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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믿음의 적이다(사41:8-16)-2013.2.10
믿음에는 두 가지의 적이 있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의심보다는 두려움이 더 무섭습니다. 의심이 발전되어 두려움이 되거든요. 예를 들어, 건강이 의심스러우니까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아내가 의심스러우니까 의처증이 생기고, 남편이 의심스러우니까 의부증이 생깁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우니까 두려움이 생기고, 하나님의 은혜가 의심스러우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성도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도 가장 쉽게 마주치는 대적입니다. 아무리 좋은 믿음을 소유한자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믿음이 파선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영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불신의 바이러스입니다.
상담자로 유명한 앤 랜더즈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4대 요소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믿음, 소망, 사랑,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긍정적으로 움직이나, 두려움은 인간을 부정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믿음이 없을 때 생기고, 소망이 없을 때 생기며, 사랑이 없을 때 생기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지렁이 같은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고 부르십니다. 자기 백성을 지렁이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바벨론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의 상황이 마치 지렁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볼품없는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다는 표현함은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지렁이같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이 긍휼하심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여건속에서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결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세상은 온통 두려움의 전시장과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인간을 두렵게 하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마치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의 창고와도 같습니다. 한시라도 두려움이 없는 시간도 없고, 두려움이 없는 장소도 없습니다. 그런 두려운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루도 안전하거나 편할 날이 없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하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화 한통만 울려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당장 의식주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저 너머 영원한 세계까지 천차만별의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해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뿌려놓은 죄악의 바이러스입니다. 누구라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두려움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편안해야 할 가정도 두려운 공간이 되고, 심지어는 상당수의 교회마저 두려움의 공동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두려움의 존재가 됩니다. 미안하지만 배우자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부모형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가 두려움의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도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옥죄기도 하고, 성공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때로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개방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또한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현대인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두려움의 덩어리들입니다. 요즘은 건강백세를 살아가는 시대라서 젊어서부터 노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한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두려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애당초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다만 예수 믿는 성도는 두려움의 바다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두려움속에 빠져서 허덕이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의 존재를 인정하고 두려움을 다스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의 노예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가장 가까운 주변에 정말 많습니다. 두려움은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과 루트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건강을 타고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때로는 돈을 타고 들어오고, 명예와 권세를 타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두려움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영적인 것, 육신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솔직히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큰 이유는 죽음을 통해 좋은 세상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사후세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 앞에 장사가 없습니다. 때문에 죽음 앞에 자유 할 인간도 없습니다.
자기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치던 나폴레옹에게 어떤 병사가 질문을 했답니다. "장군께서는 어느 때가 가장 무서운 때입니까?" 그러자 나폴레옹은 뜻밖의 대답을 하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발사를 불러다 면도를 할 때가 제일 무섭다네. 이놈의 면도칼이 목 줄기를 훑을 때는 으스스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부하를 시켜 이발사의 아들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 아이의 목을 잡고 있게 한다네. 이발사가 내 목을 베는 날에는 그 아들 녀석도 목 졸려 죽는 거지 뭐"
사람들은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사후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죽음앞에서는 엄숙해지고 겸손해집니다. 믿음생활을 안하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큰 소리치던 인간이라도 막상 당신이 죽으면 지옥간다고 말하면 엄청나게 기분 나빠합니다.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듣기는 싫어도 화를 내며 분노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옥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임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간접적으로 그런 사후세계를 믿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나라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당시 유대는 바벨론의 포로에서 다시 바사정권으로 넘어가게 되자 몹시도 불안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할 수 밖애 없는 이유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렁이같이 말입니다. 지렁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연약하고 무능하고 더럽고 추한 지렁이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렁이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지렁이보다 약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렁이같은 인간들은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두렵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도들에게 두려움은 믿음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믿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두려운 생각이 스쳐갈 수는 있고, 머물다 갈수는 있을지라도 두려움에 메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의 열두 정탐군들처럼 말입니다. 열 두명 모두가 똑같은 환경을 정탐하고 왔지만 열명의 정탐군은 두려움에 지배를 당했고, 두명의 정탐군은 두려움을 지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불신자와 성도의 두려움에 대한 가장 큰 차이입니다. 성도는 두려움에 지배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두려움을 없애달라는 주문처럼 바보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수영선수가 물이 무서우니 물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영선수는 물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도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의 반대말은 두려움이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의 반대적인 개념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안에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적인 두려움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0장24-33절을 보시면 세가지 두려움을 삼가라고 말입니다. 원수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두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방해야 합니다.
