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백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다. 더 이상 살아야 할 희망이 없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지겹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이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하나님도 원망스럽다. 그분이 정말 계시다면 나의 이런 소망 없는 삶에 대한 어떤 의미를 해석이라도 해주셔야 한다. 그러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은 날마다 계속되는 절망적인 삶 그것뿐이다. 그 삶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허덕이며 사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똑같다. 똑같다. 그리고 그런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아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누가 나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마음일까요?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마음일까요? 혹시 여러분들의 마음은 아닌가요? 아마도 인생이라는 무대에 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본 일반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 글을 요셉의 심정으로 써보았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암울했을까요? 어쩌면 글을 통해 드러난 마음은 제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이런 생각을 전혀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있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형통케 하시는 그 손길을 보고 날마다의 감옥생활이 전혀 지옥같이 느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의 처지를 짐작해 보는 제 마음 어느 한 구석에 바로 그러한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 마음이 투사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단 저만의 마음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다 같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순간 이런 생각들이 삶을 힘들게 하는 순간들을 가지게 했을 거라는 사실은 동일할 것입니다.
특히 자기의 삶을 주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실망이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아등바등 현실에 겨워하는 삶을 살면서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실 저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날마다 밭으로 나가면서 과연 이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인가를 되묻곤 하였습니다. 왜 다른 이들은 심지어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이런저런 목회를 그럴듯하게 하고 있는데 도대체 나는 이게 무어냐는 자조적인 마음이 늘 들기도 하였습니다. 꾀죄죄한 차림으로 밭으로 나갈 때 제 곁을 스쳐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에 담긴 무시와 경멸의 작은 속삭임들이 저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 전화를 걸어온 한 분이 대뜸 "귀한 일을 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도대체 저의 어떤 일을 보고 귀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저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에 제가 너무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정말 저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농사나 짓고,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정말 목회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때로 제겐 너무도 힘든 시간들이 주어집니다. 정말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의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의 마음이 실감납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선지자로서 멋있게 활동한 적도 있습니다. 갈멜산에서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싸움 하나만으로도 그는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저는 그런 일 근처에 다가간 경우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지치고 낙담하여 그럴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제게는 위안이 됩니다.
특별히 무언가 가시적인 성취를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는 한국교회 풍토에서 정말 저 같은 사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세상적인 사고로는 지금이라도 목회를 접고 그냥 조용히 먹고 살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지도 못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삶을 이어가게 하신 것은 분명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또 그 과정들을 통해 제가 변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좌절, 더 큰 실망을 겪는 것이 제게 영적으로 유익할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못 말리는 자기 합리화라고 사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날마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 주님과는 관련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분과 함께 걷는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림절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 하면 오늘은 새해의 첫 날입니다. 교회력으로 새해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분의 오심을 대망하는 이 기간을 대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르며 크리스마스까지 4주 동안 이어집니다. 이러한 교회의 절기를 따르는 전례에서는 촛불을 밝힙니다. 그분의 오심을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기름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도 예외 없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제가 밖에 나가보질 않아서 거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백화점이나 큰 대형 마켓들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주님이 오신 크리스마스가 모든 인류의 축제가 된 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흥청망청 술을 마셔대는 모습을 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연신 술을 마셔댑니다. 즐거운 축제의 기간이니까요.
지난 번 논산에 모였던 교회들이 과연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고민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보았듯이 젊은 분들이 나이 드신 목사들과 매우 달랐던 점들이 저는 참 신기하고 기뻤습니다. 아마도 십이월 초부터 새해 보름까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불을 켜면 많은 돈이 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돈을 들여가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목사들은 정말 훌륭한 목사들입니다. 아마도 그런 교회 성도들은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에 들어가는 돈을 절약하여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크리스마스가 이교의 축제인 태양절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은 다만 크리스마스 절기에만 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지금에 와서 크리스마스가 이방 종교로부터 들어온 잘못된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오래도록 이어진,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의 절기를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 것일까요?
