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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파 두목이라는 ‘주홍글씨’
두 사람의 구속에 대해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구속당할 짓을 했다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름값’ 때문에 혐의가 과장됐으며 억울한 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경상대병원 병실에서 기자를 맞은 김태촌씨는 “서방파 두목이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따라 다닌다”며 “국민에게 ‘또 김태촌이네’ 하는 인식을 심어준 게 억울하고 한스럽다”고 호소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조양은씨의 부인 김모씨는 “무리한 수사”라며 “이미 갈취 혐의는 빠졌고 폭행 부분도 본인은 억울하다고 한다.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국내 조직폭력계의 산 증인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조직폭력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다. 조직폭력의 역사는 곧 우리 사회의 이면사다. 그 이면사에는 인간의 속성인 폭력이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표출돼 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 사회 이면사의 단면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암흑가의 제왕이던 두 사람이 빛의 세계인 신앙의 길을 지향하다 다시 어둠의 거리로 내몰린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신조를 갖고 있는 강력부(현 마약조직범죄수사부) 검사들은 주먹의 ‘개과천선’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과연 두 사람은 검사들의 그런 신조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여생을 바칠 것인가.
김승연 회장 사건을 맞아 수사기관과 언론에서는 범서방파나 양은이파 앞에 ‘전(前)’자를 붙이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두 조직이 건재한 것처럼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두 조직은 오래 전에 와해됐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 사업가로 탈바꿈했다. 다만 명불허전이라고, 과거에 양은이파와 범서방파 식구였다고 하면 건달세계에서 족보를 인정해주는 정도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언론이나 수사기관에서 보는 것과 달리 현재 주먹계에서 두 사람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100명 동원이 가능하다는 주먹계 실력자 백모씨는 “현재 서방파와 양은이파라는 조직은 없다. 옛날 브랜드일 뿐이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옛 동생들은 다 ‘개인 플레이’를 하고 있다. 형-동생 관계로 지낼 뿐 조직 활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 지방 중소도시에서 20여 명의 동생을 이끌고 있는 Y씨도 “양은이형과 태촌이형 시대는 끝났다.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며 “개념 없는 기자가 많다”고 언론을 비판했다.
두 사람이 여전히 주목을 받는 것은 과거에 화려했던 명성 때문이다. 그 이름값으로 두 사람은 지금 양지와 음지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 이름값은 또 수사기관의 실적 쌓기에 변함없이 매력적인 소재다.
“늘 칼 차고 다녔고, 만나면 싸웠다”
행동대장급에 지나지 않던 조양은씨를 일약 차세대 주먹의 선두주자로 부각시킨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그의 숙적인 김태촌씨가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신상사파와 가까웠던 박종○, 오기○씨 등 호남파 주먹들이 후배인 김씨에게 보복 명령을 내린 것. 김씨는 당시 신상사를 큰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김씨는 특공대를 조직해 조씨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두 사람 간에 벌어진 이른바 ‘3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조씨를 찾아다니던 김씨는 어느 순간 표적을 조씨의 보호막인 오종○씨로 바꿨다. 오씨를 제거하면 조씨가 설 땅이 없어지리라는 계산에서였다.
1976년 3월, 김씨의 특공대원 7~8명이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주차장 부근에서 오종○씨를 습격했다. 오씨의 아우가 몇 명 있었지만 대검과 도끼, 낫으로 무장한 특공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공대는 오씨의 하체를 난도질했다. 오종○이라는 호남 주먹의 거목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김태촌씨는 공격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현장 지휘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오씨는 사실상 주먹계에서 은퇴했고, 조양은씨와 김태촌씨는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서로 상대방의 영역을 기습해 ‘연장질’을 하는 사건이 수시로 발생했다.
김씨측이 조씨측을 친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퍼시픽호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씨측이 퍼시픽호텔에 있던 박모씨 등 조씨의 부하들을 급습해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김씨의 옛 아우는 “당시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다. (조양은 식구들과) 만나면 싸울 때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살았다.
김씨측이 당한 대표적인 사건은 최모씨가 칼을 맞은 사건이다. 당시 조양은씨와 부하들은 모 호텔 커피숍에 김씨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커피숍에는 김씨 대신 최씨가 앉아 있었다. 조씨의 아우들은 이날 최씨에게 10여 차례 칼을 ‘먹였다’. 그밖에 서로의 아지트를 공격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두 조직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조씨측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강했다고 주장한다. 김씨측보다 먼저 서울에 진출한 데다 조직의 위세를 가늠하는 척도인 호텔나이트클럽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주요 이유다. 과거 조씨 핵심 측근의 증언.
