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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반틸
- 개혁주의(칼빈주의)입장에서 볼 때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변증에 있어서 아주 큰 일을 감당해 낸 사람.
목사,신학박사,1895년 화란 태생. 1927-1928년 사이에 미시간 주 스프링 레이크에서 목회하였고, 1929년 이 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를 역임했다.
반틸의 변증학은 흔히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라고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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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틸은 말하기를,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 총전을 조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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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neutrality)은 없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 '코르넬리우스 반틸'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냐'로 표현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가', '부처를 믿는가', '알라를 믿는가', 누구처럼(?..ㅋㅋㅋㅋ) '부두교를 믿는가', '나 자신을 믿는가'... 이렇게 여러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라는 큰 카테고리로만 나뉘어진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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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틸은 기독교의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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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영원한 피조물이라는 진리이다 .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원한 피조물이지 결코 창조주가 될 수는 없는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당연한 기초적인 진리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중요하게 가르쳐 주고있다. 아담의 범죄와 사탄의 범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가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 변증학 반틸 교수가 가르치는 중요한 신학 원리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영원한 피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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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성경은 완전영감된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다
둘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다
셋째 예수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
이것은 인간의 철학적 수학적 물리적으로 인간의 그무엇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드릴뿐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읍니다 만약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신학은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할수가 없게됩니다
이세가지 대전제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초석이며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코넬리우스 반틸※교수 신학의 출발점이며 세계로쟌위원 이종윤목사님의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이세가지 대전제는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수있는 초석이되며 바른신학을 쌓아올릴 초석됩니다 바른신학을 배우고 시작할수 있다는것은 하나님의 큰은혜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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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고 확신한다. 반틸은 바르게 말하기를, "교회의 신조들은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 진리의 조직적 진술에 불과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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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과 답변 >
문 : 신앙을 강조하는 전제, 신앙은 신학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답 우리는 전제주의다. 성경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반틸의 신학적인 입장,
코넬리우스 반틸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제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적설계운동 에 있어서 이와 같은 입장은 긍정적이라 생각되어진다. 세속적인 합리주의에 의거하여 하나 님을 보일 수도 없으며, 보인다는 것은 허울좋은 선포이며, 보인다 해도 성경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 저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적설계의 증거를 제시하면서도 전제에 대한 기본적인 구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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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신학자 반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얻게 되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덧붙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만일 신자와 불신자가 인간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존재인지에 대해 일치할 수가 없다면, 그 둘 사이에서 지 식에 대한 어떤 공통적인 영역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상 그와 같은 의견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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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과 개신교의 접촉점에 대한 입장
카톨릭은 카톨릭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지성과 의지 라는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은 조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은혜의 소멸을 의미할 뿐, 인간은 창조 당시 부여받은 지성과 의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떤가? 칼빈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손상되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개신교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해석함에 있어서 궁극적인 열쇠를 쥔 궁극적 참조점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개신교의 원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사물 해석의 궁극적인 참조점이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된다....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또는 최종적인 참조점의 위치에 세워 놓았다."8
반틸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인간이 사물을 해석하는 모든 서술에 있어서 궁극적인 참조점이라는 자신에 관한 이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어엎거나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인은 소위 '유신론적 논증들'을 틀림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자연인 자신이 이러한 논증들을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많은 자연인이 유신론적 논증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서 그들 스스로에게 이러한 방법을 통해 존재가 입증된 신들이란 한결같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들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변증학자들은 성경이 보여주는 완벽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대로 남겨둘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길 원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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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틸은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정면충돌"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방법은 롬1:18-25의 죄인의 근본속성에 대한 바울의 진단에 기초해있다. 이 말씀에 따라 반틸은 인간 누구나 본성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성에 대해 알고있다고 확신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심성에 너무나 깊고도 분명히 박혀있어 그 어떠한 억지와 변명으로도 불신앙을 "핑계할 수 없다." (19절) 불신앙이란 단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짖누르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억지이다.
따라서 이 억지를 꺽는 일에는 "정면충돌" 이상 유력한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불신자에게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창조를 말하고,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부활과 다른 기적의 사실성 증명할 수 있으나 결국 기독교인은 불신자를 향해서 어떤 형태로던 "회개하라"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변증이 추구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의 추구와 제시와 논증은 복음으로 사람을 회심시키기에 불충분하다. 불신앙의 억지스러운 고집으로 맹목이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보다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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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반틸을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 가운데서 스스로를 증거 하시는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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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틸의 생각은 전제주의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시각과 변증과 신학은 오직 성경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세계에서 말하는 세속적인 세계관은 공통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세상은 전제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제부터 다르기 때문에 대화의 여지가 없다, 교집합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될 일은 일방적인 선포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tearson8?Redirect=Log&logNo=8001267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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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의 상반성(Antitheses in Education)
코넬리우스 반틸
신자가 사는 원리는 불신자가 사는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것은 교회 뿐만 아니라 교육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에 대하여 말할 때도 세상과 상반(相反)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반성은 교육전반에 걸쳐있다. 첫째는 교육철학 분야로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흔히 무시되고 있다. 둘째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커리큘럼 분야에서 나타나며, 마지막으로는 교육의 대상자인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고려할 때 나타난다. 이 세가지 요소를 염두에 두고 교육철학의 상반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비그리스도인은 우주가 하나님을 창조해냈다고 믿기에, 그들의 신은 유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해냈다고 믿음으로 그들에게는 우주가 유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가 하나님과 대면(對面)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어린이로 우주를 대면토록 하길 원한다. 비그리스도인의 교육은 하나님이 없이는 교육으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절대적인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전적으로 방치되어 있다.
하나님 없는 교육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있는 존재로 창조된 점을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이는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혹은 무신론적 교육운 비(非)기독교적인 동시에 반(反)기독교적인 교육이다. 하나님 없는 비기독교적인 교육운 자연적으로 인본주의적이거나 인간 중심으로 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 필요가 없다면,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진정한 기독교 교육을 원한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쳐 나와야 할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전혀 미지의 세계에 둘러 싸여 있다고 믿으며, 인간은 안개 속에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같은 정도의 적은 지식밖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크리스천은 원래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과, 사실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와, 말씀계시로서의 성경 안에서 살았으며, 현재 인간은 원리적으로 그리한 하나님의 참된 빛을 회복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의 교육은 한 쪽 방향으로 질주해 들어가 보고는, 그것이 무지를 극복해 냈다는 착각 아래 다시 다른 쪽으로 질주해가든지, 아니면 완전한 절망 속에서 전적으로 멈추어 버리든지 한다.
흔히 비크리스천 교육가들은 교육의 목표나 목적에 대한 이념을 전혀 폐기해 버린다. 그들은 인간의 환경에 대한 “기능적 조정”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길의 향방(向方)을 알지 못하고 안개 속을 헤매인다면, 어떻게 “속도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교육의 목적을 알며 교육의 내용 역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독교적으로 정의된 방식은, 내용적으로도 기독교적인 교훈 속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그리스도적인들은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 한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지식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의 마음은 빛을 밝히기 위하여 가동울 필요로 하는 전구가 아니라, 오히려 직접 공급을 받아 밝히는 오일랩프와 같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계시가 유입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깜깜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러한 조명없이는 어떤 “사실들”을 알 수 조차 없다.
따라서 비크리스천 교사들은 종종 그들이 실제로 “사실들”을 소유하고, 알고 있으며,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들은 곧 그 “사실들”이 실로 어둠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완전히 자포자기한 절망의 상태에 빠지고 만다. 크리스천 교사들은 어떤 단순한 사실도 하나님의 계시의 조명을 받지 않고는, 참되게 알려지거나 가르침 받을 수 없음을 안다. 수학의 법칙까지도 달리는 알려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 특성들에 대하여 자각해야 한다. 그러한 자각 없이는 결코 순수한 크리스천 학습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특성들을 자각하는 것이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것보다 직접적인 종교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간접적으로 어디서든지 항상 종교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종교를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데는시간을 덜 들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특성들을 자각하는 것은 커리큘럼의 계혁이 하나님 중심적이 되는 다른 것들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커리큘럼은 인간중심이 돼야 한다. 이렇게 될 때만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 된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의 인격이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는 위치에 있을 때만 최상으로 발달할 수 있다고 믿지만, 크리스천들은 어린이의 인격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한, 전혀 발달을 가져 올 수 없다고 믿는다. 비크리스천 교육은 어린이를 진공상태에 두며, 이러한 진공상태에서 어린이가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질식 해 죽고 만다. 크리스천 교육만이 실로 인격을 양육할 수 있음은, 그것만이 어린이에게 물과 공기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비크리스천들은 권위가 어린이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믿지만, 크리스천은 권위 없이는 어린이가 전혀 살아 갈 수 없다고 믿는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전문가”의 권위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권위가 못된다. 크리스천은 인간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에 기초한 권위를 필요로 한다.
이같이 우리는 교육전반에 걸쳐 교육 원리의 상반성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한편에서 상반되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에서 상반되는 개념을 무시하는 것은 정력과 자산을 낭비하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I. 교육철학 분야의 상반성
전체 기독교 교회는 상반된 개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반성(antitheses)의 개념 위에 근거한 것이 있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에서보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특별히 더 극명한 사실이 되고 있다. 아, 그렇다. 나는 사방에서 우리는 건설적인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죄많은 세상에서 크리스천 개인이나 조직은 그들이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이 될 때 까지는, 진정한 의미로 긍정적이거나 건설적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죄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과 같다. 악마의 영도력 아래서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욕하는 미성숙한 성경적 암시를 가지고 죄의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상반성은 전형적으로 통합의 기초가 된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 주고 평화를 공표하기를 원하는 사람, 축제를 벌이고 맹세를 하기 위하여 유다를 방문하는 사람은 그의 낙천적의에 대한 근거로서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확신을 보여주지 않는 한 그는 거짓 선지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비크리스천의 개념
교육의 상반성에 대한 어떤 것을 도출해 내려고 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상반성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교육 이론의 모든 차이는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 이 한 잇슈로 압축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만 한다면, 상반성의 복합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모든 교육 프로그램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된, 성장하는 인격을 낳는 데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환경이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만약 우리가 교육이 “환경에 대한 성장하는 인격의 조정”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그러한 정의(定意)는 성장하는 인격이 조정받게 되는 환경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지 않고는 전혀 의미가 없게 된다.
“환경이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하게 될 때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유신론과 무신론적 학설이 서로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이 즉시 발견 될 것이다. 전자(前者)는 인간 인격이 조정(調整)되는 환경은 궁극적으로 인격적이라는 것을 확고히 해주는 반면 후자(後者)는 그것을 부정한다.
초인간적(超人間的) 인격 혹은 인격들에 관하여 말하는 실제에 대한 무신론적 학설이 많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들의 견해를 궁극적인 인격으로 되게하지 못한다. 실재 이론은 완전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상하지 않는 한, “인격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며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를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한 일신론은 노골적인 다신론과 다를 바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신론이 아니다. 어린이가 조정받는 신(god) 혹은 제신 스스로가, 그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독립된 운명, 혹은 우주 혹은 실재에 조정되어져야 한다면,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그만큼의 중간지대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없으며,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알컫기 위하여 선택하는, 운명 또는 우주, 실재,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에 조정받아야 함이 분명하다.
오늘날의 교육철학이 어린이가 조정받아야 하는 궁극적으로 비인격적이며 상반된 환경을 전제하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현대의 사변사상의 흐름을 추적해 나가다 보면 여기 저기서 완전한 진리, 절대적 진실의 믿음 같은 진술들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흔히 사람들이 완전한 존재로 지칭하기까지 하는 “하나님”이란 단어와 동일시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말할 때는 그것이 온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철학의 “하나님”은 기껏해야 그들 스스로가 설정하고, 그들 스스로가 궁극적인 판단을 가하는, 어떤 이상의 구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은유적인 하나님이란, 모든 현실적인 목적을 위한 유한된 하나님에 지나지 않는다.
유행하는 교육철학에 의하면, 어린이가 조정받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우주, 실재에 대해서이다: 그가 받을 교육내용은 이러한 조정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인격적인 환경과 비인격적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결정적인 상반성으로까지 그들을 추적해 올라가지 않는 한, 교육의 상반성의 깊이를 파악 할 수 없다는 귀결이 따르게 된다. 이 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생각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비인격적인 바탕 위에 설립된 교육 프로그램은, 인격적인 바탕 위에 설정된 교육 프로그램과는 전적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아래에서 다루게 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지 모든 크리스천 교육가들은 싫던 좋던 이러한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촉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누구든지 이러한 인식에 전적으로 붙잡히기만 하면, 크리스천 교육은 세속적인 교육이 소홀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을 참가하거나 강조하는 차이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소위 다른 교육이 말하는 식으로, 90, 60, 30, 10퍼센트 정도의 기독교 교육 따위 같은 말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기독교 교육을 전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공립교육이 지향하는 이념 같은 것을 위하여는 1퍼센트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게 된다. 두 가지 교육학설을 뒷 받침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들은 전반적으로 전면에 나타난 모든 점들과 전(前) 후(後) 안 밖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이와 같이 완전한 상반성을 강조할 때, 한 순간도 일반은혜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 교리는 절대적인 상반성의 교리에 역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그것을 더 공고히 해준다. 일반은혜가 궁극적인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며 정확하게 이해되기만 하면, 그것은 어떤 면으로도 그러한 궁극적 차이를 약화(弱化)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은혜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어떤 것들을 지적해 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일반은혜는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과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다만 근접한 유사점들이 있으며, 이러한 근접한 유사성은 궁극적인 차이의 배경하에서만 연출된다. 사람들이 일반은혜를 믿지 않거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할 때, 근접한 유사성을 궁극적인 유사성으로 승격시키거나 근접한 차이를 궁극적 차이로 승격시킴으로 말이암아, 궁극적인 차이를 약화될 결과를 낳기 쉽다.
이러한 현상은 비개혁주의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종교란 삶의 중성적인 영역에 참가 될 수 있는 조미료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어졌다. 그들은 일반은혜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교회들은 크리스천들이 2×2=4라고 하는 것이나, 비기독교인들이 2×2=4라고 하는 것에는, 그 배경에 있어서 궁극적인 차이가 없음을 당연시하고 있다.
2×2=4라는 사실은 당신과 같이 신자에게 있어서와 다른 불신자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이아니다. 당신이 2×2=4라고 생각할 때, 당신이 이 사실을 수의 법칙과 연관지운다. 그리고 당신이 이 사실을 수의 법칙과 연관지우려면, 수의 법칙을 모든 법칙과 연관지어야 한다. 그런데 당신이 직면한 문제는 그 법칙이 그 자체의 정당성에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와 속성의 표현인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2×2=4라는 사실이,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하나님의 속성과 의지 속으로 깊이 얽혀지도록 해 줄 수 있는 반면, 불신자가 2×2=4라고 말할 때는 그 역시 이 사실을 온통 수의 법칙에 대한 것으로만 연관짓도록 인도받을 것이며, 그는 이러한 법칙을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같이 2×2=4라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으며,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일반은혜의 교리가 우리에게 깨닫도록 도와 준 것은 “2×2=4”가 신자에게 의미하는 바와 불신자에게 의미하는 바 사이에 놓여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사실들에 불공정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우리의 시선을 상반성에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상반성에 보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서, 그것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을 주시하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일로, 어린이가 조정(調整)받아야 할 우주가 비인격적인 것이라면, 어린이와 우주 사이에는 상반됨이 없다는 극단적인 한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크리스천 유신론자로서의, 삶의 상반성이 좌시(坐視)되지 않는 삶과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 반면, 무신론자들은 삶의 상반성이 좌시된 삶과 세계관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가 먼저 깨뜨릴 때까지는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반면, 모든 비그스도인은 깨뜨리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없는 교육.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들 중의 하나는, 아마도 우리 반대자들의 비인격성 이론의 근거 위에서는, 사람과 그의 환경 사이에는 변증적인 관계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누가 비인격적인 법칙과 관계 속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와 같은 법에 책임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개념도 획득할 수 없다.
이제 크리스천 윤리 혹은 도덕의 전체적인 구조는 이러한 합법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정의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법적인 관계의 가능성과 실현을 전제하지 않고는 건전한 죄의 교리는 파선하고 만다. 죄의 교리가 파선될 때 이 세상의 악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악을 우주의 구조적 실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고대와 현대철학을 막론하고, 부정은 긍정과 같이 근원적이고, 악마는 하나님과 같이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고수해 왔다.
이와 같이 모든 윤리적인 특성들이 형이상학적인 특성들로 저급화되고 있다.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이 존재함으로, 존재하는 것은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어떤 철학 학습이론이 아니라 바로 비중생적 철학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기독교가 불가능하다는 귀결을 도출한다. 죄가 없기에 죄를 없이 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없이해야 할 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은, 역사의 과정 안에 있는 어떤 한 지점에서 나타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기독교가 그리스도에게 부여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독특한 위치를 점(占)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어떤 윤리나 도덕이 이러한 비인격적인 철학 위에 기초한 학풍 속에서 가르쳐 질 때, 그것은 이교적인 윤리나 도덕이 되고만다는 자연스러운 귀결아 나온다. 그렇게되면 참된 모든 기독교적인 것은 사실 배제되고 만다.
둘째로 어린이와 환경 사이에 놓여진 모든 상반성을 철저히 제거해 버릴 때, 우주에 대한 비인격적인 개념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을 절대적 상대주의로 이끌어 갔다는 사실 속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플라톤의 “영원한 이데아”는 영원할 정도로 그렇게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플라톤 자신이 악의 궁극성을 주장했을 때, 그는 그들 속에 현세주의를 주입시켰다. 이와 같이 그는 이상세계를 덧없는 세상 위에 세웠다. 시간은 움직이는 영원의 형상이 되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모티프는 실용주의가 공개적으로 배타적인 현세주의를 공언(公言)하고 나설 때 까지는 충분히 성취되어 왔었다. 반면에 이상주의는 시간과 영원을 “구체적인 일반개념”과 상호연관지었다. 그것은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 비인격적인 것이란 본래 그것이 인격적인 것과 연관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약 비인격적인 것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연관되지 못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인격에 복종하게 마련이다.
진화론(進化論)은 이러한 보편적 경향의 한 특별한 현현(manifestation)에 불과하다.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싸우고, 또 그렇게 함으로 당신이 문제를 최소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진화론의 배경에는 상대주의와 비인격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한 상대주의적인 기반 위에서는 사람과 환경 사이에 상반성이 있을 수 없음이 즉시 간파될 것이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바로 이러한 상대주의가 상반성의 무한성을 준비한다고 말한다면, 일리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경우에 상반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기에 그것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높지 못하고, 하나님도 사람보다 높지 못하다면 누가 어느 한 쪽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인본주의적인 교육. 이제 크리스천은 이러한 철학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단의 인류에게 행한 첫번째 일은 이브에게 그녀가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무시한다고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준 일이다. 사단은 우주는 중성적이며 그 안에는 상반되는 것이 없다는 암시를 그녀의 마음속에 주입시켰다.
악마는 이브에게 자신이 하나님만큼 오랜 기원을 가졌다고 말했으며 악마는 이브에게 하나님과 자신을 모두 지배하는, 한 비인격적인 법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을 넌지시 부인하였다. 사단은 인격철학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거짓크리스천들이 스스로를 참된 크리스천으로 믿게 할려고 할 때, 노골적인 비인격철학보다 인격철학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교육학습 커리큘럼이 그러한 상대적 교육철학 위에 기초할 때, 어린이는 실제로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확고히 터득하게 된다. 아, 그렇다 그것은 현세를 헤쳐 나가는 것과 연관되는 한에서만 문제시 삼는디. 정직이 여전히 최선책이 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정직하지 못하다 해도, 그것 역시 당신이 “그것과 결별”할 수 있는 한 문제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온 우주는 “결별을 위한” 장소가 된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 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 하시며” 여호와는 단지 비인격적인 자연법의 상징적 표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선지자 스바냐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의 삶 속에서 이러한 태도가 침투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가능한 가장 높은 톤으로 상반성을 설교했다. 그는 분노와 환난의 날로서의 심판날을 설교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교육정책에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어떤 연대를 갖는 것 보다 더 이상 그들의 창조주와 구속주를 혐오스럽게 모욕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의 약속과 경고 속에서 인식되지 않을 때 이미 악마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그렇게 큰 소란 없이 파멸로 나아가는 일이 된다.
하나님 중심의 교육. 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 교육자로서 우리의 첫째되는 임무는 상반성 없이 이러한 교육(하나님 중심)을 대면해야 하고 또 그것을 향하여 철저히 상반된 태도를 취해야 하는 일이다. 현대 교육철학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를 혐오스럽게 모욕한다. 당신은 어떻게 기독교와 유신론을 부인하는 바탕 위에서 적극적으로 기독교적 혹은 유신론적인 어떤 것을 건설하기를 기대하겠는가?
여기에 우리가 긍정적 일 수 있기 전에 먼저 부정적이 되어야만 할 명제가 나타난다. 우리가 이후에 진실로 건설적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 속에 내재된 부정적안 것들을 먼저 부인해야만 한다. 현대철학의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부인하기에 실패한 당신의 어떠한 건설적아며 통합적인 것도, 그 자체가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것이 된다. 여기에 교육의 상반성이 놓여 있다.
신비의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
이제 실제의 견지에서보다 오히려 지식의 견지에서 동일한 상반성을 보기 위하여, 현대 교육철학에 근거하여 사람은 전적으로 자생적 존재라는 주장을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만 비인격적인 실재이론의 자연스러운 부가물이 아니다. 비인격적인 우주에서의 하나님이 기껏해야 지식의 분야에서 사람의 조력자의 위치에 불과하다. 공허함이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가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자르게 생각하지 못하면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가 실재의 성격에 대하여 일체 생각하기를 선택하지 않을 때는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머신토쉬는 이렇게 말했다. “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정말 관심을 갖지 않는 일에 대하여 그의 시간을 쓰도록 강요 할 수 있는 어떠한 인간적인, 신적인 법은 없다; 흥미로운 일에라야 발동되는 인간의 능력은 제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기껏해야 자신의 특별한 기호와 일치되는 일들에 자신을 묶어 두는 일이나 다를바 없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Anna Karenina)에서 주연급 배우 중의 하나가 극(劇) 중에서 신들(gods)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 일에 약간의 실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서 트집을 잡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다. 이제 그러한 표현태도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어떤 접촉도 가진 적이 없었으며, 실재의 진리 즉 자신과 그를 둘러싼 우주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어떤 정보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임을 전제한다.
인간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문의도 없이 현실을 해석하는 그 일을 수세기 동안 스스로 시도해 왔다는 것을 이제 어떻게 느끼는가? 인간은 자신의 최선을 다 해 왔다. 그는 모든 신비(all mystery)를 정복하기 위하여, 혹은 당신에게 있어서라면 어떤 특정한 신비의 정복을 위하여, 스스로의 지성의 지렛대를 가지고 그 분야로 용감히 뛰어 들었었다. 그리고 그의 지성(知性)이 그를 실패케 했을 때, 주위가 온통 신비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을 받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 수준을 낮게 이끌어 내리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 마저 실패했을 때는, 현실이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결론으로 내몰아 간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견해이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주의 깊고 철저하게 연구할 수 있는가에 상관없이 무리수는 남게 마련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실재를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 그것은 자만에 근거한 말로 치부된다.
오늘날의 철학자들은 온전한 실재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 버렸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총체적 실재(total real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앎의 관념, 즉 총체적 실재에 대한 통찰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 실재의 존재는 본래 불가해적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모든 사물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역시 자각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전체를 모르고서는 그러한 전체에 속한 어떤 일부분도 전적으로 알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나(one)와 다수(many)에 대한 의문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난해하다. 총체적인 실재는 미지에 속한 것이고, 그 결과로 무리수가 모든 특별한 사실들을 둘러싸고 있다.
이런 모든 것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정박지 없는 바다 위에 버려진 표류자로 느끼게 한다. 그는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에 압도당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전율을 느끼게 까지 한다.
그는 “레벤쌍스트”(Lebensangst-삶의 염려)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 염려란 모든 인간 관계가 단지 일시적 가치만 갖게 됨으로 인하여, 상실점(lost point)이 빈 공간 속으로 삼켜질 정도까지 상승하게 될 때, 의식의 수면으로(to theconsciousness) 올라 온다. 인간은 그가 알 수 없고 조정(contrl)할 수 없는 그러한 궁극적인 비합리적 존재에, 아무튼 의미심장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러한 현대의 비합리주의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절 할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한 자의식적인 인격자로서의 정당한 지위를 내어 드린다면, 우리는 비합리주의에 대하여 정반대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의 유추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이 진리임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살고 거동하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 그리고 성경에 관해서는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창조된 원래의 계시된 분위기 속으로 사람을 복귀시키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성경을 과학철학의 교과서로 간주하려는 구실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와 죄의 존재를 당연시한다면, 구속계시의 불가피성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하지 않는 한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 이시다. 유신론이 기독교의 전제인 것 같이, 기독교 역시 유신론을 함유한다. 우리는 어느 한 쪽에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공허함에 대한 두려움은 불신자의 삶을 조정하는 동기가 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신자의 삶을 조정하는 동기가 된다. 당신은 두려움의 기반 위에서는 적극적이 될 수 없고, 공허함 속에서는 건설적일 수 없으며, 특별히 당신이 공허한 데 처하고서 건설적일 수 있음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속에서 정말로 건설적이 될 수 있기 위하여, 현대 교육 속에 내재된 부정적인 것들을 먼저 부인해야 한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이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인 현실로 눈을 돌린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지금껏 논의해 온 교육철학과 정확하게 일치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우리는 교육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교육분야의 책들이 부지기수이다.
사람들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며, 자기들의 세대는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세대는 자신을 교육에 몰입시킨다. 마치 여기에서라면 다시 뭔가 무에서 유로 나타날 것 같이 말이다.
둘째로 당대의 교육정책 속에는 구심점(Centrality)이 없다. 인간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존재해 나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 삶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명확한 확신위에 기초된 정책을 따르는 대신에,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일련의 미지에로의 실험들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선동가들은 차례로 일어나 외친다; 자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자 저기 그리스도가 있다. 사람은 기껏해야 그가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어렴풋한 지식 외는 실재의 지식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함으로, 그의 교육정책들은 목표와 내용과 방식에 대한 것으로 분열되어 있다.
교육이론가들은 숨쉴 겨를이 없다. 그들은 개가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공을 쫓아 가듯이 이것 저것 막 질주해 들어 간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교육의 목표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교육의 목적에 관해서는 그것은 설정 가능한 환경에 대한 조정(調整) 방식을 성장하는 인격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육목적은 교육의 목적에 대한 전통적 개념 즉 어린이에게 어떤 정보지식을 주기 위한 것이다는 견해와 상반된다. 기능적(functional) 교육이 개념적(conceptual) 교육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소위 이러한 교육의 기능이론에 대하여 잠시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그것은 기능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공허함 속에서는 아무런 기능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그러한 환경이 진정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전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면, 교육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환경에 대한 조정(調整)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자가당착이다. 공허함을 위한(for the void) 준비란 있을 수 없다. 현대교육은 공허함에 대한 준비를 시도함으로 모든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기독교 교육 개념만이 진실로 기능적 교육개념일 수 있음을 즉시 알게 된다. 기독교적 바탕 위에서 성장하는 인격은 그것이 접촉하게 되는 환경 가운데서 만나게 될 보증 된 확신이 있으므로 따라서 기능적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기능교육의 현대적 개념에 매혹당한 어떤 교사가 그러한 교육개념이 자신이 고백하는 기독교와 일치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반문해 보는 일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트로이안(trojan) 기병대가 크리스천 캠프로 진입하는 일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지식과 신뢰. 이 경우는 크리스천 교육의 내용과 관련하여 전형적인 유사성이 있다. 역시 여기서도 우리는 기독교 유신론적 인생관 및 세계관에 대한 주도적 개념이 커라큘럼의 중심을 결정하게 함으로서 염려를 감소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 저러한 주제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소비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하녀 끊임없이 담장을 쳐다보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큰 진척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항상 반대 편의 비판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혼자 설 수 있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다시금 이것은 우리의 반대자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세계대전 중 독일인들은 연합국들로부터 배우고, 연합국들은 독일인들로부터 배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연합군들로부터 배운 것을 연합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고, 연합군 역시 독일군으로부터 배운 것을 독일군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용하는데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 역시 언약인격(a covenant personality)을 구성하는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 속으로 적용 할 수 있는 것 만을 반대자로부터 넘겨 받을 수 있다. 명확한 기독교 유신론적 패턴 속에 설정될 수 없고, 언약인격의 발달로 이끌 수 없는 교육내용은 우리가 학풍 속에 나타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
끝으로 이것은 교육방법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주위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을 주시하는 데 매우 예민해야 한다는 유혹이 우리를 압도한다. 이것 역시 본래 명령적이면서 필수적이다. 모든 우수한 군인들은 적의 계교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그것은 명령적이다. 적이 사용하는 어떤 방식들은 어쩌면 우리에 의해 변형되어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역기 명령적이다. 그러나 항상 변형되어진 것이 그것들임이 분명하다. 형식(form)이란 원래 중성적(neutral)이기에 우리사 학생들 앞에 구별된 내용(content)을 두기만 한다면 형식에 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유리잔의 재질(材質)에 석탄산이 함유되어 있다면, 당신은 물로 한번 잔을 씻어냈다고, 거기에 물을 담아 자녀에게 마시게 하지 않는다. 분명한 기독교 유신론적 내용을 담기 위하여 먼저 비기독교적 정신을 담아 쓴 내용을 취해서 쏟아버린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의 관계는 피부와 살의 관계와 같아서 어느 한 쪽을 손상하지 않고는 쉽게 분리할 수 없다. 우리 반대자들의 교육방법과 관련하여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것과 유사해 보이는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으나, 결코 그들의 것들과 동일한 방법들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역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에 관한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집중적이며 포괄적으로 부정적이 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적 유신론이라는 말이 뜻하는 만큼 결코 집중적이며 포괄적으로 적극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근간으로 삼는 상반성의 근본원리는 바로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정책에서 대담하게, 보다 더 일관성 있게 특별해지면 세상의 눈에는 확실히 “특별하게” 비칠 것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특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특별하게” 비칠 것이고, 세상의 눈에는 배나 “특별하게” 보일 것이다.
II. 커리큘럼의 상반성
자 이제 당신이 나와 함께 조금만 심사숙고 해준다면, 나는 기독교 학교의 커이큘럼인것으로 나타나고, 항상 그렇게 특정지워져야 하는 몇 가지 외양들을 조망해 보고 싶다. 나는 다만 의도덕으로 결코 놓쳐서는 안될 몇 가지 외양만을 조망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히며, 프로그램을 설정하는 것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대략의 아우트라인 정도에서 커리큘럼을 고려하고, 정신이 혼란할 정도로는 세분화하지 않기 위하여, 특성과 역사를 다루는 정도로 언급하는 것이 좋을성 싶다. 그것은 공간의 “사실들”과 시간의 “사실들”을 다루며, 그것은 당신이 가르치는 주제(과목)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수학이든 바느질이든, 요리이든 음악이든 당신은 시-공간적 “사실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문제들을 보다 단순화하고 집중화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의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시-공간적 “사실들”(spacetime facts)에 대해서 말한다. 모든 “사실들”은 시간과 공간과 함께 뒤엉켜 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는 “사실들”에 대하여 지적(知的)으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형태나 내용이 역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만, “사실들”의 형태로서의 공간과 시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빈 공간과 빈 시간은 무의미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커리큘럼은 “시-공간적 사실들”을 다룬다고 말해도 좋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가지 더 서론적인 점들을 거론하고자 한다. “사실들”과 “법칙들” 사이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구분이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것들을 사물들이 따라 행하는 “법칙들”(laws)로 간주하였다면, 당신은 “사실들”(facts)을 설명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이것은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법칙이란 단순히 “시-공간의 사실들”이 행하는 방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칙들이란 “사실들”에 대하여 배우려고 하는, 보다 큰 “사실들”의 부분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역사적인 “사실들”과 공조된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 한,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의 실행의 법칙에 따라 나타내지 않는 한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역시 “사실들”이란 말 아래 “법칙”이란 말을 포함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도하는 바에 더 합당하다. 그러므로 “시-공간적 사실들”이라는 귀절은 그들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사실들”과 “법칙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서론적 내용의 고려와 함께 역시 우리는 이제까지 어떤 기독교 학교 커리큘럼의 중요한 특징이 되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진입하기 위한 길을 준비해 왔다. 이러한 중요한 특징은 이제 나타나겠지만 전체 “시-공간적 사실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개념의 패턴 속에 설치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크리스천의 자족(self-sufficiency)
우리는 이미 공간과 관련을 맺지 못하는 “사실들”이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은 전혀 가르칠 수도 없다. 이와 유사하게 시간 없는 공간적 “사실”은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가르칠 수 없다. 당신은 그것이 당신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어떤 것도,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 그리고 가르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이 배경하고 있는 환경이 있다는(what it is all about) 몇몇 희미한 암시라도 가져야 함이 여전히 요구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 교육. 이제 이렇게만 해서 전체 “시-공간적 사실들”이 그것의 전제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되지 않는 한, 크리스천에게는 단지 추상적인 것이 되고, 전적으로 비 지성적이 됨으로, 전혀 가르칠 수 없다. 우리는 사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관찰되지 않는 한 “사실”은 실제적으로 관찰되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개념을 표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시-공간적인 사실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가 당연히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사실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과 그 사실들의 관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실의 의미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공간적 사실들”을 보았다면,당신은 먼저 “사실들”에 관한 사실을 본 것이다; 즉 당신은 피상적인 사실들과는 구별된 사실들을 먼저 보았었다. 따라서 배경 앞에서, 혹은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의 패턴 속에서 시-공간적 사실들을 보지 못하는 어떤 사람도, 그가 다만 본다고 생각할 뿐이지 어떤 사실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출발점이 되는 사실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반대로 기독교적 유신론자 만이 출발점이 되는 사실들을 소유하고 있는 이유로 유신론적 사실들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이 사실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일반계시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데, 홀로 바른 표준이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은 “피상적인 사실들” 즉 의미를 갖지 못하는 추상적인 것들을 다룬다.
