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남계서원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 1552년(명종 7)에 창건되었으며, 정여창(鄭汝昌)의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사액을 받았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숙종 때 강익(姜翼)·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했으며, 별사(別祠)에는 유호인(兪好仁)·정홍서(鄭弘緖)를 배향했다가 1868년(고종 5)에 별사를 없앴다. 소수서원에 이어 2번째로 창건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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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은 만년에 덕산에 살면서 인근 함양 땅에 자주 들렀다. 함양 선비들은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면서, 선생의 학문과 경륜을 배우고자 했다.
1563년 3월 남명 선생은 함양의 남계서원에 가서 일두 정여창 선생의 사당에 배알하고 여러 제자들의 강론(講論)을 들었다. 이때 남명 선생께서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조계 유종지, 백곡 진극경을 데리고 남계서원에 갔는데, 개암 강익, 역양 정유명, 매촌 정복현, 남계 임희무와 많은 선비가 모여서 강학(講學)을 했다.
강학을 마치고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덕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남명 선생이 “일두는 학술이 깊고 독실하며 한점 하자도 없었는데, 화를 못 면한 것은 하늘의 운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남명선생 편년’에 있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남명선생은 63세 되던해 덕산 인근에 살면서 항상 곁에서 글을 배우는 제자들과 함양의 남계서원을 방문해, 일두 정여창 선생의 사당을 배알하고 함양 선비들과 함께 학문에 대해 토론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이 찾았던 남계서원은 현재 함양-거창간 3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이다. 함양 수동에서 거창 쪽으로 얼마가지 않아서 길가에 보인다. 서원은 연화산을 주산으로 하여 그 좌우로 뻗어나온 산줄기가 애워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남계천이 흐르고 있다.
남계서원은 1552년(명종7)에 지방 유림들이 함께 뜻을 모아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명종21)에 ‘남계’라는 서원 이름을 조정으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 되었으나,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그 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별사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그만큼 유서가 깊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사당(祀堂), 강당인 명성당(明誠堂), 양정재(養正齋), 보인재(輔仁齋), 풍영루, 묘정비각(廟庭碑閣) 등이 있다. 사당에는 정여창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좌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성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 오른쪽 협실은 집의재(執義齋)이다.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못과 애련헌, 영매헌이 있다.
남계서원은 남명 선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남명 선생이 일두 선생의 학덕을 흠모하고 있었다. 남명이 1557년 두류산 유람을 하다가 일두 선생이 만년에 거처했던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현재 지명)를 지나면서 “선생은 바로 천령(함양) 출신의 유종이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 내한을 거쳐 안음현감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했다.
남명 선생이 그 학덕을 높이 평가한 일두 정여창(鄭汝昌)은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1450년(세종 32) 함양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1480년(성종11)에 성종이 행실과 경학에 밝은 사람을 구하자 성균관에서 그를 제일로 천거하였다. 어머니를 여위고 지리산 악양에 들어가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여기에서 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다.
1490년 효행과 학식으로 추천되어 소격서참봉(召格署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때 성종은 그의 사직 상소문의 끝에 “너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행실을 감출 수 없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이것이 너의 선행이다.” 라고 쓰고 사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시강원 설서로서 연산군을 지도하였으나 연산군이 좋아하지 않았다.
1495년(연산군 1)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푼 지 1년만에 정치가 맑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감사는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가 있으면 그를 만나서 물어본 뒤에 시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에 의문나는 것이 있으면 원근에서 그를 찾아와 판결을 받았다. 민사를 돌아보는 여가로 고을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친히 교육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경성으로 유배되었으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정여창은 함양 선비정신의 기틀을 이루었으며 중종때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학덕으로 성리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 5현으로 불리며 1610년(광해군 2)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당시 남명이 남계서원을 찾은 것은 일두의 학덕을 흠모해서이겠지만,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서원이 남명의 제자들에게 의해 창건되었다는 것이다.
1552년 서원 창건을 주창한 함양 선비 개암 강익, 소고 박승임, 사암 노과, 매촌 정복현, 남계 임희무 중 강익과 임희무는 남명에게 직접 학문을 배운 제자들이다.
특히 강익은 서원을 창건할 당시 덕산 산천재로 남명을 찾아가 몇 개월간 공부를 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남명이 남계서원의 창건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조언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남계서원은 1552년에 시작하여 재정적인 이유로 7년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1559년에 서원의 담장 공사를 하면서 마무리를 짓고, 1561년에 와서 사당을 완성하고 위패를 봉안했다. 위패를 봉안한 지 2년만에 남명이 방문을 해 위패를 배알하고 강학을 한 것이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에 의하여 향촌에 설립된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 운영기구로 그 기능은 강학(講學)과 선현의 제향(祭享)이었다.
서원의 교수 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기본이었다. 강은 서당과 마찬가지로 대개 순강, 망강, 월강 등으로 나뉘고, 방법에 따라 배강과 명강으로 분류되었다. 강의 평가는 대통(大通),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의 5단계 또는 통, 약, 조, 불의 4단계로 나누었다.
500년전 남명 선생은 남계서원 강당에 앉아 제자들의 강을 듣고, 평가를 하셨을 것이다.
함양 지역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던 남계서원은 지금, 찾는 이 조차 드문 한적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사당엔 남명선생이 흠모했던 일두 정여창 선생, 그리고 남명 선생의 제자인 개암 강익, 사숙인 동계 정온의 위패가 모셔져 ‘남명의 숨결’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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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카페 '역사랑 숨바꼭질 할래'에서 퍼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