요셉 이야기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요셉 이야기를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창세기 말미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편애와 형제들 간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어리석음과 폭력이 어우러진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샀는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편애를 받는다는 것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편애의 상징인 채색 옷을 버젓이 입고 다녔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귀한 도련님처럼 채색 옷을 입고 나타나는 그를 볼 때 형들의 마음은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만 해도 참기가 어려웠는데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합니다. 그 내용이 형들이 듣기에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형들이 모두 동생인 그에게 절을 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님께 그럴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형들은 그렇게 말하는 동생이 미웠을 것입니다. 분명 저런 놈은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배 다른 형제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와 요셉의 행동이 만나 끔찍한 범죄가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죽여 없앨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머릿속에 일석삼조의 방안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이방인 상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요셉을 죽이지 않고 그 상단에 노예로 팔아넘기면 직접 형제를 죽여야 하는 죄를 범하지도 않고 돈까지 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토록 얄밉게 굴던 녀석을 단 번에 죽게 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데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고생을 할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에 흡족했습니다. 자신들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채색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짐승에게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방의 노예로 끌려간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종의 완전범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가 되어서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가려져 있던 그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유력자인 경호대장의 집사장이 되었고, 노예였지만 큰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겸손하였고 특히 여주인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여주인의 고발에 그는 강간미수범이라는 치욕스러운 범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웬만했으면 좌절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억울함을 크게 호소하다가 사형을 당하기에 꼭 맞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합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얼마나 여주인이 야속했을까요? 그런데도 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감옥에 잇는 모든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가 얼마나 잘 섬겼으며, 섬기는 그의 손길이 얼마나 진지했으면 간수들이 모든 것을 그에게 위임할 정도였습니다. 감옥에 분위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막장입니다. 그곳에서는 인간의 본성만이 판을 치는 살벌한 지옥이었지만 그는 그곳의 분위기를 바꿉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빠져나갈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두 관원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꿈을 해몽해 보니 한 사람은 곧 죽을 운명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복권이 되어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써준다면 요셉은 누명을 벗고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날을 얼마나 고대하였을까요? 그러나 권력을 회복한 관원은 요셉과 한 약속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써 본 글은 그때의 요셉의 심정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갑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가 노예로 보내야 했던 나머지 15년 모든 기간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의 원망하는 태도를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분명 대단한 믿음의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고 마침내 감옥에서 벗어나 극적으로 애굽의 전체 재산을 관리하는 총리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 역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가 꾸었던 꿈대로 그는 그의 형들 뿐 아니라 만인이 무릎을 꿇는 대인이 되었습니다. 부와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꿈대로 기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을 찾아온 형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절하고 있는 고관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먹었던 동생 요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형들을 향해 하는 요셉의 말은 그러나 단순한 용서의 선포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4-5)
"하나님이 큰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7-8)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놀라운 발언입니다. 순전히 가족 내부의 문제로만 보였던 일들이 단순히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말썽 많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경쟁과 갈등의 이야기로 보였던 것이 알고 보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보다 큰 이야기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요셉을 죽이지는 말자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팔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한과 배신으로 점철된 못된 결정들이었습니다. 요셉에게 일어난 최악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난 사실에 불과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자 일어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우인 요셉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이야기의 배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예비하심이 있었습니다. 형들의 악행까지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더 큰 손길이 있었습니다. 배우들보다 더 큰 어떤 작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축복하시는 통로가 될 한 가족의 꿈은 형들에 의해 꺾이거나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꼬마 요셉도, 총리 요셉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 이야기를 전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주시는 분, 또는 다른 계획을 세우시는 위대한 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 과정과 방법을 우리는 모릅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을 선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가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단순히 땅의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우리가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이중적인 사건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단순히 내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커다란 이야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아등거리며 사는 것 같지만 그런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가 그려지고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펼쳐지는 이야기 가운데 불합리한 것이 있고, 탐욕에 미혹되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선택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을 엮어 결과적으로는 그 결말이 선으로 끝나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의 첫 4주간을 대림의 계절로 맞이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다리는 삶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하늘에서도 그리고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단순히 이 땅에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 안에서 오롯이 평안을 누리게 하는 평화입니다. 고통과 결핍과 극한 가난이라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신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사랑하는 어지니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한 해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시기기를 소망합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평화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보다 근원적인 신뢰와 확신의 이유를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평화입니다. 그 평화를 누리며 사는 이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3년 12월 1일설교
- 최태선 목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