우리는 여타의 어떤 분야보다 교육 방면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는 심각하게 오도된 혼란, 즉 사실(fact)이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실이다라는 그런 가르침에서 돌아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 주제를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차원으로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은 자명한 이치이든지, 아니면 사탄적인 기만이다.
우리가 기독교란 진리이든지 아니면 거짓이다라는 명제(命題)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진리라면 이러한 진리는 사실상 신, 불신자 모두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불신자는 부자와 나사로서 비유에서 가르치는대로 실상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된다. 그러나 흔히 하는대로 만약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알?뮐測? 시-공간적 영역이 있다는 것이 받아 들여진다면, 사실은 모두에게 동일한 사실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단적인 기만이다.
실재의 유신론적 해석과 무신론적 해석 사이의 전체적인 논쟁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집약된다. 즉 유신론적이 아닌 사실들이 “사실들”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더 이상의 어떠한 언급도 없이 사실들은 사실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전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당신 스스로가 영혼과 몸을 적에게 내어맡기는 꼴이 된다.
유신론자로서 우리의 주장은 유신론적 사실들 외는 사실들이 없다는 것이고, 반면에 우리 반대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표현을 하던 안하던, 하나님이 존재하던 안하든지에 상관없이 사실들은 사실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시작부터 용납하는 것은 완전한 패배의 자인이 될 것이며, 기독교 교육을 쓸모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망치도록 내 몰아 갈 것이다.
하나님이 언급되는 교육. 당신이 시-공간적 사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급되고 가르쳐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확신이 없는 한, 소위 중립적인 학교가 아닌 기독교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데 돈을 투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학교들의 교육정책의 기초가 되는 완전한 상반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오떤 과목(科目)이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도 어디서든지 가르쳐질 수 있다면, 기독교 학교를 운영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극단적인 진술 혹은 지나친 비난이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플라톤(plato)은 그것을 그런 것으로 알렸고 또 그렇게 말했다. 그는 누가 두 마리의 말과 두 마리의 황소를 보았다면, 2×2=4가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고 이해했다. 그는 어쨌든 이상세계(ideal world)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하며, 말들과 황소들로부터 이끌어 낸 이중성과 모든 구체적인 것들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고 알았다. 그렇다면 이중성,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플라톤은 그가 몰랐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이상세계는 그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 없이는 소망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보았던 모든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수학 뿐만 아니라 윤리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글쎄 어떤 것을 가르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해있는 덕을 관찰하는 것으로 덕을 알수 있는가? 없다. 악에 오염되지 않은 덕은 여기에는 없다. 극단으로 치닫는 어떠한 덕도 악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한 덕의 개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이상세계를 바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조차 우리가 저절로 총체적인 덕(virtue totally)을 발견할 수 없음은, 선한 것들에 대한 개념들 중에도 진흙과 머리카락과 오염으로 점철된 그러한 두려운 이념들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상세계 역시 부정 없는 긍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악마도 하나님 만큼 오랜 기원을 가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본 덕의 개념 역시 궁극적인 신비로 남아 있었다. 플라톤은 그가 궁극적인 사유의 딜렘마에 봉착하고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현대철학에 있어서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플라톤보다 더 잘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플라톤이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음을 기꺼히 용인한 만큼 현대철학은 그렇게 잘 용인할려고 하지 않는다. 버나드 보장케(B.Bosanquet)는 5+7=12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진기함이라고 부르고 그는 또 그것을 영원한 진기함이라고도 했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수학의 법칙과 같은 그러한 법칙은 완전한 진리의 몸체와 연계되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의 논거는 2×2=4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중성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한 플라톤의 말과 일치한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학교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충분히 용인할 수 있다. 기독교 학교의 필요에 대한 근거는 바로 이러한 점, 즉 사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알려지지 않는 한 어떤 사실도 알려 질 수 없다는 바탕 속에 놓여진다. 일단 이러한 점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기독교 학교에 수학을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은 사라지고 만다. 당연히 기독교 학교에서 수학이 가르쳐져야 하며 그것은 여타의 어떤 곳에서도 가르쳐 질 수 없다.
상반성에 대한 자각
우리가 의도적으로 2×2=4라는 이러한 문제를 채택했던 것은, 그것이 기독교 가르침에 있어거 흉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기독교 윤리 같은 것들이 기독교 학교에서 교수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이상적인 것으로 기꺼히 용납하나, 교육의 주변에 놓여지는 그런 과목들이 기독교 학교에서 교수되는 데 대해서는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껏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은, 의당 기독교 학교는 시종 기독교 분위기 속에 어린이들을 두기에 좋고, 그러한 기독교 분위기는 오직 크리스천 교사들에 의해서만 공급 될 수 있다는 정도이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아니면 최소한 회의적인 태도로 말한다. “당신이 2×2=4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특별히 기독교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글쎄 우리의 답변은 만약 당신이 수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칠 수 없다면 달리는 그것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수학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가르쳐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당신이 학과를 시작하기 전에 두 시간 기도를 했다는 점에서 수학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분위기를 호흡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 분위기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가져오지 않고는 어떤 사실도 가르쳐질 수 없다는 교사 편에서의 깊은 확신이다. 교사가 이러한 확신을 갖기 전에는 어떠한 윤리적 기독교는 지적 이교주의의 딱딱한 진흙 바닥 위에서는 활발히 꽃 피우지 못한다.
물론 나는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기는 쉬우나 현실화 하기에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잘안다. 아, 언약의 자녀들의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일이 전적으로 우리 능력의 한계 밖에 있음을 너무 쉽게 놓치지 않는가? 우리는 수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르쳐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린이가 2×2=4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어떤 법칙에 따라 시-공간적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법칙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모든 충분한 암시를 즉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1학년생이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8 혹은 10학년이 그러한 암시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면 낙심할만 하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보기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그렇게 될 때, 후에 그것들에 대하여 보다 많은 것을 배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수학과목은 기독교 학교 커리큘럼의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수학이 다른 과목들 보다 결코 시간을 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어떤 과목은 비교적 유용한 시간대 가운데서 많은 시간 할당을 받으면서도, 커리큘럼에 있어서는 주변의 위치에 놓여야 하는 일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시-공간 세계의 공간적 요소를 강조하는 수학과 여타의 모든 다른 과목들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의 영역 가운데서 주변에 처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배열에서 기인된다. 즉 사람이 중싱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의식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므로, 그의 가장 독특한 인간 자취는 부동의 공간적 영역에서 보다, 역사 속에 있는 시간의 움직임 속에서 자신을 더욱 완전히 나타낸다. 따라서 자연을 가르칠 때, 보다 역사를 가르칠 때 인간과 실재에 대하여 보다 독특하게 기독교적 해석을 이끌어내기가 더 쉽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역사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수학에 대한 기독교 가르침에서도 동일한 정서적인 열정으로 반응해 주기를 기대 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역시 우리는 공간의 사실들과 시간의 사실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재삼 인식해야 한다. 시간적인 사실들이 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광의 중심에 더 근접해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간적인 사실들을 시간적인 사실들과 연결하여, 후자를 공간적 사실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전송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교향악단에서는 모든 개개의 악기가 개별적으로 튀어나서는 안된다. 좋은 그림은 별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한 많은 배경들을 깔고 있다. 기독교 학교의 커리큘럼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빠뜨릴 수 없는 과목들을 포함한 하나의 유기체(a organism)가 되어야 한다. 내가 기독교 학교 외에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주장 할 때, 일반은총의 교리를 잊지 않았다는 점을 재삼 명시해 두고자 한다. 물론 당신에게 있어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불신자들에게 있어서와 같이 일시적인 실용적 편이성을 충족시켜 주는 정도를 의미한다면, 비기독교적 수학 교과서(그리고 종교와 기독교를 포함하여 여타의 내용에 대해서도)로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기독교 가르침과 절대적인 궁극적 내용들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앞 섬
커리큘럼에 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모든 시-공간적 사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 앞에 놓여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요점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요점이 분명해지기만 하면, 모든 다른 문제들도 그 빛 가운데서 해결될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우리가 이미 손댄 이러한 커리큘럼의 중심에 대한 문제를 잠시 고찰해 보자.
우리 크리스천의 삶과 세계관에 중심이 있다면, 우리의 교육 커리큘럼에도 반드시 구심점이 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교육 정책들 속에 중심이 없다는 것을 말해 왔고, 그러한 중심의 결핍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 철학 속에 중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 주위의 학교 커리큘럼에도 역시 중심이 없는데 그것은 달리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의 삶과 세계관(life-and-world views)을 위한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중심을 가진 커리큘럼을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오래된 고전들(the classics)과 인문학들(humanities)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연을 탐구하려고 무분별하게 돌진해 나가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우리를 다만 이러한 경향이 인간 자신을 희생시킴으로 인간의 환경에 대한 강조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점만 지적해 두고 싶다.
이제 만약 우리가 현대 교육 철학이 주장하는대로, 사람은 결국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현대 교육 커리큘럼은 사람이 무엇인지, 그의 환경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침묵의 용인 위에 건설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람은 전적으로 표류하게 됨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멀리서 자신이 보기에 흥미있어 보이는 어떤 것을 향하여 할 수 있는대로 빨리 돌이키는 것이다.
기독교 학교의 커리큘럼은 당연히 이 모든 것들과 정반대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는 사람이 무엇이며 그의 환경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더욱이 우리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커리큘럼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를 위한 커이큘럼의 입안자인 우리는, 무모하게 앞 뒤로 돌진해 들어가서 이 쪽 한번, 저 쪽 한번 찔러보는 식으로 일하지는 아니한다.
우리는 항상 사람을 커리큘럼의 중앙에 놓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환경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사람에게 복종하도록 만드셨다. 역사가 배경으로 격하될 수 없다는 귀결이 따라 나온다. 사람의 역할이 가장 돋보이게 나타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과목들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시간의 양(量)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자연 탐구는 그것이 역사의 연구와 분리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유익하고 유용하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커리큘럼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간의 커리큘럼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그러므로 구속(救贖)의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추는 신성한 역사는 모든 역사의 가르침의 중심에 놓인다. 나는 근본적으로 시간의 양(量)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음을 다시 밝힌다. 신성한 역사가 커리큘럼의 중심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역사가 아닌 다른 과목들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과 불일치하지 않는다.
자연인 역사와 관련되어질 때만 구속받은 자로서의 인간이 커리큘럼의 중시에 위치하게 되고, 그렇게함으로서만 시-공간 세계의 어떠한, 모든 사실도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게 될 때만, 교육의 내용으로부터 교육의 형식을 추상적으로 분리시키는 일이 없게 되며, 이와같을 때만 교육은 실로 구체적일 수 있게 되고, 이와같을 때만 마땅히 강조되어야 할 위치를 선정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뭇솔리니(Mussolini)보다 오히려 모세(Moses)에 관하여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될 것을 줄곧 염려하는 일 없이, 인류의 역사와 인류의 구속역사 속에 있는 실로 중요한 상징들을 밝혀낼 수 있게 한다. 이와같을 때만, 자연(自然)은 하나님의 그림책, 즉 하나님의 움직이는 그림책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와같을 때만 우리는 기독교 교육이 이름에 걸맞는 것이 되는데 너무도 필수불가결한 분위기를 공급할 수 있다.
III. 어린이와 관계된 상반성
우리는 교육을 받는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단계에 왔기 때문에 매우 단촐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에 대한 현대 교육철학의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논의하였는데, 그것은 어린이에 대하여 생각할 때도 당연히 마찬가지이다. 공허한 미로(迷路)와 끝없는 비합리성의 심연으로부터, 이 세상 위에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생겨 나왔다. 그리고 각 인간 존재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생겨 나왔다. 그리고 각 인간 존재는 전체로서의 종족 변천의 발달단계를 반복한다. 발전하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발달단계를 반복한다. 발전하는 합리성의 작은 결함들이 배워서 다루어야 하는 조정들이 전혀 일시적인 일들을 다루는 것 같으나, 그의 주위에는 희미한 가능성들의 개연성이 있다.
따라서 어린이는 열려진 가능성의 무한한 연속성 앞에 놓여야 함이 분명하다. 이러한 가정된 조정의 과정을 위하여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환경 지향적인 “인격의 통합”이라는 어귀이다. 인격의 개념이 누누히 반복되어 사용되며 인격발달이 교육의 전부라고 한다. 교육은 단지 중세적(中世的)인 정신, 즉 커리큘럼이 어린이에게 예속되기 보다는 어린이가 커리큘럼에 예속되는 그러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때만, 인격은 어떤 진정한 발전의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인격에 대한 비기독교적 개념
인격과 그것의 발달 가능성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반대자와 우리 자신들 사이에 논쟁의 정점이 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커리큘럼의 타입을 갖고서는 인격발달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하는가? 우리는 한번 더 궁극적인 선택을 직면해야 함이 확실해 진다.
빈 젖꼭지를 빠는 아기들. 교육철학을 논의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사실 우리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할 수 없는 입장으로 생각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반대자들의 입장이 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커리큘럼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도대체 어떠한 것이 가르쳐 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잇슈였다. 그리고 우리가 커리큘럼의 구성에 있어서 편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칠 수 없다고 반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의 발달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비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바로 그와같이 주장하는 그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전혀 인격발달을 꾀할 수 없다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전면(全面)에 내세워 온대로, 우리는 전적으로 긍정적이며 건설적이 되기 위하여 먼저 철저한 부정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순수한 양육. 우리가 우리 반대자들의 교육체계 하에서는 인격이 발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들의 주장하는대로라면, 유한한 인격이 완전히 비인격적 분위기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장은 유한한 인격은 그것이 절대적인 인격과 대면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 한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공간적 사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인격은 시-공간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특이하게, 이 우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놓이지 않고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 인격의 경우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당신은 합리성에 대한 생각 없이는 인격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유한된 합리성은 그 자체를 생각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유한된 인격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비인격이 인격에 대한 장식이 될 수 없다. 인격이 완전한 의미에서 파악되었다면, 그 인격은 전적으로 자족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격이 유한된 의미로 파악되었다면, 인격은 비인격을 그것의 장식으로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비인격 장식의 배후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가정(假定)하에서이다.
모든 상반성을 없애버리고, 우주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중립적인 우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비기독교적 교육철학의 비인격주의였다. 이제 다시 유한된 인격을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역시 이와 같은 궁극적인 비인격주의이다. 그렇게 될 때 어떠한 인격의 발달진행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유한된 인격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위치에 있지 않으므로, 유한된 인격이 배워야 하는 “사실들” 혹은 유한된 인격이 조정받아야 하는 환경이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는 위치에 두어진다면, 지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어떤 결실 있는 접촉도 가능할 수 없다. 정말 지식을 가지려 한다면, 아는 자와 알려진 것 모두가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 둘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비기독교적 부정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의 권위의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가르치는 관계는, 그가 그의 해석을 완전한 진리로서 나타낼 어떤 권위를 갖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곧바로 낳는다. 정말 권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권위를 행사할 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일이 되지 않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은 엄밀하게 말하여 권위와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하여 조금 더 안다고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의 권위 즉 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전문가적 권위만큼 용납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전문가적 권위. 이제 우리는 법적 권위를 전문가적 권위의 대용물로 변호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권위란 전혀 없는 것이고, 권위가 없기에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에 권위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바탕 위에는 지식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해 진다. 그리고 만약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전문가적 지식 역시 불가능하다.
진정한 권위. 권위란 유한한 인간의 인격 앞에 완전한 하나님의 인격을 두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르쳐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질 수 없으며, 권위를 가지고 가르쳐지지 않는 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바로 이것이 교사의 위치를 그토록 한없이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그토록 무한히 값있게 해주는 점이다. 우리 반대자들의 바탕 위에서라면 교사의 위치란 전혀 소망적이지 못하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과 그가 호소할 수 있는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어린이를 무한한 가능성의 연속선 앞에 두어야 하고, 그러한 가능성들과 관련하여 취해야 할 가장 현명한 태도에 대하여 무언가 말해 줄 수 있는척 해야 하는 동시에, 그는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결과, 어린이는 그가 살 수 있고,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받지 못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크리스천 교사는 자신을 알고 과목들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어린이를 안다. 그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완전한 결실이 있을 것을 충분히 확신하고 있다. 그는 영원한 보상에 대한 여명 속에서 수고한다.
http://blog.daum.net/holylife2/706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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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大韓예수敎 長老會 光州改革神學硏究院
학술지명 光神論壇
권 2
호 1
출판일 1990
반 틸의 변증세계 재 이해
조봉근 大韓예수敎 長老會 光州改革神學硏究院 변증학 교수, 목사
2-637-9001-02
pp.19-53
<목차>
제 1 장 반 틸의 역사적 환경
1. 유년시절
2. 미국으로 이주할 때
3. 부르심을 받은 반 틸
4. 전원에서 자란 학자
5. 프린스톤 대학시절
제 2 장 반 틸의 사상적 세계
결 론
제 1 장 반 틸의 역사적 환경
1. 유년시절
1895년 그 아름다운 봄날에 화란에서는 특별하거나, 주목할만한 어떠한 역사적 사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트 반 틸의 견고하고 오래된 농장 집에서는 (이 집에는 광이 붙어 있었고 붉은 기와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경사가 있었다.
아이트의 좋은 아내인 크라지나가 그들의 6번째 아이인 코넬리우스를 낳았다. 진 실로 사람들과 나라들의 연대기는 그 작은 화란 아이의 탄생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 십만의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책을 읽었고, 그의 복음의 확증과 믿음 의 변호를 통하여 혼돈되고 불신이 가득찬 금세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대두분의 미국 사람들에게 있어 기억되는 것은 넓은 바다가 육지를 기대고 있는 화란은 에 라스무스, 렘브란트, 반 고호, 벨미르, 스테빈 ,휴겐스 그리고 안네 프랑크, 한스 프린크와 실 버 스켓트에 의해서 알려 졌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 떠난 퓨리탄 들에 의해서 알려졌고 뚝에 구멍이 생겼을 때 그의 손으로 바닷물을 막은 작은 소년 에 의해서 인식되어 진다.
이 작고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는 철학의 어려운 분야와 신학에 대부분의 사람들 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기여를 했다. "화란은 자유의 전통적인 땅 중의 하나이다"라고 헤브로크 힐스는 썼다.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에서 자립적 지성과 자유종교의 정신의 발현 이 막혔을 때에도 화란은 그러한 것들의 고향이다" 고대 그리이스가 철학에 기여하고, 고대 로마가 법률학에 기여한 것같이 화란이 신학에 기여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벽두로두터 화란 사람글의 제일 원인의 성격과 궁극적 실체의 문제 즉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을 다루는 철학의 분야인 형이상학에 대한 사랑은 혁신적인 종교모임의 탄생으로 표시되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공동생활의 형제단으로서 알려졌다. 그들 은 예배를 말없이 혹은 적은 말로서 드렸다. 이 운동의 태동기로부터 두 명의 유명한 사람 이 나왔다. 처음으로 신약의 헬라어판을 편집한 학자인 에라스무스, 그리고 단순한 수도승이 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이다. 그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고독과 숨겨진 고뇌 신뢰와 승리 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를 통하여 인간에게 필요하고 위로를 주는 기록으로 존재 할 것이다"라고 죠지 엘리오트는 말한다.
가톨릭과 신교 모두 화란의 사상가들에게 게속적인 빚을 지고 있다. 트렌트 종교 회의 전에 로마교회는 교리의 일반적 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춥고 습기차고 거칠은 화란의 환경은 바다와 바다의 요소에 대한 맹렬한 투쟁과 합해져서 제네바에서부터 전달된 활기찬 칼빈주의의 씨에 대한 가장 적합한 토양을 제공했다. 개헉파 교회들이 일어났고, 기독교 학교들이 세워졌고 프로테스탄트 신문이 널리 퍼졌고 프로테스탄트 정당이 11개 주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개혁신앙의 부풀어 오르는 힘이 화란 시민의 성격 속에 철과 강철을 넣어주었다. 또한 개인적인 그리고 사회적 인 책임감을 자극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심었다. 개혁신학이 아래로 뿌리내리는 곳은 어디서든지 위로 열매가 열렸다.
신앙 개혁 시기 전에 인구의 급격한 변화와 정치적 압력은 적지않은 화란 원주민 들이 다른 해안지역으로 이주하게 했을 때 그들은 자유사회의 원리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그들과 함께 옮겨 갔다. 이 정신은 카나다와 미국의 생활에서도 좋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은 이주자의 숫자와 비교해 볼 때 대단히 큰 것으로 증명되었다. 과거의 화란 생활의 특이 한 점 한 가지는 생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에 엄격한 질서가 있는 것인데 화란말로는 Verzuiling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나누기" 같은 것을 뜻한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그것은 전통적으로 화란의 신교들은 신교 교회에 나가고 그 들의 자녀들을 신교 학교에 보내고 그의 세금이 신교 가구들을 돕기 위해서 쓰여져야 하고 신교 신문을 읽으며 신교 크럽에 어울리고 신교 정치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 마 가톨릭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도 비슷한 형식을 따랐다. 그러므로 화란 사람들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 이고 규칙있는 사회체계를 가졌다. 아마도 이러한 전통의 부정적인 측면은 세계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교와 가톨릭과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이 10년동안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좁은 길을 가진 같은 구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이러한 생활이 같은 인구를 가진 영국이나 미국에서 발견될 수 있 는 성경과 기독교의 이해에 대한 지식보다 힐씬 높은 지식을 초래한다. 이상하게 나누어진 사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훈련되고 가장 헌신적이었던 기독교 사상가들의 얼마가 배출되었 다.
화란의 최북단지역에서는 구로닌겐 지방이 있다. 여기에는 독일말을 하는 프리 스로 알려진 족속이 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과 운명에 있어서 화란 사람들과 밀접하 게 연결되어 있지만 강하고 자부심있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화 란 사람들과 다른 족속이다. 기독교시대 초기에 프리스 족속은 로마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그리고 후에 독일과 프랑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점령되었다. 1523년에 오렌지공 월리암의 지휘하에 그들의 자유를 다시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그들은 화란의 다른 거주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침입자에 대항한 모든 유럽 중에서 가장 완강히 저항한 사람들 중의 하나 였다.
1895년 5월 3일 코넬리우스 반 틸은 "그루테가스트"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반 틸 의 가계에는 프리스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 레인더는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사 람들이었다. 그는 여인숙의 주인이요 운영자로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기독교 철학자로 서 사색했고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신학자로서 가르쳤다. 그의 생전에 화란의 개혁 교회는 세례로 인한 거듭남의 문제로 나누어졌다. 다수의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경건한 가정 에서 출생하는 것으로 인해서 언약의 자녀들은 거듭나는 것으로 당연히 믿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아이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반면에 소수의 지도자들과 사람들은 언약 의 자녀들이라도 세례를 받아야 하고 교회의 품에서 양윽되고 교회의 특권들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고 구주와 그의 구속을 개인적으로 알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여인숙 주인은 후자의 무리에 속했다. 보수적 세례 긍정론자들은 교회에서 예배보는 것을 금지 당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광이나 공공건물에서 그들의 예배 를 보아야만 했다. 이 일을 그들은 그들의 교회를 세울 때까지 확고하게 그리고 즐겁게 했 다.
레인더의 아들인 아이테는 근육이 발달하고 희고 흘러내리는 수염을 가진 구약의 족장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로닌겐의 대부분의 거주자들과 마찬지로 그는 우유를 나누어주고 가축을 키우고 파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40에이커 되는 농장에서는 정원야채, 건초 그리고 아마를 생산했다.
19세기의 화란사람들은 많은 가족이 있었다. 아이테와 크라지나 반틸은 세상에 8 명의 자녀들을 낳았는데 코넬리우스는 6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법석대기 좋 아하는 아이로서 기억한다. 그의 어린시절 널게 퍼진 버드나무 아래에 있는 모래상자 안에 서 노는 것과 일군과 함께 아버지의 광의 건초더미 두는 곳에서 자면서 밤을 보내는 데에 그의 주요한 기쁨이 있었다. 그는 케이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이 별명은 그의 가까운 친구들에 의해서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
좋은 개혁신앙을 가진 모든 가정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케이스는 기독교학교에 보내졌다. 그의 형 야곱과 함께 그는 2마일 거리되는 학교에 터벅터벅 걸어다녔다. 도중에 그들은 여러가지 잡다한 방해물들과 작은 도랑을 나무를 짚고 넘기 위해서 자주 멈췄다. 화 란의 아이들은 뾰족한 나무신 혹은 크롬파를 신는 것이 습관이었다. 수업중에 학생들은 그 들의 신발을 옮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학교당국은 성급한 학생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가끔 논쟁이 벌어 졌을 때 성격 이 폭발하고 주먹이 날고 그리고 싸움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크롬파를 움직여서 서로 상대방의 머리를 세게 때렸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한 행동은 분명히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반 틸의 집에서나 기독교 학교에서나 성경은 중심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리 문답 교육을 포함한 가정예배는 아이들의 영적 성장에 중요한 요소였다. 코넬리우스는 지금 도 감동적으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억하고 암송한다. 그 질문은 "삶과 죽음에 있어서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안입니까?"이다. 여기에 대답은 다음 과 같은 신조였다. 즉,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나는 삶과 죽음에 있어서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보혈로 내 모든 죄를 완전히 씻었으며, 그리고 나를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원하셨고 그래서 그가 나 를 보존하신다.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도 내 머리에서 떨 어질 수 없다. 진실로 모든 일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룰 것이다. 그런고로 그의 성령으 로서 그는 역시 나에게 영생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내가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꺼이 살게 만드신다. )라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일에 검은 나무로 된 크롬파를 신은 아이들과 함께 기도의 집으로 엄숙 하게 걸어가는 반 틸의 가족을 마음 속에 생생하게 그려 볼 수 있 ;다.
반 틸씨는 예배드리려고 가는 길이나 예배시간에 작난과 한눈파는 것을 책망하는 것을 참지 못하곤 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성스러움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리스도이신 위대 한 왕에게 예배드리는 동일한 귀한 믿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였다. 영광의 주님에 합당한 경외심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에 집으로 가는데 비가 오면 작은 달팽이들이 땅에서 움직이기 시작해서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이 오래된 화란 속담인 "너는 모든 달팽이에게 소금을 뿌려서는 안된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짓는다. 속담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교훈은 "너 자신을 너무 가늘게 펴지 말아라 : 인생은 너무 짧다"는 뜻이다.
거기서 우리는 아이테와 크라지나 반 틸의 경건한 가정 생활을 형성 하는 데 결 합된 요소들을 발견한다. 그들의 후손에게 그들은 루비보다 더 귀한 사랑을 엄격하나 편견 없는 훈련을 칼빈 신학의 풍요로운 유산을 알게 함을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그 리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향기로운 추억들로 가득찬 마음을 남겼다.
누구라도 인생의 황혼기에 있었던 코넬리우스 반 틸이 자주 그로닌겐의 그 황금 시절로 돌아가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그리운 단어를 반복한다면 그의 향 수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여도 갈 수 없는 곳 내 철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나그네는 아직도 고통하네 축복이 불어온 시발점이여 기념할만한 축복이 주어진 곳.
2. 미국으로 이주할 때
케이스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 반 틸의 가족은 드릭크 마을로 옮겼는데 그 마 을은 그로닌겐과 프리스랜드 지방 접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 20에이커의 농장이 있었고, 아이테는 많은 양의 홍당무, 양배추, 감자, 그리고 꽃, 양배추를 키움으로 그의 형편을 개선 할 수 있었다. 습기차고 비옥한 땅은 이탄도 산출했는데 이탄은 가족들이 힘들여 땅에서 얻 어서 후한 가격에 팔았다.
이탄은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로서 보통 8평방 인치의 넓이에 3내 지 4인치의 두께를 가진 인료로도 또 비료로도 쓰여지는 물질이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기쁨 중 하나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크고 달콤하고 즙이 많은 딸기를 모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그들은 열심히 갖고 먹었는데 어떤 때는 땅에서 난 날 것 을 어떤 때는 크라지나에 의해서 맛있는 파이나 혹은 달콤한 과일이든 파이로서 먹었다.
반 틸의 가족은 드릭크에 산지 오래지 않아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나이 많은 아들 중의 하 나인 헨드릭은 화란 군대에 징집되어서 드렌타 지방에 있는 앗센에 머물러 있었다. 헨드릭 과 다른 아들들의 오랜 군대 생활에 대한 염려가 가정위에 암영을 던졌다.
반 틸 내외는 소년들이 하나씩 하나씩 집을 떠나서 군인이 되는 것을 보고 새롭 게 장래를 생각했다. 그러면 누가 농사를 지을 것인가?
아버지의 동의와 함께 케이스보다 열 한 살이 많은 레인더는 결혼했고 그의 신부 와 함께 화란을 떠나서 미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하몬드 남쪽 10마일에 있는 인디아나 하이 랜드에 가까운 농장에 정착했다. 레인더는 한 에이커당 5달라씩에 40에이커를 빌렸고 두 마 리의 노새를 사고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그를 따라서 기회있는 땅에 부모들이 오도록 종용하는 편지를 썼다.
1905년 봄에 갈등하는 감정을 가지고 헨드릭을 뺀, 반 틸의 가족은 조국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 땅에서의 그들의 뿌리는 깊었다. 이주는 친척과 친구와 아는 사람들과의 이별과 문화적 배경과 오래 계속된 전통 뿐만 아니라 교회적 결합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 다.
그러나 아이테의 마음에 화란에서의 게속되는 삶의 불확실함에 대한 새 세계의 삶의 보 도 된 이점들은 변화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쟁기를 손에 잡았을 때 그는 돌아서지 않 았다. 그들은 로텔담까지 기차로 가서 화란 미국간의 증기선을 타고 뉴욕으로 항해했다. 그 들의 배는 케이스의 10번째 생일을 보내고 13일 후인 1905년 5월 19일에 도착했다.
결핵증 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반 틸 여사는 배에 있을 때, 건강이 호전되는 것을 경험했고 결과 배가 도착 했을 때에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것같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73세 까지 살았다.
뉴욕시에서 가족들은 하은드까지 그들을 데려다줄 이라이철도 기차를 탔다. 그것 은 지치고 꼬불꼬불 돌아가는 여행이었다. 26시간 동안의 여행은 특별히 그당시 팔에 안긴 어린아이였던 작은 시에프코에게는 힘든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하몬드에 도착했다. 정거 장에 레인더가 마중 나왔다. 재회의 기쁨은 큰 것이었다. 레인더는 피로에 지친 여행자들과 짐들을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에 태웠다.
그들은 하이랜드까지 이르는 포장되지 않은 10마 일 이상의 길을 가는 동안 요동했다. 아이들은 미국 전원생활에 경치와 소리에 호기심과 흥 분으로 가득찼었다. 우는 가축들, 부드러운 모습을 가진 말들, 광대한 광들과 곡간들, 아담한 농장 집들, 평평하고 나무로 된 시골이었다.
당시의 하이랜드는 주요한 도시는 아니었다. 6개의 건물들이 그곳의 경치를 장식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체국, 기독교 개혁교회, 학교, 대장간, 철도, 사무소 그리고 살롱 등 이 있었다. 레인더는 가족들이 셋집으로 가도록 주선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 새로운 문화, 그리고 생소한 언어에 대한 적응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반 틸 가족은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교회의 사역자는 셀다 목사였다. 그런데 자주 주인 "the domine"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그가 경건 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는 반 틸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케 이스의 장래 계획에 말로 다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형제들은 교실이 두 개인 학교에 갔다. 그들은 영어를 빨리 익혀 나갔다. 1학년에 입학한 케이스는 영어를 너무 잘 터득하여서 그 해에 5학년으로 월반했다. 선생님은 케이스 에게 "큰 크롬파"라는 그리고 야곱에게는 "작은 크롬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후에 그들의 형 들 중의 하나인 크라스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그를 두 개의 크롬파스의 형이라고 불렀다.
다른 두 형제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대신에 농장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처음 에 아이테는 양파를 재배하려고 노력했다. 그 실험은 실패했다. 양파가 빨리 자라저 씨를 맺 고 딱딱하게 되어서 쓸모 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작은 오이를 재배해서 더 나은 성공을 기 두었다. 이것들을 그는 한 부쉘에 50센트씩 리비와 멕네일에게 팔았다. 아이테는 지금까지도 코렐리우스에게 분노를 일으킨다. 그처럼 비참한 가격에 한 부쉘마다 등이 부서질 것같은 노동이 들어간 것을 생각할 때, 분노에 몸이 떨리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대체적인 상황은 화란에서의 그것보다도 향상되었다.
아이테는 여러가지 종류의 야채를 경작할 수 있었고 들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었다.
3. 부르심을 받은 반 틸
케이스 반 틸에게 있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의 부르심은 하늘을 가로질러 일 련의 번쩍이는 줄같은 순간적이고 극적인 섬광에 의해서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경험 은 강제, 끊임없는 당김, 발전되는 설득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남자와 여자 와 젊은이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필사적인 필요성 속에 서서 세속 세계에서 살고 있었 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에게 '자유케 하는 말씀을 가지고 가서, 주님의 언약의 백성을 강 하게 세우려는 소원이 엿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케 이스를 붙잡았다. 마침내 그는 바울과 같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말할 수 있었 다. 「고린도 전서 9:16」
찰스 스펄죤은 그의 대학의 학생들에게 이러한 충고를 주곤했다. "젊은 이들이여 만약에 여러분이 복음의 사역 밖에 머무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가 뜻하는 바는 물론, "만약 선지자적인 충동이 당신들을 잡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다른 것을 하십시 오" 농사를 포기하고 성스러운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하는 결정은 19세가 된 반 틸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잊혀지 지 않는 이사야의 말인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6:8)하는 말이 그의 심령에 새 겨졌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세웠다.
한동안 미시간 그랜드 래피즈는 기독교 개혁 운동의 신경 중심인 예루살렘처럼 기능을 발휘했다. 그 부산한 화란 사회에 칼빈 예비 학교와 대학 그리고 칼빈신학교가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그들의 생의 사역을 위한 훈련을 위해서 설립되어 있었다.
케이스는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던 해인 1914년 가을에 문스터를 떠 나 예과에 들어갔다.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처음에 몇 개월동안 인디아나 주에서 온 그 학생은 그의 배 움에 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었다.
