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2리 469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40호
[松月堂(송월당) 현판]
[松月堂重建記(송월당중건기)]
[松月堂(송월당) 전경]
본 건물은 松月堂(송월당) 全愼憲(전신헌)이 조선후기에
건립한 정자로 그 후 담은 없어지고 樊巖(번암) 蔡濟恭(채제공)이 쓴
편액만 전해 내려오다가 그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옛자리곁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칸반의 3량가 납도리 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마루방 1칸, 온돌방 2통칸을 연이어 배열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이곳에 주차를 해 놓고 오늘의 답사지인 逸愚亭(일우정)으로 향했다.
[송월당 앞 길 가에 피어 있던 맨드라미]
이곳의 맨드라미는 벌써 소개해 드렸지요.
혹 못 보신 이웃님들 들려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셔서 보셔요.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pts47&folder=21&list_id=12939539
[무수촌 된장마을의 장독]
일우정을 찾아 가는 길 눈앞에 펼쳐지는 장독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렸지요.
바로 그 유명한 무수촌 된장마을이라 하네요.
무수촌 된장마을 소개는 내일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처음의 답사일정지인 일우정과 우엄고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멋스런 가로등]
[逸愚亭(일우정) 전경]
일우정은 全奎炳(전규병, 1840~1905)이
1866년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에
'逸愚臺(일우대)'를 새긴 후, 1868년에 정자를 짓고
溪堂(계당) 柳疇睦(유주목)에게 청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逸愚亭(일우정) 앞 안내팻말]
이번 답사길엔 큰 실수를 하였답니다.
보통 디카를 P에 놓고 촬영을 하는데, 가방에 넣었다 꺼냈다 하는 과정에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S로 전환이 되었는줄도 모르고 그냥 담았지요.
나중에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P로 하였지만,
그만 사진들이 하얗게 뿌옇게 나와버렸어요...ㅠ.ㅠ
[안내판 글 내용]
[逸愚亭(일우정)과 뒷쪽에 보이는 우엄고택]
전규병의 본관은 沃川(옥천), 字(자)는 汝明(여명), 號(호)는 愚?(우엄)이다.
계당 유주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철종 12년(186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 '愚?先生文集(우엄선생문집)' 2冊(책)이 있다.
[逸愚亭(일우정) 현판]
[逸愚亭(일우정)]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전면에는 낮은 누마루를 설치하고 軒檻(헌함)을 둘러 격식을 갖추었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반 칸 마루를 설치하였고,
좌측 반 칸은 양분하여 앞 공간에는 위패를 모실 수 있는 작은 사당을 마련한 점이 주목된다.
정자와 연못, 금석문과 편액, '逸愚亭昌酬錄(일우정창수록)' 등
현존하는 유적과 기록를 통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선비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逸愚臺(일우대)]
[雲崗臺(운강대)]
[雲崗(운강)]
雲崗(운강)이란 멋스런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운강대 안내 표석]
[일우정과 우엄고택 옆 전경]
운강대를 내려오며 담아 본 일우정과 우엄고택 옆 전경
[우엄고택]
일우정뒤쪽에는 살림집인 우엄고택이 있는데
영남지방의 전통적인 선비집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완전한 'ㅁ'자형의 집에 사랑채보다
안채가 약간 높으며 사랑채는 바깥쪽으로 문과 대청이 나 있다.
[우엄고택]
마당 중앙에는 작은 우물과 장독이 조경처럼 들어앉았고
대문칸에는 커다란 솥들이 아궁이위에 걸쳐져 있다.
사랑채의 방 두 개가 민박으로 사용되는데 모두 군불을 떼는 아궁이가 달려있다.
다소 외지고 오래된 집이지만 정자와 연못 등 현존하는 유적과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살았던 선비들의 삶과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다.
[七里亭(칠리정) 현판]
[七里亭記(칠리정기)]
[七里亭記(칠리정기)]
[장독대와 송월당 바로 앞쪽으로 있는 七里亭(칠리정))]
七里(칠리) 全應參(전응삼) 선생은
이곳 이계 마을의 입향시조인데 자는 秀夫(수부). 호는 七里(칠리).