“당시엔 호텔을 나와바리(구역)로 삼았다. 조선을 비롯해 도쿄, 센추럴, 반도, 코리아나, 백남 등 시내 주요 호텔의 나이트클럽을 우리 식구들이 다 장악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서방의 나와바리는 이태원 해밀턴호텔 등 매우 제한돼 있었다.”
“동생들 손가락 잘라오라”
김씨의 옛 아우 한 사람도 객관적인 판도에서 조씨 측이 우위에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두 조직 간 전쟁에서는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양은이 잘나가긴 했다. 주요 호텔나이트클럽을 다 그쪽 식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무교동 다운타운의 경우 전주 식구들이 잡고 있었는데 이들도 조씨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거의 서울의 절반을 장악했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태촌이 형이 올라온 뒤로는 세력 판도가 바뀌었다. 그쪽에서 잡고 있던 주요 호텔 나이트클럽들에 우리 특공대 30명이 순차적으로 쳐들어가 사장들을 협박하기도 했다.”
그 즈음 김씨는 정치폭력사건에 휘말렸다. 1976년 5월에 발생한 신민당사 난입 및 전당대회 각목 사건이다. 당시 김씨는 폭력배 수백명을 이끌고 신민당 당사를 점거해 김영삼 총재 등 주류측 의원들을 폭행한 데 이어 3일 뒤에는 전당대회장에 난입해 각목을 휘둘렀다. 이 사건으로 김씨는 그해 6개월간 실형을 살았다.
하극상 사건인 사보이호텔 사건과 오종○ 난자 사건 이후 주먹계의 위계질서는 급격히 무너졌다. 급기야 호남 주먹의 대부인 송태○씨가 김태촌씨의 아우들에게 맞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원래 표적은 송씨가 아니라 김씨의 광주 선배인 조모씨였다. 조씨가 OB파와 가까워진 후 자신의 구역을 침범한다고 판단한 김씨가 동생들에게 응징을 지시한 것. 김씨의 아우 7, 8명은 치안본부 옆 주차장에서 조씨를 집단폭행했다. 그런데 현장에 있던 송씨가 덩달아 봉변을 당한 것이다. 사건 직후 김씨는 송씨를 찾아가 사과했다. 김씨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송 선배한테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더니, (폭행에 가담한) 아우들의 손가락을 잘라오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했다. 결국 아우들이 송씨한테 야구방망이로 맞는 것으로 화해했다.”
김태촌과 조양은의 전쟁은 서울 주먹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주먹계 선배들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1977년 어느 날 전북 주먹의 대부 이승○씨가 조씨를 불러냈다. 태권도 전국체전 우승자로 해병대 태권도 감독을 맡는 등 태권도계 실력자이던 이씨는 당시 주류도매업을 하면서 주먹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씨가 약속장소에 가보니 서로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김씨가 나와 있었다. 이씨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한 방에 앉았다. 하지만 화해하기에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었다. 대화는 아무런 소득없이 끝났다. 일어서면서 잠시 서로의 몸이 스쳤는데, 각자 몸에 지니고 있던 칼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보다 어린데 무슨 형님이냐”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77년 11월 서울구치소에서였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구속됐다. 둘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당시 체포과정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보이호텔 사건 등으로 수배자 신분이던 조씨는 광주로 내려가 있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반대로 김씨는 광주에서 사고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 있다가 잡혔다. 김씨의 죄목은 교도관 상해였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자신에게 혹독하게 대했던 교도관을 출소 후 칼로 난자한 사건이었다. 거기에 명동 꽃다방 폭력 사건 등이 보태졌다.
두 사람은 서울구치소에서 한 방을 쓰면서 화해했다. 조씨는 자서전(‘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꽃’)에서 당시 김씨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형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를 부인한다.
“나이가 나보다 어린데 무슨 형님이냐. 서로 ‘어이’ 하고 불렀다. 지난 일은 화해하고 먼저 나가는 사람이 옥 수발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집행유예로 먼저 출소한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나가 그의 아지트로 쳐들어가 ‘전쟁 계속하자는 거냐’고 따지자 ‘선배가 칼을 맞았는데 어떻게 쉽게 화해하겠냐’고 둘러댔다.”
조씨가 출소한 것은 1978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2년 실형을 살았다.
