孟(김맹)은 世宗(세종)때 文科(문과)에 올라 執義(집의)를 지냈으며,밤에 龍馬(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金駿孫(김준손),金驥孫(김기손),金馹孫(김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兄弟(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金氏三珠(김씨삼주)"로
일컬어졌다.
金馹孫(김일손)은 1486年(中宗17年)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일찍이 金宗直(김종직)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읽고 金宏弼(김굉필),鄭汝昌(정여창)等(등)과 親交(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史官(사관)으로 있을 때 全羅監司(전라감사) 李克墩(이극돈)의 非行(비행)을 史草(사초)에 썼다가 그의 怨恨(원한)을 사게 되었다. 燕山君(연산군)이 登極(등극)하여 成宗實錄(성종실록)을 編纂(편찬)할때 工巧(공교)롭게도 李克墩(이극돈)이 堂上官(당상관)으로 參與(참여)하여 史草(사초)를 살피게 되니 金馹孫(김일손)의 스승인 金宗直(김종직)이쓴 弔意帝文[(조의제문:世祖(세조)의 王位簒奪(왕위찬탈)을 非難(비난)한글)을 실은 것이 發見(발견)]되어, 李克墩(이극돈)이 盧思愼(노사신),尹弼商(윤필상), 韓致亨(한치형) 等(등)과 함께 燕山君(연산군)에게 알려 戊午士禍(무오사화)가 일어나 金馹孫(김일손)은 權五福(권오복),權景裕(권경유),李穆(이목)
等(등)과 함께 斬首(참수)當(당)하였고,金宗直(김종직)은 剖棺斬屍[(부관참시
:죽은 뒤에 큰 罪가 드러나 무덤을파고 棺*관)을꺼내어 屍體(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金馹孫(김일손)의 强直(강직)한 氣槪(기개)와 才能(재능)은 後日(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中宗(중종) 때의 領議政(영의정) 南袞(남곤)은 말하기를
"世上(세상)에 다시 濯纓[탁영:金馹孫(김일손)의 號(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그의 文章(문장)을 물에다 比하면 濯纓(탁영)은 江河(강하)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金馹孫(김일손)의 짧은 生涯(생애)를 哀惜(애석)하게
여겼다.
三賢(삼현)의 한 사람인 金大有(김대유)는 金馹孫(김일손)의 조카이며 金駿孫(김준손)의 아들이다. 戊午士禍(무오사화)에 叔父 金馹孫(김일손)이 斬首當(참수당)하자 父子(부자)가 함께 湖南(호남)에 流配(유배)되었다가 中宗(중종) 때 풀려나와 平生(평샌)을 慷慨(강개)한 志節(지절)로 살았으며,3個月間(3개월간)의 漆原縣監(칠원현감)을 마지막 벼슬로 辭職(사직)하고 淸道(청도)의 雲門山(운문산) 속 三足堂(삼족당)에서 73歲(73세)로 一生(일생)을 마쳤다. 金馹孫(김일손)의 曾孫(증손) 金彦諭(김언유)는 故鄕(고향)에 살면서 至極(지극)한 孝行(효행)으로 名望(명망)이 높았고, 詩(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特(특)히 松雪體(송설체)에 能(능)하여 碑(비)와 屛風(병풍),簇子(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金彦諭(김언유)의 아들 金玄成(김현성)은 光海君(광해군)때 廢母論(폐모론)에 不參(불참)하여 免職(면직)되자 淸貧(청빈)하게 餘生(여생)을 마쳤으며,詩書畵(시서화)에 모두 能(능)했다.
그 밖의
人物(인물)로는 深河(심하)의 戰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운 金景瑞(김경서)와 韻書(운서)를 깊이 硏究(연구)하여 中國語(중국어)에 能通(능통)했던 金德承(김덕승),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 金禮直(김예직),朝鮮(조선) 風俗畵(풍속화)의 大家(대가) 金弘道(김홍도)가 有名(유명)했고,忠孝旌閭(충효정려)를 賜額(사액)받은 金晋熙(김진희)와 "海東歌謠(해동가요)"를 남기고 "靑丘永言(청구영언)"을 編纂(편찬)한 金天澤(김천택) 等(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