아주 심한 향수병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생각은 끊임없이 가까이 결합된 반 틸 가족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런 레나를 그리워했다. 그는 뮨스터의 좋은 땅, 말과 가축들, 잔디에 입맞춤, 일하면서 들과 정원에서 하나님을 관찰하는 즐거움으로 돌아 가기를 갈망했다. 그는 사기면에서 특별히 침체되었으므로 그의 믿음은 흔 들렸고 그리고 그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기반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의 학문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코넬리우스 반 틸은 학교를 그만두려 했던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솔 직히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의 원숙한 나이 때에는 그는 주목할만한 형이상학자가 되 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뛰어난 철학자가 되었다. "당신이 피곤하거나 혹은 낙심했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그는 그의 갈색 눈을 깜박이며 말할 것이다. "내가 거의 그 럴 뻔 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는 뜨거운 물 속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세 가지 요소들이 그를 요동치 않게 했다. 레나의 편지로부터 그는 상당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또한 그는 그의 가족중에 처음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 이었다. 그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큰 크콤과"가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 럽게 여겼다. 만약에 그가 한 순간의 약함으로 항복해 버린다면 그가 어떻게 그의 머리를 들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고난을 위해서 태어난 형제인 두 번째 사촌 헤르만 모에스 가 중요한 고비에 그와 친구가 되어서 그와 길게 이야기 했고, 그래서 그를 절망의 수렁에 서 건져내 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무렵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고 반 틸은 그의 예비교육 을 방해하는 모든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 결정 뒤에 큰 안도감이 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예과교육과 대학 기간은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용광로에서 시험받는 기간이었다. 재정적인 위기로 인하여 그는 시간제의 일을 구해야만 했다. 일주일에 방값과 음식값이 4달라 들었다. 기독교 개혁교 회 학생 기금에서 제공하는 제한된 장학금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는 기숙사에서 그 건물을 관리하는 일을 얻는데 성공했다.
다른 많은 학생들이 그들의 여가를 운동, 법정, 그리고 사회적 활동을 즐길 때 케 이스는 결코 덜하지 않은 기쁨과 흥분을 가지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그리고 쇼펜하우어 등의 어려운 책들을 탐구했다.
철학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배움의 한 분야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것들의 특성 을 다루는 죤 번연과 같은 사색가들과 집필가들에게는 경이의 근원이다.
그러나 코넬리우스 반 틸에게는 그것은 이상하고도 놀라운 매력을 주었다. 이러 한 흥미는 아마도 보수적 세례 긍정론자들촤 관련된 얼마간의 학자들의 영향 때문이거나 혹 은 스스로 분명한 사상가였던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얻은 것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떻든 간에 전제와 삼단논법과 그리고 모하며의 관처럼 하늘과 땅사이에 매달려 있는 수백 가지의 다른 문제들은 일찌기 케이스 반 틸의 맛있는 음료와 음식이 되었다.
아마도 그의 분석적인 마음은 언제나 비기독교 학자들의 전제에 도전 할 기독교 철학의 구조의 철학들이 결합되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 철학 체계는 헬만 도이벨트나 볼렌호벤, 그리고 반 리센과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피어 나 엘 깔스베이끄, R.H.나쉬 등처럼 "우주법 체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반 틸은 아 브라함 카위퍼와 헬만 바빙크의 계시철학에 영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클라우스 스킬더의 영향도 막대하다.
4. 전원에서 자란 학자
코넥리우스 반 틸의 신학교 예과 훈련을 받는 동안 그랜드 래피즈의 예과의 교육 수준은 높았다. 초기의 몇몇 신학효 교수들이 교수단을 배가했다. 그러나 소위 "실천과정"이 라 불리우는 것들은 아직 채택되지 않고 있었다.
학교의 설립자들은 화란에서 가르쳐진 수업과정을 따랐다. 개인의 다양함의 여지 는 거의 없었다. 선택과목은 없었다. 큰 크롬파가 좋아했던 두 분의 선생님은 클라스 스콜랜 드와 그 교수 아래서 그는 4년 동안 고전 헬라어를 배웠다. 그리고 화란 역사와 문학을 가 르친 반 안델교수가 있었다. 반 안델 교수를 학생들은 "진정할 인격자"라고 부르곤 했다.
가능할 때면 언제나 그는 플랑드로 지방의 예술과 역사의 빠르고 열정적인 특이한 점들을 연구함에 의해서 화란말의 명사변화와 동사체 계의 딱딱함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그는 오르 간을 연주하고 그의 학생들의 민요를 인도함으로 순수한 기쁨을 맛보았 다. 어느날 누군가가 그를 그의 화란말 문법에 대한 지식의 결핍으로 인하여 비난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심술궂게 대답했다. "무엇이 라구요? 내가 그들 모두에게 A학점을 주었습니디․. 그렇지 않은가요?"
오늘날 반 틸 박사는 어떻게 반 안델 교수가 그의 학생들에게 상상력 을 불어 넣어 주었고 그들의 조상의 나라의 위대함에 대하여 그들의 인식을 증가시켰는지를 말한다. 그는 스페인의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장한 화란 군사들이 생명을 곁고 투쟁한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 다.
두 나라간의 80년 전쟁의 정점에서 화란이 자유륵 얻을 기회란 진정 으로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회의주의자들은 네델란드의 일을 말했 다.
"가능성 없고 감각없고 그리고 희망없는" 그러나 오렌지공 월리암의 용감한 지도력 아래서 화란은 스페인이 자랑하는 함대인 'the siver fleet'를 격파했고 굉장한 승리를 얻어냈고 압박된 국민을 그들이 증오 하는 적으로부터 자유케 했다. 케이스가 위대한 아딘라함 카위퍼의 책들 을 광범위 하게 읽기 시작한 것은 그가 그랜드 레피즈 학교의 학생들이었 을 때였다.
카위퍼(1837~1920) 박사는 보통사람 열명이 해날 수 있는 일을 했 다. 그는 라이덴(Leiden) 대학과 라이덴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는데 그 때는 독일의 파괴적인 성경비평의 운동이 화란의 신학교에도 침입해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그 운동은 계몽(the Aufklarung)이라고 알려졌 다. 젊은 카위퍼는 그것이 이성에 호소하는 힘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는 초기 사역에서 자유주의 설교에 헌신했고 때문에 복음을 무력하 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교회에 있었던 여성도를 통하여 그리고 기독 교 소설인 "레드크립(Redcliffe)의 상속인"을 읽음을 통해서 그의 눈은 열려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아름다움에 대항하는 그의 교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회심했고 중심에서부터 손끝까지 완전히 변했다. 그후로 그의 칼같이 날카로운 마음은 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인 기독교를 위하여 싸웠다. 그의 업적의 기록은 한 사람의 "누가 누구인 가"(Who's Who)를 읽는 것같다. 그는 두 개의 신문을 편집했고, 국회의 원으로 뽑혔고 암스텔담(Amsterdam)의 자유대학을 설립했고 기독교 보수사역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1901~1905년까지 네델란드의 수상으로 봉직했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또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게다가 200권이 넘는 책을 그의 여가 시간에 집필했다.
여기에는 일반은총(Gemene Gratia)에 대한 3권의 기념할만한 책들과 하이델베르그(Heidelberg) 교리문답 강해, 신학백과사전, 중동까지의 여행기록인 "고대 세계를 돌아서" Pro Rege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하 여" 지금은 불행하게도 인쇄되지 않는 놀랄만큼 부요하고 통찰력 있는 일련의 헌신적인 설교들인 "하나님께 가까이"등이 있다. 그의 주요한 명제는 성경에서 확립된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게시된 종교라는 것과 칼빈주의가 그 종교에 대한 내용면에서나 그리고 인생과 세계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나 가장 명백하고 또 가장 일치하는 표현이라는 것이 다.
그래서 반 틸(Cornelius Van Til)은 그의 계통적 서술 중의 얼마의 배경이 문제될 때 그가 아브라함 카위퍼 (Abraham Kuyper)의 어깨위에 서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개혁자들의 뒤를 따라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나 이전의 나와같이 그렇게 하려했던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처음에 카위퍼와 다음에 바빙크의 업적들을 이용했다." 그들의 관점은 얼마나 기본적이고 넓었던가! 그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생각은 그것의 메시지 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반 틸 박사가 어떤 중요한 점에서는 아브라함 키위퍼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리차드 개핀 씨가 "예루살 렘과 아덴"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딴 틸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를 흠모하고 따라서 카위퍼의 "성경기자에 대한 수평적 취급" 그의 "이름 뿐 아닌 개념까지의 성경신학에 대한 반대" 그리 고 그의 "성경 기자들과 뒤따르는 기독교 세대 사이의 불연속"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가 결코 화란의 가장 뛰어난 정치가 겸 신학자에 대한 그의 찬양, 존경 그리고 애정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이 거인의 실제적인 영향이 반 틸의 믿음의 생활에서 뿐 아니라 그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약간 고풍적이고, 어느 정도 화려한 구사력에서 그리고 그의 책 중 얼마에서 발견되는 고전적인 냄새에서도 보여진다.
그의 학생시절에 케이스(Kees)는 언제나 거의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농장에서의 여름응?기대했다. 그 날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재회를, 작열하는 인디아나 태양 아래서 거칠기는 하나 반가운 토양과 다시 만나 는 것을 그리고 그의 떨어지는 재원을 다시 공급하는 기회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 날들은 레나(Rena)와의 축복으로 가득찬 시간을 의미했는데 위에 장식용 천을 단 빛나는 작은 2인용 마차를 타 고, 전혀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혹은 번개와 폭풍우의 일시적인 위험도 모른 채 잎으로 덮인 시골길을 다녔다.
은퇴한 그 변증학 교수는 "연인의 젊은 꿈보다 인생에서 반만큼이라 도 즐거운 것은 없을 것이다"는 것에 진심으로 동의할 것이다. 1921년에 반 틸은 칼빈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마침내 적어도 한 학기는 지방교 회를 목회할 것을 바랐다. 그는 어느새 화란말, 그리고 영어 뿐 아니라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까지도 알게 되었다.
지적인 수준과 안목에서 그는 아마도 대부부의 그의 친구보다 앞섰을 것이다. 여기에 네델란드에저 그의 어린시절을 보낸 청년이 있다. 네델 란드의 언약의 자녀로서 그는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학교에 프로테스탄 트 교회에 다녔고, 프로테스탄트 대기(大氣)에서 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점이 많았다. 이러한 종류의 환경에 부산물은 그들이 무엇을 그리고 왜 믿는가를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권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경험으로 훈련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들은 인생의 모든 면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방향이나 목적없이 혹은 소경처럼 흔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 반 틸의 안목은 넓어졌다. 그는 네델란드에서의 그의 생활도 감사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복잡하고 복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아는 사랄들은 색다른 파장으로 생각했고 느꼈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파괴로부터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국민의 대부분은 정처없이 당황하고 혼란속에 절망하며 방황했다. 반 틸은 생각 했다. "농부 출신인 내가 어떻게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가치관의 외과 의사로서 봉사할 수 있을 것인가?"그리고 "하나님이여 내게 알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다. 반 틸은 루이스 벌코프, 사무엘 볼베다, 월리 암 헤인즈, 텐 호르, 제레마와 같은 학자들에게서 교육받는 자신을 행복 하다고 느꼈다.
5. 프린스톤 대학시절
반 틸은 칼빈신학교에서 1학년을 수료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 남아서 신학교육을 끝마치고 지방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과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원서를 내서 그곳에서 계속 공부를 하는 것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복음블 선포하고자 하는 열망은 타오르는 불꽃같았으며 그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자신을 강대상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를 기도로서 결정짓고자 하였다. 감정적인 면에서는 그랜드 래피즈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는 그의 가족과 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 다니면서 훌릉한 교수님들의 가르침 에 감사드렸고 캠퍼스 둘레의 화란사람들애게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동부로 펀학시킨 겉정적인 두 가지 이유중 하나는 프린스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프리스톤은 가장 뛰어난 교육기관의 하나로서 알려졌고 철학과의 유명한 교수들을 자랑했다. 두 번째 이유는 프리스톤 신학과 교수들은 성경적인 신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게할더스 보스, 핫지, 월리암 암스트롱, 로버트 월슨, 오스왈드 알티스, 그리고 그레샴 메이첸 등이 그 교수님들이었다.
조용한 프린스톤 대학촌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학교는 명상하고 집중하기에 도움이 되는 분위기는 없다고, 누릅나무와 단풍나무가 쭉쭉 뻗어 있는 넓은 길, 독립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고상한 역사, 잊혀지지 않는 교수들, 나무로 가득찬 사랑 스런 캠퍼스들은 공동체의 끈들을 하나의 신비스런 사상의 탱크로 녹인 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10년간, 1920년대 독일의 대학들은 깨어진 주지 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국의 상아 리그 학교에서 는 대조적으로 생동적인 자유주의 위에 서 있었다.
전 세계로부터 지적으로 굶주린 젊은이들이 세상지혜의 샘으로부터 물을 마시기 위해 그들의 학교로 떼지어 모여들었다. 하바드대학 예일대 학, 그리고 프린스톤 대학들이 그 매력적인 이름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이름을 언급할 때 거의 경외심을 가졌다.
독일의 대학들과 상아 리그 학교들의 대조가 뚜렷한 것이었다면 프린 스톤 대학과 프린스톤 신학교 사이의 차이 또한 뚜렷한 것이었다. 대학 교는 상대주의 위에 서 있었고 신학교는 절대주의 위에 서 있었다. 대학 교는 궁극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신학교는 신구약 성경을 최종 적인 권위로 인정했다. 그리고 또 우주가 하나님치 솜씨로 지어진 것을 믿고 하나님의 중재적인 왕,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의 초석이요, 구세 주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놓여 있음을 확신했다.
신학교 당국은 반 틸이 칼빈 신학교에서 이적해서 2학년으로 편입하 는 것을 허락했다. 화란계 학생들은 그들의 강한 칼빈주의적 훈련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한 단계 위로 평가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케이스(Kees)는 대학에서 철학을 수강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철학과 의 과장은 보우만이었는데 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였다. 개인주의는 주관적 이상주의의 이론인데 그것은 인격을 실체 해석의 열쇠로서 간주 한다. 보우만과 반 틸은 그들이 인정하는 견해에서 크게 달랐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따듯한 인격적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대에 반주지주의 조수가 기독교 사회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비기독교적 생각을 이해하는 것을 점차 용납하지 않게 되었 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단순한 복음을 세상에 전파 해서 그것을 퍼지도록 하지 않는가?"
크레샴 메이첸은 재빨리 이러한 생각을 분석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스토아, 그리고 에피쿠로 스 철학자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가 아라투스와 게린투스로부터 인용함으로 그들 자신의 작가들에 대해서 알고 있음을 보였던 것을 기독 교인들에게 상기시켰다.
메튜 헨리는 그점을 확실히 하였다. "바울은 원래 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배움은 복음 사역자에게 장식이 되고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특별히 배움없는 자를 확신시키는데 있어서 그는 그들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패배시킬 수 있게 했다. "
반 틸이 언젠가 휘두르게 된 양날 선 칼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뿐 아니라 프린스톤 대학의 지성적인 환경에 의해서 만들 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젊은 인디아나주의 주민은 대조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돌입했다.
그것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세 가지 준비 단계를 표시한다.
첫째로 네델란드에서의 나누어진 문화단계가 있었다. 둘째로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경건하고 강렬한 칼빈주의가 있었고, 세째로 프린스톤에 서 세련된 자유주의적 지식세계의 이해와 보수주의적 신앙방어 능력윽 함께 얻게 되었다.
그가 그의 짐을 풀고 그의 재원을 평가하며 긴 숨을 쉬며 미래를 직면 하면서 신학교 교정 의 알렉산더 홀에 자리 잡았을 때 그는 어떻게 느꼈는 가?
"나는 비록 미국의 얼마간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배우기 시작한 시골 소년 이었지만 나는 나 자신의 것을 잡을 수 있윽 것을 확신했다. 나는 제레마 박사 아래서 철차적드로 배웠던 것들애 의해서 잘 교육을 받았 다"고 그는 말한다. 두 개의 길이 갈라졌다.‥‥‥ 그리고 그는 작은 사람 들이 간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차이점을 만들었다. 그는 뚜럿한 주체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註: 월간현대사조, 1981년 10월호~1982년 4월호, 발췌 요약 인용.
제 2 장 반 틸의 사상적 세계
코넬리우스 반 틸의 변증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변증 학" (Apologetics; 1951), "기독교 유신론적 험증학" (Christian Theistic Evidences; 1952), 그리고 "신앙의 변호"(Defense of the Faith. 196 3) 등이 있다.
물론 그의 "조직신학서론"(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1971)과 "기독교 유신론적 윤리학"(Christian Theistic Ethics;1980) 등에서도 그의 전제주의 방법론과 특별계시인 성경의존적 신학사상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의 변증론만을 다루기 위하여 변증학 분야의 세 책을 주로 인용할려고 한다.
월리암 화이트(Willam White)에 의하면 반 틸은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전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1)
그런데 그 방법은 더 정확히 표현해서 전제주의적 변증의 방법론이 며, 그것은 아브라함 카위퍼(Abraham Kuyper)의 방법에 기초를 둔 것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에 그 기초를 둔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의 진실을 성립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증거와 히브리서 11장 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 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증거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는 말씀들이지 이성론자들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성적인 추론을 하지 않고 있다. 2)
(1) 말씀 계시에 대한 절대 의존적 전제주의
노르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에 의하여도 반 틸은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 적 변증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3) 변증의 방법론에 있어서 전제주의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은 말하기를 "나의 삶에 대한 전 해석을 그것으로부터 절대 권위있는 계시로 간주하 는 그 근원으로서의 성경에서 아주 진실하게 출발한다"는 것을 인정한 다고 술회하고, "나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우주에 대한 그의 계시를 그 자체의 권위 위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참이라고 생각한다." 4) 고 밝히므로서 성경계시 의존적 기독교 세계관을 피력하였다.
물론 반 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은 귀납식 추론 방법을 일삼는 이성 주의자들이나 실증주의자들에게 불만의 요소가 되는 것이 사실이며, 순환논리로서 단정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성 주의자들에게도 전제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이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5) 즉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의 차이점은 진리를 변증하 기에 앞서 전제를 하되 무엇을 전제하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다. 기독교 인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성경의 계시없이 실재를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움직인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진리를 변증하기 전에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귄위를 전제하고, 비기독교인은 진리를 변증하기 전에 신적인 권위의 존재를 부인함과 동시에 이성의 자율성을 전제한다. 6)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전제에 의한 변증방식을 통해서 비기독교인을 설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요, 조금도 모순되기나 억지 논리가 아닌 것이다.
죤 에드워드 카넨 (John Edward Carnell)도 반 틸의 전제주의에 동의 하여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먼저 사실을 연구하고, 후에 하나님을 발견 하려고 하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모든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7) 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기독교인은 하나의 전제 아래서 움직이는데, 그 전제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인 것이다." 8) 라고 하였다. 반 틸의 전제주의는 외롭지 않다. 전제주의자 반 틸은 기독교인들은 터툴리안(tertullian)이 수힝했던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하여 "반대자들의 입장이 가지고 있는 원리들과 필연적으로 교리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기독교적인 입장의 유일한 증거는 그 진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입증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된다." 9) 라고 하였다.
필자의 생각에도 계시종교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방법은 별 수 없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Kerygula)에 의하여 본체적 하나님을 증거 해야 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가 나타낸 계시에 의존하 지 않고서 올바& #47480; 인식과 신앙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반 틸과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선포한 계시의 역사성"을 일단 인정해야만 기독교 신학이 출발할 수 있고, 변증의 첫번째 과제와 대상이 사실로 수용되어야만 기독교 신앙의 변증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 에 그의 변증방식은 원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라 믿는다. 만일에 그렇지 않고 버틀러(Butler)처럼 이성적인 유추를 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데까르트(Descartes)의 유신론증과 평행을 달리며 똑같이 본체론증(The ontological Argument)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사실 본체론적 논증은 형이상학적 연역적 논증으로서 중세 스콜라 철학시대에 이르러 안셀름(Anselm, 1033-1109)에 의하여 시작된 논증 방식인데, 다른 유신론증과 구벽되는 점은 인과율(因果律)을 통한 귀납 식 추론을 하지 않고, 신(神)의 관념자체를 가지고 그대로 신존재(神存 株)를 증명하였기 때문에, 일단은 신(神)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으면 신(補)의 속성이 나 관념 이 거론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본체론증 자들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우리가 사유 (사색)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완전한 신(神)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10)고 규정한다. 본체론적 논증을 평한다면 이 논증은 관념에서 반드시 존재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과 더 나아가서 창조주이신 신(神)을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으로 규정 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소치라 할 것이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하나님의 관념은 전혀 독특한 관념이어서 필연적으로 존재의 특질을 내포하지만 다른 관념들 은 그렇지 않다." 11) 고 철학적 독단론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증방식은 박형룡 박사에 의해 "사상의 기초적 필연적 원리로부터 인출(引出)하는 선험적(業驗的) 증명" 12) 이라고 판정되었고, 박 아론 박사에 의하면 "형이상학적(刑而上學的)이며 관념주의적 (觀念主義的) 논증" 13)이라고 명명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성주의자나 논리주의자에게 있어서도 이미 연역식 전제주의 방식이 있었다고 하는 선례를 철학사 A 내지는 변증학사적인 B 측면에서 지적하면서 코넬리 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가 일반적인 논리방식에서도 하자(error)가 없다는 점을 천명한다.
註: A Bertrand Russell, 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B Avery Dulles, A history of Apologetics.
(2)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성
반 틸은 화란 자유대학의 아브라함 카위퍼와 헬만 바빙크 그리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핫지와 비 비 워필드가 이어온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게승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를 주장하고 확립한 변증신학자로서 탁월한 본보기가 되었다. 14) 그렇기 때문에 그의 변증학체계는 버나드 램(Bernard Ramm) 15) 의 체계 를 훨씬 뛰어 넘어서, 그레샴 메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신앙 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 1925) 보다도 말씀계시의 우위성을 고조시켰다. 결국 그의 견해는 이성이 가능하도록 계시진리를 전제할 필요성을 특이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도 거론한 것처럼 전제 주의 신학사상으로 될리운다. 왜 그가 그와 같은 입장을 가지게 되는가 하면 "이성의 법칙과 과정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있는 기독교의 하나님 '영원부터 자즌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없다면 인간의 사고 그 자체 도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 16) 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경우에 이성의 위치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본적 으로 또 실제적으로 의존되고 있다.
(3) 이성의 적용문제에 관한 그의 입장
반 틸은 "이성에 대한 계시의 우위성"을 말하면서도 극단적인 측면에 서 이성사용의 불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이성을 가지고 는 구원사역에 종속할 수 없고 "성령으로 중생한 이성으로 변화될 때만 이 계시에 의한 윤리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17) 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상 속에는 "계시의 진리를 전제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를 초월하기 때문에 논리가 계시에는 적용되지만 하나님 자신에게는 적용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8) 즉 반 틸은 중생한 이성을 계시의 종으로서 사용하며, 그의 저서 중의 하나의 제목을 빌어 말한다면, "신앙을 변증하 는데"(In defense of the faith) 중생한 이성을 사용한다. 19)
결국 반 틸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성을 이성답게 사용하는 법은 피조물로서의 이성, 자충족성이 없는 이성의 제한성, 더 나아가서 부패 한 자연이성에서 성령으로 중생한 이성 그리고 계시를 수용하고 수종드 는 이성으로 깨닫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주의자나 알미니안주의자 그리고 토미즘주의자는 이성을 그릇되게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없는 이성을 지나치게 추켜 세우므로써 이성자체를 교만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창세기 3장에 나타났던 유혹자 뱀과 같은 충동이었다.
마땅히 이성은 서야 될 자리에 서야 되고, 앉아야 될 자리에 앉아야 되는데, 잘못된 추종자들 때문에 도리 이상으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오랜 역사를 군림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구데타로 집권한 이성을 하나님 말씀으로 재혁명(개혁)하여 우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서 계시의 말씀을 권위적인 상좌에 모시고 거듭나고 변화된 이성으로 백의 종군하라는 것이다. 얼마나 반 틸의 신학이 탁월하고 장엄한가!!
반 틸은 나의 신조(My Credo)라는 그의 입장을 요약해 놓은 간결한 요약서에서, 다른 기독교 사상가들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다고 지적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이성을 충분히 견지해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다. 어떤 사상가들은 반 틸의 사상을 오해하여 맹신주의라고 꼬집고 있으나 그것은 반 틸의 신학체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논평할 때, 이성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이성에 대해 단지 계시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객관적이고 공명정대한 평가일 것이다.
(4) 기독론적인 유신론
반 틸은 바울신학C 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을 말한다. 사실,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 이해없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올바르게 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 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물론이요, 종합주의적인 로마 가톨릭교와 급진주의,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 보편주의 운동은 기독교적인 궤도를 많이 이탈한 엉뚱한 신학사조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단지 학문적 범주에 머무는 종교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어떠한 접근방식이든지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학문 이상의 신앙세 계이며, 그 신앙은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 며, 순수한 신앙은 절대적인 차원에서의 신앙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바른 신앙은 절대 신앙에 근거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성경적 이해가 아닌 제멋대로의 무책임한 접근방식이나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The empty cross of Jesus) 20) 종교적 발상은 구속론적 측면에서 볼 때, 허구이며 무용한 철학적 유신론으로 떨어진 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는 반 틸의 사상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생의 의미는 기븐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의 도식에서 본 새로운 세계관이 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의 사실조차도 올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실들은 맹목적인 사실들이 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 가능한 관계를 가지지 못할 것이 다." 21)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사역이 무엇 인가?를 분명히 인식할 때만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라 고 생각된다. 반 틸은 이러한 기독론적 하나님 이해를 분면히 피력하고 있다. 22)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정확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신정통주의자인 칼 발트(Karl Barth)는 불트만(Bultmann)이나 부룬너(Brunner)와는 달리 철저하게 기독론적으로 그의 "교회 교의 학"을 다루었다고 반 틸은 보았다. 23)
오로지 기독론적인 신학만이 참으로 살아있고 충분히 능동직인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교제)를 바로 말할 수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발트의 기독론은 모든 참 신학의 연구에 열쇠가 된다 고 반 틸은 보았다. 24)
그러나 반 틸은 곧 발트의 기독론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물론 발트는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로 다시 접근하기 위하여 18세기와 19세기에 팽배했던 계몽주의 사조에 따른 자유주의와 고등비평주의와 대항하여 그의 교회 교의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를 가리 켜서 신정통주 의자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발트에게 있어서 성육신 사긴은 역사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물론 기독론적으로 구성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은혜의 신학 (A theology of grace)D이며, 하나님은 그의 존재를 인간과 공존재 (共 存在) 안으로 확장하신다.
註: D Berkouwer는 "칼 발트웨 신학에 있어서 은총의 승리"에서 그를 옹호함.
그는 자기의 존재를 인간의 존재와 동일시하시고, 인간의 존재를 거룩 한 존재에 참여하는 존재로 변형시킨다.
한 완전한 주격 전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기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트는 말하기를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의 마음대로 줄 수도 있고 거두 어갈 수도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단지 한 속성(屬性)에 불과하다" 25) 고 하므로써 초절주의적인 은혜관을 가졌다. 이러한 점을 반 틸은 비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기독론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가운 데 성경적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가 주장하는 성경적 기독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그의 속성과 사역을 이해하자는 것이 다. 그런 까닭에 반 틸에게 있어서 성육신되신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표힌한다고 보았다. 즉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한 하나님(초월성)을 표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 84; 통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註: C N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5) 존재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
반 틸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존재론적으로 본질이 동일한 위격 들을 설명한다.
그는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그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라." 26) 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님과 더불어 영원 전부터 함께 계신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제 이위(第二位)이시라"는 성경적 진리를 피력 하고 있다.
그런데 반 틸의 기독론은 게노시스 교리(Kenosis doctrine) 27) 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자신이 가지신 신성(神性)을 버리셨다던 가 또는 그리하여 하나의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아니라고 단언하여 말한 다. 그는 또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인간이 되셨다는 말도 아니라" 28) 고 말한다.
그리고 반 틸은 계속해서 그의 기독론을 전개한다. 그가 본 성육신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지닌 신성과 인성이 구별없이 하나로 뒤섞여 버렸다는 뜻도 아니다.‥‥‥ 신성을 항상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께 서 이미 그가 가지고 계신 신성에 인성을 또 취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그가 이미 지니고 계신 신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는 것이다.
정녕 칼케돈(Chalcedon) 신조(주후 451)29)는 이 모든 사실들을 정리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동되거나 또는 변화되거 나 혹은 분열되거나 분리됨이 없는 두 개의 성품으로서"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었다고 표현하였다.
반 틸은 성령에 관하여 설명할 때에도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전개한 다. 그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사역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 30)
그래서 반 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복종시키심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여 놓으신 일을 취하 여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이시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바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며, 성령도 다른 분이 아니시며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니 본체론적으로 삼위(三位)는 한 분이신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의 속죄사역 을 통해서 이룬 것이며, 이것을 우리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응시키시는 성령께서도 역시 그 자신이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만일 그렇 지 않다면 모든 구원사역이 하나님의 단독사역이 아닌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시 그의 비공유적 (절대적) 속성들을 끝까지 손상시키지 않으려면,구원사역에 있어서 주도권이 인간이 아리라 바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되셔아만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정통 진리인 것이 다. 31)
(6) 메이첸 스타일의 탁월성과 보수성
반 틸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지식에 풍부한 신학자들을 만났 다. 가장 큰 영향을 입은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를 비롯하여, 핫지(C.W. Hodge)와 암스트롱(William Park Armstrong), 로버트 월슨(Robert Dick Wilson), 오스왈드 알티 스(Oswald T. Altis), 그리고 특별히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을 만났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10년간인 1920년대에 독일의 대학들은 깨어진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잿더미 속에서 허덕이므로 미국의 기독교계에도 반주지주의(反主知主義)의 물결이 몰려들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복음습幌컥?단순성"이란 신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그레샴 메이첸은 재빨리 대처하여 그거한 운동의 좁은 생각을 분석해서 그들에게 경고했다. 32) 훗날 이와같이 반 틸이 휘두르게 된 양날 선 복음의 칼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뿐 아니 라 프린스톤 대학교의 이성적인 환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반 틸이 가지게 된 변증학적 탁월성과 보수성은 세 가지 준비 단계가 있다.
첫째로 네델란드에서의 나누어진 경건한 문화적 단계가 있었고, 둘째 로 그랜드 래피즈에서의 강렬한 칼빈주의적 단계가 있었으며, 세째로 프린스톤에서 학문적으로 세련된 지적능력 함양의 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자유주의에 대한 평가 능력과 보수주의적인 입장의 정립이 형성되 어졌다. 실제로 코넬리우스 반 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4명의 저명 한 학자는 죤 그레샴 메이첸, 게할더스 보스, 아브라함 카위퍼 그리고 클라우스 스킬더 (Klaus Schilder)였으나 33) 그 중에도 변증적인 날카로 움은 메이첸의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반 틸같은 변증학자가 두 명의 성경신학자와 신약학자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입어서 변증학적인 칼잡이 가 되었는지는'하나님의 경륜에 속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7) 워필드 보다 더 강한 성경의 권위와 영감성
반 틸은 오로지 성경의 권위로만 기독교의 진리를 바르게 변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반 틸애게 있어서 성경의 위치는 신적 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믿고 있는 성경의 영감은 어디 까지나 완전영감(Plenary Inspiraton)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완전 영감설에 있어서 가장 탁월하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까지도 변증학에 있어서 만큼 은 「불신자와 더불어 중립적 영역에 서서 그리스도인의 중생한 이성이 아닌 측면에서의 "바른 이성"(right reason)을 가지고 자연계시를 본질 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반 틸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구 프린스톤의 변증적 방법론은 대두된 영국의 버틀러의 유추론(Analogy)에서 인용한 것이며, 그리고 러틀러의 변증학적 방법론은 더 올라가서 토마스 아퀴너스의 자연신학과 종합주 의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반 틸의 변증학에 있어서 이성적인 유추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 가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반 틸은 아브라함 카위퍼를 좋아하면 서도 "카위퍼가 자연적 원리와 특덜원리(초자연적 원리)를 엄연하게 갈라놓고, 이 두 개의 다른 원리들이 상호간에 파괴적임을 들어서 자연 인과의 논쟁의 무용성을 결론으로 삼는 점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다. " 34)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변증학(Apologetics)에서 개혁신학적인 접촉점(The point of Contact)을 모색하여 로마서 1장 19절로 20절에 증거된 신지식(神知識)을 기독효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촉점으로 제시하 고 있다.
반 틸은 말하기를 "우리는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말할 때 이성이 나 경험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비기독교인도 가지고 있는 신의식(神意識) 속에서 발견함으로서 기독교적 진리를 변증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35) 고 했다.
