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g Lijun(팡 리쥔) 方力钧 ( 1963~)씨리즈-1
중국 현대 미술의 위상은 최근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으며
지난해 세계미술시장 점유율을 살펴보면 중국은 39%를 차지해 미국의 25%를 넘어셨다.
세계로 향해가던 중국 현대미술은 이젠 아예 중국을 예술의 메카로 만들어버릴 기세다.
국내에서도 중국 현대미술 작품들을 감상할수 있는 기회도 부쩍 더 많아졌다.
그런데 중국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다보면, 무언가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어색함과 위화감 그리고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받게된다
우선 대부분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억압되고 지나치게 암울하거나 때론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때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유치하고 조잡하다고 느껴지기도하고
어떤 때에는 지금시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엄숙하고 교조적인 분위기가 녹아난다.
아무리 국제적인 스타급 작가라 해도 낯설고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장샤오강의 그림은 너무 우울하고 서늘할정도로 가라앉아 있으며
왕광이의 팝아트는 어딘가 모르게 짝퉁같은 조잡함이 느껴지고
위에민준이나 팡리쥔의 캐릭터들은 얼핏 호방하고 유쾌한듯하지만
지나치게 과장되어있어 왠지 우롱당한 듯한 개운치않은 느낌이든다
왜 이런 석연치않은 이질감과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일까?
“20년간의 중국 정치경제 개혁이 없었다면
중국현대 예술은 근본적으로 생겨나지도 않았다”고 말할정도로
중국현대미술은 개방과 개혁으로 풍요로워지는 경제와
여전히 존재하는 구태의연한 억압적인 정치 사이에서 태어난 미술들이다
정치체제로서의 사회주의와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특이한 이종 결합으로
중국은 지난 20년간 다른 나라는 가질 수 없었던 독특한 사회적 경험을 축적해왔고
이것이 자연스레 중국 현대미술만의 독특함으로 연결되었다.
그만큼 중국 현대미술의 이상한 분위기는 중국현대사와 관련이 깊다
중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은 문화혁명(1966~76)과 천안문 사태(1989)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영혼과 남과 다른 특이한 생각들을 자양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문화혁명의 시기는 그런 예술이 자라나기에는 너무나 모질고 척박한 시대였다.
예술을 사회주의의 주요 무기로 간주한 중국정부에 의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만이 강조되었고,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반대파를 숙청할 때 순수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조차도 탄압당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단지 지식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오지로 추방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리거나 예술활동 자체를 금지당했다.
어린 시절 문화혁명의 혹독한 시기를 거치며
억압적 체제에 대한 반항심을 키워온 세대가 천안문 사태의 주역이 되었고
대부분의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이 바로 이 세대에 속한다
중국 현대미술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부터다.
당시 중국 공산당에 저항했던 작가들이 외국으로 망명해 활동하면서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천안문 사태를 전후해 외국으로 나간 해외파와 ,
국내에 남아서 사회·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업을 계속한 작가를 합쳐서
‘차이나 아방가르드’ 작가 라고 부른다.
천안문 사태이후 개혁과 개방이 이루어져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정치와 사상의 자유가 없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중국 현대미술은 정치적 무력감을 냉소와 허무, 정치적 풍자라는 코드로 녹여내
삐뚤어지고 왜곡되거나 허무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중국식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풍도 녹아들어 이질적인 느낌의 중국 현대미술이 나타났다
이를 두고 미술비평가 리시엔팅은 ‘냉소적 사실주의’와 ‘정치적 팝’이라 이름붙였다
Fang Lijun 方力钧 ( 1963~)
중국 현대미술의 4대천왕 중 한명인 팡리쥔은 '냉소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의 예술세계는 중국인들의 영혼을 깊이 할퀴고 간
문화혁명 그리고 천안문 사태 와 아주 깊이 관련되어있다
하북성 태생의 팡리쥔은 베이징 중앙미술대학 판화과를 졸업하던 89년, 천안문 사태가 터지자
이에 분노해 비주류와 반항의 의미를 담은 민대머리 건달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건달들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건달이라는 의미에서 표현 한것으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중국 현대미술의 4대천왕: 장샤오강, 왕광이,위엔민 준 , 팡리쥔
무협지에서나 쓸 법한 명명법인 4대천왕이라는 칭호는 작가를 대중스타화 하여
흥미를 부추기고 또한 원톱(one-top) 선발 구조의 위험성을 피하면서
여러 작가를 동시적으로 브랜드화하는 데 유효한 장치로 중국의 대중문화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단어다
팡리쥔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버린 이 민대머리의 건달들은
실없는 웃음과 모든것이 지루하다는 듯한 하품이 그 특징으로
중국의 대표적 예술가의 그림속 이미지라고 보기에는 약간 고약하다.
실제 중국 내에서도 그를 당대 최고의 중국미술가라고 추앙하는 분위기 반대편에는
단순히 자신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 서양인의 구미에 맞게끔
" 중국인을 추하고 무능한 '아Q(阿Q)'의 이미지로 만들어 국제시장에 내다판 매국노"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팡리쥔뿐 아니라 소위 4대천왕이라고 불리는 작가들 모두가 그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그림 속 이미지는 중국 현대사회의 고난과
그속에서 작가가 경험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깊은 관계가 있다.
팡리쥔은 다섯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문화혁명 시기를 지냈다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곧 인민의 적으로 몰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지주계급은 광대한 인민 군중의 파렴치한 적이고
이 세상에서 몰아내야 할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어느날 비판 대회가 열렸다.
어린 나도 "지주놈을 매달아라!" 라고 외쳤다.
함성에 이어 긴 모자에 커다란 나무 팻말을 목에 걸고 비판대로 올라온 사람은
나를 가장 사랑해주었던 할아버지였다.
첫댓글 지인이 보내준 중요한 자료입니다.작가를 통해서 중국의 현대사를 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