사실상 모든 두려움은 사단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초조와 낙심을 만들어서 범사를 두렵게 만들려고 합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종종 두려움에 빠집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내적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실체를 가만히 살펴보면 허수아비와 같습니다. 일종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참새들은 허수아비를 보고 무서워 달아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참새들은 허수아비 근처에 잘 여문 곡식들이 많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로운 참새가 되길 바라고 계실는지 모릅니다.
땅에 있는 살쾡이가 나무 위에 있는 다람쥐를 사냥하는 비법이 있답니다. 땅에서 나무 위에 있는 다람쥐를 발견한 살쾡이는 순간 매서운 눈초리로 다람쥐의 눈을 응시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람쥐는 스스로 두려움의 파장을 내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만 땅 아래 살쾡이 발 앞에 뚝 떨어져 먹이가 되고 만답니다. 피할 길은 얼마든지 있는 데도 말입니다. 솔직히 지나고 보면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렸을 적 가끔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술을 먹고 밤길을 걷던 사람이 도깨비와 저녁내내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깨비를 전봇대에다 묶어놓고 아침에 가보니 싸리로 만든 빗자루였답니다. 도깨비가 아니라 허깨비를 본 것입니다. 두려움은 마치 허깨비와 같습니다. 허깨비같은 두려움에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말씀속에서 두려워 말라고 주문하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 두려워말라는 말씀성구가 무려 366번이 나온다고 합니다. 일년365일을 두려움없이 살라는 말씀이랍니다. 그리고 한번이 추가된 것은 4년마다 찾아오는 윤년 때문이라는군요. 재미있는 해석이지만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세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의 원인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증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능히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디모데후서1장7절은“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무기는 당연히 기도입니다. 시편기자는“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셨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 주님도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빌립보서4:6“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전혀 문제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꼬마 아이를 만났습니다. "얘야,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얼굴로 대답합니다. "아뇨".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우리 아빠가 이 공동묘지 지키는 사람이거든요."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본문(10,14절)에서 두려워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지렁이같은 야곱이라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그들을 굳세게 하시며, 붙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요. 마치 모세가 비스가산에서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를 향해 하나님이 하신 말씀처럼.“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맞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것도 겁나지 않습니다. 무섭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이라도 물리치는 능력이 있지만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고백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두려움은 성도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대적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있다고 큰 소리치는 성도를 한방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한순간에 영적 패잔병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안에 있는 두려움을 예수의 이름으로 추방합시다. 한 두 번 두려움에 패배했을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다. 사실 홈런선수가 삼진아웃을 잘 당합니다. 반드시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두려움이라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한 결과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우리는 어떠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용기와 담력을 줍니다.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줍니다. 결정적으로 강하게 하사 능력과 권능을 부어주십니다. 모든 세상의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된 자들이 두려움에 메어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가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범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때문에 두려움을 예수의 이름으로 추방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두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마귀가 겁을 주려고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 갈 것입니다. 마귀도 건들만하니까 건듭니다. 애당초 믿음의 담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물리치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당당하게 선포하십시오. 어떠한 두려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더러운 귀신아 물러갈지어다!!!
여러분? 개도 눈동자보고 덤벼듭니다. 어설프게 겁을 내고 소리를 지르니까 컹컹 짖으며 덤벼듭니다. 개도 어린아이나 여자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덤벼듭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기를 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하면 왠만한 개는 금방 꼬리 내립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렵다고 겁내지 마십시오. 아니 세상이 주는 어떤 두려움앞에서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담대하게 외치고 나가십시오. 죽기를 각오하면 무서운 게 없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앞에 선 소년 다윗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다윗에게는 결코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죽음의 문제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엄청난 파도가 밀려와도 겁내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라도 우리 주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대적들은 망할 것이며, 그들과 싸우던 자들은 허무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렁이같은 야곱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카로운 타작기계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세상이 주는 어떤 두려움도 겁내지 마십시다. 오직 우리 믿는 성도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적인 모든 두려움에서 반드시 건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201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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