이와같은 접촉점 문제에 관한 반 틸의 견해는 성경에 입각한 견해라 할 것이다. 반 틸이 말한 것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나 알미니안파 의 견해는 성경을 벗어란 이성의 충족성과 궁극성을 옹호하는 견해인 것으로 성경적 견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인 죤 칼빈과 칼빈 주의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 워필드, 카위퍼, 바빙크에 의하여 구상된 개혁신학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유래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바와같이 신의 계시와 자연적으로 접촉하며 신의 계시에 의하여 둘러 싸여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아의식은 어디까지나 신의식을 전제로 존재한다. 결국 그런 까닭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신의식을 소유함은 불가피한 사건인 것이다. 36)
이렇게 반 틸의 성경적 입장은 변증의 방법론이나 "권위와 이성"이라 는 논술에서도 확연하게 들어나고 있다. 그는 원자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철두철미 처음부터 성경적 증거에 의한 방법론을 주장하면서, 비기독교 인이 그들 철학의 2대 원리를 삼는 인간이성의 자율성(자충족성)과 우연론을 규탄하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절대적 권위로 내세운다. 그는 분명히 칼빈과 같이 성경적이며, 게할더스 보스처럼 성경신학적인 변증학을 정립한 20세기의 거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의 변증학(Apologetics)책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우선 제일 먼저 주시 해야 할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에 나타난 계시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 37) 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개혁신학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개혁신학적 성경교리에 의해서 만 가능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반 틸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한 것을 보면 "인간은 원래 행위언약의 조건으로 이 지상에 살게 되었으나 그것을 파기하였고 그래 서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언약을 수립하여 그 새로운 언약에 의하여 행위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외같이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 관계를 기록하여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반 틸은 이처 럼 그 교리문답서는 한층 더 성경에 관한 개혁신학적 교리라고 말하며, 계시의 필요성, 계시의 권위성, 계시의 충족성, 게시의 확실성이라는 제목하에 서술한 것을 밝히면서, 계시의 필연성 내지는 필요성은 인간이 행위언약을 파기하였다는 사실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한 "계시의 권위는 성경이 부여하는 계시의 성격 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계시의 필요성과 권위와 충족성에 최종적으 로 그 계시의 확실성이 첨부되어야 한다. 38) 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명확하기 때문 에 죄인에 대한 그의 계시 역시 본질적으로 명확하다"는 것이며, "하나 님의 계시는 평범한 진리와 평범한 수단에 의해서라도 배운 자나 못배운 자(무식한자)가 다함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차원높은 지식인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끌어올린 발트의 계시관을 여지없이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그는 "칼빈이 묘사한 바와 같이, 죄인인 인간이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새로운 영의 눈을 뜰 때, 인간은 그 때부터 성경 1060; 증거하는 새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라." 39) 고" 설명한다. 즉 "죄인이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반응까 지를 포함해서 볼때, 자연의 모든 현상이 성경의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성령의 은혜 에 의한 것이라." 40) 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반 틸은 성령와 영감성과 더불어 성령의 내적 조명(Illumination)의 궁극적 필요성을 강조하였 다
결 론
이상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반 틸은 개혁신학 체계로 발전된 변증학 체계를 가질려고 애써왔다.
그의 체계의 하나님 중심사상은 죤 칼빈의 사상체계와 같았다.
비록 반 틸이 어거스틴을 기독교 형이상학과 기독교적 인식론을 시도 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였다고 인정 했을 찌라도 그는 분명히 죤 칼빈과 같은 사상적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Apologetics, p. 82)
그의 보다 직접적인 변증학적 관계는 카위퍼와 바빙크와 같은 위대한 화란의 사상가들과 핫지와 워필드와 같은 유명한 미국 칼빈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는 말년에 암스텔담의 자유대학교에서 볼렌호벤과 도이벨트에 의해서 발전된 칼빈주의 철학에 크나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카위퍼나 바빙크의 사상과 아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 틸은 철학사의 과정과 흡사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탈레스로부터 죤 듀이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다양성들을 자주 언급한 다. 그러나 힝상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는 모든 철학체계들에 대하 여 반대한다. 그는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입장에서 기독교 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재주의나 이상주의 혹은 경험주의나 이성 주의에서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반 틸의 강한 칼빈 주의적 하나님 중심의 입장은 그의 신학에 대한 변증학의 중요성 혹은 변증학에 대한 신학의 중요성에 관한 토론으로 말미암아 밝혀진다.
바빙크와 카위퍼는 변증학 위에 신학의 우선권을 내세우며 워필드는 변증학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바빙크와 카위퍼는 유신적 진리 체계를 먼저 가지고 나서 변증을 하려 고 한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실제로 기독교를 먼저 방어해야 하고, 나중에 우리 가 신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 틸 은 바빙크와 카위퍼의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에 의하면 조직신학은 중심에 있고, 변증학은 주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변증학적 방어는 최선의 성경진리 체계를 아는 사람에 의하여 반드시 만들어질 것이라고 반틸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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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간 현대사조, 1982, 1월호 p. 36.
2) 같은책, 같은쪽,
3) Norman Geisler, Christian Apologetics, 위거찬역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78.
4) 같은책, 같은쪽 Van Til, Apologetics에서 인용.
5) Ibid, p. 79.
6) 조봉근, 변증학 개론, p. 111.
7) John Edward carnell, "An Introduction to Apologetics," p. 175.
8) J. Edward Carnell, Ibid, 같은쪽.
9Van Til, "My Credo" C 5. in Jerusalem and Athens, p.258.
10) Joseph Butler, "The analogy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ed to the constitutlon and course of Nature" p. 1736. 참조
11) 박아론, 기독교 변증학, p. 178., 박형룡, 기독교 변증학, pp. 63~65, 요약
12) 박형룡. Ibid, p. 61.
13) 박아론, Ibid, p. 177.
14) Normon Geisler, Introduction to philosophy, 위거찬역, p.296.
15) Bernard L. Ramm, A christian appeal to reason, 1972.
16) N. Geisler, 기독교 철학 개론. 같은책, 같은쪽.
17) Van Til, Christian Theistic Ethics, 위거찬역, p. 172.
18) 가이슬러, 같은책, p.297.
19) 같은책, 같은쪽.
20) Michael Green, The empty cross of Jesus, The Jelus Library, 1984, pp. 151~167.
21) Van Til, Defense fo the faith, p. 11. 69. 86.
22)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신국원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p. 234~236.
23) C. Van Til, 칼 발트의 기독론 비판, C. L. C.역, 1977, p. 15.
24) 반 틸, 발트의 기독론 비판, 같은책, 같은쪽.
25) 반 틸, 같은책, p. 16.
26) 반 틸, The defense of the faith, 신국원역, p.29.
27) 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신복윤역, 기독교교리사, 총신 대학 출판부, 1979, p. 137.
28) 반 틸, 신앙의 변호, 신국원역, 변증학, 같은책.
29) 벌 코프, 기독교 교리사, 신복윤역, p. 121.
30) 반 틸, 같은책, p. 32.
31) 같은책, 같은쪽.
32) 월간현대사조,1981년 11월호 pp.23~25. 요약발췌
33) 같은책, 같은쪽.
34) 반 틸, 신앙의 변호, 신국원역. p .316.
35) 조봉근, 변증신학개론, p. 101.
36) 조봉근, 같은책, p. 100
37) 반 틸, 변증학. 이창우 역. 기독교문화사, 1986, p. 64
38) 반 틸, 기독교 변증론, 이창우역, p. 65.
39) 반 틸, 같은책, p. 81.
40) 같은책, 같은쪽.
http://blog.naver.com/chunrain?Redirect=Log&logNo=80043290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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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반틸 그리고 칼빈주의자들
칼빈주의(개혁주의 신학)
1. 개혁주의 신학(칼빈주의)
개혁주의는 칼빈주의 또는 장로교라고도 불리워진다.
쯔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되고 칼빈이 완전한 신학체계를 세웠다. 후에 칼빈의영향으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신학을 형성하였다.
정의
정의를 위한 배경-로마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여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루터란은 적극적으로 신학 전반과 삶에
성경적 변화의 노선에서 전진하지 못하였다. 종교 개혁의 2 세대에 속한 칼 빈는 보다
더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강조하였다.
정의 -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와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Reformed church- 독일, 화란, 남아공, 미국의 CRC 와 RCA, 헝가리.
Presbyterian church- 스콧트랜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한국.
Calvinism- 칼빈의 사상과 철학을 따르는 운동이다.
본질은 같으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며, 민족적, 언어적, 지역적 차이와
신앙고백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신앙고백의 핵심 사상과 일반적인 사상은 동일하다.
특징
신학적인 특징- 어떤 하나의 지배적인 개혁주의 중심의 주제보다는 몇 가지의 중요한
사상이 있다.
1. 성경중심의 신학- sola scriptura
1) 쯔빙글리와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강조한다.
쯔빙글리- "젊었을 때 나는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인문 교육에 너무
많은 정력을 소모했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온전히 성경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는 철학과 신학이 그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나는 말씀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교리를 배울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Of the Clarity and Certainty of the Word of God, 1522).
칼빈 -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며, 성경의 가르침은 하늘로부터
왔다 (Institutes 1.7.4).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모든 것들의 최고 권위의 근거가 된다는 사상
조직 교회와 혹은 교리 위에 권위가 있고, 종교회의나 논쟁에 있어서도
최종 심판자는 성경으로 모든 문제에 최고 권위를 말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장 10절)
3) 신학 사상과 성경 해석 방법을 성경의 내용에서 이끌어 내려고 했다.
칼빈이 사용한 간결성과 용이성의 원리가 성경 그 자체에서 사용되었음을
칼빈은 확신하였다.
2. 하나님 중심의 사상
루터란은 인간의 경험을 강조하며, 기독론적 신학이며 복음과 율법의
차이점을1) 강조. 이신칭의를 강조. 침례교는 구원의 신비에,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에,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에 강조를2) 하지만 그러나
개혁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과3)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상을 강조. 하나님 중심과 동시에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다.
3. 계약신학(언약신학, Covenant Theology)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계약신학에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삼위일체에서
3위는(인격) 인격적 관계에서 볼 때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계약적이시다. 아담의 행위계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계약에서 나타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계약사상은 다음과 같다.4)
Zwingli5)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도 적 용된다고
말한다.
Bullinger - 불링거가 성례전과 구원사의 전개를 취급할 때 나타난다.
Calvin - 언약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주도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성과 믿음의 응답을 강조한다.
Olevianus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일방적인 약속 으로서
은혜언약을 이해한다.
본격적으로 계약사상은 코게이우스에6) 의해 절정을 이루었다.
4. 철학사상 - 유한은 무한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상
(finitum non capax infiniti).
이 표현은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라는
말고 동일하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알려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 지만, 인간이
완벽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말버그회(1529년)에서 성만찬 논쟁시에 쯔빙글리는 이 사상에 근거하여
성만찬을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재의 몸은 땅에 있는 떡에 육신의 모양으로
있지 않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편재사상을 가지고 성만찬을
해석함으로써 의견이 일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루터는 편재설의 근거하여 또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있다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성만찬의 신학을 설명하였고 지금까지 그 당시의 주장한 편재설을 루터란들은
주장 하게 되었다.
멜랑톤은 개혁파를 의식하여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 10항 (1540)-
떡과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참으로 나타난다(vere exhibeantur)라는
타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참으로 임재한다(vere adsint)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철저한 루터란들은 1540년도 신앙고백을 버린다. 즉 그 물질들 안에,
함께, 위에 참으로 계신다고 말한다.
루터란과 차이점 - 성만찬 논쟁,
루터란 - 속성의 전달(communicatio idiomatum)을 주장함으써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속성의 전달이란 한 쪽의 속성이 다른 쪽의
속성에서도 타당성을 갖는다는 주장
(quae sunt hominis, recte de Deo et contra, quae Dei sunt, de homine dicantur). 신성과 인성의 속성은 각각 상호 교류한다는 뜻이다. 터는 성만찬에서 영화된 몸의
실체적 임재가 가능하다고 본다. 일치신조는 인격의 통일, 속성의 교통,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하는 신적 속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에 속하는 일부 속성(전지, 전능, 편재)이 그의 인간적 본성에 전달되어서,
그리스도는 그가 임재하시기로 약속하신 거기에 나누이지 않는 한 인격으로 임재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파의 철학적 원리 - 이 사상이 신학, 정치, 예배에 스며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주권.
5. 예정론 - 이중 예정론(선택과 유기), 어거스틴의 영향과 발전으로 형성됨
바르트는 이중 예정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되고 버리움을(유기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도르트시조와
웨스트미스터 신앙 고백서.
6. 특징이 되는 중요 교리- 5대 교리- 도르트회의7)에서 결정
전적 타락, 제한 속죄, 불가항력인 은혜, 무조건적인 선택, 성도의 견인
7. 신조
화란 개혁파에서 하이델베르그 문답서, 돌트 신경, 벨직 신앙고백서를
인정하고, 영어권의 스코트랜드와 영국, 미국 등에서 웨스트민스터 대. 소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을 사용한다.
해석학적인 특징
1.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성경의 권위와 명료성에서 나왔다. 칼빈의 성경해석학을 참조하라.
쯔빙글리와 칼빈, 불링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등.
2. 성령의 내적 조명(testimonium spirtus sancti internum)
성령의 역사를 말씀함께 강조한다.
말씀은 객관적 요소를 공급하고 성령은 주관적 요소를 공급한다.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을 통한 해석을 주장한다.8)
일반적인 특징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제1 스위스 신조, 하이델베르그, 도르트, 벨직.
정치 - 장로 정치, 당회, 노회, 총회. 회중교회와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사회 - 신정 정치적 체제, 제네바, 카이퍼의 영역주권,
경제 -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 Max Weber- 예정론 사상에 따라 신의 소명과
직업에 소명,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는 사상
문화 -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 사회의 모든 문화 속에서 실현되게 한다.
개혁신학의 전망
기존의 성경적인 사상을 이어받고,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개혁 신학적 도약을
모색 해야 한다. 신학을 발전을 위한 무한한 연구가 필요하다. 단지 방어적인 수동적인
자세와 폐쇠적이며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고 현대인 포용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학문
적인 발전을 가져야 한다.
첨단 과학 문명시대를 이끌 수 있는 성경적 사상을 인출해야 한다.
문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현대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현대 문명과 사회, 국가의 주인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해야 한다. 죄인이며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
(일반 은총 에 사는 인간)을 균형있게 말하여야 한다.
2. 개혁주의 신학자들
1. 화란
1.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생애- 아버지 목사 얀 F. 카이퍼(Jan Frederik Kuper)의 아들로 어릴적부터 개혁신앙을
배웠으나, Leiden 대학에서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신학교육을 받았고 그 방법으로
비이즈(Beesd)라는 조그마한 어촌에서 목회를 하다가 샤롯테 용거(Charlotte Jonge)의 The Heir of Redclyffe라는 소설읽은 후에 또 피체 발투스(Pietje Baltus) 라는 여인에
의해 다시 개혁신앙으로 완전히 거듭나는 체험을 하였다. 자유주의와 중재신학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개혁주의 신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칼빈주의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롭게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 자유대학을 설립하고, 수상으로 활동함.
영향
칼빈 - 일반 은총론
F. D. Maurice(1805-72)- 하나님의 왕국
저서- Principles of Sacred Theology, The Work of the Holy Spirit(번역, 김해연)
Dictaten Dogmatiek, 5 vols.
중심사상- 영역주권(sphere-sovereignty)- 이 사상은 그리스도가 왕이시기에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왕권이 세워져야한다는 것.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현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그 도시의 각 분야에서 실시된 것처럼,
화란을 칼빈의 정 신에 따라 그리스도가 그 나라의 모든 영역에서 왕적 통치가
실현되게 했다. 영역주권은 카이퍼의 큰 공헌이다.
신학의 특징
정통 칼빈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
하나님의 영광
언약사상의 재강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일반 은총을 강조- 창조의 진행과 문화 창조 활동과 시민 생활의 가능성을 일반은총
사상에서 본다.
영향
쉐퍼
도덕적 다수 사상 - (예, 미국 제리 포웰목사 등에게)
2.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생애 - 목사(Jan Bavinck)의 아들로 독일지역 벤타임(Bentheim)에서 출생.
자유주의 사상과 개혁사상이 싸움이 일고 있을 때, 선댁(Sundag) 목사의 많은 감화를
받음. Leiden과 Kampen과 공부한후 Free에서 가르침.
학위 제목 - De ethiek van Ulrich Zwingli(1880)
저서 - Gereformeerde Dogmatiek, vols. 1-4.
신학방법론
그는 자신의 시대의 신학적 사상과 철학적 사상을 일정하게 상호작용 시킴으로써
개혁 신학을 발전시켰다.
현실적인 신학자, 카이퍼는 스콜라스틱하며 관념주의이다.
성경신학적 기반이 견고.
역사신학 강조.
종합적인 방법을 사용- 다른 신학 체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의 모든 요소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함.
타락전 선택론과 타락후 선택론을 거부함. 두 견해는 불충분하다고 함.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정들은 특별한 순서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형성하고, 그 계획안에서는 앞서거나 뒤지거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징
칼빈에게 돌아가고자 함. 바르트 역시 이런 초기의 자세를 갖지만,
자연주의를 반대한다. 자유주의 반대.
지나친 초자연주의를 반대한다. 성경은 자연적인 것도 기록되고, 이적도 있다.
이신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강조
3. 벌카우어(G. C. Berkouver, 1903-1996)
대표작
Studies in Dogmatic,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수많은 조직 신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신학 방법론
신앙과 계시의 상관성- 신앙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신앙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류호준).
미국
1. 구 프리스톤학파
1)핫지(C. Hodge)
생애- 미국 장로교의 정통 교의신학자, 그의 책 조직신학은 표준서이다.
신학방법론
귀납적- 성경적 사실의 상호 관계는 그 원리와 법칙까지 포함하여 성경적 사실에서 인출되어야 한다고 함. 베이콘의 경험주의에 의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
상식철학10)을 사용- 프리스톤 신학은 독일철학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영향력을
반대하고 신앙을 지식에 기반에 둠으로써 지나친 부흥운동을 절제 시켰다.
특징
점검되지 않은 종교적 체험의 위험성을(자유주의와 부흥주의) 지적.
한국교회도 이 점에 위험성이 있다.
성경의 무오성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 칼빈주의적 확신.
가끔 지나치게 이성주의가 나타난다.
2) 워필드(B. B. Warfield)
칼빈주의자로서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한 변증학의 대가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
2. 웨스트민스터학파
1) 메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영향 - 워필드
생애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창설자
신학과 사상
기독교의 역사성을 강조
구 프리스톤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킴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함 -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최대의 적”이라고 말함
2) 반틸(C. van Til)
영향- 카이퍼와 바빙크.
전제주의- 변증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계신다(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체)
그리고 성경의 자증적 계시를 전제하고 시작한다. 이것에 근거하여 구속받은
사람은 유추 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아래에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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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신학자 해설
1. 니버(Reinhold Niebuhr, 1882-1971)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엘림허스트 대학과 에덴 신학교와 예일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디트로이트에서 13년간 목회하였다. 그는 사회적, 정치적 개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참여에 대해 칼 바르트보다 더 강하게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본질과 원죄, 역사의 모호성, 무력의 사용에 대한 논의 속에서 구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복음을 특징지어주는 보다 낙관적 인생관을 예리하게 비평했다.
2. 라너(Karl Rahner, 1904- )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브래스라우에서 태어나 1922년 예수회에 가입, 1932년 사제 임명을 받았고 1948년 이후 인스브루크, 뮤니히, 뮌스터 대학 등에서 교의학을 가르쳤으며, 생존하는 카톨릭 신학자들 중 가장 혁신적인 다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신학
고전적 아퀴나스 신학과 임마누엘 칸트, 헤겔, 그리고 하이덱거에 의해서 다양하게 제시된 독일의 이상주의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종합을 시도하였다.
3.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사회개혁자. 독일 태생의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미국과 독일에서 수학했으며, 신학교 졸업 후 뉴욕 시의 노동자 계층의 독일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의 신학
개개인에게 잔존하는 죄의 급진적 본성과 개인적 중생의 필요를 과소 평가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4. 메이첸(Gresham J. Machen, 1881-1937)
미국 장로교의 신약신학자 및 변증가. 볼티모어 출생으로 죤스 홉킨스, 프린스톤 대학 및 신학교, 말버그 그리고 독일의 괴팅겐 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지금의 정통 장로교회 신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창설자이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현대 주의자와의 논쟁 중에 보수진영의 탁월한 지적 지도자이다.
5.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1967년부터 튜빙겐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 희망과 약속의 범주, 종말론을 강조한 {희망의 신학}을 발간.
그의 신학
정치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인간적인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으로부터의 해방을 동반하는 기독 메시지를 강조한다.
6.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로서 네덜란드의 호게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아브라함 카이퍼를 계승하여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과 캄펜 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그의 저작(著作)
{개혁파 교의} 4권은 성경의 자료에 보다 가까운 집착, 교의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관심, 다양한 견해들에 보다 포용력 있는 밀착을 시도하는 추론의 종합적 양식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7. 반틸(Cornelius Van Til, 1895- )
미국의 개혁주의 변증가이다. 화란에서 출생하여 1905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주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1년간 강의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새로 형성된 교수단의 일원으로서 그곳에서 40여 년 이상 변증학을 가르쳤다. 변증학에서 그는 성경의 무오적 진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어떠한 진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전제들이라고 주장하였다.
8. 벌카우어(G. C. Berkouwer, 1903- )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수년간 목회를 하다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발렌티누스 헤프에 의해 취해진 입장을 좇아 그 대학에서 교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산 신앙과 신학적 반영의 종합적 관계를 강조했다.
9. 벌코프(Louis Verkhof, 1873-1957)
미국 개혁파 신학자. 네덜란드에서 출생하여 칼빈 신학교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칼빈 신학교에서 수년간 강의했으며 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그는 카이퍼와 바빙크의 전통적 입장에 서서 미국의 정통 칼빈주의의 대표적인 대변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10. 본회퍼(Dietrich Bonh effer, 1906-1945)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출생하여 튜빙겐, 유니온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나치주의에 대한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히틀러 암살계획에 관련되어 43년 체포되었다가 45년 처형되었다.
그의 신학
칼 바르트와 연관된 신정통주의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며 {값싼 은총}이란 비평을 통해 기독교 사회를 강조한다.
11. 부룬너(Emil H.Brunner, 1889-1966)
스위스의 신정통주의 신학자. 취리히 대학에서 수년간 신학을 강의했다. 칼 바르트의 신학적 관심과 많은 공통점을 지녔으나 자연신학의 문제에서는 바르트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그의 신학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은 특별계시를 떠나서 창조된 인간에게 유용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신적 계시의 제안적, 인지적 양상보다는 인격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12. 불트만(Rudolf K. Bultmann, 1884-1976)
독일의 신약 신학자이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베를린, 튜빙겐, 말버그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복음서에 대한 양식비평학 발전의 기수였다.
그의 신학
신약의 전체적인 구조가 신화적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이해되어지기 위해서는 실존주의 철학의 범주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3. 브래쉬(Donald Bloesch, 1928)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인디애너의 브레맨에서 출생하여 앨림허스트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신학
폭넓은 개혁주의적 전통을 고수하며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칼빈주의와 루터주의 사이의 과거의 논쟁 부분을 중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4. 슐라이엘막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독일의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신학교수와 설교자로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졌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특성은 교리적 진리나 윤리학의 체계 속에서 발견되기보다는 신적 실재들의 개인적 체험과 종교적 감정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 월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 켄터키의 렉싱톤 근교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와 신학교, 라이프니쯔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당시 가장 박식한 보수 신학자로 신약주석, 교부학에 있어서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되었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과 성경의 무오성의 칼빈주의를 확증시켰다.
16.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스위스의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다. 바젤에서 태어났으며 나치주의에 반기를 든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로 바멘 선언을 초안하는데 주도적 공헌을 한 인물.
그의 신학
헤겔의 추종자로 슐라이엘막허의 신학 곧 낙관적이며 인본주의적 신학사조에 대한 강한 반발로 이해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주제의 심원한 복구를 표방한다.
17. 콘(James Cone, 1938)
미국의 해방신학자이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그는 미국의 흑인 신학자 중 가장 뛰어나 학자일 것이다.
그의 저서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미국 흑인의 경험의 배경 속에서 이해되는 것처럼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했다.
18. 큉(Hans K ng)
독일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이다. 튜빙겐 대학에서 에큐메니칼 신학과 교의신학을 가르쳤다. 최근 교황 무오류, 그리스도의 선재의 문자적 진리에 대한 부정, 동정녀 탄생, 칼케돈 회의의 공식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 등을 부정함으로 인해 큉의 입장은 19C 자유주의와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의 입장을 연상시키게 한다.
19. 틸리케(Helmut Thielieke, 1908)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이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명예교수이며 영어권에서는 설교자이며 윤리학자이다.
그의 신학
{복음주의적 신앙}이라는 그의 조직신학 책에 포괄적으로 잘 전개되어 있다. 기독교 전통의 단순한 보수적 재론이 아니며 현대인의 마음에 수용할만한 범주로 그 내용을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것도 아닌 하나의 신학을 기술하고자 했다.
20.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로, 독일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베를린, 브레슬라우 할레대학 등에서 수학.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와 하바드, 시카고 대학 등에서 강의하였다.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은 실존주의와 독일의 관념론에 크게 영향받았다. 그는 예수를 인간의 불화, 불안, 죄 등을 초월한 {새 존재}의 전달자로 이해하였다. 또한 창조, 타락, 부활과 같은 기독교 교리의 고도의 상징적 해석을 제시했으며, 그는 신학 체계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성경의 직접적 활용을 거의 배제시키고 있다.
21.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1928)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로 1960년대 이후 그는 유럽의 개신교 신학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등장, 뮤니히 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의 신학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 신학의 비평주의로 볼 수 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신적 계시는 다른 학술적인 분야와 공유하는 합리적이며 역사적인 방법을 통해 확증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신학은 진리와 사실성에 대한 일반적인 연구 속에서 다른 학문 분야와 더불어 부단한 대화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22. 팩커(James I. Packer, 1926)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글로우체스터 시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수학. 고전, 철학, 신학 부문에서 학위취득.
그의 신학
성경의 자증적(自證的) 권위와 증거주의적 고려보다는 성령의 증거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는 영국 국교회 전통 개혁주의, 복음주의적 흐름에 서서 영국의 청교도들로부터 자신의 신학적인 저작에 많은 영감을 취하였던 것이다.
23.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독일의 교회사가이며 신학자이다. 그 당시 매우 탁월한 지도자이다. 라이프찌히, 기젠, 말버그, 베를린대학에서 수학. 그는 하나님의 부격, 인간의 형제격, 신앙의 본질인 윤리적 이상 구성으로서의 산상수훈의 관념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덕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정확한 역사적 연구의 제창자로, 도덕적 반 형이상학적 경향으로 특징지어지는 신학적 입장의 주창자로서 그는 19C의 자유주의 신학의 숱한 결정적인 강조들을 요약했다.
24.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이다.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프린스톤 대학과 신학교에서 수학. 19C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주도적 신학자.
그의 신학
장로교회의 문제들과 미국인의 일반적인 교회생활에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정통 칼빈주의와 축자 영감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강력한 변증가로 기억되고 있다
25. 헨리(Carl F.H. Henry, 1913)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로 뉴욕에서 태어나 휫튼 대학, 북부 침례교 신학교와 보스톤 대학교에서 수학. {오늘의 기독교}의 편집인으로서 일하고 있다. 개혁파적인 전통에 서있는 대작가로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음주의적 학풍의 부활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26. 김교신(1901. 4. 18. - 1945. 4. 25)
교육자, 함남 함흥에서 출생.
약력 - 1918년 함흥농업 학교 졸업
1920년 토오교오 거리에서 기독교 노방전도를 듣고 회심
신앙 교육 - 일본 무교회주의계 저명한 신앙가 우찌무라의 문하에서 배움.
신앙 운동 - 김교신의 개인잡지로 변한 [성서조선]을 통하여
신앙- 외세와 제도에 얽매인 교회를 예언자적인 자세로 비판
성경의 순수한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한 민족 고유의 섭리사적인 사명의식을 촉구했다.
27. 김재준(1901-1987.1.27)
장로교 목사, 신학자로. 호는 장공, 함북 경흥에서 출생하였다.
수학 - 송창근의 전도로 입교, 일본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 수학.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 - 조직 신학, 윤리학 분야.
28. 남궁억(1863. 12. 27. - 1939. 4. 5)
민족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 호는 한서, 서울 양반가문에서 출생.
업적 - 96년 독립협회의 조직 시부터 이에 가담, 적극적인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
29. 박윤선(1905 - 1988)
장로교 목사로 신학자이다. 평북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수학 - 평양 숭실대, 장로회 신학교, 미국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
1979년 총신대 대학원장에 취임했고 만년에 합동신학원 원장에 취임해 주석 집필 등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저서 - [성경 신학] [영생의 원천] [응답되는 기도]
30. 박형룡(1897.3.28.-1978.10.25)
장로교목사, 신학자로 평북 백동군 운서면에서 출생하였다.
업적 - 한국의 첫 신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정통적인 보수주의 교리를 정립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화했다.
신학 사상 -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
저서 - 교의신학 전집
31. 백낙준(1895.3.9.-85.1.3.)
장로교 목사, 교육가,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업적 - 일제시대에 정인보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국한운동을 전개하며 한국과 영국의 한 맥을 형성.
32. 송창근(1898.10.5.-1951.7.)
장로교 목사로 신학자이며 수난자이다. 호는 만우이며, 함북 경흥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부산 성빈 학사 등
업적 - 37년 10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진보적인 신학사상을 소개했다
http://blog.naver.com/mokpojsk/12001763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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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이상규*
시작하면서
흔히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적 정통주의라고 일컬어져 왔다. 이 신학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을 검토하고,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라는 관점에서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주로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될 것이다. 넓은 의미로 말할 때 감리교나 성결교회도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앙 전통에서 생성되었지만 저들은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개혁주의를 논하는 이 글에서 논외일 수밖에 없다. 개혁교회, 개혁신앙, 혹은 개혁주의라고 할 때 이 용어는 때로 광의로 사용되고 있지만,1) 이 글에서는 보다 제한적 의미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확립된 개혁신앙이 스위스, 화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교회 혹은 장로교회를 통해 전수되어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석명된 신학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개혁주의와 칼빈주의는 동의어로 보아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2)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시작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독일의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교회는 독일, 화란, 프랑스 등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런 개혁교회의 신학을 보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3)란 넓은 의미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을 통칭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라는 말은 쯔빙글리(Zwingli, 1484-1531)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사상을 루터의 그것, 곧 ‘루터파’(Lutheran)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파(Lutheranism)나 개혁파는 다같이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를 비판하고 개혁했지만 개혁파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점은 로마교의 ‘전통’(tradition)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비교해 보면 그 경계선이 뚜렷해진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으나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다. 루터는 ‘전통’의 폐기에 대하여 칼빈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따라서 루터교에는 로마교적 잔재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지만, 개혁교회에는 로마교의 잔재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디아포라(diaphora)와 아디아포라(adiaphora)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차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바트부르그(Wartburg)성에 은거해 있던 루터는 1522년 3월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후 8편의 연속적인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복음(福音), 율법(律法), 이신득의(以信得義) 등은 디아포라(diaphora)로 보았으나 예배의식, 성상, 성직자의 예복 등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디아포라(본질적인 것)는 어느 시대에서도 개변될 수 없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아디아포라(비질적인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임으이로 정할 수 있는 ‘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교회 안에는 예배의식, 성직자의 복장 등을 포함한 로마교적 잔재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모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서 로마교적 잔재를 일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인톤는 개혁주의란 반사제주의(反司祭主義) 일뿐만이 아니라 루터주의의 개혁으로 보았다. 그래서 베인톤는 “개혁교회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4)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클로스터(Fred Klooster)는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바로 ‘성경적 원리’라고 말했다.5)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적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비록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칼빈주의라고도 불리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보다 성경적임을 증명하고, 다른 신학활동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학을 교리화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루터란과는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화란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알미니안주의자와 다름을 도르트 신조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대소요리문답(1647) 등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을 성경과 같이 절대화하지는 않으나 신조(信條)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인간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적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도 소위 성전(聖傳)이라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때로는 이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한다 하여 성경 보다 우월한 권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모든 전통을 배격했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이다. 신학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적 성격을 지난다.
2.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유동식교수는 그의 ?한국신학의 광맥?에서 한국개신교 신학 백년의 흐름을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 참여의 신학’, 그리고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별하고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에 초석을 놓은 이로 길선주(吉善宙)와 박형룡(朴亨龍)을 들었다.6)
유동식의 분류를 따른다면 길선주와 박형룡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었고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신학전통을 개혁주의 신학으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물론 개혁주의적 요소들이 없지 않지만 그 신학적 함의는 보수주의 혹은 정통주의에 가깝다. 차라리 간하배의 지적처럼 길선주, 박형룡으로 이어지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은 ‘보수주의, 복음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 그 시기를 1920년대까지로 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에 의한 구체적인 신학적 논구는 1930년대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이 때부터는 그 이전 시대와는 다른 성격의 신학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 적어도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시작되었지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첫 한국인 교수인 남궁혁박사(1882-1950)가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한국 장로교회의 첫 신학잡지는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인데,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의 주된 필진이었다. 말하자면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적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을 ‘한국신학’(Korean theology)이라고 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초기 한국교회 신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어왔다.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7)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8) 비록 한국교회 초기 신학에 대해 근본주의, 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에 준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푸리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땐스,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을 아주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대영제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 있어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현대적 견해’(the modern view)를 가진 소수의 인사들은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장로교선교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9)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즉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0)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했던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 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1930년대를 거쳐가면서 한국교회에는 신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초기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내한한 인사들로서 장로교 신학에 철저한 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신학이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을 결정했던 것이다.
신복윤교수는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의 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도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관한 논설이 처음 게제된 때는 1937년 함일돈(Froyd Hamilton)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함일돈은 이 글에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의 초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11) 박형룡박사가 로라인 뵈트너(L. Boethner)의 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을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 이 책이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역서였다.12) 비록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13) 이것은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의 신학적 입장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를 단지 서문만 고쳐 그대로 채택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동일한 고백을 갖게 함으로서 피선교국의 장로교회간의 복음주의적 연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꼭 개혁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장로교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집했을 것이다. 미국장로교회는 불과 4년전인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 채택했는데, 꼭 그런 의사가 있었다면 웨스트민스터고백서를 채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설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 밝혔을 뿐 교회의 공고백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 문서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이 진술마저도 선언적 의미만 지닌다.
주한 선교사들이 복음주의적 연대를 시도했던 점은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자 교파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 곧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자고 합의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가 반드시 엄격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strong calvinistic trend)을 지닌 것”이라고 평했고14) 하비 콘는 이를 평가없이 인용하고 있으나15) 백낙준의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릴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12개 신조를 칼빈주의적 이라고만 볼 수 없다.
