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묘갈명[학계 전해 묘갈명 병서]
공의 이름은 해, 자는 대용, 성은 전씨이다.
고려조에 동정을 지낸 전학준은 바로 그의 윗대 조상이 된다.
중세에 전유는 판도판서 상호군으로 옥천군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이로 인해 본관으로 삼았다.
증조의 이름은 전희철인데 상호군을 지냈고 영천으로 이사를 왔으며, 할아버지의 이름은 전박인데, 현릉참봉을 지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전응삼으로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했고 뜻이 고상했다.
호는 칠리수다.
어머니는 원성 변씨로 교수를 지낸 변이의 따님인데 가정 병신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으로 지조가 굳었고 신중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며 명리에는 담박했으니 일찍이 서애 유선생의 천거로 통례원 인의의 벼슬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처가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딱하게 여겨 집과 종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청렴하고 고결하기가 대체로 이와 같았다. 호는 학계이다.
만력 임인년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67세였고, 묘소는 고을 동쪽 두월 오향 둔덕에 있다. 부인은 의인이니 풍산유씨이며 대사헌을 지낸 귀촌 유경심의 따님인데 묘소는 고을 동쪽 묵동 임방을 등진 산등에 있다.
6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전성헌은 승훈랑이고, 전사헌은 봉사로 한강 정선생의 문인인데 임진 선무공신에 들었고『창의록』을 남겼다.
전시헌은 선교랑이고, 전상헌은 통덕랑이고, 전신헌은 통덕랑이고, 전이헌은 첨추인데 야옹공의 사손이 되어 대를 이었으며 서애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딸은 배응취, 권섬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배응취는 문과에 올라 목사를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맏아들 승훈랑의 아들은 전유흠인데 생원이고,
둘째 아들 봉사의 아들은 전유중이고, 셋째 선교랑은 3남이 있는데 전유익은 생원이며, 전유경, 전유장은 참봉이다. 넷째 통덕랑 전상헌의 아들은 전유항이고, 다섯째 통덕랑 전신헌의 아들은 전유득이며, 여섯째 첨추는 4남이 있는데 전유일, 전유신, 전유성, 전유룡이다.
전유일의 현손인 전치도가 구음의 서재로 나를 찾아보고, “선조 인의공의 묘소에 아직 비를 세우지 못했는데 이제 작은 빗돌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선조께서는 이미 덕을 숨겨서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기에 기술할만한 사적과 공로가 없으며 또한 집이 여러 번 화재를 만나 남긴 글도 흩어져서 전하지 않습니다. 평소의 뜻과 행실을 그 열에 한 둘도 상고해서 찾을 길이 없어 오직 세계와 생몰연대 및 성명을 서술해서 묘소에 표시하려고 하는데 이 또한 일이기에 이에 감히 외람되지만 비문을 부탁합니다.”
고 했다.
나는 나이 먹고 병든 몸이어서 실로 이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했으므로 누차 사양을 했으나 용납이 안 되어 마침내 가첩에 근거하여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한다.
현재 임금 11년 신미년 동짓날,
통정대부의 품계로 전 행승정원 우부승지로 있으며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한 문소 김굉이 삼가 지음.
全海墓碣銘
鶴溪 全海 墓碣銘 幷序
公諱海 字大容 姓全氏 高麗同正諱學浚 卽其上祖也 中世有諱侑版圖判書上護軍 封沃川君 子孫因以爲貫 曾祖諱希哲 上護軍 移居榮川 祖諱珀 顯陵參奉 考諱應參 俱中生進 有高趣 號七里叟妣原城邊氏 敎授廙女 以嘉靖丙申 生公 天性耿介 謹約自守 於名利泊如也 嘗以西厓柳先生薦授通禮院引儀 不就 婦家悶其貧乏 資給庄獲 辭不受 其廉潔高古 類如此 號鶴溪 歿于萬曆壬寅 享年六十七 墓在郡東斗月面午原 配宜人豐山柳氏 大司憲龜村景深女 墓郡東墨洞負壬原 六男 成憲承訓郞 士憲奉事 受業於寒岡鄭先生參壬辰宣武功 有倡義錄 時憲宣敎郞 常憲通德郞 愼憲通德郞 彛憲僉樞 出爲野翁公嗣孫 登西厓先生門 二女 裴應聚文牧使 贈參判 權暹 承訓一男 有欽生員 奉事一男 有中 宣敎三男 有益生員有慶 有章參奉 通德郞一男 有恒 通德郞一男 有得 僉樞四男 有一有信有性有龍 有一之玄孫致道 訪余龜陰之社曰 先祖引儀公墓尙無顯刻 今始具短碣 而先祖旣隱德不仕 無事功可述 家又累經回祿 遺文字 亦蕩佚無傳 凡平日志行 無由考尋其一二 惟有叙次世系 生卒子姓 以表隧道 亦一事也 茲敢竊有請焉 且余耄且病 實不足以相茲役 而累辭不獲
則遂就家牒 而謹識之如右
上之十一年辛未南至節
通政大夫 前行承政院右副承旨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聞韶金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