그 시기 양은이파는 내분을 겪었다. 2인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난 것. 원래 조씨의 바로 아랫동생은 사촌매제인 백영○씨였다. 그런데 백씨가 1976년 대구 수성호텔 살인사건으로 구속된 후 박수○씨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박씨는 1976년과 1977년 조씨가 두 차례 구속돼 있는 동안 바로 아래인 강영○씨와 더불어 양은이파를 이끌었다. 퍼시픽호텔 사건 때는 서방파의 집중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거목 조일○에 도전한 김태촌
김태촌씨가 구속된 것은 그보다 석 달 뒤인 그해 5월. 범단(범죄단체구성) 혐의였다. 그때쯤 김씨는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김두한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주먹계의 거봉 조일○씨에 맞선 일화는 당시 그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구속되기 한 달쯤 전 김씨는 충남 천안의 조일○씨 집을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자신이 형님으로 받들던 박충○씨와 조씨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원래 조씨의 직계 동생으로 조직의 2인자였다. 그런데 조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느라 ‘은퇴’를 선언한 이후 조씨의 친구인 모경○씨와 갈등을 빚었다. 갈등 끝에 박씨의 부하들이 술집에서 조씨와 모씨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모씨가 칼에 찔려 죽었다.
사건 직후 박씨는 천안을 떴는데, 조씨와 화해하고 싶어 했다. 김태촌씨가 그 중재역을 자임한 것이다. 박씨는 김씨의 대선배인 박종○씨의 친구이기도 했다. 당시 조씨 집에는 부하 수십명이 기숙하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김씨는 혼자 찾아갔다. 두 사람은 초면이었다. 주먹계 서열로 김씨는 조씨의 한참 후배였다. 조씨는 박씨와 화해해달라는 김씨의 부탁을 일축하고 돌려보냈다.
며칠 뒤 김씨는 또 한 차례찾아왔다. 이번엔 동생 10명을 데리고 왔다. 1차 방문 때와 같은 용건이었다. 조씨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충돌이 있을 법도 했건만 김씨 일행은 유유히 돌아갔다.
그 사정에 대해선 두 사람의 얘기가 다르다. 조일○씨는 자서전 ‘불의 아들’에서 당시 부하들이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김씨 일행의 귀로를 가로막았으나 자신이 포위망을 풀어줬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그때는 겁나는 게 없었다. 조씨의 집을 밤에 찾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조씨 주변에 수십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알려진 대로 언변이 뛰어났다. 내가 자제한 것이다.”
조일○씨는 뒷날 청송교도소에 장기 수감 중인 김태촌씨를 돌봐줬다. 현재 김씨는 조씨를 형님으로 깍듯이 대하고 있다. 조일○씨는 조양은씨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4년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씨에게 지금의 부인 김모씨를 소개한 사람이 바로 그다. 김씨는 그의 친구 딸이다. 당시 그는 뒷날 조씨의 장모가 된, 김씨의 어머니에게 조씨를 “전두환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민주투사”라고 소개했다.
조일○씨는 1980년 초 계엄치하에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두 달간 수감된 적이 있다. 그때 조양은씨를 처음 만났다.
“양은이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둘이서만 한 방을 썼다. 나는 정치범이니 오래 있을 테고 자기는 단순 폭력이니 곧 나갈 것 같다면서 출소하면 수발을 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양은이가 어느 날 밤 육군본부 헌병대로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 직후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결국 내가 먼저 나가 면회를 다녔다.”
조양은씨와 강영○씨는 1심인 보통군법회의에서 범단 및 서방파 조직원 최모씨 살인미수 혐의 등으로 각각 징역 1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와 상고는 기각당했다. 청춘을 묻는 기나긴 수감생활의 시작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OB파
김태촌씨도 1심에서는 1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계엄령이 해제돼 항소심 재판이 민간법원에서 열리게 된 것. 2심 재판부는 5년 6개월을 선고했다.
김씨가 출소한 것은 1986년 1월. 나와 보니 이동재씨가 이끄는 OB파 천하였다. 호남 선배들도 이씨를 보스로 인정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이동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이동재를 잡으러 갔다가 경찰에 쫓기기도 했다.”
김씨는 자신이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OB파에 난자당한 친구 이석○씨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이동재씨의 사무실을 급습했으나 실패했다. 김씨에 따르면, OB파와의 전쟁은 이동재씨가 이석○씨를 찌른 자신의 동생들을 김씨측에 보내 야구방망이로 맞게 함으로써 종결됐다.