어떤 점에서 12개 신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12개 신조는 개혁신앙의 특색도 없지 않으나 근본주의적이기도 하고, 정통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개 신조가 기본교리를 말하는 단문으로 되어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김영재의 지적처럼 사실은 개혁주의적 내용이 희석화 되어 있다.16)
이 12개 신조에는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고17)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에 대한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말하자면 12개 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윤리적 상황에서 단순한 기본 교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직면하는 삶의 현실에서 개혁주의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12개 신조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사상체계인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드러내는 고백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하비 콘(Harvie Conn)이 말한 바처럼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18) 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했는냐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하여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김양선에 의하면 길선주목사(1869-1935)는 “대전도자요, 대부흥가요, 대성경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는데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는 상당한 신뢰를 얻었고, 그의 신앙과 신학는 한국교회의 표준으로 인식되었는데, 그의 신학사상은 선교사들의 그것 보다 더 극단의 보수주의였다고 지적했다.19)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는 철저했으나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신학을 헤아리는 안목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성경에 대한 철저한 믿음 혹은 축자영감설에 서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신비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도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또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비단 한국교회 초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 세대에도 여전히 현저했다.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종말론인데, 비록 일제하의 상황에서 신사참배강요라는 독특한 정치현실이었다고 하지만 전천년설(前千年說)을 신봉했다. 이 전천년설은 상당한 정도로 세대주의 신학으로 채색된 것이었다.20)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 다수 의견이었고, 바빙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란 개혁신학자들의 견해도 무천년설이었다. 또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나 칼빈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무천년설이 지배적이지만 박형룡이나 박윤선까지도 전천년설을 따랐다.21)
한국장로교회에 스며든 세대주의적 경향성을 지적한 인물은 하비 콘, 부르스 헌트(Bruce Hunt), 신복윤, 김영재 등인데, 하비 콘는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가 유입되었다.”고 지적하고 서구 기독교 문서의 역간에 힘입어 한국교회에도 세대주의가 유행하게 됬지만 서구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라 변형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일반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세대주의는 고도로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 초기형태의 세대주의라고 지적했다.22)
그리고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해석법이라고 지적했다.23) 그 결과 모든 예언적 약속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원리가 개혁주의적 이해가 결여된 초기 한국교회에 쉬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신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미래적인 강조’가 편만했는데,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해석방법이었다. 한국교회가 신국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바로 세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부선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부르스 헌트는 “미국의 많는 근본주의 계통에서 가르쳐 지는 하나님의 계시역사를 일곱 시기로 나누는 방식이 미국의 보수주의적 장로교 일부에 유입된 것 처럼 한국교회의 가르침 속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24)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5)고 지적했다.
정리해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비록 개혁주의적인 특징들이 있기는 하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는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1930년대의 진보적 신학의 대두
1930년대로 넘어 오면서 한국인들의 새로운 신학, 곧 ‘다른 전통’의 대두를 보여주는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동식은 1929년부터 1939년까지를 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불렀다.26) 이 시기의 신학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유를 선언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이식해 준 신학으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하였으므로 보수주의 신학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이 점은 1930년대로부터 선교사 중심의 신학에서 한국인에 의한 신학적 논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정통 보수신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문제들이 1930년 이전에도 간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1916년 황해도에서 김장호(金壯鎬)목사가 성경해석상의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고, 1925년에는 선교사 게일(Gale, 奇一)이 의역본(意譯本) 성경이 문제시 된 일도 있었다.
1926년에는 소위 ‘서고도 사건’이 있었다. 카나다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William Scott)는 함흥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성서비평학을 용납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 목회자들과 논쟁한 일이 있었다. 그는 성경에는 역사적, 지리적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김관식, 조희염 등은 이 주장에 동조했다.
함흥지역이 카나다 연합교회의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에 타 지역에 비해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 미국 북장로교의 영향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1930년 이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진보적 신학 운동이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며 지역적이었지, 전국적인 운동은 되지못했다. 그러나 카나다연합교회의 선교지역인 함경도를 중심한 자유주의적인 경향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27)
1930년 중반기 이후 한국교회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은 미국교회의 신학적 논쟁과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는 1812년 설립된 이래 100여년간 북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있어서 유일한 보수주의 신학교였으나 1929년 교수진이 개편되어 점차 보수주의 신학에서 이탈하였다. 이렇게 되자 메이첸(J. G. Machen, 1881-1937)을 비롯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프린스톤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다.
이 때 교수 8명과 52명의 학생들이 이들을 따라갔다. 이것은 브릭스(Briggs) 사건이나 오번선언(Auburn Affirration, 1924) 등과 연류된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와같은 미국교회의 상황은 한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미국교회를 추수(追隨)하고 있던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의 이런 변화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적 기류는 주로 미국교회의 영향하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28)
성경관의 변화는 신학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표인데, 1930년대에 와서 성경관의 변화가 뚜렷이 나타났다. 완전 영감설(完全靈感說)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이 부인되었고(1934), 고린도전서 14장 33-34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가 제기되었다(1934). 또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립을 보여준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실재를 알리는 첫 신호였다. 이때 문제가 된 사건은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김양선교수는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 제소된 이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를 가리켜 전 교회가 문제삼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에 의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했다.29)
창세기 저자문제란 서울 남대문교회의 김영주(金英珠)목사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한 데 대한 강병주(姜炳周) 목사의 문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서 이 문제는 결국 본문비평의 문제였다. 강병주 목사의 제소에 대해 총회는 평양신학교 교장 라부열박사를 위원장으로, 박형룡박사를 서기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총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반대론은 근대의 파괴적 성경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이론인바 그들은 과연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하는데 멎지않고, 오경전부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모세시대로부터 여러 세기 후대 어떤 인물들이 기록한 위조문서로 돌립니다. 또 그들은 오경뿐 아니라, 구약의 다른 여러 책과 신약 여러 책을 후대인의 위조문서도 인정하며 그 기록의 내용에 신화의 고담과 미신과 허설과 각종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여 냄으로써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선 장로교회 안에서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창세기만이 아니라 오경 전부 내지 신구약 성경 대부분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권위도 무시하며 능욕하는 사람이니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니라’(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조 21조)고 믿고 가르치는 우리 장로교회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 교회 제1조를 위반하는 자이므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합니다.30)
김영주 목사는 이 보고서를 받아드리고, 자신이 주장을 취소함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은 새로운 도전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1934년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문제시됐던 또 한가지는 김춘배(金春培)목사의 교회에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문제였다. 함북 성진(城津) 중앙교회의 목사였던 김춘배는 ?기독신보?(基督申報) 제977호에 “장로교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제목의 글 ‘여권문제(女權問題)’라는 항에서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천년전의 일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4:33-34까지의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였다.
김춘배 목사의 주장은 성경의 권위와 한계를 시사하는 것이었고 교회안에서의 여권 신장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성경의 영원성과 절대성을 의심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총회는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앞서 말한 창세기 저작권 문제와 더불어 이 문제를 연구보고케 하였는데, 1935년 제24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을 발표되었다.
.....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바울은 34절 하반에 ‘너희 율법에 이른 것과 같이 복종할 것이요’ 하여 여자에게 교권을 불허하는 규율의 성경적 근거를 지시하였으니 그것은 창세기 16절에 여자는 남자의 주관한 바 되리라 한 말씀이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의미하는 말씀임을 개설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기로 성경에 이미 명령되었으니, 남자를 포함하는 교회 위에 교권을 가지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가르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우리 교회 교역계에서 제외하기 위하여, 총회는 각 노회에 명령하여 교역자의 시취문답(試取問答)을 엄밀히 하여 조금이라도 파괴적 비평이나 자유주의적 해석방법의 감화를 받은 자는 임직을 거절케 할 것이오며, 이미 임직을 받은 교역자가 그런 교훈을 하거든 노회는 그 교역자를 권징조례 6장 42조, 43조에 의하여 처리케 할 것입니다.31)
제24회 총회는 이 보고들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므로 자유주의 신학적 성경해석은 총회적 결의에 의해 거부되었다. 김춘배 목사는 총회의 대세에 뜻을 굽혀, 그 게재문의 의도가 “성경을 해석함이 아니었고’ 또 ‘만약 그 문구가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파괴하고 교회의 피해가 급(及)할 염려가 있다면 책임의 중대함을 감하고 취소하기를 주저치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성경을 비평하고 또 그것을 교수하는 교역자들과,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추어 자유롭게 해석하는 자들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여전히 정통신앙을 확립하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용납치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통신학에 대한 일련의 도전는 한국교회의 신학이 보다 근본주의적 경향을 뛰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빙돈단권성경주석(Abigdon Bible Commentary)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935년 총회에서는 당시 감리교의 유형기의 편집으로 번역 간행된 아빙돈 단권주석은 1930년 미국 감리교 출판사인 아빙돈사가 발간했던 것으로 미국, 영국, 카나다, 호주 등의 성경학자 66인이 공동집필한 것이었는데 한국감리교회가 희년기념으로 1934년에 출판한 것이었다. 이 주석의 한역자들은 대부분 감리교인들이었으나 장로교인 중에도 채필근, 김현근, 문재린, 김명선, 한경직, 윤인구, 김재준, 송창근 등의 목사들이 번역에 참가하였다. 이 주석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을 전적으로 도입한 자유주의적인 주석이었으므로 장로교목사가 번역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시 된 것이다.32)
길선주 목사는 그 주석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집필된 것임을 지적하고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목사들에게 엄중한 책임규명을 하므로 후일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진보적 신학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1935년 제24회 장로교 총회에서 이 문제를 제소하였고, 총회는 길선주 목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신생사 발행 성경주역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으므로 장로교회로서는 구매치 않을 것이며 동 주석을 집필한 본 장로교 교역자에게는 소관 교회로 하여금 사실을 심사케 한 후 그들로 하여금 집필의 시말을 기관지를 통하여 표명케 할 것이다.
채필근 목사는 집필의 과오를 사과하였으나, 송창근, 김재준, 한경식 목사는 신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총회의 독단에 응할 수 없다고 하여 사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을 이끌고 있던 박형룡의 신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에 극히 형식적인 3인 연서의 성명서33)를 신학지남에 발표하므로 일단락 되었다.
이상과 같은 장로교 총회적 차원에서 문제가 됐던 사건들은 한마디로 성경관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완전 영감설은 한국장로교회가 서 있는 양보할 수 없는 기초였다. 문제는 이런 신학적 토론의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는 보다 방어적 성격을 뛴 근본주의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전통신학이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특성의 외연은 기대할 수 없었다.
1930년대 이후 점차 대두되던 이런 신학운동은 총회 차원의 결정이나 사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 발전되어 장로교 안에는 자연히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이 뚜렷해졌다.
4. 김재준의 신학과 조선신학교의 설립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인물은 김재준이었다. 김재준은 김익두 목사의 감화로 입신하였고, 일본 청산(靑山)학원 신학부에서 3년간(1925-1928) 유학하고 도미하여 핏츠버그에 있는 웨스턴(Western)신학교에서 3년간(1929-1932),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일년간 연구한 후 1933년에 귀국하였다. 남궁혁은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했으나 그의 신학사상 때문에 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1930년대의 대부분을 평양 숭인고등학교(1933-36)와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1936-39) 성경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편집인이었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는 1933년 귀국 후부터 1935년 신학적인 문제로 더 이상 ?신학지남?에 글을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34) 이런 기고문을 통해서 김재준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천명해 나갔고 역사비평학적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신학지남? 1934년 1월호에 쓴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였다. 김재준은 이 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의 ‘처녀’를 ‘젊은 여자’로 고쳐 읽었다. 또 이것이 사실에 가깝고 본문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표적’을 꼭 ‘이적’으로 볼 것은 없다고 지적하므로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 성격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김재준 목사의 이러한 해석은 당시 교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때 편집위원으로 있던 박형룡은 편집인 남궁혁에게 사표를 제출함으로 항의하였고, 김재준은 1935년 5월호를 끝으로「신학지남」에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박형룡이 볼 때 김재준은 성경을 축자적 영감설을 부인하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오류를 주장함으로 보수주의 신학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자유주의 신학이었고, 전통과 정통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대립는 시작에 불과했다. 신학적 대립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구역이었던 함경도 지방에서 보다 뚜렷했다. 곧 해외에서 신학을 연구한 이들이 귀국하면서 ‘다른 전통’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마포삼열의 경고는 그 의미가 이미 반감되고 있었다.
근래에 신신학(新神學)이니 신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합니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한다든지, 혹은 선교사업을 최소한도로 축소한다든지 할지라도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합시다. 나와 한석진(韓石晋) 목사가 13도에 두루 다니며 전파하던 그 복음, 양전백(梁甸伯)목사가 선천(宣川)에 전하던 그 복음은 저들의 지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성신의 감동을 받아 전한 것이었으니 앞으로는 그것을 조금도 변경치 말고 받은 그대로 전합시다.
1935년 이후 해방 전까지 신학적인 문제로 총회적 차원에서 문제된 것은 신사참배건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일제하라는 시대적 제약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아직까지도 한국 장로교 총회가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이 총회적 차원에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학적 문제를 야기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말을 거쳐 가면서 한국의 신학적 판도는 크게 변모되고 있었다. 이 변화에 동기를 준 것이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이었다. 교회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고, 교회에서의 구약설교를 금지시키는가 하면 성경과 찬송 일부의 삭제를 명하기도 했다.
보수주의 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가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사실상 폐교되고, 1918년 창간되어 22년간 장로교회의 신학을 주도해 오던「신학지남」은 1940년 8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보수주의 신학의 연구와 변증은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 영향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 또 주한 선교사들이 강제출국하고, 보수주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보수주의 신학의 약화를 초래했고, 그 신학적 공백상태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지경을 넓혀갈 수 있는 환경을 얻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시대적 상황에 타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보수주의 신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김양선은 “보수주의는 붕괴되고 지금까지 저들의 손에 있던 교회의 지도권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35)
1940년 4월에는 김재준, 송창근(宋昌根), 윤인구(尹仁駒) 등이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를 개교하였다. 이미 있던 평양의 장로교신학교가 폐교되는 상황에서 조선신학교가 개교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 인사들이 일제의 정책에 순응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신학교는 처음부터 일제와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김재준은 ‘선교사 집권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고 신학과 신학교육의 자주를 내세웠는데, 이것은 세계교회로부터의 한국교회를 이탈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정책과 일치하고 있었다. 김재준은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과 전통을 전적으로 개혁할 것을 말하면서, “조선교회의 건설적인 실제면을 고려에 넣는 신학”을 강조했는데,36) 이것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신학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했다. 이 조선신학교는 194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기반을 다져갔고, 해방후 조선신학교는 ‘남부총회’에 의해 한국 장로교 직영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신학교가 1946년 9월 설립되었다. 타협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이 고려신학교 설립의 주된 동기였다. 따라서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신학교 설립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5. 박형룡는 개혁주의자인가?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에서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의 영향력은 과소 평가될 수 없다. 그는 한국장로교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이자 장로교신학의 보수주의적 전통을 엮어간 인물로서 그의 신학이 어떻했던가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897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난 박형룡은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1916), 평양의 숭실전문학교(1920)를 거쳐 중국 남경(南京)의 금능대학(1923)에서 수학하고 도미하여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1926는 졸업하였다.
다시 컨터어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9개월간 수학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후일 이 학교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1932). 귀국한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는 동시에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에서 가르치다가 1931년 4월부터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의 변증학을 가르치는 전임교수가 되었다.
이 때로부터 교수로서 그리고 보수신학의 변증가로 활동하게 된다. 1931년부터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는 1938년까지 교수로 있었고, 1942년에는 만주 동북신학원 교수 및 교장으로, 1947년에는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1948년에는 남산의 장로교신학교 교장으로, 1952년 이래로는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72년까지 활동하고 은퇴했다.
그는 1935년 ?근대 기독교신학 난제선평?이란 책을 저술한 이래, ?표준성경주석 로마서?를 포함한 4권의 주석서와 ?우리의 피난처?라는 제목의 설교집, ?기독교 변증학? 등 단행본과 전7권의 ?교의신학?을 완간했다. 1978년에는 박형룡의 모든 저작을 한데 묶어 전14권의 ?박형룡박사 저작전집?이 출판되었다. 흔히 박형룡은 “변증학자로 시작하여 조직신학자가 된 분”이라고 하는데,37) 그는 변증학을 그의 ?교의신학?의 서론격으로 하여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그 기초로 조직신학적 체계를 ?교의신학?에 담았으며, 이상의 분야 외에도 목회학, 예배학, 교회정치, 기독교교육학, 선교학 등에도 관심을 드러냈다.
그는 흔히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한국에 소개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가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때는 1923년에서 26년 어간이었는데, 이 때는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와 이로 인한 대립과 갈등의 시기였다. 1812년 설립된 프린스톤신학교는 16세기 개혁신학과 17세기 유럽의 칼빈주의적 장로교 정통주의를 이어받는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의 진정한 보루(a vertitable bastion of calvinistic orthodoxy)였고, 알렉산더,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이 프린스톤 신학을 주도하였다. 그의 신학적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프린스톤의 신학자들 중에 특히 메이첸(G. Machen, 1881-1937)이었다.
특히 박형룡은 변증학을 전공했으나 변증학을 가르친 존슨(Johnson)이나 그리인(William B. Greene) 보다 신약학을 교수했던 메이첸의 영향이 컸다. 메이첸는 1920년대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정통신학의 파수는 그 시대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었다. 그가 1921년에 출판한 ?바울 종교의 기원?(The Ogigin of the Paul's Religion)이나 1930년의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는 그 시대 자유주의와의 대결이 빗은 결정체였다.
흥미롭게도 1928년 귀국한 박형룡은 마치 미국장로교 현장에서 메이첸이 그러했듯이 한국장로교회 마당에서 벌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사조에 맞서 싸우는 신학적 소명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다. 그는 1930년대 한국교회의 ‘다른 전통’에 대항하고 김재준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일전을 통해 초기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을 지키고 이를 계승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신학은 방어적 근본주의 성격을 뛰게된다.38) 이런 점에서 볼 때 박형룡이 메이첸으로부터 특히 4가지 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한숭홍의 지적은 수긍할 만 하다.
즉 박형룡은 1.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배타적이고 변증적인 신학방식, 2. 알렉산더, 하지 부자, 워필드, 메이첸으로 이어지는 근본주의적이며 칼빈주의적인 정통주의, 3. 변증학 공부에서 터득한 신학논쟁에서의 강한 반론과 비판 능력, 4. 교단분열과 신학교 설립의 선례를 메이첸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박형룡이 변증학을 전공하게 된 일이나 메이첸의 문하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1920년대의 미국교회의 신학적 변화에서 한국교회를 유추해 보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상황에서 미국교회를 조망해 보는 반성적 성찰의 결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박형룡이 ‘한국의 메이첸’39)이라고 불린 것은 메이첸과 박형룡이 미국과 한국이라는 상이한 현장에서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을 위해 동일하게 부름 받았다는 시대적 소명과 그 신학적 유사성과 정신적 연대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 때문에 박형룡의 생애에는 메이첸을 추종하려는 심리적 연대감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는 변증과 옹호가 중요한 사상적 맥이었고, 그가 ?기독교근대신학 난제 선평?에서 말한바와 같이 “신학사상의 바른 자와 그른 자를 획별차천명(劃別且闡明)”하는 것을 교회를 위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학에는 고도의 교리적이고 사변적인 성격이 짙었다.
어떻든 박형룡은 1930년대 이래로 정통주의 혹은 보수주의라고 일컬어지는 한국교회의 신학전통을 기초 놓고 이를 파수하며 계승해 가는 50년간의 변증과 대결과 투쟁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 박형룡의 신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를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과 화란에서 석명된 삶의 세계관적 체계 혹은 문화적 소명을 강조하는 전통에서 볼 때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박형룡은 미국의 개혁주의적 정통신학과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두 갈래의 신학전통을 동시에 수용했다고 보여진다. 미국신학은 직접적으로 배웠지만 화란신학은 간접적으로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교의신학?을 보면 17세기 유럽의 개혁주의적 정통신학을 계승한 프랜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1632-1687)의 신학을 이어받는 프린스톤 신학자들, 곧 찰스 하지, 에이 에이 하지, 워필드, 메이첸, 그리고 심지어는 침례교신학자 스트롱(A. M. Strong), 세대주의자 세드(William G. T. Shedd) 등도 인용하고 있고, 화란계통의 카이퍼, 바빙크, 보스 등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그는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40) 그는 벌코프를 통해 화란 신학 전통을 잇고 있다고 보여진다. 박형룡이 벌코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교의신학?이 벌코프의 조직신학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41)
말하자면 그는 벌코프를 통해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간접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한국교회에 소개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화란 개혁자들의 저술이 영역되지 못했고 그가 화란어를 읽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벌코프는 박형룡에게 화란 개혁주의 전통을 전수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박형룡은 벌코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벌코프가 가졌던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사회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개혁주의적 성찰을 시도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루이스 벌코프는 하나님의 주권의 우주적 성격을 강조하여 문화에 대한 소명, 곧 문화변혁을 강조했다.
그는 칼빈신학교에서 38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뿐 아니라 성경신학과 사회윤리 분야에도 저서를 남겼다. 그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의 와중에서 근본주의자들이 무관심했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사회복음주의에 대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낙관주의적인 합리주의 신학인 사회복음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 ?교회와 사회문제?(The Church and Social Problems, Grand Rapids, 1913)이다. 다시 말하면 벌코프는 근본주의를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약점인 사회에 대한 건실한 관심을 회복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던 것이다.42)
그는 개인구원과 타계주의적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문화변혁적 전통을 가진 개혁주의자로서 신칼빈주의(Neo-Calvinsim) 전통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코프의 신학으로부터 큰 빚을 지고 있는 박형룡에게는 그 시대의 사회나 문화현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나 문화변혁적 관심이 희박했다. 이 점은 그의 글쓰기의 여정 속에 드러나 있다.43)
장동민은 박형룡은 “1940년 이후 조직신학을 강의하면서 프린스톤의 전통과는 다른 화란신학을 접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도 벌코프를 통해서 화란신학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은 장동민의 말처럼 “화란신학을 받아드린 후에도 변증학의 방법론과 그 내용이 별로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구 프린스톤의 신학 전통, 곧 하지, 워필드, 메이첸으로 이어지는 미국적 전통에 착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형룡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 특히 1930년대 이후 진보적 신학의 대두에 대항하여 한국교회의 신학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싸움 때문에 성경권위를 수호하는데 앞장섰고, 그 싸움의 와중에서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적 경향성을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자신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불렀지만,44)
그 시대적 외인(外因) 때문에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적 내인(內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개혁주의적 특성을 지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 근본주의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직접적으로 근본주의를 지지하는 두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45) 이 글에서 그는 근본주의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이며, 정통주의 기독교운동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그는 근본주의는 20세기 미국적 배경에서 대두된 신학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며, 초대교회 교부들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파수하려했던 신학이었고 미국장로교회가 견지해 온 신학으로서 심지어 기독교 자체라고 이해했다.
흔히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칼빈 이래로 최대의 칼빈주의 신학자로 불리며, 근세 개혁교회의 3대 조직신학자로 불린다.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살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므로 문화에의 소명은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는 심지어는 정치 현실에 참여하여 개혁주의적인 이상을 수립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함께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그러나 박형룡에게는 카이퍼적인 문화에의 소명은 없었다. 박형룡은 카이퍼를 비롯한 화란 개혁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박형룡은 구 프린스톤 신학-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이어지는 청교도적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받아드렸기 때문에 그것을 불변의 전통으로 계승하고자 했지 유럽의 개혁주의를 받아드릴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물론 1930년대에 대두된 진보적 신학과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거절한 박형룡에게서 카이퍼에게서 보게 되는 문화에 대한 세계관적인 체계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에게 그런 세계관적 체계나 박형룡의 표현을 빌려 말해서 문화에 대한 ‘지로’(指路)가 있었다면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오늘 현실에서 보는 신앙과 삶의 이원론적 괴리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를 쇄신하고 혁신하는데, 아니 사회와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박형룡의 신학에서 문화변혁적 측면이 없었던 점은 비단 박형룡에게만이 아니라 '개혁주의'를 말하는 모두에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46)
6.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주의 신학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교회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그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실제로 해방후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신학 교육기관으로서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교육이념, 곧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더 나아가서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 쇄신을 의도한 일은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 확립에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과 주남선은 비록 투옥되어 있었으나 해방을 예견하고 한국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신학교의 설립을 의도했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입교(神學立敎),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통해 한국교회를 바로 새우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불신앙과 타협주의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고, 자유주의 신학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투쟁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체득했던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45년 해방당시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이 신학교가 남부총회에 의해 장로교회 직영신학교로 가결되었을 때 새로운 신학교육 기관의 설립은 긴박한 과제였다. 그 현실적 요구에 의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는 설립되었다.
말하자면 고려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다. 이것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이념을 계승하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 점은 초기 고려신학교 관련 문서에서 거듭 표명되고 있다. 한상동과 주남선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고려신학교가 추구하는 신학적 이념은 개혁주의 신학임을 분명하게 표명히 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그대로 가르치며 도 장로교원본 신조서인 웨스터민스터 신조게요서의 교리대로 교리와 신학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여 교리와 및 생활을 순결하게 할 목사 양성을 이념과 목적으로 하고 현하 한국교계에 거대 신학자인 박윤선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 칼빈적 개혁파의 사상 그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하여 왔고, 앞으로 더 일층 노력하려고 하는 바입니다.47)
고려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박윤선는 고려신학교를 모체로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우리의 신앙노선?이라는 글에서,
첫째로 이 노선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및 그 대소요리문답을 교리로 하고 또한 그 예배 모범과 권징조례를 순수히 지킨다. 둘째로 일제말기의 흐리워졌던 오점을 밝히 회개하여 청산함이 절대로 필요한 줄 알고 실행한 것이다. 셋째로 신학에 있어서 타협주의는 배척하고 순수히 칼빈주의 신학을 보수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사도적 전통으로 가지지 않는 현대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를 반대한다.48)
고려신학교는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장로교전통을 생활을 따르며, 생할에 있어서는 성화적 삶을 추구하며, 신학에 있어서는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박윤선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였고,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고려신학교교육의 이념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신학교 학우회가 발간한 소책자 ?우리의 신앙노선?에서 “우리가 진리를 지키려면 옳은 신학사상을 지켜야 한다. 신학이란 성경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후,
우리는 개혁파의 신앙노선을 따른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이 칼빈주의 신학을 주장함에 손색이 없어야 한다. 신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자유주의, 발트주의, 알미니안주의. 우리는 위의 모든 신학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주의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중간주의 신학도 좋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께달은 성경주의라고 할 수 있는 칼빈주의 신학을 강력히 파수한다.49)
고 하여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고 이를 교육하고 파수하는 것을 신학적 이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개혁주의를 복음주의와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위의 소책자에서 박윤선는,
소위 복음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정통신학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명확하게 개혁파신학을 께닫지 못한 관계로 계약신학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나 계약신학도 그리 고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타협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실상 진정한 열매있는 개혁주의 신앙은 안가진다.50)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를 사수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51) 한상동과 주남선는 개혁주의 신학을 통한 교회건설이라는 분명한 의지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고, 박윤선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계승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고려신학교는 하비 콘의 지적대로 “교회 내에 보수주의 사상을 심어줄 터전”52)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 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는 묘판의 역할을 했다.
7.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
실제로 한국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초를 놓은 인물은 박윤선(朴允善, 1906-1988)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경신학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보다 앞선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사변적 난해성 때문에 대중적 수용도가 낮았다. 그러나 주경신학자였던 박윤선의 저작들, 특히 성경주석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한국목회자들의 서제에서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박윤선의 주석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박윤선은 그의 방대한 저술과 30여년간의 신학교육과 목회적 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을 공표하고 가르치고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의 교의신학은 선언적 의미가 컸지만 박윤선의 개혁주의적 성경주석은 목회적 터전에 쉬 용해되고 착근할 수 있었다. 그의 성경 주석에는 41편의 소눈문이 특주 혹은 참고자료로 포함되어 있고, 1,053편의 설교가 포함되어 있어 시골의 설교자로부터 도시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읽혀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영향력은 박형룡을 능가하며, 한국교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1905년 평북 철산군에서 출생한 박윤선는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4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두 차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였다(1934-36, 1938-1939).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메이첸의 문하에서 헬라어공부와 신학연구에 주력하였다. 박윤선는 2차 미국유학시에는 반틸(C. van Til)의 문하에서 변증학을 배웠는데, 반틸의 영향으로 신학이란 어떤 자연론적인 유추나 철학적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 성경계시에서 출발하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에 기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또 반틸의 신학이 근거하고 있는 바빙크의 교의학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게된다. 그의 첫 신학논문인 “빨트의 성경관에 대한 비평”과 그의 두 번째 신학논문인 “빨트의 계시관 비평”53)은 이런 훈련의 결과였다. 박윤선의 철저한 계시의존사색도 이런 교육을 통해 얻는 것이었다.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4년간 고려신학교 교수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53년 10월에는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비록 체류한 기간은 불과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화란의 개혁신학을 직접 접하게 된다. 박윤선이 박형룡과 다른 한가지는 박형룡은 미국의 구 프린스톤 신학을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으로 보수하고 파지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박윤선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는 구 프린스톤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어지는 미국 장로교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 19세기 화란에서 석명된 개혁주의 신학, 이 두 흐름을 적절히 종합하였다. 박윤선은 1960년 고려신학교 교장 및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0년부터 63년까지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동산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로 활동했고, 1963년부터 1980년까지는 총신대학교 교수로 봉사했다. 1979월에는 설립 50주년을 맞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10월 말 총신대학 대학원장직을 사임하고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여 원장 혹은 교수로 봉사하였고, 명예원장으로 계시다가 1988년 6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박윤선은 일생동안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위해 일관된 생애를 살았는데, 한국교회를 위한 그의 중요한 봉사는 주석 집필이었다. 그의 주석 집필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로부터 40년간의 노고 끝에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완성하고 1979년 10월 9일 총신대학교 강당에서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드린바 있다. 그의 주석은 분량으로 보면 구약은 총 7,347쪽, 신약은 총 4,255쪽에 달해 신구약 주석은 총 11,602족에 달하며 매년 약 240쪽의 주석을 집필한 샘이다.54) 그는 지칠줄 모르는 학자였다.
그는 주석이나 설교, 단행본 외에도 고신의 ?파숫군?에 218편, 총신의 ?신학지남?에 40편, 합신의 ?신학정론?에 1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14년인데, 218편의 글을 발표했으므로 연 15.6편의 논문을 발표한 샘이다. 외람된 이야길 수 있으나 그가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고신 신학의 전성기였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열정적인 기간이었다.
박윤선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에도 박식하였고, 그의 성경주석에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권의 신학자와 하지, 워필드, 메이첸 등 미국신학자들은 물론, 잔 메이어(Jahn Meter), 델리취(Delitzsch) 등 독일 신학자들과 아브라함 카이퍼, 비빙크, 보스, 리델보스, 스킬더 등 화란의 신학자들의 신학을 동시에 소개하였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석명하고 이를 구체화하였을 뿐 만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 위에서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 진정한 개혁신학자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개혁주의가 아닌 신학을 비판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개혁주의 신학을 천착하려고 힘썼다. 박윤선는 옛 평양신학교의 벽을 넘어선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하비 콘은 박윤선은 단순한 근본주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고 함으로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 신학자 였음을 지적했다.
박박사는 옛 평양신학교가 너무나 제한된 분야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반은총의 여러 분야들을 인식하지 못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차원을 넘어서길 원했다. 즉 한국교회가 칼빈주의라는 보다 원시적인 안목(the larger perspectives of Calvin)에서 바라보고 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원했다. 개혁신앙에서 동료였던 박형룡과는 달리 박윤선는 조직신학 연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신약연구를 통해서도 이런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55)
그가 말한 칼빈주의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란 삶의 체계로서 칼빈주의, 곧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했다. 그는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자가 아니라 그는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으로 체달(體達)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경신애학(敬神愛學)의 삶을 살았으며, 겸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김명혁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윤선은) 개혁주의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한국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박목사님은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적 삶이 무엇인자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신 분이었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 주셨고, 소극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보여 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사회문제와 구제사역 등에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다56).
박윤선은 1946년부터 1960년까지는 고려신학교에서 교수로 혹은 교장으로 봉사했으나, 1963년에는 1948년에 설립된 총회신학교, 곧 총신대학교로 옮겨갔고 이 곳에서 1980년까지 봉사했다. 그리고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이 신학교 교장에 취임함으로서 그의 영향하에 개혁주의 신학과 그 학맥(學脈)은 고신대학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교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 계승되었고, 고신과 합동 등 한국의 보수주의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8. 남은 문제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이라는 흐름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연원과 발전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한국교회가 아니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따른다고 말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신학과 그 전통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고, 또 그 개혁주의적 삶에 충실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그 신학적 경계선을 획정하고 비판도 해왔다. 그러나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세대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혹은 오순절 운동과의 경계선이나 그 신학적 차이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석명하지 못했고, 개혁주의라고 하지만 사실은 세대주의 혹은 근본주의적인 신학에 안주해 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장로교회가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근본주의, 세대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을 말하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문화 현실이나 사회 현상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하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에는 대체적으로 문화소명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근본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예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 사명에 대한 무관심은 결과적으로 도나티스트들이나 청교도들에게서 보는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게 된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인 동시에 만유의 주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만다. 바빙크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정교는 분리될 수는 없으나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한국의 개혁주의자들은 정교의 분리를 정당한 것처럼 인식하여 왔다.
교회 현실에서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는 개혁주의 교회와 개혁주의적 삶의 과제로 남아있다. 첫째로 개혁주의적 삶의 체계, 곧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을 확립하고 그것이 일상의 삶속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개혁주의는 교회를 위한 신학인 동시에 개인의 삶을 위한 지로적(指路的) 체계이다. 한국에서 개혁주의를 말하는 장로교회는 개혁주의적인 삶의 추구에 무관심했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사는 생활은 먹고 입는 가장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궁국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개혁주의적 삶을 추구해야 한다. 둘째 개혁주의 교회간의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김의환박사의 말 처럼은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 사이에서 움직이는 진자(振子)의 움직임을 목격해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요구할 때 연합이 깨지고, 연합을 우선시 할 때 순결이 훼손된다. 어거스틴과 도나티스트의 싸움이 바로 그것이고, 칼빈과 제세례파의 긴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는 교리적 순결과 정통을 강조하되 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연합을 그토록 강조하였기에 Willem Nijenhuis는 칼빈은 개혁자들가운데 교회일치 혹은 연합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를 Calvinus Oecumenicus, 곧 ‘연합운동가 칼빈’이라고 호칭하였고, 연합운동가로서 칼빈에 관한 한권의 책을 저술하였다.57) 우리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되 연합을 소흘히 해서는 않될 것이다. 특히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은 우리의 당면과제라고 할 수 있다.