참봉 珀(박)의 넷째 아들로 명종 1년(1546) 司馬兩試(사마양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自適(자적)하며 일생을 마친 분이시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540호
[松月堂(송월당) 현판]
[松月堂重建記(송월당중건기)]
[松月堂(송월당) 전경]
본 건물은 松月堂(송월당) 全愼憲(전신헌)이 조선후기에
건립한 정자로 그 후 담은 없어지고 樊巖(번암) 蔡濟恭(채제공)이 쓴
편액만 전해 내려오다가 그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옛자리곁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칸반의 3량가 납도리 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마루방 1칸, 온돌방 2통칸을 연이어 배열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깔아 놓았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이곳에 주차를 해 놓고 오늘의 답사지인 逸愚亭(일우정)으로 향했다.
[송월당 앞 길 가에 피어 있던 맨드라미]
이곳의 맨드라미는 벌써 소개해 드렸지요.
혹 못 보신 이웃님들 들려보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셔서 보셔요.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pts47&folder=21&list_id=12939539
[무수촌 된장마을의 장독]
일우정을 찾아 가는 길 눈앞에 펼쳐지는 장독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렸지요.
바로 그 유명한 무수촌 된장마을이라 하네요.
무수촌 된장마을 소개는 내일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처음의 답사일정지인 일우정과 우엄고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멋스런 가로등]
[逸愚亭(일우정) 전경]
일우정은 全奎炳(전규병, 1840~1905)이
1866년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에
'逸愚臺(일우대)'를 새긴 후, 1868년에 정자를 짓고
溪堂(계당) 柳疇睦(유주목)에게 청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逸愚亭(일우정) 앞 안내팻말]
이번 답사길엔 큰 실수를 하였답니다.
보통 디카를 P에 놓고 촬영을 하는데, 가방에 넣었다 꺼냈다 하는 과정에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S로 전환이 되었는줄도 모르고 그냥 담았지요.
나중에서야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P로 하였지만,
그만 사진들이 하얗게 뿌옇게 나와버렸어요...ㅠ.ㅠ
[안내판 글 내용]
[逸愚亭(일우정)과 뒷쪽에 보이는 우엄고택]
전규병의 본관은 沃川(옥천), 字(자)는 汝明(여명), 號(호)는 愚?(우엄)이다.
계당 유주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철종 12년(186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 '愚?先生文集(우엄선생문집)' 2冊(책)이 있다.
[逸愚亭(일우정) 현판]
[逸愚亭(일우정)]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전면에는 낮은 누마루를 설치하고 軒檻(헌함)을 둘러 격식을 갖추었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반 칸 마루를 설치하였고,
좌측 반 칸은 양분하여 앞 공간에는 위패를 모실 수 있는 작은 사당을 마련한 점이 주목된다.
정자와 연못, 금석문과 편액, '逸愚亭昌酬錄(일우정창수록)' 등
현존하는 유적과 기록를 통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선비들의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逸愚臺(일우대)]
[雲崗臺(운강대)]
[雲崗(운강)]
雲崗(운강)이란 멋스런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운강대 안내 표석]
[일우정과 우엄고택 옆 전경]
운강대를 내려오며 담아 본 일우정과 우엄고택 옆 전경
[우엄고택]
일우정뒤쪽에는 살림집인 우엄고택이 있는데
영남지방의 전통적인 선비집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완전한 'ㅁ'자형의 집에 사랑채보다
안채가 약간 높으며 사랑채는 바깥쪽으로 문과 대청이 나 있다.
[우엄고택]
마당 중앙에는 작은 우물과 장독이 조경처럼 들어앉았고
대문칸에는 커다란 솥들이 아궁이위에 걸쳐져 있다.
사랑채의 방 두 개가 민박으로 사용되는데 모두 군불을 떼는 아궁이가 달려있다.
다소 외지고 오래된 집이지만 정자와 연못 등 현존하는 유적과 기록을 통하여
조선시대 말기에 살았던 선비들의 삶과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다.
[七里亭(칠리정) 현판]
[七里亭記(칠리정기)]
[七里亭記(칠리정기)]
[장독대와 송월당 바로 앞쪽으로 있는 七里亭(칠리정))]
七里(칠리) 全應參(전응삼) 선생은
이곳 이계 마을의 입향시조인데 자는 秀夫(수부). 호는 七里(칠리).
참봉 珀(박)의 넷째 아들로 명종 1년(1546) 司馬兩試(사마양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自適(자적)하며 일생을 마친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