얼마 후 김씨는 화해의 표시로 건달 단합 체육대회를 구상했고 이씨도 적극 찬성했다. 그해 6월 한강 둔치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을축구대회가 그것이다. 이 행사에는 유지광, 정종○, 신상사를 비롯한 주먹계 원로들과 송태○, 박종○, 정학○씨 등 호남 주먹계의 선배 다수가 참석했다. 또한 구속된 조양은씨를 대신해 양은이파를 이끌던 백영○씨도 동생들을 거느리고 동참했다.
백씨에게 당시 행사에 참여하게 된 사정을 묻자, 김씨의 얘기와는 달리 자신이 먼저 제안해 성사된 것이라 주장했다. “동생들끼리 자꾸 싸우니 얼굴이라도 익히자”는 뜻에서 마련했다는 것이다. 백씨는 그날 미기(美技)상을 받았다. 대회 최우수상은 정학○씨에게 돌아갔다.
김태촌씨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달 뒤인 그해 7월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을 일으킨 것. 김씨의 부하들이 뉴송도호텔 사장 황익○씨를 폭행한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당시 서울고검 소속 박남○ 부장검사의 이권과 관련된 청부폭력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해 9월 구속된 김씨는 징역 5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됐고, 박 검사는 옷을 벗었다.
김씨가 조양은씨와 다시 만난 것은 1989년 5월 충남 아산의 도고호텔에서였다. 당시 공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조씨는 3차 귀휴를 나왔다. 김씨는 그에 앞서 그해 1월 폐암 선고를 받고 형집행정지로 석방,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폐암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김씨가 밤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조씨가 묵고 있는 도고호텔을 찾아감으로써 성사됐다. 김씨의 동생 30여 명이 동행했다. 호텔엔 조씨의 아우 100여 명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조씨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것을 다짐하고 조씨가 이동재씨까지 포함해 세 사람의 서열을 정했다고 한다. 조양은-이동재-김태촌 순으로. 그런데 당시 세 사람간 서열을 정했다는 조씨의 주장에 대해 김씨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이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자기 동생이 되나. 동재는 51년생으로 가장 어렸고.”
감옥에서 자살 기도
문씨는 또 김씨가 위장으로 교회에 다닌다는 항간의 의혹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위장으로 교회를 다닐 이유가 없다. 교회 다니면서 여러 사람 만나다 잘못된 일에 얽혀서 그렇지, 위장은 아니다. 내가 말했다. ‘형님은 목사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신앙생활 열심히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거다. 획기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문병○은 99% 바뀌면 되지만 김태촌은 100% 바뀌어야 한다’고.”
그는 “김태촌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이라고 말했다.
“암에도 걸려봤지, 폐병도 걸렸지, 그 전에 자살기도도 해봤지, 사형구형도 받아봤지. 지금 정신력이 강해 버티고 있는 거지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우울증과 신경쇠약 증세도 보인다. 그의 삶 자체가 드라마다. 인천 뉴송도호텔 사건으로 구속돼 있을 때 자살을 기도했다. 공권력에 대한 무력감으로 절망하는 가운데 동거녀가 아이를 유산했다. 돈이 없어 함께 수감된 동생들 변호사도 못 댔다. 러닝셔츠를 찢어 목을 맸는데 줄이 끊어져 살았다. 그때 무의식중에 성경을 집었다고 한다.”
2004년 10월, 16년 6개월의 형기가 만료됐지만 김씨는 출소하지 못했다. 7년의 보호감호 때문이었다. 보호감호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재판을 받던 중 2005년 8월 보호감호를 규정한 사회보호법이 폐지됨에 따라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소록도 나환자 봉사
문씨에 따르면 김씨는 출소 후 과거 동생들과는 일절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항간에는 사업가로 변신해 돈을 번 김씨의 동생 몇 명이 ‘마지막 정’을 표시하는 뜻에서 그에게 억대의 돈봉투를 건넸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문씨는 “소문나면(동생들이) 피해를 본다”며 “형님이 다 거절한 걸로 알고 있다”고 부인했다.
“권상우 사건만 해도 평소 친분이 두터운 나카지마 목사님을 돕는다는 마음에 전화 한 통 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김태촌이기 때문에 길거리에 침만 뱉어도 구속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나는 형님의 재구속에 실망하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 시련이다.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으면 형님의 인생은 희망이 없다.”