고고(孤高)한 분리주의는 교만일 뿐이다. 세째 오늘의 현실에 대한 문화적 소명을 지녀야 한다. 앞에서 강조하였지만 한국의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로 오인될 만큼 근본주의적인 사고로부터 탈피하지 못했다. 이것은 개인의 회개와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경건주의나 복음주의의 영향일 수 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과 통치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넷째 교회정치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 특히 개혁주의를 말하는 교회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이지 못한 한 가지가 교회정치이다.
교회정치의 개혁이란 비 개혁주의적인 정치적 관행과 그 요소를 개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교회에 나타난 직분의 계급구조, 교회 제도의 계급화는 불식되어야 할 비 개혁주의적인 요소이다. 19세기 영국의 칼빈주의 역사신학자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교회관의 변질은 이미 2세기에서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한 가지가 교회에서의 비 성경적인 고위 성직계급의 출현이라고 말했다.58)
오늘의 한국교회의 계급적 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로마교회와 같이 계급구조화 되기 쉽고, 이미 그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의 지나친 권력행사는 개혁주의 정치원리인 지교회의 동등성과 자율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개혁주의적인 실천은 우리 시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할 수 있는 도서
교회와 신앙고백, 김영재 성광
개혁신학의 현대적 조명, 5집, 한국개혁신학회
개혁신학, 한국교회, 한국신학, 도서출판 대학촌
기독교사상연구, 3집(고신대학교)
박형룡의 신학연구, 장동민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 총신대 출판부, 박용규편
성경과 나의 생애, 박윤선
성경과 신학 1집, 복음주의 신학회
신앙과 신학, 쿰란출판사 이종성외
신앙과 학문, 서철원
신학사상 25집
신학정론, 1989. 12
신학정론, 1991. 7
신학정론, 1992. 3
신학정론, 1995. 11
신학지남 1994. 여름
신학지남, 1996. 겨을
신학지남, 1997, 가을
신학지남, 1999, 여름
신학지평 8집, 안양대학교
한국기독교의 재인식, 김영재, 엠마오
한국기독교와 신앙, 숭실대학교 기독교문화연구소
한국교회사, 김영재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김양선
한국장로교신학사상, (영문, 한역판), 간하배
한국장로교사상사, 박용규
Der Protestanttismus.... 김영재 학위논문
The Christian confrontation ... 이근삼 논문
http://cafe.naver.com/chowk0208/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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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틸의 신학방법론
김광열 교수/강의안
조직신학을 공부해야할 필요성..
공부하는 자세 3가지
1. 성경을 성경연구의 최종적인 권위와 기준으로 삼는 자세
우리가 생각할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볼때, 성경이외의 것들을 가지고 성경의 가르침을 제한시키는 모습들을 발견할 때가 많다. 구원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다른 교리도 그렇지만, 구원론은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이 상당히 많이 영향을 주게되는 교리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이야기할때에도 성령체험이라든가 하는 것이 성령의 가르침을 제한시키거나 왜곡시키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 신학의 인간의 이성의 작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성의 잣대에서 수용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5장에 배드로가 두배에 가득차게 고기를 낚는 모습이 있다. 자유주의자의 해석은 그것이 이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고 했을때에, 고기들이 그물을 내리는 그 자리로, 몰려올 것을 미리 아시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단지 예수님이 그것을 아셨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성경의 이적적인 역사를 합리적으로 재해석 하려고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기 보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기준 절대적인 기준 아래에서 재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진 것이 바로 자유주의자들의 자세이며,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코넬리우스 반틸의 신학방법을 잠깐 소개를 하고자 한다.
Cornelius Vantil 의 전제주의 : 성경을 궁극적인 권위로 삼는 신학적으로 체계화 시키고 정리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자세를 생각하면서 신학방법을 정리하면서 그 내용을 보고자 한다.
미국의 개혁주의 변증학자중에 한 사람이다. 전제주의라고 말한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든지, 아니면, 인간의 경험이나, 진리에 의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전제되어야지만, 인간의 경험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수 있다는 것이다. 전제주의를 변증학의 영역에서 구축했다라고 할 수 있다. 변증학이라면 구 프린스턴, 비비 워필드, 핫지, 메이천 교수등.. 이들의 변증학자들의 자세는 무엇인가 하면, 조직신학을 할때에는 성경을 근거로해서 조직신학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학의 경우는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변증학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불신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하고자 할때, 이렇게 말하면, 불신자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은 성경을 믿으니까, 그렇게 믿지만, 나는 성경을 믿지 않으니까, 성경을 빼고 하자고한다. 그런데,
반틸이 보앗을때, 그것은 일관성 있는 변증학자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한다. 변증학의 내용도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그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알미니안 적인 방법으로 기존의 변증학자들이 변증을 하였다. 자기 선배들의 변증학자들의 방법을 알미나안주의로 비판을 한다. 알미니안 주의라고 하면은 칼빈주의와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전적부패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인의 상태에서 어느정도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정도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알미니안 주의이다. 전적부패가 바로 여기에 완전히 반대된느 것이다. 여기에 불신자가 서 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불신자에게 접근한다고 한다면, 신존재증명이 있다.
우주론적 신 존재증명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리한 것이다. 인과율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 하나의 결과가 비가 내리는 것이라면, 그 원인은 더운공기와 찬공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그 배후에 있는 또다른 대기의 이동이라는 원인의 결과일 뿐이다. 그 원은 또한 원인의 결과이다. 원인의 원인을 추적하면 제일 원인이 나온다. 그 제일원인이 하나님이다. 그것이 우주론적 신존재증명이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고, 믿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 왜 문제가 있는가? 이론적인 논리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중생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전제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법역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변증학과 조직신학은 구분되어야 한다라고 보았다. (이전의 변증학자들) 그러나 반틸은 변증학도 조직신학과 마찬가지로 성경적 방법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증학과 조직신학은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틸이 주장하였다. 이것이 전제주의적인 방법이다.
반틸의 전제주의는 변증학의 영역에서만 중요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 신학 이외의 다른 기독교적인 학문속에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J. E. Adams 개혁주의적 상담학자이다. 반틸의 전제주의를 상담학에 적용하려하였다. 기독교 상담학의 모습들을 보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세속적인 상담학의 방법으로 상담을 한다. 그 몸통에 해당하는 상담학의 원리와 방법도 성경에서 와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신학을 할 때에만 성경이 진리이고, 상담학을 할 때에는 성경이 진리가 아닌것처럼 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학과 마찬가지로, 상담을 할 때에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상담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지시적인 방법, 지식적인 방법 : 비지시적인 방법이다라고 해서, 문제있는 사람의 내용을 들어준다. 문제의 성격을 들어주고, 그 문제에 대해서 들어주기만 한다. 비지시적인 방법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잇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진정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아담스는 이런 일관성을 잃어버린 상담학에 대해서 성경적인 기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부부싸움을 하고 온 부부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상담한다.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는 죄에서 출발한다. 시기와 다툼, 이런 것은 다 죄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이다. 가정의 열쇠는 예수님에게서 올 수 있다. 상담학의 영역에도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은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 문제에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원칙적인 해결책과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해답이다.
예배드릴 때에만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세상에서 철학을 할때나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 분의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 학문이 기초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구원론을 공부하면서, 상담학의 영역에까지미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학의 내용들이 정리되기 위한 최종적인 권위로 성경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그것과 상반된다고 할지라도, 첫 번째 가장 큰 원리는 성경을 신학원리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는 조직신학의 많은 교리들이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다. 어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무오교리..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무오교리를 무엇을 근거로 해서 고백을 하는가? 성경이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하는 것을 정리한 것이 성경관이다. 인간론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기독론은 성경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종말론은 성경이 종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성경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해서 아닌 것 같으니까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성경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무오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무오교리를 말하기 위해서 다 항목별로 대조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책과 과학의 모든 교리와 대조해보고, 거기에 맞아떨어지면, 성경이 무오하다고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에 성경무오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을 신학함의 최종적인 권위와 말씀으로 삼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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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마허와 반틸의 해석학
슐라이에르마허는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리워진다. 해석학의 보편적인 범위를 파악했고 그 결과로 얻은 이해에 대한 철학적 이론을 체계화 시켰다. 해석학을 로마교회와 개신교의 정통주의 해석학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해석학의 출발점- 반틸은 절대의 의존 감정으로 본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계에 관한 해석을 관찰이나 어떤 공간-시간 사건의 개념적인 해석이나 또는 사건들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절대의존 감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C. Van Til, The New Hermeneutics, p.59) 따라서 단언을 하는데 있어서 최종 표준은 하나님 아닌 인간이 된다.
해석학- 본문으로 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이해의 학 또는 이해의 예술로(the art of understanding) 정의한다. 여기서 이해는 이해되고 있는 과정이 중요하며, 예술이란 하나의 기술이며, 주관성을 말한다
이해 자체에 해석학의 관심을 두고 이해가 일어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이해가 성취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해란 저자의 정신적 과정의 추체험으로 규정한다. 객관화 된 고정된 표현을 통해 그것이 연원한, 저자의 정신적 삶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본다.
오해를 피하는 기술로서 해석학을 정의하며, 문제의 전적인 발전은 텍스트 보다는 저자에 집중되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문법적 심리적인 규칙을 제한한다.
보편 해석학- 저자와 해석자의 공통적 인간성을 그 전제로 한다. 텍스트에 구별없이 적용되는 이해의 방법이다.
해석학적순환
전체는 부분을 통해 이해되고 부분은 전체를 통해 이해된다는 것. 변증법적 상호 작용에 의해 의미가 전달된다. 단어는 문장에 의해서 해석되고 문장의 의미는 개별적 단어의 의미에 의해 파악된다. ex) 저자의 저서와 저자의 삶의 관계. 저서와 그의 언어의 관계.
Hermeneutics: The Handwritten Manuscripts (Atlanta: Scholars Press, 1997)
*해석 방법이 역사 비평에서 문학 비평으로 전환되었다.
본문의 문법적인 해석(객관적인 언어학 자료들의 사용)과 더불어, 심리학인 해석으로, 저자의 의식을 통찰하는것이다. 본문 자체의 메시지 보다 메센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해된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예술이다.
(Hermeneutics deals only with the art of understanding, not the presentation of that which has been understood. The presentation of what has been understood could be only one special part of the art of speaking and writing, and that part could be done only by relying upon general principles. . . . It is commonly believed that by following general principles one can trust one's common sense. But if that is so, by following special principles, one can trust one's natural instincts. Ibid., p. 96)
해석에 있어서 심리적이며, 예술적인 것을 강조했다. 해석자는 저자가 느낀 것을 느껴서 그 느낌을 적용한다. 결국 그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감정과 맛에 따라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서술했다. 이런 심리학적인 측면은 해석자가 자신 안에서 해석의 재 창조를 요구하기 때문에 전이해라고 부른다. 결국 텍스트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해석자 자신의 이해라는 결론을 만들어 낸다. 좀더 넓게 보면 해석이란 인간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해석학이 삶의 정황만을 포함하지 않고 우리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모습들에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해석학의 공헌
*해석학을 이해의 학, 이해의 기술로 이해함
*저자와 해석자의 공통점이 존재함을 말함으로써 체험적인 면을 강조
*해석자가 자기 자기 자신을 저자의 마음 속에 놓음으로서 저서 구성의 내적 기원을 이해하게 하는 점
*이해의 개념을 삶의 관계로 부터 파악하였다. 이것은 후에 딜타이와 하이데거에 영향을 주엇다.
그의 해석학의 문제점
*성경의 객관적인 이해 보다는 해석자의 주관성이 더욱더 강조
*하나님의 의도 보다는 인간의 내적인 활동과 인간의 체험과 인간의 내적인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쓴다.
*성경의 참된의미로서 성령의 의도 결국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할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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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학(The Defence of the Faith by Cornelius Van Til)
1. 들어가는 말
코넬리우스 반틸의 저서 「변증학」이 주장하는 요체는 전제와 일관성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인식과 윤리․의식에는 반드시 분명한 전제가 따라야 하며 그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는 절대적 인격체이며 무한한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되거나 가감없이 그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상명령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승천하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성경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그것이 불신자들에게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과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인 패러다임이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등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가지고 갈 때, 마음대로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거나 가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협되고 가감된 변증은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 위에 그리스도의 지혜와 공로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것은 참된 구원의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강조한다.
저자인 코넬리우스 반틸은 개혁주의 변증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한때 모교인 프린스턴신학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그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이 변질된 것 때문에 수락하지 않고, 개혁신학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변증학 교수로서 일생을 개혁신학 변증학을 수립하고 가르쳤다.
본서는 ‘전제와 일관성’의 변증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두 용어로써 성경주의적 세계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인식의 결과 후속되는 윤리와 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존재와 인식, 그리고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해답을 잘 제시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본서를 읽으면서 느낀 점을 존재론, 인식론, 실천윤리론, 접점과 전제 그리고 일관성 등의 차원에서 서술․평가하고자 한다.
2. 변증의 내용과 방법론 - 전제와 일관성
변증학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타협이나 가감 없이 효과적으로 세상의 문화 속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학문 분야이다. 이에 대해 본서는 먼저 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것에서, 변증의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 우리의 존재와 인식체계는 바른 신학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른 신학은 건축물의 기초와 같다. 신학이 바르게 세워져 있으면, 아무리 이단이나 그 아류의 사탄이 불어 닥쳐도 흔들림이 없다.
그 신학의 해답은 물론 성경이다. 우리가 증거하는 그리스도가 바른 신학에 입각해서 증거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제일주의에 입각한 개혁신학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 신학을 강조한 것은, 신학이 본서의 강조점인 전제와 일관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식과 사고의 출발점은 절대적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존재나 지식․인식 자체가 어떤 의미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모든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다. 하나님은 자족하시고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어떠한 것도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참된 지식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은 결코 중립적(neutral)일 수 없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식은 자기 분석적(analytical)이며 자기해석적이나, 인간의 지식과 인식은 하나님께 의존적이며 유추적(analogical)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식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한에서, 수용적이고 재구성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지, 이성에 근거한 창조적이어서는(creatively constructive)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와 어떻게 접촉할 것인가? 이 때 발생하는 문제가 접점(point of contact, 공통적 출발점)의 문제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과 불신자들 사이에 접점은 없으며, 그 접점을 찾으려 하는 순간 진리의 체계는 무너진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그 동안 그들이 쌓아온 이성이나 경험 등 기존의 세계관에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덧입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존가치와 세계관을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기초를 쌓는 일이다. 이것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과 타협하거나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 덧입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일관성의 문제이다. 그 일관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자연을 통해 오지도 않고, 로마 카톨릭교회의 가르침대로 교회나 신부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오늘날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인간의 이성이 개입하여 계시되지도 않으며, 오직 우리의 구원은 성령과 성경 말씀의 진리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왜 개혁주의를 고수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원에는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들처럼, 인간의 이성이 작용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제한적 선택으로 인한 전적인 은혜의 결과라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가 다른 복음주의자나 로마 카톨릭 등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일관성의 중심에는 바로 이러한 개혁신학이 자리를 잡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을 접촉할 때, 개혁주의적 하나님을 전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접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인간의 상식이나 이성, 경험을 접점으로 삼게 되면, 참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핫지나 벤틸은 이성을 면도칼이라고 말했다. 이성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그 칼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성은 중생한 사람의 손에 의해 사용될 때 바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전제로 귀결된다. 우리의 변증은 성경 안에서 절대적인 권위로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을 처음부터 전제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을 전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제는 주관적인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 이를테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등으로 불신자들과 접점을 이루려 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 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인식과 윤리, 행동은 물론 그리스도를 변증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고 그 전제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일관성은 언제나 개혁교회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말미에 있는 내용인 ‘일반은총과 스콜라주의’, ‘암스테르담과 舊프린스턴’ 등에 대한 서술도,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되고 있음을, 독자들은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3.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존재하고 모든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해야 한다. 또한 그 전제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 일관성은 성경에 입각한 개혁주의의 신학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바른 신학이 필요하다. 그 신학은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 성경에 입각하지 않은 신학은 바른 진리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서는 일관되게 전제와 일관성이라는 주제로서 책의 전체적 흐름과 강조를 잘 이끌어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우리 지식의 한계 그리고 인식의 방법 등이 왜 개혁적이며 성경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본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방법에 관하여, 존재론에서 인식론을 거쳐 불신자와 접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접점과 충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전제와 일관성의 유지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횡행하고 심지어 종교다원주의까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대에, 이 책이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바른 신학을 확립하는데 필독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자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읽히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한국땅에 바른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이 가장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본서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읽기에는 철학적인 배경이나 용어 등의 어려운 점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또한 일반 성도들이 읽기에는 너무 많은 학자들의 견해 등이 인용되어서, 처음 접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는 한다.
우리가 증거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어야 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증거는 성경 안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본 서평자는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노선만이 가장 성경에 입각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칼빈의 다음 글을 인용․강조함으로써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성경에 금하고 있는 법만큼이나 금지의 법이다. 성경이 가는 곳에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 <끝>.
http://cafe.daum.net/iamwithyou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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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세속화와 성화의 은총
-반틸로 인하여 바르트가 자유주의자로 평가됨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화란의 박사학위 수여제도는 유럽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어서 매우 특이하다. 논문을 완성하여 내부심사에 통과되면 출판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널리 보내져 폭넓은 평가를 접수하며, 반대자(opponent) 5명을 선정하여 공개적인 방어식에서 비판적인 질문을 퍼붙도록 하며 이에 대해 성공적인 학문적 방어를 성취하였다고 판단되면 학위를 수여한다.
나는 지난 1994년말 화란 자유대학교에 [세속화와 성화: 칼 바르트의 성화론 연구와 한국교회에의 상황적 적용(Secularization and Sanctification: A Study of Karl Barth's Doctrine of Sanctification and Its Contextual Application to the Korean Church)] 제하의 논문을 제출하여 통과되었으며, 자유대학교 출판사에서 1995년초 출판되었고, 동년 2월 20일 벨기에 루방대학교의 브링크만(M. E. Brinkman)교수, 레이든대학교의 덴 둘크(M. den Dulk)교수, 자유대학교의 베셀스(A. Wessels)교수, 몬스마(J. A. Montsma)박사, 그리고 환 더 코이(C. van der Kooi)박사가 반대자로 나선 방어식을 통과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속화의 신학적 극복
1979년 미국 칼빈신학교로 유학한 나는 M.Div.과정을 마치면서 조직신학을 전공으로 선택함으로서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전통을 계승하는 화란계 교의신학파의 제자가 되었다. 후크마(A. A. Hoekema), 클로스터(F. H. Klooster), 플랜팅가(C. Plantinga, Jr.)교수로 이어지는 칼빈의 조직신학 전통은 정통적인 보수신앙을 견지하면서도 근본주의가 아닌 화란 개혁주의의 폭넓고 균형있는 신학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6년간의 신학수업과 3년간의 이민목회를 마치고 1988년 귀국하였을 때, 한국은 매우 들떠 있었다. 교회의 급성장은 경제적 급성장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민주화와 올림픽열풍으로 자신감과 낙관론이 풍미하고 있었다. 그후 3년동안 신학강의와 목회를 하면서, 나는 한국교회의 세속화라는 심각한 문제를 절감하게 되었고, 이 주제와 그 극복방안이 나의 중심적인 신학적 관심으로 부각되어 마음을 짓누르는 고민거리가 되었다.
1991년 다시 유학의 길을 떠난 나는 화란으로 가는 비행기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한국교회를 그토록 축복하셨는데 지금 세속화라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 종에게 신학적인 해결방안을 가르쳐 주셔서 조국교회가 계속 하나님의 나라에 공헌하게 하소서."
화란에 도착한 나는 대학시절부터 동경해오던 자유대학교를 대하자 감격스러웠다. 대학은사인 손봉호교수의 출신교로서 종종 말씀해 주셨고, 어린 마음을 가득 채웠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가 그 기독교철학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강의했던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본산이며, 칼빈신학교의 많은 은사들이 그들의 신학을 형성했던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나의 지도교수 아드리아누스 환 에그몬드(Adrianus van Egmond)박사는 풍부한 목회경험과 연구경력을 가진 자상하고 친절한 분으로서, 카이테르트(H. M. Kuitert)교수로 인한 좌경화의 오명을 씻고 다시 아브라함 카이퍼로 시작하여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와 베르카우어(G. C. Berkouwer)교수로 이어지는 자유대학교의 정통적인 개혁주의 조직신학을 회복시킬 사명을 띠고 조직신학교수로 취임하였다.
그와 함께 논문의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세속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20세기에 일어난 유럽교회의 급격한 감소로 인하여 신학과 사회학, 역사학 등에서 이 주제가 폭넓고 심도깊게 다루어졌음을 발견하였다. 수많은 관계문헌들을 읽으면서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세속화 개념과 유럽에서 통용되는 세속화 개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진행단계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며 본질상 동일함을 확인하였고, 연구할수록 세속화 초기단계에 있는 한국교회에 그들의 분석과 성찰이 그 극복을 위해 매우 유용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성화와 바르트
이러한 세속화의 연구과정에서 논문작성에 결정적인 두가지 방향이 수립되었다. 하나는 세속화의 반대개념이 성화이며, 따라서 세속화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방안은 성화의 은총과 능력이라는 발견이었다.
90년대의 화란신학계는 60년대에 일어난 세속화신학에 영향을 받아 세속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세속화에 대한 긍정적 수용이 결국 유럽교회의 감소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허탈감속에서 신학적 반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증거해주었고 나와 거의 비슷하게 네이메이건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로버트 환 더 즈반(Robert van der Zwan)과 1988년 한국에 나와 1년동안 체류하며 한국교회를 연구하고 귀국하여 출판한 보고서에서 한국교회가 곧 직면할 최대의 문제는 세속화라고 증언했던 레오 오스터롬(Leo Oosterom)과의 만남은 나의 판단을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50년대말에 세속화에 대해 비판적인 논문을 냵다가 오랫동안 신학계에서 소외당했던 리트휄드(Boudewijn Rietveld)박사는 벌써 노경이었는데, 나에게 그동안의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자신의 입장이 수용되기 시작한다고 회고하였다.
나는 그의 논문을 중심으로 성경적인 세속화의 개념을 정의하였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세속화의 반대과정(counter-process)이 다시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화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속화에 대한 부정적 비판과 함께 긍정적인 대안으로서 성화론의 연구가 나의 과제로 설정되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칼 바르트(Karl Barth)를 연구대상으로 정한 것이다. 세속화를 긍정적으로 다룬 세속화신학자는 상당수 있었으나, 이를 비판적으로 그리고 성화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다룬 신학자는 많지 않았다. 바르트는 이 면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그는 칭의론보다 성화론을 강조하는 칼빈의 입장을 기초로하여 유럽교회의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매우 복음적이고 균형있는 성화론을 형성하였다. 더욱이 나를 지도하는 환 에그몬드교수는 화란, 독일,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바르트학회의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실로 칼 바르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연구해보고 싶은 신학자임에 틀림없었으나, 한국 보수신학자 어느 누구도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미개척분야로서 위험부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실로 총신대에서 신학을 처음 접했을 때 바르트는 금단의 영역이었고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나 칼빈신학교에서 바르트는 보다 균형있게 언급되었으며, 특히 바르트 아래서 친히 수학했던 클로스터교수는 그의 비판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의 무조건적 바르트비판에 제동을 걸었다. 그와 한 학기동안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I/2를 읽으면서 개인지도를 받는 동안 나의 바르트에 대한 편견은 점차 제거되고 그의 신학이 주는 깊은 통찰력과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적 열정에 감동되었다.
그후 목회하는 동안에 매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는 [교회교의학]의 인덱스를 사용하여 관련부분을 참조함으로서 통찰력을 심화시키는 단계를 포함하였으며, 이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씀에 대한 사색과 묵상이 부족한 현대에 그의 신학은 말씀의 깊이를 깨닫게 해 주었으며, 주위에 있는 친구목사들에게 이를 권했고 한결같이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또한가지 바르트를 연구하고저 했던 이유는 바르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분단을 청산하는데 결정적인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진보계열의 조직신학에서는 바르트가 중심인 반면 보수계열에서는 바르트가 전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신학적 대화와 화해를 이룰 수 없었다.
바르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대가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러 가지 동기는 바르트의 성화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화란과 독일, 그리고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바르트에 대한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하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였다.
논문의 구성
본 논문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성화의 컨텍스트로서의 세속화"에서는 먼저 현대교회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여 서구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이해의 변화과정을 설명한 후에 세속화의 기독교적 정의를 제시하고 비서구교회의 세속화가 가지는 특성을 분석한다. 현대의 세속화는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세속화로 나누어 설명되며, 이어 세속화와 성화의 관계가 설정되는데, 세속화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온 본회퍼의 종교개념을 분석하여 세속화를 반대한 새로운 본회퍼이해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연구한 4명의 학자들(H. W. Tribble, J. C. Lombard, O. G. Otterness, M. den Dulk)을 분석하고 장단점을 비교한다. 나의 방법론은 컨텍스트적 접근방식(contextual approach)으로서 모든 신학은 그 역사적 및 신학적 컨텍스트를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따라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2장 "바르트의 이해"는 이 방법론을 잘 반영하고 있다. 1952년에 발표된 [교회교의학] IV/2권이 성화론의 주요 본문이지만, 그때까지 바르트신학의 역사적 발전을 살펴봄으로서 그의 성화론이 형성된 과정과 그 역사적 및 신학적 컨텍스트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먼저 [교회교의학] 이전의 7저작을 분석하는데, 이 기간은 자유주의자 바르트, 사회주의자 바르트, 신학적 회심기의 바르트, 변증법적 바르트, 기독론적 전환기의 바르트, 반나치운동의 바르트등 급격한 변화를 반영하면서, 그에 따른 성화론의 차이와 발전과정을 살펴본다. 다음으로는 [교회교의학] I권부터 III권까지의 관련부분들을 분석하여, 성화론을 중심으로 바르트신학의 구조를 설명한다. 제3장 "바르트의 성화론"은 [교회교의학] 제4권을 분석하여 바르트의 성화론을 객관적으로 정리한다.
서론에서는 그의 구원론에 논의되는 소명과 칭의와 성화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그 기독론적 기초와 죄론적 전제를 분석한다. 바르트 성화론의 구조는 성화의 목적론적 원형(teleological cycle)으로서, 그 3대 구성요소인 그리스도의 성화, 언약공동체의 성화, 그리고 세계의 성화 개념을 설명한다. 다음에 성화의 4형태인 제자도에의 부르심, 회심으로의 각성, 선행의 찬양, 십자가의 위엄을 상설하고, 성화의 결과로서 교회의 성화와 개인의 성화를 다루는데, 특히 교회의 세속화는 어떻게 일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성화의 결과로 극복되는가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를 소개한다.
이 중심적인 장은 현대교회의 5대 성화론이 잘 정리된 [성화에 대한 다섯가지 견해(Five Views on Sanctification)]라는 책을 분석하여 복음적인 성화론의 10가지 공통점을 유출하고 바르트의 성화론과 비교하여 서로 조화된다는 결론과 함께 끝맺는다. 제4장 "한국교회의 컨텍스트적 분석"에서는 한국교회의 성화론을 전통종교들의 전이해와 연관하여 분석하고, 한국교회의 정치적 세속화와 도덕적 세속화를 비판한다.
제5장 "칼 바르트와 한국교회"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바르트가 한국교회에서 오해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의 성화론이 한국교회에 올바로 적용될 때 얻게 될 7가지 유익을 열거한 다음, 한국교회가 성화의 복음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세속화를 극복하고 제3천년대에도 힘차게 하나님의 나라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모든 논문을 마감한다.
한국신학과 교회에의 바램
나는 단순히 한 분야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서 이 논문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조그만 신학적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우리는 유럽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그들에게서 뼈아픈 교훈을 배워야 한다. 비록 바르트가 오래 전부터 유럽문화에서 시작된 거대한 세속화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지만, 19세기의 구자유주의를 무너뜨리고 교회의 세속화를 저항하는데 앞장섰으며, 그 결과 20세기 후반의 복음주의 부흥에 공헌했다고 판단된다. 그는 신학적 이론뿐 아니라 삶의 과정을 통하여 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고저 노력하였기 때문에, 세속화에 직면한 한국교회가 그에게서 배울 바가 많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바르트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이는 그의 신학을 역사적 및 신학적 컨택스트에서 분리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에 그 책임이 있다. 나는 바르트의 복음주의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정통적인 신앙을 전혀 양보함이 없이도 바르트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더 풍요하게 만든다고 확신한다.
20년대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근거로 그를 최악의 자유주의자로 정죄한 반틸(C. Van Til)교수의 영향으로 한국 보수신학은 바르트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신학적 빈곤과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배타적 고립주의와 신학적 분리주의에 희생되고 있다. 나는 부지도교수였던 브링크만박사의 신칼빈주의와 바르트의 관계를 조명한 저서들을 읽고서야, 왜 그토록 반틸이 바르트를 비판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하루속히 진보와 보수의 신학적 분단과 대립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소하기 바라며, 나의 연구가 이러한 신학적 화해와 교회의 일치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목회와 신학, 1997년 3월호
http://www.jsrhee.com/WR/dis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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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
박아론 (총신대교수)
目 次
第 三 部 現代神學의 危機와 그 近況
Ⅰ. 현대신학의 집안싸움
1. 序論 .............................................. 3
2. 本論 .............................................. 4
1) 불트만 ........................................... 4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 6
3) 집안싸움 .........................................10
3. 結論 ..............................................12
Ⅱ. 聖經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13
2. 차원 신학자들 .....................................14
1) 바르트 ...........................................14
2) 부른너 ...........................................15
3) 틸리히 ...........................................15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15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三대 新神學과 總神人의 결의 ...17
Ⅳ. 미국신학의 근황
1. 序論 ..............................................21
2. 舊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21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23
4. 死神神學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24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24
6. 結論 ..............................................24
Ⅴ. 유럽신학의 근황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7
2. 칼발트의 실각 .....................................28
3. 불트만의 붕괴 .....................................28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28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29
6. 신학적 축의 변동 ..................................30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33
* 總結論 - 終末이 가까운 現代神學 ....................37
第 三 部 現代神學의 危機와 그 近況
Ⅰ. 현대신학의 집안싸움
1. 序論
지난 10년간 개신교의 신학을 주름잡던 바의 불트만(Rodolf Bultmann)
의 이론은 이제 급속도로 쇠퇴되어 가고 있다. 금일 그의 추종자라고 스
스로 생각하는 자들도 그의 생각과 완전히는 일치하지 않으며, 이런 저
런 면들을 들어 그의 신학에 반항을 일으키고 있다.
불트만 신학의 쇠퇴와 몰락을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 들일 때, 프로테
스탄트(Protestant) 신학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계시의 역사
성에 관한 특별한 강조와 더불어 불트만 사상의 나머지에 대한 新神學의
건설을 위해 경쟁하는 젊은 신학자들의 무리의 손아귀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젊은
신학자 가운데서도 마인즈(Mainz)대학교의 판넨 베르그 교수와 튀빙겐
대학교의 몰트만(Jurgen Moltmann)교수는 가장 흥미를 돋군다. 왜냐하
면, 그들은 불트만(R,Bultmann)에 있어서와 같은 주관적이며 自意的 神
學으로부터 根本的으로 離脫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미래
와, 미래와 결부된 기독교인의 소망이라는 말로서 기독교 메시지에 대하
여 매혹적인 再解釋을 함으로써 그들은 불트만과 訣別하는 듯이 보인다.
오늘날 그들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혹은 역사로서
의 신학(theology as history)혹은 [그리스도 부활의 신학]이라 불리우
며 신학 연구가들에 있어서 토론의 초점이 된 것이다.
2. 本論
1) 불트만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할 것 같으면 신약에 기록된 바의 기독
교의 소망은 유대적이며 헬라적인 양 根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망에는 먼저 유대적인 근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바의 심판자
이며구세주로서의 人子의 오심에 대한 구약적인 기대에로 소급하여 생각
할 수 있다. 하늘로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말하는 바의 신
약은 유대인 사상에 있어서의 [인자의 오심](Coming of the Son of Man)
과 비길 만한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所望은 역시 헬라적인
사상의 근원을 갖는다. 헬라인들은 경건한 자의 영혼은 죽은 후에 하늘
로 올리워 간다고 하는 기대에 머리가 저려 있다. 이 헬라인적이며 그노
시스주의적 소망의 개념은 이 현세의 완전한 파괴와 아울러 인생들의 영
혼의 편력(방황)을 광명의 세계로 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한다. 이와같은 헬라적인 소망의 개념은 신약의 종말론적 메시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불트만은 소망의 양 개념-유대적이며 헬
라적인 개념-은 본질상 신화론적이라고 지적함에 이른다.
불트만(R.Bultmann)에 의하면 이제 신약에 있어서의 소망의 말씀은 본
질상 神話論的인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인에게 그것(신화론적인 것)의
재해석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受納될 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신화론적
사유(thinking) 방식은 현대인에게는 점차로 폐물화되어 가고 있다. 왜
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결정지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대
인이 수납할 수 있도록 신약의 소망의 메시지를 재해석할 수 있겠는가?
여기 불트만은 비신화화(demythologyzierung)로서 답변한다. 그에 의
할 것 같으면 신약의 神話論的 言語로서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바의 기
독교 메시지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의 비신화화는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
에서는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은 약간씩
예수의 종말론적 말씀을 비신화화하였었다.
