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5월의 기억
순천에 가서 나종영 시인이랑 진탕 마셨다. 그는 내가 다닌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시인의 길을 육칠 년 정도를 앞장서 간 사람이다. 그가 시에 바친 순정은 엊그제 내린 비에 날리는 벚꽃에 비길 정도이다. 조경이나 원예 전문가에 의해 화려하게 만들어진 꽃은 그에겐 꽃이 아니다. 그는 어제 나에게 단 두 마디를 했을 뿐이다. 만든 시는 시가 아니다. 나는 죽기 전까지 내 전집을 내겠다. 그 말 때문에 나는 그와 아침과 점심을 겸하는 추어탕 식사비를 과감하게 지출했다.
그와 내가 적을 같이 둔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꿈은 거의 아버지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명문대 법대에 들어가서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형편없는 촌놈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만큼의 담대함도 갖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의 명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나는 스스로 광주시내에 있던 입시학원에 찾아가 나의 영어, 수학 실력을 점검 받고는 했다. 중학교를 담양에서 나온 나는 전남의 각지에서 몰려온 수재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고2가 됐고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고 풍향동에 있던 집에 돌아갈 때 우리학교 문예부였던 반 친구 녀석하고 집쪽을 향해 동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광주엔 상추튀김이 유행이었다. 계림초등학교 근처의 튀김집으로 가기로 한 것은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 그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와 그 친구가 했던 행동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30년도 더 지난 오늘까지도 생생하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고향이 진도였고 형들이 넷인가 있었다. 그런 환경 때문인지 그 친구의 말은 고2 짜리들이 흔히 할 수 있는 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날 치른 국사 시험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관련된 문제가 나온 것 같은데 나는 오로지 그 문제를 내가 맞혔나 못 맞혔나 하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역사에 대한 평가나 해석에 대한 문제는 나에게 관심 밖이었다. 친구는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르지만 군사쿠데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 얘기는 당연히 그 친구와 내가 태어날 무렵 일어났던 군사반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서 주변을 살펴보아야 했다. 물론 그 친구도 어느 순간에 목소리를 거의 들리지 않게 낮추었다. 식은 땀이 날 정도였다. 때는 1977년이었다.
풍향동에 있던 그 친구의 하숙집에서 더 놀라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숙방에 가서 교복의 윗도리를 벗고 추리닝으로 갈아입더니 책장의 어디에선가 두꺼운 책을 꺼내들고 그걸 털털 털어내더니 거기서 툭 담배가 튀어 나왔다. 설마 저걸 피우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하고 생각하는 나를 비웃듯이 그는 책 부피에 잔뜩 짓눌려 있던 담배 개비를 손가락으로 빙빙 굴려 제 모양으로 만들더니 이내 입에 물고 성냥불을 당겼다. 그러고는 근처에 사는 선배들이 몰려와서 바둑을 두었던가 싶다. 바둑판을 앞두고 선배들과 나란히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돌을 놓은 그 친구의 손가락 모양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돼 버렸다. 나는 교과서를 버리기 시작했다. 아니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들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내 손가락에도 담배 개비가 쥐어지기 시작했고 노트에다 깨알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방엔 교과서와 참고서 대신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전후한국문제시집 1,2권이 자랑처럼 들어있었다.
성적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향하여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성적표가 집에 도달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불려가서 심하게 문초를 당해야 했다. 그 장면은 어쩌면 대사가 없는 그림자극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서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우리집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생애 최초로 아버지에게 맞섰다. 아버지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입을 앙당물고 아버지 앞에 있었다.
시간이 훨씬 더 지나서 깨달은 사실이긴 하지만 그 즈음의 광주는 어떤 저항의 기운이 팽배해 있었다. 나보다 불과 5,6년 선배들이 시내 모처에 사회과학서점을 내고 밤마다 모여서 학습과 토론을 하고 광천동의 공단에 위장 취업해서 노동자들과 함께 야학을 하면서 뜨거운 연대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 기운이 고2였던 나에게도 전달되어 온 것이었다. 생각하면 너무도 새롭고도 놀랍고도 무서운 사실이었다.
1980년 전남대학교 국문과 1학년에 들어가자마자 내 주위에는 그런 선배들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성큼 나타났다. 윤상원, 박관현, 신영일, 박효선…. 지금은 이승의 사람들이 아닌. 나는 광주 충장로에 있던 통나무집, 남광주역 근처에 있던 향군식당 등지에서 그 선배들의 그늘에 들어갔다. 하지만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적당한 거리란 내가 둔 것이 아니라 그 선배들이 내게 배푼 배려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 너무 어려서 그 선배들에게 쓸모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의 가을은 내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계절이었다. 내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 냈는가 하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사실 나도 그 5월에 죽었어야 옳은 것이다. 나는 두려워서 도망쳤다. 마침 아버지가 거리에 있던 나를 발견하여 짐짝처럼 질질 끌고 가 집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무사했다. 나만 무사했다.