전북 출신의 최백호씨는 김태촌씨가 출소한 후 한동안 그의 ‘수행비서’ 노릇을 했다. 최씨는 석사 출신의 ‘엘리트 주먹’. 그는 “내가 지켜본 바로는 김 회장님은 예수”라며 김씨의 신앙을 행적과 관련지어 설명했다.
“소록도를 방문해 나환자들에게 봉사하고 신앙간증을 했다. 일본에 가서는 매일같이 집회에 참석해 신앙간증을 하고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봉사활동도 했다. 회장님은 성경을 통독하고 식사할 때 꼭 기도한다. 국제청소년범죄예방 중앙연수원장을 맡았는데, 청소년들에게 검사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말하더라. 과거와 단절하기 위해 동생들을 만나진 않지만 인간적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신앙 계통의 사람을 만나면 매우 즐거워한다.”
과거 김태촌씨 계열이던 ‘사업가 주먹’ 백모씨.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경호를 맡기도 했던 그는 “돈을 좀 벌면 기도원을 지어 태촌 형님의 신앙생활을 돕고 싶다”고 밝혔다.
김태촌씨의 몇몇 지인에 따르면, 그는 출소 후 한때 독자적인 생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사업거리를 찾았다. 중국에서 조개를 수입해 홈쇼핑을 통해 판매하는 사업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지인을 내세워 오락실에 투자할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한 지인은 현재 김씨가 한 번에 30만~50만원에 이르는 간증집회 사례비로 생활비를 충당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김씨는 기자에게 “과거에 좀 벌어놓은 게 있다. 먹고사는 데는 지장 없다. 땅도 좀 사놓았다”며 돈 문제에 크게 구애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김씨의 고향(광주) 친구들은 그의 출소를 계기로 이타회라는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하일성씨가 경영하는 갈빗집이 결의 장소였다. 회원은 20명, 월 회비는 10만원이다. 회원 중엔 신학교 총장도 있고 법조인도 있다. 코미디언 김병조씨도 회원이다. 이타회는 소년원 위문방문 등 사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태촌씨는하씨의 식당에서 생일잔치를 치르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김씨는 틈틈이 연마한 색소폰 솜씨를 뽐냈다. 당시 참석자의 전언.
“형님 몸이 심하게 안 좋은 건 사실이지만, 폐암 환자가 색소폰을 부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인사말에서 ‘앞으로 나를 형님이라 부르지 말고 김 회장이라고도 하지 말라. 집사님으로 불러달라’고 해 그 자리에 참석한 교인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타회 회원인 김용○씨가 들려주는 김태촌씨의 심경.
“태촌이는 ‘왜 법은 나를 자꾸 이렇게 옭아매냐. 신앙생활도 헷갈려 못하겠다’고 괴로워했다. 자꾸 사건이 터지니 신앙생활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오산리기도원에서 나와 함께 자면서는 ‘진짜 인생 살기 싫다’고도 했다. 돈은 없지, 자존심은 강하지. 자격지심과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겠다고 사업거리를 찾기도 했다.”
“관 속에 들어가도 가둘까”
그는 “태촌이가 수사기관의 실적 쌓기에 희생되고 있다. 관 속에 들어가도 가둘까” 하며 김씨의 재구속을 안타까워했다.
김태촌씨는 청송교도소에서 가수 출신 이영숙씨를 소개받아 2년간 편지를 주고받다 1999년에 옥중 결혼했다. 김씨의 뇌물 혐의는 바로 이씨와 김씨의 후배가 교도소 밖에서 보안과장에게 편의를 봐달라며 돈(합쳐서 2800원)을 건넸다는 것이다.
김씨는 이에 대해 “교도소법 위반이지 뇌물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권상우 사건에 대해서도 “당사자 간 오해를 풀어 다 해결된 것인데 문제를 삼았다”며 억울해했다.
“‘강요’는 ‘협박’과 달리 합의서가 있어도 죄가 성립한다고 한다. 어쨌든 당사자가 강요받지 않았다는 데도 기소했다. 출소 후 과거의 동생들은 전혀 안 만났다. 조양은이 행사장에 다녀 욕먹는다고 해서 행사장도 일절 안 갔다.”
김씨의 재판이 열리고 있는 창원지법 진주지원에 따르면 5월 초 김씨의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가 무더기로 접수됐다. 서명자는 2만7000여 명에 이른다. 김씨의 강연을 들은 학생과 교인이 많다.