특히 그것을 靈的인(speirtualize)것으로 만든 것은 요한이며 현재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언되는 바의 구원의 계기가 되는 것이라
고 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오심(Parousia)이 더
디므로 그것을 領海(spiritualize)함으로써 자체 내의 非神話化를 꾀했
던 것이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에 불트만(R.Bultmann)은 신약의 종말론
을 비신화화 함으로써 현저하게 얻은 바의 그의 자신의 기독교의 소망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소망은, 기독교에
있어서 死後에서가 아니라 여기(here), 지금(now)에 있어서 소망 중에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인은 미래를 위하여 기약된 존재이며,
동시에 현재에 결단을 내리며 책임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미래를 위한
책임을 지는 자이다. 그는 사후의 삶에 대한 환상을 더 갖지 않으며, 미
래에 진정한 실존-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에 속하는-에 다다를 수 있을 것
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이 말하
는 미래란 것은 역사적인 미래를 말함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으로 파
악되어야 한다. 그는 생각하기를 어떤 심오한 방식에 의해서든 미래를
현재로부터 떼어 놓는다는 것은 언제나 오류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의
의미는 현재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람이 현재의 책임 있는 존재란 것을
더 많이 알수록 그는 더 명백하게 역사의 의미를 알게 된다. 사람은 현
재 외에 과거와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불트만적인 감각으로 이해된 기독교의 소망은 [영원한 현재]에 뿌
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한 그 소망은 인간의 과거와 미래 양자에 걸쳐
개인적인 사고방식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제 만약에 불트만이 말한 모든 것이 옳다고 한다면 인간의 종말론적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 기독교인에게 믿고 소망할만한 무엇이 남겠느냐고
질문해도 좋을 것이다. 거의 남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그 대답
이다. 불트만의 기독교 소망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역사적 이해의 완전한
결핍으로 인하여 그것은 인간의 주관주의적 密室의 獨白으로 둔갑을 한
다. 불트만에 있어서 기독교의 소망은 하나님의 地上統治의 역사적 실현
을 가리킴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역사적 미래에 있어서 사람에게 약속하
신 바를 성취하심을 가리킴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일을
알고 있음을 뜻하는 데 불과하다. 즉, 성도는 여기, 지금(here and now)
하나님 앞에 결단을 내림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생
명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과 사람의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은혜에 스
스로를 대비하는 것이다.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앞서 불트만(R. Bultmann)은 우리를 실망시켰다. 그가 역사의 참뜻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에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제시하는 바는 기독교 소
망의 實存主義的 變形物이며, 그것은 正히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메시지
의 改惡으로 고려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판넨베르그와 몰트만은 오늘날의 후불트만(post Bultmanian) 신학자들
중에 손꼽히며, 그토록 장기간 거부되어 온 [역사적 예수]의 연구를 부
활시킴으로써 현대신학을 위한 역사의 인식을 소생시킨 자들이었다. 그
리고 그들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이라 불리운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며 기독교신학을 신약성서
의 종말론적 입장에 서서 전폭적으로 재고하기를 제창하기 때문이다.
판텐베르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원래 역사적 미래에 대한 기
대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소망이 기대하는 바의 역사
적 미래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에게 주신 바의 약속의
성취의 결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기독교에 의하여 이
와 같이 기대된 바의 역사적 미래는 성질상 종말론적인 것이다. 또 그의
역사적인 신실성과 불변성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미래를 [실현]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소망은 하나님의 역
사적 신실성 불변성의 입증으로 종말론적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기독교
인이 기대하는 것을 뜻한다.
판넨베르그(W. Pannenberg)가 하나님을 말할 때 미래의 능력(die
Macht der Zukunft)으로서 말하고 하나님의 진수를 미래양식(future
mode)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판넨베르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미래발원체(future oriented being)이며,
만약 하나님을 배우고자 할진대 신학은 미래발원신학(future oriented
theolog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은 사람이 갖는 모든 신개념에 앞서 계시
며 우월하시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그의 미래성에 비추어서 인간의 개념
구성(선험적)과 도식화(schematization)로 부터 벗어난다.
사람은 자유이기 때문에 인격체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미래를 소유하기 때문에만 자유이다.
그의 미래관이 본질상 역사적인 것인 만큼 변증법적이라는 것이 즉시
밝혀진다. 판넨베르그는 역사를 不可分離的 전체로 생각하여 신성한 역
사와 세속적 역사로 구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역시 바르트적인 역
사의 2형(two-types)적인 견해를 거부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현실
자체가 '종말로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
래는 그 끝이 신약성서가 말하는 바의 종말론적 메시지로서 나타날 역사
적 미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실망스럽게도 판넨베르그의 미래와 역사에 대한 사상은
辨證法的 思想型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미래는
이곳에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그것은 현재
위에 그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
이 그 임박성을 선포한 것과 같이 아직 오지를 아니했고,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 속에 이미 나타났다고 말한다.
판넨베르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엄격히 역사적 미래를 하지
않고, 현재를 포함한 모든 제각기의 시대에 살며 소망하는 사람들에 의
하여 그 도래가 느꺼지는 바 미래 안에 성취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
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소망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확신
속에서 수난 당하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를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소망이란 것은 신앙이 하나님에 의하여 참으로 약속된 바를 믿
는 그러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expectation)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부활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독교인의 소망은 보편적인 예수 그리
스도의 미래와 관련하여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다. 볼트만이 소
망과 약속이란 말로써 강조하는 바의 수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미
래는 역사적 미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자, 볼트만(J.Moltmann)에
의하면 바르트(K.Barth)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는 종말(eschaton)은
모든 시대에게 超絶的 의미를 부여하며, 또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동등하게 가깝고 동등하게 먼] 초절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몰트만(R.Bultmann)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契機
(eschatological moment)를 논하며 여기 지금(here and now)에 있어서의
인간의 결정과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초대 기독
교의 종말론적 공헌을 발전시키기보다는 그것을 模糊한 것으로 만든 초
절적 종말론의 희생자들이다.
성경에서 입증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 계시이다. 그것을 [영원한
현재의 나타나심](epiphany)으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헬라적 사상과 탐구
의 방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판넨베르그
(Pannenberg)의 경우와 같이 위장 역사관(pseudohistorical viewpoint)
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실망한다. 몰트만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
도의 미래를 의미하는 바는 역사상 미래(historical future)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적 미래](historic future)이다. 그것은 즉 하나님
의 약속을 통하여 마주칠 수 있는 미래를 뜻하고, 그 미래에 대한 지식
은 거기에 닿을 수 없는 일시적인 것이며, 단편적인 것이며, 公開的인
것이며, 曲解된 때문에 [소망의 지식]인 것이다.
몰트만(J.Moltmann)이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서 역사의
개념은 [역사주의]와 실존주의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歷史
主義와 實存主義를 거부한 후에 몰트만은 그의 콧김으로 날려보낸 두 선
택물의 어느 틈에 자신의 자리를 정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몰트만의 역
사개념은 판넨베르그가 파악하고 있는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라고 斷言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J.Moltmann)에 의하여 기독교의 소망은 파루시아(Parousia)혹
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는
가버린 누군가가 실제로 돌아옴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오히려 임
박한 도래(eine bevorstehende Ankunft)나, 혹은 더 정확히는 도래하고
있는 미래(eine ankunftige Zukunft)이다. 판넨베르그(W,Pannenberg)처
럼 몰트만(Moltmann)은 그리스도의 [Parousia]를 辨證法的 方式으로 파
악하려고 하고 있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
의 재림(Die Parusi Christi)은 평범한 뜻의 역사상의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미래의 역사속에 위치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고 있는 미래](anarriving future)이며 현재에 사는 인생살이
를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다. 더욱이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지만 , 그것은 현실에 있어서 우리의 나날의 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와 아주 상이한 무엇이다.
3) 집안 싸움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Pannenberg, and J.Moltmann)을 세운 [소망의
신학]은 [세속적인 신학이 죽였고 혹은 회피한 하나님에 관하여 논의를
재개시킨 그 능력]은 칭찬 받을만 하다. 소위 신학자들이 하나님 없는
신학 혹은 적어도 하나님을 망각한 신학을 창조하기에 바쁜 즈음에 그것
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 후로부터 [소망의 신학]은 하나님의 죽음
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미래의 하나님]이란 용어로서 신학
을 구상하는 일에 관심을 모으게 함으로써 다소간 현대신학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더욱이 실존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과소 평가한 불트만(R.Bultmann)과 그의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함으로
써 소망의 신학자들은 우리들에게 기독교의 신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한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기 때문
에 세상의 소망이라고 하는 막중한 사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와같은 신학이 세속신학의 물결을 막도록 현대신학의 단상에 나타나
지 아니 하였던들 거의 모든 현대 신학자들이 그자체로는 불가능한 바의
신이 없는 신학적 사고의 과제 앞에 무릎을 꿇고 지냈을 것이다. 이리하
여 [소망의 신학]은 현대 신학자들을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해
방시켰으며, 아마 이런 이유로서 우리들은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W.Pannenberg, and J.Moltmann) 양인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
나 그들이 뜻하는 미래의 하나님은 역사상의 하나님이 아니며, 변증법적
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특히 기독교종말론에 관해서 비성서적 처리방법
을 취함으로서 불트만에 못지 않게 잘못되었다.
판넨베르그와 몰트만(W.Pannenberg and J.Moltmann)이 아는 것과 같은
기독교인의 소망은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의 육체적 재림이라는 소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
스도의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열망하는 성도를 가리키는 동시
에 그리스도의 도래는 변증법상으로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의 소망은 부활 사건이란 과거를 가
리키는 것(이것은 2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문 밖의 십자가에서 죽은[나사
렛 예수]라 불리우는 분이 다시 생명으로 환원함을 뜻한다)도 아니며,
역사의 미래에 무덤에서 일어났으며 지금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의 소망은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미래의 예수 그리
스도를 향하여 가지는 유망한 기대를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미래는
시간적으로 국한시킬 수 없고, 그것은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더욱이
그것은 여태까지 미지인 바의 새로운 가능성 안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K.Barth)가 객관화의 요소를 자신의 신학에 도입한 것과 병행
하여 불트만 학도들과 그 선배들은 초대교회가 고백한 그리스도와 역사
의 예수를 여러가지로 더 의미심장하게 결합하는 일에 노력하였었다. 볼
트만과 소망의 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바는 한갓 아늑하고 작은
집안 싸움에 불과한 것이다.
3. 結論
오늘날 역사가와 사회학자들이 우리들에게 지적해 주듯이, 현대인은
[실존주의 후 시대]에 살며 또 그들은 그와 같이 오랫동안 그들의 사상
을 지배하였던 실존주의적 죄의식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들은 [내일]에 속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기 위하여 소망중에
그들의 팔을 벌린다. 그러므로 [소망의 신학]이 어디서나 모든 사람의
상상의 날개를 사로잡는 것은 오직 자연스러울 따름인 것이다.
[소망의 신학]은 제 때를 만나서 소망의 메시지를 대망하는 자들을 위
하여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것은 제
구실을 십분 발휘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소망의 신
학]은 주어진 여건 위에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 세대에게
성서적 계시에 입각한 단순하며 똑바른 소망의 메시지를 제공해주는 대
신에 [소망의 신학]은 인간자율주의의 산물인 순수합리주의와 순수불합
리주의와의 혼합물인 소망의 변증법적 사상을 제공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유행과 최신식의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샤
르땅, 블로흐, 그리고 콜링우드(Teilhard de Chardin, Ernst Bloch and
R.G.Callingwood)등 제씨의 글을 읽는 것이 신학적으로 유행이며 또 최
신식이랄 수가 있다. 그러나 각 시대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그들의 신학을 최신식 유행물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을 휘황하게
현혹시키는 일이 아닌것은 명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일하신
창조주요, 통치자요, 심판자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진리로써 새로워
지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는 소망의 신학자들이 신학자의 참다운 임무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용감하게 신성경해석학 써클로 부터 탈출하며 세상의 소망으로서의 역사
상의 그리스도를(성경의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 역사철학을 계속해서 가
르치지 말고)사람들에게 선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와 몰
트만(W. Pannenberg and J. Moltmann) 양인은 마침내 신약성경의 종말론
을 특징짓는 역사적 사고방식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그들이 진정한 [소
망의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Ⅱ. 聖經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불트만은 [성경을 비신화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서 오늘날 그 이
름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불트만에 의하면 성경은 비과학적 언어를
사용할 뿐 아니라 과학 이전시대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들이 사는 세상위에는 하늘이 있는 데 하늘에는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주
하고 있으며 인간들이 사는 세상 아래에는 지옥이 있는 데 사탄과 마귀
들로 만원이 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성경이 갖고 있는 삼층 세계
관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층 세계관은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에게 수락될 수 없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과학 이전시대의 세계관을 내버리고 비과학적 말들을 가
려낸 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파악하는 일이 우리의 급선무라고
불트만은 말한다.
2. 차원 신학자들
1) 칼 바르트
칼.바르트(Karl Barth)가 불트만(R.Bultmann)의 신학을 하나의 철학적
이론이라고 비평했다 불트만은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하지만 불트만
의 신학에는 하나의 신화가 있는데 그것은 [과학에 의하여 증명되는 사
실만이 사실이라는 주장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불트만의 [비신화
화] 시도를 비평하는 바르트는 보수 기독교인들과 같이 성경의 무오성
을 믿는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바르트는 [역사과학에 의하여
증명되는 사실들만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두개의 차원]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역사(Geschichte)이며 역사(Historie)
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의 직접적 성격을 부인한다. 하나
님의 계시는 역사의 차원속에 있는 어떤 것과도 동일시 될수 없다. 역사
의 차원 속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잘못과 모순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성경도 역시 역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
의 완전한 계시를 찾아 볼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 잘못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성경의 책들 속
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해부대 위에 놓고 과학의 칼로 성경을 해부하고 있는 불트만을
바르트는 그의 차원신학을 통해서 후원하고 있는 것이된다.
2) 부른너
바르트와 함께 新正統主義 神學의 支柱로 알려진 부른너는 근본주의자
들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은 성경
의 문자들을 신격화한다고 주장한다.
3) 틸리히
틸리히는 또 한편 역사과학에 의한 성경비평이 기독교인의 믿음에 영
향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을 함으로써 바르트와 부른너와 같이 성경의 역
사적 비평을 환영했다. 그는 [인간 예수]와 [새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전자를 역사적 조사의 대상으로 삼고 후자를 기독교인의 믿음
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부룬너와 같이 차원 신학을 말하
는 신학자라고 볼 수 있으며, 바르트와 부른너(K.Barth and E.Brunner)
와 같이 그의 차원신학을 통하여 불트만(R.Bultmann)의 [비신화화]시도
를 후원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성경의 유오성과 불완전성을 지지하는 이론적 근거로서 그들의 [두 개
의 차원]의 개념을 제시한다.
바르트(K.Barth)가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말하는 참역사
(Geschichte)와 역사(Historie)의 구별이나, 부른너(E.Brunner)가 말하
는 [나와 그것]의 차원 [나와 너]의 차원 구별은 그들의 성경관 뿐 아니
라 신학 전체를 지배하는 [두 개의 차원]의 개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도 신앙고백문을 작성하기
위한 특별위원회의 일원인 헨드리(G.S.Hendry)박사는 그의 저서 오늘을
위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에
서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지리학적 지식
이나 수학적 지식과 다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의 영감은 하나의 이론이나 학설
이 아니다. 이는 신앙인 것이다. 신앙은 학설을 그 기초로 삼을 수 없
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 것이다]라
고 하였다. 바르트와 부른너의 차원신학을 따르는 헨드리 박사는 물질의
세계, 자연과학의 세계를 [나와 그것]의 차원 속에 두고 인간이 자유하
는 세계, 인격적 세계를 [나와 너]의 차원 속에 둔다. 그런데 헨드리 박
사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만남
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學理的 지식을 가르쳐주지 않고 인격
적 관계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實踐的 지식을 가르쳐 준다.
반틸(C.Van Til)은 헨드리의 성경관은 역사적인 기독교 성경관과 상치
되는 칸트(I.Kant)의 이원론적 철학에 입각한 주관적이며 실존 주의적인
성경관이라고 평하고 있다. 반틸의 이와 같은 비평은 헨드리에게만 국한
되지 않고 결국 현대 차원신학 전반에 해당하는 비평이기도 하다.
우리는 [두개의 차원]의 개념이 성경에서 오지 않고 칸트의 철학에서
왔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칸트의 철학에서 온 [두
개의 차원]의 개념을 토대로 하고 그 위에 성경관을 세움은 더 큰 잘못
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진리에 관한 마지막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만물을 판단할때 우리의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어야 한다.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三대 新神學과 總神人의 결의
20세기에 전개된 현대신학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도전을 우리는 3
신주의(3Ns)의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신주의라 함은 신프로
테스탄트주의(Neo Protestantism)와 신정통주의(Neo Orthodoxy),그리고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를 두고 하는 말이다.
20세기가 시작할 무렵 슐라이어막허와 릿출의 신학의 잔광을 받아 헤
르만과 하르낙 그리고 미국의 워터 라우센부쉬와 같은 신학자들이 소위
[신프로테스탄트주의]라는 새 신학을 형성하고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성
경적으로 바른 교리와 신앙에 도전 했었다. 그후 1919년 스위스 산골의
한 청년 목사 칼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를 집필함으로써 점화된 소위
[신정통주의]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세계로 번져가면서 복음주의 기
독교의 교리와 신앙을 송두리채흔들어 놓는 위력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신정통주의 신학운동의 여
력을 빌려 복음주의적 교리와 신앙에 투철치 못한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 중에서 신복음주의(Neo Evangelicalism)라는 새로운 신학
운동이 일어나게 됐으니, 미국 켈리포니아주에 있는 풀러신학교가 이 운
동의 진원지 였었다. 이 신복음주의 운동은 복음주의를 과장하면서 역사
적 기독교의 성경적 신앙을 타협하는 대가로서 범세계적인 선교와 교회
연합을 성취코자 하는 동기를 가진 운동이다.
20세기 초에 형성된 소위 [신프로테스탄트주의]신학을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신앙을 포기하고 에라스므스의 인본주의적 신앙으로서의 환원
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교로부터 모든 초자연성을 제거하고 윤리의
차원으로 기독교를 격하시키는 신학운동이었다.
칼 바르트가 일으킨 신정통주의 신학 운동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Back to God),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라는 구호를 외
치면서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신학]의 자연주의적 집착을 통박했다는 점
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미련을 다분히 지닌 신학운동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을 회의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의 역사적 진리성을 부인하는 등의 사실을 보아 그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가 진리로 믿고 아는 바에 대한 매우 심각한 도전이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꽤 오랜 세월동안 그토록 기독교 지성을 매
혹시키고 현대신학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의 질주
에 제동을 거는 한편 복음주의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성격을 고발함으로
써 신학적 우파와 좌파에게 아울러 호감을 샀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신정통주의는 초자연적 기독교도 만족시키고 현대지성의 과학주의
도 만족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적 신학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20세기
인의 신학]으로서 참으로 나무랄데가 없는 만점에 가까운 신학으로 오랜
동안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정체를 알고 보면 우리는 그것이 결코 초자연적
기독교가 아니며 오히려 현대지성의 무신론적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초
자연적 기독교의 타협을 의미하는 "위장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에
동의치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신정통주의 신학의 쇠퇴와 때를 같이 해
서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막강한 도전으로서 등장한 [신복음주의]란
어떤 것인가? 이 [신복음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운동은 복음주의 기독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운동이라는 사실을 그 특징으로 하고있다. 즉 신복
음주의는 복음주의 기독교내의 [반란적 사건]인 것이다.
이 신학운동은 하롤드 아켕가, 에드워드 카넬, 버나드 램,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 소위 [풀러그룹]이라고 일컫는, 복음주의사상에 투철성
이 결여된 일련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일으킨 운동으로
서 범세계적인 선교사업과 교회연합운동의 전개를 위해서 복음주의 기독
교의 문호를 에큐메니칼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해서 개방하자는 운동, 그
러니까 에큐메니칼 기독교에 대한 [문호개방 운동]인 것이다. 오늘날 신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영감교리에 대한 양보와 창세기 1장의 기독교 진화
론적 해석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와 과학주의, 세속주의등의 포용을 일삼
으면서 세계선교와 교회연합을 지상의 과제로 부르짖고 있다.
그레샴 메이천(J.Gresham Machen)박사는 일찌기 말하기를 자유주의 기
독교는 불신 지성과 대화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포기했기 때문에 기독교
가 아니라고 했다. 즉, 신복음주의는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대화하기 위
해서 복음주의를 포기하자는 운동인 것이다.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운동
신정통주의에 비해서 신복음주의는 그 성격이 보수적이고 온건하기 때문
에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복음주의 기독교내에 존
재하는 방법론적 견해 차이를 의미할 뿐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우리 한국 교회는 100년이 채 안되는 그 짧은 성장사의 과정 속에서
현대신학의 3신주의적 도전을 자체로 받아 왔다.
한국 교회사의 초기에는 감리교회가 설립한 협성신학교가 신프로테스
탄주의신학의 아지트가 되어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해 도전했고,
그후 일제 말기에 서울 승동교회당 하층에서 시작한 조선신학교는 재빨
리 해외에 가서 바르트신학을 배우고 돌아온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리더
쉽 하에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신정통주의적 도전의 기수가 되었
다. 그러나 1902년에 평양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가 설립한 장로회신학
교는 초대 미국선교사 교수들의 복음주의적 신앙입장과 특히 박형룡 목
사의 강한 메이천주의적 리더쉽의 덕분으로 협성신학교의 신프로테스탄
트 주의를 누르고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목사의 신정통주의적 도전을 일
단 물리치는 일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에서 신프로테스탄트주의 신학은 그 기세가 크게
꺾인감이 있었지만, 서울에서의 조선신학교의 재개강과 그후 동교의 한
국신학대학으로의 발전 그리고 김재준 교수의 좌절모르는 신정통주의를
위한 선전책략 등은 한국에 신정통주의 신학을 널리 보급하는 일에 성공
했고, 기어코 1951년의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창설과 1959년의 예수교장
로회 통합측 교단의 발족을 촉발하고야 말았다.
현금 우리 교회와 우리 모교의 [신복음주의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신
복음주의 거부운동에 힘을 모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순간에 다달았음
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에큐매니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용공 기독교이며, 신복음주의는 그와
같은 에큐메니칼 기독교와의 대화와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크다고 인식하고 에큐메니칼 기독교와 그것을 두둔하는 신복음
주의를 강력히 거부하는 메이천주의적 노선을 구축함으로써 전세계적으
로 그리고 특히 대한민국에 있어서 우리 총신인들이 진정한 반공신학의
확립을 통한 승공적 전열에 참여가 가능한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하는 바
이다.
Ⅳ. 미국신학의 근황
1. 序論 - 원래 미국신학은 [한국선교의 신학]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미국 개신교신학은 한국 선교 당시에 가졌던 보수주의
적 사상성과 신앙자세를 완전히 팽개쳐 버리고 [사신신학], [세속화신
학], [정치신학], [해방의 신학]등 일련의 급진적 신학 사상으로 대표되
는 신학적 전위성을 추구하면서 불교와 같은 동양종교와 사상적 귀납점
을 모색하는가 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서는 화해와 일치를 부르
짓는 등 무신론적이며 탈 기독교적이고 범종교적이며 초이데올로기적 에
큐메니칼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고 한마디로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우리 모두가 개탄해 마지 않을 일이겠는가
2. 舊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구 프린스톤 신학]은 우리가 아는대로 미국 북장로교회의 직영 신학
교였던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가 19세기 초
에 창설될 때로부터 시작하여 1929년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침투로 말미
암아 동 신학교의 교수진이 완전히 자유주의 화하던 운영의 해인 1929년
까지 동 신학교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하고 이끌어 온 바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또는 일명 [북장로교 신학]을 의미한다.
[구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의 시기는 그레샴메이천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를 사임하고 나오던 해, 즉 1929년으로 메이천 박사와 그의 동지
들이 인근도시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구 프린스톤 신학]의 계속을 목적
으로 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웠고 거기서 메이천 박사의 제자들과 후배들이 현금에 이르기까지 보
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며 발전시켜 나오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메이천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로부터 나온 후 [구 프린스톤
신학]은 미국 교회내에서 100여년간 장악했던 신학적 리더쉽을 놓쳐 버
리게 됐을뿐 아니라 1937년에 메이천 박사가 사망하므로 그 마지막 대변
인을 잃어버리게 된 결과 미국교회에 대해서 노도와 같이 밀려 닥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앞에서 완전 고립되었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미국신학계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
는 실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역사적 계
속으로 자처하고 있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훼이스 신학교 및 카
버난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등에서 교수되고 있는 보
수주의 신학은 너무나도 현 미국 개신교 신학계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횡포에 눈물을 삼키며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낙후적 존재"가 됐다는 것
이다. 몰락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19세기
말에 독일 신학계를 대표했다고 볼수 있는 릿출(Albert Ritschl), 하르
낙(A Harnack), 헤르만(J.W.Hermann)과 같은 신학자들의 윤리주의적 신
학사상이 미국 내에서 다수의 유력한 추종자들을 얻어 [구 프린스톤 신
학]에 의해서 대표되어 오던 [미국 보수주의 신학]에 대해서 일제히 총
공격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미국교회 내에서 [프린스톤 신학]의 몰
락을 가져오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단일 요인으로서 사회복음신학자
워터 라운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라우센부쉬의 신학은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사회를 거의 동일시하는 社
會志向的 神學이었으며 성경의 권위보다 인간의 [사회적 진화]의 능력을
믿는 인본주의적 사고를 가진 신학이었기 때문에 라우센부쉬가 그 당시
확고한 보수주의적 노선을 걷던 프린스톤 신학에 대해서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으며 라우센 부쉬와 그의 사회복음신학의 미국내에서 급속
한 세력확장은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
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박사가 그
래도 그레샴 메이천 박사를 계승해서 [미국보수주의 신학]의 기수격이
되어서 현대 미국 자유신학에 대하여, 특히 미국교회내에서 팽창일로에
있었던 [신정통주의 신학](Neo-Orthodox Theology)이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맹렬한 투쟁을 벌인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는
없다. 1919년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출판된 후로 10년도 되기전
에 소위[신정통주의 신학]이 미국에 상륙했고 미국교회 안에서와 신학자
들 사이에서 요원의 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하여 1940년대와 1950년대 초
반기까지 현대 미국신학계를 완전히 석권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기
에 접어들면서부터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맹종했던 미국 개
신교 신학자들이 또 다른 독일의 실존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
사상에 매혹되어 사족을 못 쓰는가하면, 그 중에서 일부 신학자들은 폴
틸리히(PaulTillich)의 [철학적 신학]에 심취, 그의 제자들이 되므로
[불트만, 틸리히 시대]가 왔었다고 볼 수 있겠다. 1960년 경부터 미국
신학계에는 구주 신학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위 [후기 불트만 시대]가
도래 했으며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은 1960년 중반기까지 그 인기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어떤 급진적으로 새로운 신학의 출현을 위한 서막"
과 같다는 인상을 짙게 풍겼던 것이다.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1920년대로부터 1940년대가 끝나기까지의 약 30년동안을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현대 신학계를 지배했고, 특히 미국에서는 칼 바르트
가 신학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인기높은 신학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칼 바르트는 독일의 또 다른 신학자 루돌프 불트
만(Rudolf Bultmann)의 소위 [실존주의 신학](existentialist theoiogy)
이라는 새로운 신학사상 앞에서 고전하다가 완전히 궁지에 몰려 그 패색
이 짙어가기만 했다.
4. 死神神學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사신신학시대는 1963년부터 시작해서 5,6년간의 전성기를 누리고 1970
년대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그 막이 내렸다고 할 수 있겠다.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사신신학자 시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막을 내린 뒤 70년대에 접어
들면서 현대 미국신학계에는 [정치신학],[디오니소스 신학],[흑인신학]
등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6. 結論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선교의 신학]이었던 [미국신학]이 20세기에 들
어서면서부터 급진적으로 좌경해서 오늘날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봤다.
우리는 현대 미국신학의 변천을 4기로 나누어서 살펴봤다. 제일 먼저는
그레샴 메이천 박사(Dr.J.Gresham Machen)가 이끌던 [프린스톤 신학]이
1920년대에 몰락하고 자유주의가 팽배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라우센
부쉬등의 [사회복음신학]이 기승을 부려[미국 정통신학]이 수난당하는
울분과 후퇴의 시대였다.
다음으로 현대 미국신학의 제2기를 살펴봤다. 이 시기는 미국에서 정
통신학을 고립시켜 놓고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불트만의 실존주의
및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 판을 치던 거물신학자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시기는 "자유주의가 거보를 내딛는 시대"이기도 했
다.
셋째로, 우리는 1960년대 초에 돌연 그 막을 올렸다가 10년도 못가서
막을 내려버린 [사신신학자 시대]를 살펴봤다. 이 시기는 로빈슨, 올타
이저, 반 뷰렌등이 나타나서 "누가 더 사신적이냐?"를 겨루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현대 미국신학이 "사신병"을 앓는 처참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사신병"을 앓는 시기는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사신병"이라는 것은
[신학의 사망]을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1960년대 말로부터 사신신학 쇠퇴로 인한 신학적 공백
을 메우기나 하려는 듯이 [정치신학], [디오니소스 신학], [흑인 신학]
등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들이 등장하는 이른바[신학적 문제아시대](An
Age of having forgotten of God in the midst of American cultural
creativity)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세 신학 즉 [정치신
학], [디오니소스 신학], [흑인신학]을 각기 [칼 마르크스와 손잡자 신
학]("Let's hold hands with Karl Marx" Theology)과 [히피와 도시 게릴
라의 신학](Theology of hippies and city guerillas)과 [흑인이 제일이
다](The "Black people are the chosen people" Theology)로 알기 쉽게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결론을 말하면
금세기 초에 미국에서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을 계기로 팽창하기 시
작한 자유주의 신학은 [거물신학자 시대]에서 거보를 내딛어 그 "좌경
성"을 확고히 했고, [사신신학자 시대]에 와서는 그 급진성이 폭로되었
고, [새로운 신학적 문제아 시대]에 와서는 그 [동화] 또는 [수필문화]
과 같은 허구성이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대 미국신
학사상의 흐름과 변천을 살펴보면서 현대 미국신학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는 절망감을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바 있거니와 [현대
미국신학]은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며 "캄캄한 심연
을 내려다 보는 벼랑을 서 있는듯"하다.
이와같은 절망감과 이와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 미국신
학의 전망"은 어둡고 비판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지금까지 위기에
서 위기로 치달려 왔고 앞으로의 전망이 어둡기만한 [현대 미국신학]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미국신학]은 한국교회를 선교해서 설립한[한국선교의 신학]
이었건만 지금은 오히려 한국선교 당시에 가졌던 "순수한 보수주의 정통
신학"을 상실하고 오늘의 신학적 위기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
도 바울의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 9:27)라고 하는 말씀은 우리 한국교회도 교훈으로 받아
야할 것이다.
둘째로, 미국 신학이 금세기 초에 윌필드와 메이천을 마다하고 [신정
통주의]와 타협했던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급진적 좌경]
을 낳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하나
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떠나서 인간의 사고와 이론이 만들
어 내는 모든 [신신학]과 [철학적 신학]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고 추
호의 양보나 타협도 허용해서는 안될 줄로 확신한다(마5:37, 약2:10).
셋째로, [현대 미국 신학]이 미국교회의 평신도들의 신앙과는 너무나
도 동떨어진 상아탑 속에서의 [이론신학]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과 같은 "사신의 비극"과 "탈기독교와 친마르크스주의의 진풍경"을 연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과 신학 사이에
어떤 갭(gap)을 두어서는 안되겠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하는 신학"과
"신학하는 신앙"을 아울러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속에서 신학자와 평신도들이 혼연 일체를 이루어야 할 것이
다(요3:18, 엡4:13).
그렇게 할때 우리 한국교회는 "미국 신학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제방으로서 든든히 설 수가 있을 것이고, 한걸음
나아가서는 [한국선교의 교회]였던 미국교회에 대해서 [복음주의 정통신
학]을 역수출하는 새로운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유럽신학의 근황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신학은 리츨과 하르낙 헤르만 등 자유주의
신학의 삼총사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는
쉴라이에르 마허였다. 이들의 신학은 한마디로 倫理主義 神學(ethic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윤리주의 신학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인류의 도덕적 선생
으로 생각했으며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만 인류
를 위한 [위대한 도덕 교과서]로 여기면서 진리의 척도로서의 종교적이
며 윤리적인 경험을 내세우는 데 있었다.
칼 바르트는 1919년 그의 저서 로마서 강해를 통해 고전적 자유주의
를 공격하고 이 저서를 통해 유럽의 신학계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 왔던
것이다.
2. 칼바르트의 실각
1920년대로부터 5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에서 바르트는 他의 추종을 불
허하는 유럽의 대표적 신학자로 인정받고 알려지게 되었고 영미 신학계
와 심지어 피 선교지 신학에 까지 깊이 파고 들어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
다. 이 신학은 新正統主義라는 이름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신학자 에밀 부룬너와 신학적 동반자로서 노고를 나누기도 하
였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금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루돌프 불트만의 말씀과
신화가 1948년 출간됨으로 실각하게 되었다.
3. 불트만의 붕괴
불트만은 그의 저서 말씀과 신화의 출판을 계기로 갑작스러운 신학적
인기의 상승을 누리면서 바르트의 과학적 세계관과 실존주의 철학을 무
시하는 듯한 시대와 뒤떨어진 교회 교의학을 그의 [양식비평학]과 [실
존주의 신학]으로 제압해 버렸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그의 제자들에 의하
여 비판을 받게 되었다.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불트만의 신학이 붕괴함으로써 유럽신학계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불
트만 후의 신학자들은 [후기 불트만 신학자]들과 반 불트만 신학자들이
라고 볼 수 있는 [보수파 신학자들]과 [구원사학파 신학자들]과 [판넨베
르그 몰트만파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후기 불트만파 중에는 괴팅겐의 한스 콘젤만과 하이델베르그의 에리히
딩켈, 훅스, 에벨링, 케제만, 큠멜 등이 있다.
반 불트만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보수파로 괴팅겐 대학의 예레미야스,
마인즈의 스타린, 함베르크, 고펠트, 엘랑겐의 프리드리히 등 이고, 구
원사학파 신학자들은 바젤의 오스카 쿨만, 말베르그의 큠멜, 베르린의
로제 등이 있다.
또한 판넨베르그 몰트만파가 있는데 이들은 마인즈의 판넨베르그, 튀
빙겐의 몰트만이 그 대표적 신학자들이다.
이 세 부류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신학자는 함버르그의 틸리케가 있다.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몰트만과 판넨베르그, 에벨링, 옷트는 새롭게 유럽신학계에 등장한 새
로운 주역들이다. 몰트만과 판넨베르그는 앞서 살펴 보았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불트만으로 부터 실존주의 해석을 배워가지고 그
것을 새 해석학이라고 일컷는 국면으로 이끌어간 신학자이다.
하인리히 옷토는 칼 바르트의 제자이면서도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
만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신학자들 사이의 신학적 조화를 모색하는 중재
적 신학자이다. 옷트는 후기 하이덱거 사상에서 바르트와 불트만을 조화
시킬 수 있는 方法論을 발견한다.