광주의 5월을 겪으면서 친구들과의 연락도 두절되었다. 학교도 거의 전폐했다. 1980년 1학년 2학기 성적은 올 F였다. 2학년이 되어서 학교에 갔더니 동급생들은 서로 데면데면했다. 툭하면 술 먹고 싸움질이었다. 국문과 교수들은 여전히 춘향전에 나오는 야한 농담이나 지껄이거나 아니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서양비평가들의 논문 구절이나 입에 걸고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 2년 선배이자 김덕령 장군 집안의 후손인 어떤 선배의 인도로 무등산에 있던 풍암정이라는 정자로 아예 숨어버렸다. 낮에는 산에 오르거나 책을 읽고 저녁에는 풍암정에 찾아오는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풍암정 옆에 흐르는 계곡물에 랜턴을 비추어 가재나 새우를 잡아 된장국을 끓여 바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그해 여름이 짙어져서 무등산은 온통 초록의 세상이 되었다. 나랑 풍암정에서 같이 지내던 선배가 쌀이 떨어졌으니 집에 내려가서 쌀을 가져오라고 했다. 산수동에 있던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나를 보고 아연실색한 얼굴로 무슨 편지 봉투를 갖다 주었다. 입대영장이었다. 입대일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1981년 7월 29일. 나오지 말라는 어젯밤 나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주역에서 논산의 제2훈련소로 가는 장정들의 집합소에 나타났다. 열차는 떠나는데 어머니가 차창 너머로 때에 전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어머니의 눈물바람을 외면한 채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장성의 무슨 터널을 지날 무렵 쇼핑백을 더듬어 보았더니 삶은 달걀과 김밥이 나왔다. 내 앞에 앉은 나랑 비슷한 녀석에게 그걸 건넸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먹었다. 그러더니 자기도 무슨 가방을 더듬더듬하더니 나에게도 똑같이 삶은 달걀과 김밥을 내밀었다.
그해 가을 나는 육군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강원도 철원군 문혜리에 있는 보병 제6사단 2연대 15토우중대에 배치되었다. 나의 주임무는 보병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로 행정병에 배치되었다. 나는 전령백을 매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사단사령부와 경기도 포천에 있던 군단사령부를 오가면서 문서를 수발해 오거나 마라톤 타자기를 두들겨 문서를 작성하거나 무전병 근무를 서거나 했다.
계급이 올라 작대기 세 개를 달고 있을 때였다. 1982년 가을이 된 것이다. 나는 간신히 졸음을 견디면서 심야 무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갑자기 사단사령부로부터 비상 신호가 울리더니 급한 메시지가 왔다. 그 메시지는 내 심장을 거의 멈추게 할 정도의 것이었다.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 광주폭동의 수괴 박관현 광주교도소 사망”이었다. 그 메시지를 다른 예하부대에 전달하는 것이 무전병의 임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몇 년간 잊고 있었던 광주의 기억이 엄습했다. 나는 수행해야 할 내 임무도 접어둔 채 화장실에 달려가 꺼이꺼이 목을 놓고 울었다. 관현이 형, 관현이 형이 죽다니. 군에서는 박관현 형을 광주폭동의 수괴로 규정했다. 나는 광주폭동 수괴의 후배였기 때문에 숨어서 울 수밖에 없었다.
가끔 동료들과 외출을 나가 철원 시내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식당의 벽에 광주폭동 관련 현상수배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 박관현 형을 비롯하여 너무도 낯익은 선배들의 얼굴들이 벽에 붙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차마 밥도 술도 먹을 수 없어서 마른 침만 삼키다가 돌아온 적이 많았다.
그리고 딱 30년이 흘렀다. 앞으로도 30년, 또 30년이 흘러갈 것이다. 해 질 무렵, 강아지 세 마리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지리산 형제봉 능선을 오가면서 내가 철학의 길, 시의 길이라고 명명한 길을 두 번, 세 번 오갔다. 진달래는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피어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머위나물을 한 줌 뜯었다. 감나무밭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가 지나가면서 머위는 된장에 무쳐야 해하고 한 마디 하고 지나갔다.
30년이 지나도 나는 지리산 기슭에서 간신히 살고 있다. 먼저 고통받고 죽어간 이들의 덕으로. 갑자기 장끼 몇 마리 푸드득거리며 먼 숲으로 날아간 하늘에 솔개 한 마리가 마치 인공위성인 양 어두워지는 하늘에 떠 있었다.
첫댓글 눈물 몇 방울~~ 주루룩~~~ 아침부터 울었다 태웅부라더 땜시, 아니 그 시절의 청춘들 땜시....도서관 강의 가야하는데....얼릉 밥 먹어야 하는데.....그래, 그래도 밥 먹고 살아보자!
많이 아팠겠다. 그리고 많이 아프겠다. 이제 그만 아프면 안될까? 아프지 마아---- - - .
형님의 고뇌의 시간들과 치열함에 감동입니다. 저도 중고등학교때 광주에서 대학교 다녔던 사촌형과 친구들이 내방에 와서 박정희 독재와 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컷는데, 그게 저의 사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고, 문학을 대하는 자세에서 저의 몸가짐을 추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