1980년대 안토니파 보스로 서울 유흥가에서 활약하다 은퇴를 선언한 후 고향 서산에 정착한 안상○씨는 “주먹계를 완전히 떠나려면 서울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태촌씨도 기자와의 옥중 인터뷰(‘신동아’ 2001년 3월호)에서 “출소하면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마련해놓은 땅에 집 짓고 조용히 살겠다”고 밝힌 바 있다.김씨는 시골로 내려가지 않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조카 앞으로 해둔 땅이 정리가 잘 안 됐다. 섬에 있는 산에 들어가려고도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신앙간증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영적으로 즐겁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기에.”
김씨는 이번에 출소하면 이민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직폭력 세계를 떠나면 영원히 자유로운 시민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안 된다. 수사기관과 언론이 계속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시련을 주신 것 같다. 변화해서 나가겠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살지 않겠다. 떠나겠다. 징역을 너무 오래 살다보니 고통스럽다. 보스고 건달이고 조직이고 다 지겹다. 솔직히 조양은이나 나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하는 주먹계 보스로 정종○, 신상사, 조일○, 이승○, 박종○, 정학○, 이강○ 등을 꼽았다.
조양은씨와 김태촌씨가 활약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회가 바뀐 만큼 주먹세계도 바뀌었다. 김씨의 후배이자 신앙적 동지인 문병○씨의 얘기가 흥미롭다.
“건달 생활처럼 피곤한 것도 없다. 매일 행사장 다니면서도 ‘행사장 좀 안 가면 좋겠다’고 투덜거린다. 우리 때 활동한 사람들은 다들 50이 넘었다. 자식한테 건달 소리 듣기 싫어한다. 언론과 수사기관에서 건달 출신이라도 정말 성실히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지 말고 봐주면 좋겠다.”
‘주먹 사업가’ 백모씨는 주먹세계의 달라진 의식풍토를 이렇게 전했다.
“주먹도 시대 흐름을 따라야 한다. 정치인이나 연예인 발목을 잡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 건달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 깡패 이미지를 주는 순간 사업은 끝장이다. 과거와 같은 조직은 없다. 다만 같이 사업하는 동생들이 있을 뿐이다.”
김태촌씨가 누워 있는 병실 벽에는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김태촌 사망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5일 사망했다. 김태촌은 사망했지만 그가 남긴 얼룩진 과거와 인생사는 주먹계에서는 두고두고 회고될 것으로 보인다.
김태촌은 사망 전 어떤 인생을 살았나 봤더니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1950년 10월10일 전남 담양에서 3남3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김태촌의 가정은 평범했다. 아버지는 목회활동을 하다가 파출소 근무를 했고, 어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파멸을 맞았다.
여선 반란 사건과 빨치산 소탕 작전 때 김태촌의 아버지는 빨치산 즉결 총살 때 차마 이를 집행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총구를 돌려 권총을 쏴 사법 처리를 당했다.
그때부터 김태촌의 삶은 굴곡의 시작이었다. 김태촌은 공부를 잘하긴 했으나 가난이 싫어 가출했고, 불량 소년들과 어울려다녔다. 김태촌은 그때부터 사망 전까지 어둠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김태촌은 거리를 헤매며 친구들과 여러 싸움에 휘말렸고, 결국 17세 때 광주소년원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스무살 때까지 김태촌은 세번이나 소년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973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한 송태준씨를 따라 상경했다. 송태준은 4.19 혁명 이후 이정재.임화수를 이은 2세대 호남파 총두목이었다.
김태촌보다 먼저 상경한 친구들은 양은이파와 쉴 틈없는 갈등을 빚고 있었고, 잦은 폭력 사건으로 서방파는 와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태촌은 서방파 실세로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서울 주먹계를 재편했다.
김태촌이 사망하기 수십년 전 조직폭력배들은 전두환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큰 위기를 맞는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의 열망을 누끄러뜨리기 위해 치안을 강화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정치깡패들이 감옥으로 가거나 조직이 와해됐다.
김태촌이 사망한 지금 비록 정치깡패는 없어졌지만, 지방에서는 여전히 조폭출신의 정치가들이 존재했고 조폭들은 더욱 지하로 숨어들어 지하경제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현재 조폭 4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과거와는 달리 ‘사장님’,‘대표이사’등의 직함으로 활동하며 보다 지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양은이파 재건세력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아직까지 조폭3세대가 건재하다는 의견이 돌았으나 이번 김태촌의 의식불명 소식 이후 이미 황혼의 나이에 접어든 3세대의 시대가 이제 끝나지 않았냐는 의견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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