6. 신학적 축의 변동
칼 바르트가 실각하고 루돌프 불트만이 무너져버린 뒤의 유럽신학계는
후기 불트만파와 구원사학파와 중간 보수파로 불리우는 신진 신학자들의
난립으로 신학적인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하는 [혼란기]를 맞이하였으
나 1970년이 지나자 서서히 혼란기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유럽
신학을 이끌어나갈 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환언
하여, 그동안 거성신학자들의 사망에 뒤따르는 많은 소장급의 신학자들
의 신학적인 불협화음으로 빚어진 유럽신학의 어지러운 파도가 1970년대
를 거쳐 1980년대로 돌입하면서 몇몇 사상적인 독창성과 추진력을 가진
신학자들로 말미암아 질서와 안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즉 이
몇몇 신학자란 앞에서 지적하고 거론한 바있는 판넨베르그, 몰트만, 에
벨링, 옷트와 같은 신학자들이다. 그리고 한가지 부기해야 할 것은 이들
신학자외에 1980년대에 그 신학적 리더쉽과 영향력을 크게 기대해볼 만
한 신학자로서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er;1908-)와 에벨하르트 용
겔(Eberhard Jungel)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골비쳐는 성경과 기독교를
한 두가지 진리로 축소시키려고 하는 [축소주의 신학자들](실존주의 해
석학파와 구원학파 등)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인 하나님 사사잉 보존되어
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용겔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로서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더욱 동력적이며 활동주의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골비쳐와 용겔은 둘 다 칼 바르트의 감화를 받았다고 봄이 타당하다.
다만 용겔은 칼 바르트와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들이 가지는 진정한 사랑
과 신뢰의 관계들 속에 남 몰래 존재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일종의 [자
연신학]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의 신학적으로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특
히 용겔은 현재 튜빙겐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많은 신학도들의 인기를 독
차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판넨베르그와 몰트만과 같은 선배 신학자들을
물리치고 유럽신학을 리드할 수 있는 유망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면, 유럽신학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가? 20세기 후반기로 접어
들면서 바르트와 부룬너, 불트만과 같은 거성 신학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부터 유럽신학계에서는 사상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켜서 저자는 맥퀘리 교수
(Dr.John Macquarrie)와 함께 [사상적인 축의 변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어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키엘케골-
니체-하이덱거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신의 사망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고뇌와 자아와 세계를 초극하고자하는, 실존성의 추구
를 강조하는 키엘케골-니체-하이덱거 노선이 1970년대로부터 서서히 헤
겔-마르크스-불로흐 노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르스트 불로흐(Ernst Bloch, 1885-1977)의 대작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1954-1977)이 유럽사상계에 알려지면서부터 막대
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특히 1970년에는 헤겔의 탄생 이백 주년
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학계의 행사와 더불어 헤겔주의의 回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시대의 유럽사상계를 지배하던 [키엘케골-니체-하이덱거 노선]의 신
학자들이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평화와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내면적인 사색의 세계로 몰입하여 [주관의 우물]을 너무 깊이 파고 있었
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유럽의 인민들은 서구 민주주의에 대하여 비
록 그것이 그 둘에게 미증유의 경제적 번영]와 [사회발전]을 가져 왔다
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일변도적인 변증을 수정하고 공산주의와 마르
크스주의에 대한 호기심에찬 접근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유럽사람들의 사고의 보편적인 변화에 자극되어 유럽의 학
계는 [주관의 우물]을 너무 깊이 파면서 20세기 후반기의 급변하는 유럽
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리고
[구 사상 노선]의 학자들과 사상가들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유럽학계의 [사상적 진자]는 실존주
의에서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로 하이덱거의 사색으로 부터 불로
흐의 행동성으로, 주관적 사색의 우물을 파는 일로부터 정치참여를 통한
사상의 가두 시위로 크게 흔들리며 이동해가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신학계 역시 이러한 유럽학계와 문화계의 동향에 민감
한 영향을 받아서 소위 [사상적 축의 변동]을 자체 내에 초래케 되었으
니 [바르트-불트만-본훼퍼 축]이 [판넨베르그-몰트만-에벨랑-옷트 축]으
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특히, 유럽신학의 축의 변동
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위 [신마르크스주의]가 차지하는 사상
적 비중이다. [신마르크스주의]는 칼 마르크스로부터의 영향은 시인하나
정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미래학적인 인생관
과 기술사회에 대한 비판(자본주의 사회든지 공산주의 사회를 불문하고)
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능력, 그리고 혁명적 사회개조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럽신학
계에서 일기 시작한 기독교와 공산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대화와 일
치의 운동"은 현금 1980년에 와서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유
럽신학의 축의 변동에 기인한 것이며, 1980년대를 걸머지고 나아가는 유
럽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에게 신마르크스주의가 사상적으로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유럽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이 기독교 신학에 대하여 과다한 [미
래학적 의식구조]와 [종말론적 사회의 실현]을 위한 [혁명적 행동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과하는 [기독교 신학]의 "마르크스주의화"를 어떻게 미
연에 방지하면서 그들이 말하는대로 [무신론이 그 인생관이 되어버린 오
늘의 서구사회]속에서 그나마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가가 큰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다.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유럽신학은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덱거와 불트만
으로부터 떠나서 지금은 신마르크스주의에 와 있다. 또는 접근하고 있
다]고 우리는 대답을 해야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 진술한 바
내용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진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금의 유럽신학계에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보수
신앙과 그것에 입각한 보수주의 신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지 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
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유럽에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
주의적이라고 하는 신학자들의 모두가 성경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를 찬
동하고 있으며 특히 어떤 인사의 말과 같이 그들의 혈관 속에 칼 바르트
(Karl Bart)가 주사바늘로 주입한 변증법적 사상 요소들이 계속 순환하
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구원사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이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도 [역사적 비평학]을 수용하고 있
으며 마르틴 카렐(Martin Kahler)과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ke)등
서독 신학자들 중에서 경건주의 경향을 보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
다.
다만 유럽에 아직도 [보수신앙]이 존재하고 보수주의 신학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성서학교](Bible missions school)운동을 통하여 유럽에
생겨난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 가운데서 미약하나마 보존되고 있다고 하
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교들이 세워질 때 미국 교회의 세대주의 영향
을 적지않게 받는 경우도 있고, 또 부흥사 빌리 그레함(Billy Geaham)의
대부흥집회의 결과로서 전도와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
다.
그러나 이 유럽의 Biebelmissionsschule 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성
경학교와 선교학원들이 유럽교회를 위하여 열심있는 목회자를 양성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교육자와 해외로 갈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
은 치하하여 마지 않을 일이지만 이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
의 수준은 높은 편이 못되며, 따라서 현금의 유럽신학계에서 진행중인
신학적 토론과 논쟁 그리고 연구모임에서 전혀 소외당하고 있는 것도 사
실이다.
그런데 유럽신학, 특히 현금의 [서독신학]은 폐쇄된 [저명 인사들의
회합] 같아서 매우 국제성을 상실한 "산골신학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은 오늘날의
[서독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발언에 대하여 별로 흥미없는
일로 묵살해 버린다는 것과 똑 같은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주의적인 사상
을 가진 신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일 경우에 신학
적으로 [無味하다]고 하여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것 등에서 나타나며
증명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외국신학자들이지만 라인흘드 니버나 폴
틸리히와 같은 독일 이름을 가진 신학자들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보인다
고 하는 "재미있는 면"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신학이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신학적 폐쇄성]을 즐기며
저명인사들의 모임으로 유지되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의문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첫째로 유럽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
이 되므로,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인기와 여론에 편승하여 조석
으로 변하는 [유럽신학]으로 화해가고 있다는 데 대한 좋은 원인 설명이
된다고 본다. 둘째로 유럽신학이 유럽인과 독일인 외의 신학자들에게 그
들의 [신학적 회합]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는다
는 사실은 공간적으로 너무 협소한 신학, 그러니까 정말로 국제성이 없
는 "산골신학"을 운영하고 있다는 비평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
다. 오늘날 세계는 일찌기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와 관련하여 말한 바대로 과학의 발달과 교통방편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일일 생활권]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신
학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펼쳐나가야 하지 않겠
는가? 이 지상에서 서독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유럽이 세계의 전부
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신학자들은 오늘날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빈
번한 정보교환과 신학적 토론 및 공동적 학문 연구의 기회들을 마련하는
일을 힘씀으로써만 과거와 같이 [유럽신학]의 우위성을 계속 세계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를 도외시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상실하여 유럽신학이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되
었다고 한다면 유럽 외의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자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유럽신학은 [공간적 연속성]을 상실하여 협소한 지역사회의 신학, "산골
신학"으로 떨어져 버릴 날도 멀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는 제임스 로버츠(James D.Roberts;1927-)와 제임콘
(James H.Cone;1938-)과 같은 흑인신학자들이 나타나, [흑인 신학]이라
는 것을 만들고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이 한창이다. 인간적 희망의 신학을 써낸 브라질의 신학자
루벰 알베스(Rubem Alves; 1933-)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로 끊나는 신
학"은 더이상 필요가 없고 "세계의 혁명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
는 신학"을 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선을 아시아로
돌릴 경우에, 일본의 신학자 기다모리 가즈오가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
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영어로 번역되어(1951년) 널리 국제적으
로 읽히기까지 하였고, 또한 몇년전에 선교 백주년을 경축하게 된 피선
교국교회인 한국교회에서도 신학적 성숙도를 보여 윤성범 교수의 한국
적 신학(1972년)이 한국 사상의 특징을 담고서 나왔으며 보수주의측에
서는 한국교회의 경건한 신앙을 소재로하는 저자의 새벽기도의 신학
(1974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타국, 타대륙의 신학자들과 신학의 동향에 대하여 현금의 유
럽신학자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결론은 이것이다. 만일
[유럽신학]이 1980년대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신학을 한다
면, 그리고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
활권적 공간]속에서 공존하는 신학의 동료들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교
육과 계몽적 지도의 대상인양 착각하는 공간적 연속성이 없는 [산간벽지
신학]을 계속하여 한다면 그것은[유럽신학] 자체를 위하여 매우 불행스
러운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유럽신학]은 협소한 공간에 존재하는 [역
사와 시간의 뿌리]가 없는 나무 같아서 곧 고갈하며 몰락할 위험성이 커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칼 헨리 박사의 말과 같이 차라리 성
경을 읽으면서 본국에 머물러 있는 편이 수년동안 여비와 학비를 들여가
면서 서독에 신학을 배우려고 유학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힘쓰는 [경건주의 신앙]을
그 체질로 하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서독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신학
인들이 "발 붙일 곳"이 그리많지 않다는 것도 한번쯤 고려할만하다.
* 總結論 - 終末이 가까운 現代神學
우리는 현대신학이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하여 [解放神學]과 [民衆神
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基督敎神學 즉 [正統神學]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현대신학을 대표하고 있는 [歐美神學]은 본훼퍼(Dietrich Bonhoffer)
의 "신의 세속속에서의 존재"의 상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 무신
론](Von Gott ohne Gott)을 부르짖는데 거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비콕스(Harvy Cox)는 [死神神學]을 가리켜서 현대신학의 "하설작용"
이라고 비꼬았으나 그 자신도 신에 대한 "침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음
으로 "무신론적 복통"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무신론의 "음침한 골짜기"(시23:4)를 헤메고 있는 구미신학은
이미 [신학](Theology)이 아니라 "新學"의 지경에 도달했다. 오늘날 구
미신학은 그 "무신론적 전락"의 결과로서 신학의 殘骸를 여기저기 남기
고 있다.
그것은 에스겔이 본 [마른뼈의 골짜기](겔37:1,2)의 광경과 흡사하다.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무신론의 지경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脫基督敎]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일찌기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위대
함"은 "기독교가 유일종교가 아님을 과감하게 시인"하는데 있다고 하였
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도 합세하여 부르짖기를 기독교는 절
대적 진리성을 포기하고 "세계적 종교화합의 시대"의 장을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기독교]는 기독교의 옷을 벗기
에 바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리기에 바쁘다. [그리스도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대신에 교회의 "사회적 혁명적 행동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구미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신학은 분명히 "탈기독교의 활주
로"에 와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신학 또는 [정통 신학]의
[유일종교 사상]을 그 잔재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요
14:6, 롬1:16,행4:12) "무신론적 인본주의" 또는 "에큐메니칼 종교혼합
주의"의 "허무한 공간"으로 영구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그 "사회주의적
급진성"의 발휘로 인하여[공산주의]또는 [미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통
한 일치 내지는 화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치와 혁명을 통한
[정의사회구현]에 신학이 앞장 설 것을 부르짖고 있는 위르겐 몰트만
(Jugen Moltmann)과 하비 콕스(Harvy Cox)와 같은 신학자들은 [공산주
의]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공
존보다는 한걸음 나아가서 "상부상조적인 협력관계의 수립"을 제의한다.
공산주의 측에서도 기독교에 대하여 대화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자고
추파를 던져보내고 있다.
다년간 공산국 체코의 푸라하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스위스에
있는 바젤대학으로 옮겨와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WCC 중앙위원이 되었던
쟉 록흐만(Jan M.Lochmann)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가 양자의
사상적 혼합과 절충보다는 [세계사회의 인간화]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협력적 관계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출현은 이와같은 록흐만의 "예언"을 "휴지화"하
고 말았다.
위르겐 몰트만과 요하네스 멧즈의 [희망의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
서 최근 유럽신학계를 휩쓸고 있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
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혁명 사상]과
[경제이론]을 신학적 해석학의 내용으로 삼아 세계의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신학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emez)와 같은 해방신학자는 공공연하게 성경
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칼, 마르크스의 시각을 갖고서 읽고 해석할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즈의의 대화나 [인간화]의
목적을 위한 협력관계 운운이 아니라 "기독교의 마르크스주의화"요 "유
물론적 사회주의 혁명의 신학"(Materialistis Socialist Theology of
Revolution)의 출범을 의미한다.
역사적 기독교신학 즉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볼때에 이 얼
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현대신학]의 "추태"또는 "탈선행각"인
가(눅12:16-21,롬1:25,시1:1,2,고후6:14-16).
1960년대에 헤르만 도이빌드교수(Herman Dooyeweerd)의 저술 서구 사
상의 황혼(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이 출간되어 서구사상
의 반기독교적 급진성을 지적하고 경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죤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교수가 기
독교신학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저술을 펴냈는데 [현대신학]은 그"급진
적 사상성" 때문에 자살적인 총격을 여러번에 걸쳐서 받은 결과로서 지
금은 그 운명의 순간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풍자적이면
서 매우 심각한 표현을 하였다.
저자는 두 학자의 서구사상과 현대신학 전반에 걸친 비관적인 평가와
"종말적인 표현"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동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앞서 묘사하고 설명한 바와 같은 [현대신학]의 급진주의 일변도의 진
행 때문에 [현대신학]은 현재 "종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아니, "종말의 시기"라는 표현보다도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
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기독교 무신론]과 [마르크스주의]로 뒤범벅이 된 현대신학
의 [종말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한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기독교신앙과 신학의 보존"이라는 지상 명령적인 목적론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현대신학]의 "불신앙의 결론들"때문에 기독교의 존속이 "일대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직 기독교를 보존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을 뿐이다. 한국과 세계에서 기독교를 보존하고 보존한 기독
교를 전파하는 이 큰 목적을 위하여 우리 교회는 분발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현대신학의 급진적 사조에 대항하여 '일사각오의 믿음'을 갖고
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사40:8, 딤전6:12, 딤후3:14-17, 사
6:13).
박아론 박사 (총신대 교수)
http://www.imr.co.kr/graceboard/ftp/T5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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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성 목사
이 설문조사는 1960년대 후반에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이 미국의 10,000명의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으로 실제로 7,441명이 대답해 왔다고 한다.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미국 교회들의 배교적 상황을 증거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한다:
1. 당신은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한 말씀임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87%, 감독교회의 95%, 연합 장로교회의 82%, 미국 침례교회의 67%, 미국 루터교회의 77%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당신은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의 존재를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62%, 감독교회의 37%, 연합 장로교회의 47%,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4%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당신은 예수님의 처녀탄생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60%, 감독교회의 44%, 연합 장로교회의 49%, 미국 침례교회의 34%, 미국 루터교회의 19%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4. 당신은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51%, 감독교회의 30%, 연합 장로교회의 35%,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3%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Trans-Action
노엘 홀리필드(Noel W. Hollyfield)는 1976년 그의 신학석사(Th.M.) 논문인 "Sociological Analysis of the Degrees of 'Christian Orthodoxy' among Selected Students in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미국에서 비교적 보수적인 교단이라고 알려져 있고 WCC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는 남침례교단 소속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미국교회들의 배교가 비단 자유주의적 교단에 뿐만 아니라, 남침례교회에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보인다(David O. Beale, S.B.C.: House on the Sand?
|
M. Div. 1학년 |
M. Div. 3학년 |
Th. M. & Ph. D.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
74% |
65% |
63% |
마귀의 실제적 존재는 확실하다. |
66% |
42% |
37% |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
61% |
40% |
37% |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은 확실하다. |
66% |
33% |
32% |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
59% |
44% |
22% |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임을 의심치 않는다. |
87% |
63% |
63% |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
85% |
60% |
59% |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 필수적이다. |
42% |
33% |
21% |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
89% |
67% |
53% |
예수께서 어느날 실제로 땅에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
79% |
56% |
53% |
1985년 약 125명의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학자들은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지 않으셨는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그 중심 인물은 로버트 펑크(Robert Funk)인데, 그는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신약학자이며, 에모리(Emory) 대학교 캔들러(Candler) 신학교 교수이었고, 그후 캘리포니아에 웨스타 연구원(Westar Institute)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큰 성경학자 협회인 성경문헌협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의 증경 회장이기도 하다. 이 세미나의 결과로 1988년에 『예수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라는 책자가 출판되었는데, 거기에도 적색, 분홍색, 회색, 흑색으로 예수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를 표시했다(Robert W. Funk and Others, The Parables of Jesus-Red Letter Edition-A Report of the Jesus' Seminar
이 세미나의 대략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학 혹은 신학이 얼마나 배교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1) 예수의 말들이 오직 20%만이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이 그에게 돌려진다.
(2) 주기도문도 예수의 말이 아니다.
(3)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4) 예수는 자신이 신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5) 예수는 자신의 재림을 약속하지 않았다.
(6)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7)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Did Jesus Say He's Messiah?: Seminar Concludes He Didn't Publicly," The Charlotte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개념 정립과 성경적 검토는 오늘날 보수적 교회들의 바른 진로(進路)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라는 말은 말하는 이의 분별력이나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일찍부터 한국의 보수주의를 근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김재준 박사는 말하기를, "엄격한 근본주의 신학교육은 객관적 비판의 여지 없이 일정한 근본신조들의 주입이요 … 교회 지도자들의 시야는 극히 타계적이며 강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했다(간하배, 『현대신학해설』, 153쪽). 이종성 박사는 근본주의를 "신바리새주의"라고 불렀다(위의 책).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한편, 보수주의 진영에서도 빈번히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고(故) 박윤선 박사는 논평하기를,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욱 강조하며, 성경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깊이 보지 못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교리를 깊이 보지 못하며, 권위주의적이고 반지식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했다("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1979년 가을, 13-24쪽). 그러나 이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침례교회의 신학이나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같이 보인다.
또한 다음의 글은 단지 한 보수적 신학교 학생의 견해만은 아닌 것 같다: "한국적 근본주의 신학은 논리에 있어 편협하고 실제에 있어 무기력하고, 삶의 건강함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끊임 없는 교리 논쟁으로 충동질하고, 순수성 시비를 부채질하며, 건강하고 창조적인 사고 대신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한다 …. 이 신학은 그리스도인들로 반(反)지성적이게끔 규제하고 오직 열심만이 최고의 미덕인양 체제 순종적인 교인들을 부추켜 세운다"(정현철, "근본주의적 신학풍토에 관한 일고[一考]," 『총신원보』, 1988년 10월 11일, 2쪽).
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에 따라 신복음주의에 대한 개념도 다양해진다. 그러나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가지고 정의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정의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근본주의는 무엇이고 신복음주의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지 검토해 보자.
근본주의의 시작은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미국 교회의 상황에서 설명될 수 있다. 1875년 제임스 브룩스(James H. Brookes, 1830-1897)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성경공부 모임은 예언사경회로 발전했다. 이 모임은 1883년부터 1897년까지 1884년을 제외하고 매년 나이아가라에서 모였었는데, 나이아가라 예언사경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거기에 참여했던 강사들은 제임스 브룩스 외에 윌리암 어드만(William J. Erdman), 아도니람 저드슨 골든(Adoniram Judson Gorden), 에이 씨 딕슨(A. C. Dixon),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에이 티 피얼슨(A. T. Pierson) 등을 포함했다.
이 예언사경회는 1878년 부룩스의 지도 아래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한 바가 있는데, 이것은 그후 '나이아가라 신조'로 불리워졌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영감, (2) 삼위일체, (3) 아담의 타락과 전적 부패, (4) 원죄와 사람의 전적 부패성, (5) 중생(다시 남)의 절대 필요성, (6)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속, (7)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8) 구원의 확신은 모든 신자의 특권, (9)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심되심, (10)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들로 구성됨, (11) 성령은 우리들의 영속적 위로자이심, (12) 성령을 따라 삶, (13) 신자와 불신자의 죽은 후 상태와 최종적 부활, (14) 심판의 때가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1910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교리들: 진리에 대한 증언』(Fundamentals: A Testimony to the Truth)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들이 무료로 약 300만부 배포되었다. 이 일은 캘리포니아주의 부유한 석유 자본가인 리만 스튜어트(Lyman Stewart)씨와 그의 형제 밀톤 스튜어트(Milton Stewart)씨의 약 20만불의 헌금으로 가능하였다. 이 책자들의 내용은 주로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비평에 대항하여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변호하는 것들이었다(C. 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nary of Theology, pp. 433; Dollar, p. 175.)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PCUSA) 총회는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교리를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했다: (1) 성경 무오, (2)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 이 선언은 1916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Margaret G. Harden, ed., 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p. 15: McIntire, pp. 433-435.)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후반 1) 독일에서의 성경 고등 비평학, 2) 찰스 다윈(1809-82)의 진화론, 및 3) 칼 마르크스(1818-83)의 공산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교회들과 신학교들에 적지 않은 악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흔히 이 다섯 가지 교리들을 부정했다. 1890년경, 촬스 에이 브릭스(Charles A. Briggs)가 독일 유학후 그 당시 북장로교 소속 유니온(Union) 신학교 교수로 들어와 공공연히 성경의 오류를 주장했을 때, 1892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그를 징계했었다. 그러나 그때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브릭스를 계속 채용했고, 이와 같이 자유주의 사상은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교회를 부패시켰다.
1920년 컬티스 리 로스(Curtis Lee Laws)씨는 미국 뉴욕의 침례교회 주간 신문 『워치만 이그재미너』(Watchman-Examiner) 7월 1일자 사설에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위해 싸우는 자들을 묘사하기 위해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말을 초초로 사용하였다(McIntire, p. 433; 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3쪽).
1920년대의 근본주의는 미국의 각 교단들 안에서 교단의 정화 즉 자유주의의 제거를 위해 투쟁했다. 이 시기는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의 시대이었다(Beale, pp. 5, 6). 제이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은 1923년 출간한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특별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논쟁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는데, 그 종교적 신념은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일층 더 파괴적일 뿐이다. 이 현대적 비구속적(非救贖的)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리운다"(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예를 들어, 당시의 미국 북장로교회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1923년 교단 안에는 소위 어번 선언서(The Auburn Affirmation)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선언서는 1910년, 1926년, 1923년 3차례에 걸쳐 총회가 선언한 5가지의 근본교리들을 "본질적이지 않고 이론들일 뿐"이라고 선언했고, 특히 성경 무오설은 성경숭배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입장의 대립과 갈등이 노출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총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거나 서명자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총회는 벌써 진리의 싸움보다 평화를 원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924년과 1925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던 프린스톤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안에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했던 중 동부 신학교 협의회(The Middle Atlantic Association of Theological Seminaries=MAATS)와의 관계단절과 보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학생연맹(The League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에의 참여문제로 갈등과 싸움이 일어났다. 메이천과 다수의 학생들과 운영이사회(the Board of Directors)는 보다 강경한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하여 학생회의 그러한 조치를 환영했으나, 교장 로스 스티븐슨(J. Ross Stevenson)은 그것들에 불만했고 스티븐슨의 동료 교수들과 특히 학생처장 찰스 어드만(Charles E. Eerdman), 그리고 재단이사회(the Board of Trustees)는 스티븐슨의 온건하고 포용적인 입장을 지지했다.
이 때, 포용적인 총회 정치가들은 신학교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를 통합시킴으로써 자유적 세력을 우세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프린스톤은 포용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9년 메이천을 비롯한 3명의 보수적 교수들,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오스왈드 앨리스(Oswald T. Allis), 코넬리어스 반틸(Cornelius Van Til)은 프린스톤을 떠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였다(Harden, pp. 14-23; Beale, 165-170; 315-316).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와의 싸움은 외적으로 근본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제거하기는커녕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broadened churches)가 되었다. 이것은 주께 대한 배신이었고, 현대교회의 배교(背敎)와 변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자유주의화된 교단들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즉, 분리(分離, 혹은 성별 聖別, separation)의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많은 독립 교회들이 생겨났고, 작은 새 교단들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Independent Fundamental Churches of America, 1930년에 조직됨), 정식 침례교회 총협의회(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es, 1932년에 조직됨),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1936년에 세워짐, 1939년에 정통장로교회
미국 북장로교회의 경우를 다시 잠시 살펴보면, 1932년 『선교를 재고함』이라는 보고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보고서는 19세기의 선교 방법의 전면적 수정을 주장했고, 선교사들은 그 나라의 문화나 종교를 비판치 말고 존중하며 타협적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3년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은 총회의 선교 정책이 바르게 되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래서 그들은 장로교 독립해외 선교부(IBPFM)를 설립했다. 그러나 1934년 총회는 독립선교부에 관련된 자들에게 그 선교부로부터 탈퇴할 것을 명령했고, 1934-35년 동안 총회의 그 명령에 불복했던 7명의 목사들이 면직을 당했다.
1936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메이천의 상소를 기각함으로써 실로 배교적(背敎的)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그 해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라는 분리된 작은 교단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937년 전천년설 옹호와 금주 금연의 미국 장로교 전통의 주장 때문에, 이 교단으로부터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훼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가 분리되었고, 1939년 미국장로교회는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이름을 바꾸었다(Beale, pp. 317-319).
1940년대에 들어와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948년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강연에서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는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켄가는 1930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1936년 교회 분리시 메이천을 따르기를 거절했다. 1942년 그는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조직, 초대 회장이 되었고, 또한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크리스챤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誌)의 이사장으로 25년간,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 교회(Park Street Church)의 담임목사로 33년간 봉사했다. 1985년 2월 8일 79세에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의 절친한 친구요 신학적 조언자이었다.
오켄가는 풀러 신학교 교장 취임시 분리주의자들 곧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했고 자기 신학교는 주류 교단들 안에 있는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9th ed. [Columbus, Ohio: Calvary Bible Church, n.d.>, p. 5). 그는 1957년 12월 8일 한 뉴스 팜플렛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다(위의 책, 4쪽). 그는 후에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했다(Foreword to Harold Lindsell's The Battle for the Bible).
풀러 신학교(1947년에 설립), 『크리스탼니티 투데이』지(誌)(1956년에 창간),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NAE) 등의 기관들 외에, 1951년에는 20개국의 NAE들이 모여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가 형성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를 싫어했고 그것과 구별되기를 원했고,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불렀다(G. M. Marsden, "Fundamentalism," New Dictiionary of Theology, p. 268).
한편, 1941년 근본주의적 정신으로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조직되었고, 1948년에는 이 단체를 중심으로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조직되었다.
ICCC는 헌법의 서문(Preamble)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의 어두운 시대라고 언급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고 진술한 후에,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했다: (1) 성경의 완전 영감, 무오, 최종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죄적(expiatory, 속상적<贖償的))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러운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에 의한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一體性), (12)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지함의 필요성("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비록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교단)들로부터의 분리 혹은 성별이 신복음주의라는 어려운 문제를 일으켰지만, 그것은 근본주의 진영에서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는 보다 더 어려운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흔히 '2차적 분리'(secondary separation)라고 불리웠다.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협력하는 저 타협자들을 계속 용납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도 모종의 징계와 교제의 단절이 필요한가? 밥 죤스(Bob Jones),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이안 페이슬리(Ian R. K. Paisley) 등은 신복음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도 주장했으나, 죤 알 라이스(John R. Rice) 등은 그것을 반대했다(John R. Rice, Come Out-or Stay In?
1976년 근본주의적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CCC)와 별도로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orld Congress of Fundamentalists = WCF)가 밥죤스(Bob Jones)와 이안 에이슬리(Ian R. K. Paisley)를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세계 성경적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Biblical Churches = WCBC)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에는,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Jerry Falwell) 같은 이들이 신복음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함으로써 근본주의 진영에 다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Jerry Falwell, Ed Dobson, and Ed Hinson, eds., The Fundamentalist Phenomenon: The Resurgence of Conservative Christianity
이와 같이, 1930년 이후의 근본주의 운동은 '성별' 혹은 '분리'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보수주의적 교회들은 교회의 순결성의 보존이나 성실한 권징의 실행에는 관심이 적었고, 심지어 근본주의적 교회들도 오류들을 배제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쉽게 포용하고 그것들과 타협하는 경향을 띠어 왔다. 비록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는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미국에서 일어난 문제였지만,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참고로 미국의 학교들, 선교부들, 잡지와 출판사들, 라디오와 텔레비 프로그램들에 대한 죠지 W. 달라(George W. Dollar)의 분류를 소개한다(George W. Dollar, Facts for Fundamentalists, rev. ed.
1. 학교들
가. 전투적 근본주의 - Bob Jones University, Calvary Baptist Seminary, Denver Baptist Seminary, Fundamental Bible Institute, Landmark Baptist College, Maranatha Bible Institute, Northwest Baptist Seminary, Pensacola Bible Institute, San Francisco Baptist Seminary 등.
나. 온건한 근본주의 - Cedarville College, Central Baptist Seminary of Minneapolis, Covenant Seminar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Grace Theological Seminary, Liberty Baptist Schools, Moody Bible Institute, Pensacola Christian College, Philadelphia College of Bible, Talbot Theological Seminary, Tennessee Temple University,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등.
다. 수정된 근본주의(신복음주의) - Bethel Seminary, Califor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Columbia Bible College,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Fuller Theological Seminary, Gordon-Conwell Divinity School, Institute of Creation Research, John Brown University, King's College(NY), Nyack College, Taylor University, Trinity Divinity School(IL), Wheaton College(IL) 등.
2. 선교단체들
가. 전투적 근본주의 - Associated Gospel Churches, Baptist Mid-Missions, Baptist World Mission, Bible Methodist Mission, Bible Protestant Missions, Inc., Evangelical Missions, Fellowship of Independent Missions, Independent Board of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 Independent Faith Mission, Inc., International Christian Missions, Inc., United Missionary Fellowship, World-wide Missions 등.
나. 온건한 근본주의 - Bible Christian Union,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Far Eastern Gospel Crusade, Gospel Missionary Union, International Missions, Inc., Orthodox Presbyterian Missions,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United World Mission, Inc., World Missionary Evangelism 등.
다. 수정된 근본주의(신복음주의) - America's Keswick Bible Conference, Campus Crusade for Christ, Child Evangelism Fellowship, Inc., Inter-Varsity Fellowship, Navigators, Young Life, World Vision, Inc., Wycliffe Bible Translators, Inc. 등.
3. 잡지와 출판사들
가. 전투적 근본주의 - Biblical Evangelist, Biblical Viewpoint, Bob Jones University Press, Christian Beacon, F.E.A. News and Views, Fundamentalist, Gospel Standard, Harvest, The Voice of Fundamentalism, Straightway 등.
나. 온건한 근본주의 - Bibliotheca Sacra, Evangelist, King's Business, Moody Monthly, Radio Bible Class, Standard Bearer, Sword of the Lord, Trinitarian Bible Society, Voice(IFCA) 등.
다. 수정된 근본주의(신복음주의) - Baker Book House, Christian Herald, Christian Life, Christianity Today, David C. Cook, W. B. Eerdman's, Eternity, Gospel Light, His, Inter-Varsity Press, Kregel Publications, Navigators, Scripture Press, Tyndale House, United Bible Societies, United Evangelical Action, World Vision, World Literature Crusade, Zondervan 등.
4. 라디오와 텔레비 프로그램들
가. 전투적 근본주의 - Fortress of Faith, Gospel Hour, Let the Bible Speak, Radio and TV Commission of the ACCC, Twentieth Century Reformation Hour, Word of Life Hour, Word of Truth 등.
나. 온건한 근본주의 - Back to the Bible, Children's Bible Hour, Children's Gospel Hour, Old Time Gospel Hour, Radio Bible Class, Word of Life 등.
다. 수정된 근본주의(신복음주의) - Encounter, Hour of Decision, Rex Humbard, Oral Roberts, The Bible Study Hour, The PTL Club, Jack Van Impe Broadcasts, 700 Club 등.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역사를 위해서는, 특히 최근의 인물들, 학교들, 기관들, 단체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들을 참조하라: 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Greenville, S.C.: Unusual Publications, 1986); George W. Dollar, The Fight for Fundamentalism: American Fundamentalism, 1073-1983 (Sarasota, Fl.: Published by the Author, 19i83); John Ashbrook, New Neutralism II: Exposing the Gray of Compromise (Mentor, Ohio: Here I Stand Books, 1992).
첫댓글 내용 소개) 반틸(C. van Til;1895- ) 신학 요약---->교육의 상반성---->반 틸의 변증세계 재 이해---->칼빈주의와 반틸 그리고 칼빈주의자들---->근대 신학자 해설---->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반틸의 신학방법론---->슐라이마허와 반틸의 해석학---->반틸의 변증학---->교회의 세속화와 성화의 은총(반틸로 인하여 바르트가 자유주의자로 평가됨)---->세속화의 신학적 극복---->성화와 바르트---->한국신학과 교회에 바람---->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현대 교회의 배교 - 근본주의 vs 신복음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