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산 신선사를 찾아서
설날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다.
늦잠꾸러기 녀석들까지도 일찍 일어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세수를 하고,
세배상을 차려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누며, 아이들은 세뱃돈에 마냥 즐거워 일찍 깨임을 당한 표정조차 행복해 보였다.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려야 할 가까운 친척집을 돌고 나니 벌써 점심 때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서둘러 점심을 챙겨먹고 설거지는 뒤로 미룬 채로 신선사로 향했다.
차 3대에 나눠 탄 가족들은 신선사로 향하는 험한 꼬부랑길을 오르다 4륜 구동차가 아닌 차는 중턱에 주차를 해 두고 일부는 걸어서 산을 오르고 81세의 연로하신 어머님과 어설퍼서 하루 전에 왼쪽 발목을 또 삐어버린 나는 4륜 구동차에 실려서 신선사에 올랐다.
차를 타고 올라가지만 신선사 주차장에서는 바로 눈앞에 있는 절을 향해 두 발로 걸어 올라야 한다. 성큼성큼 달리듯이 올라가는 조카들과 내 아이들 뒤로 발목에 파스를 붙인 나는 조심스레 걸어 오른다. 또 나의 뒤에는 자신의 몸조차 운신하기 힘드신 어머님께서 세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달팽이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오르신다.
몇 해 전, 설날 오후에 찬바람을 맞으며 찾았던, 청도 운문사의 발걸음이 떠오른다.
그 때만 해도 어머님의 허리와 다리가 저렇게 까지 불편하시진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
회복할 수 없는 늙음이….
누구나 거역할 수 없는 늙음이 말이다.
신선은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신선사에서 신선을 생각해 본다. 신선이 있긴 한 것인지 모르지만... *^^*
앞서 오른 우리가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살펴보고도 한참 지나서야 어머님은 목적지에 오르셨다. 감회가 색다르신지 눈물마저 고였다. 젊은 날에 이 산 골짜기마다 당신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도 없단다. 어느 산골짜기를 가르키며
“저~ 산에서 나는 산나물이 참 맛있단다.”
라고 하시면서 젊은 날을 회상하신다. 교통이 불편한 그 시절에 이곳까지 걸어서 산나물을 채취하러 오셨다니 참 대단하시다.
신선사 마애불상군 옆을 보니 정상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반들거렸다. 수많은 등산객들이 이 길로 정상을 올라갔을 테지. 내 마음은 정상을 넘어서서 진작 고향 마을에 가 있다. 명절날의 신나는 고향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서 뛰어놀고 있다.
나에겐 이번이 세번째로 들런 신선사 길이다. 제일 처음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교련 행군지로 단석산행이 결정되었고, 그 중간 지점에 있던 신선사는 여학생들의 목적지였다. 같은 학교 남학생들은 단석산 정상까지였지만 체력이 딸린다는 이유로 여자들의 배려하는 차원에서 신선사까지만 오르고 왔던 길을 다시 내려오게 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남녀차별에 대단히 민감했다. 남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을 여자라고 못간다는 말이 나에겐 먹히지 않았고,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정상까지 갔다. 그 때 남겨진 단체 사진 속에는 교련복을 입은 남학생들 사이에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여자 한 명이 있으니 바로 나의 모습이다. ( 그 때, 우리반 남자 친구들이 나보고 "독종!" 이라고 했다. *^^* )
그리고 내가 두번째 이곳에 올랐던 해가 1999년도로 기억된다. 그 때는 학생의 신분이 아닌 교사의 신분으로 신선사를 찾았다.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끼리 산을 좋아하는 모임이 있어서 주말이나 계절마다 산을 올랐다. 모든 준비를 미리 해 두었다가 토요일날은 퇴근과 함께 가까운 산을 올랐는데 내가 주선하여 단석산을 오르자고 했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827m)으로 백제에 대한 신라의 국방의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진달래 군락지로 봄철 산악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송선리를 거쳐서 신선사에 들렀고, 단석산 정상을 향해 가던 중에 정상 가까이에 있는 헬기주차장에서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헬기 주차장은 아버지가 예비군중대장으로 근무할 때 방위병들과 함께 힘들게 닦았던 곳이라서 함께 간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아버지 얘기를 했다. 정상을 지나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내가 자랐던 마을, 방내리가 나온다.
오늘 함께 간 형님께 이 산을 넘어서면 우리 마을이 나온다고 했더니
“그럼 단석산을 중심으로 앞마을 처녀와 뒷마을 총각이 만난 셈이네.” 하셔서 그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신 장군이 신이 내린 신검으로 바위를 둘로 자른 후로 단석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해지는 단석산 신선사에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199호 마애불상군이 있다. 소재지의 주소는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9번지이다.
거대한 암벽이 ㄷ자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었는데 원래는 여기서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 이른바 석굴법당(石窟法堂)을 만들었다. 신라(新羅) 최초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인 셈이다. 이 석굴의 바위 면에 모두 10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을 새기고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 틔어진 곳이 입구였는데 이곳으로 들어서서 왼쪽이 되는 북쪽 바위에 삼존불상( 三尊佛像)이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本尊佛)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 안쪽에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삼국시대( 三國時代) 반가사유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밑쪽에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供養)을 올리는 공양상 2구(供養像二軀)와 스님 한 분이 역시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졌는데 이 역시 신라인(新羅人)의 모습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바위가 단절되어 쪽문처럼 틔었고 다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 면에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비록 딱딱하고 서툰 솜씨로 조성된 면도 있지만 중후한 체구와 둥글고 동안(童顔)적인 얼굴, U자 모양을 이루는 법의(法衣) 안에 내의를 묶은 띠 매듭 등 전선방사(傳禪房寺) 삼존불(三尊佛)(보물 제63호)의 양식적 특징과 친연성(親緣性)이 강하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장륙(丈六)의 미륵불상(彌勒佛像)이 확실하므로 당시의 신앙 경향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불상이라 하겠다. 동쪽과 남쪽의 바위 면에는 마멸로 희미해진 선각(線刻)의 마애보살상(磨崖菩薩像)이 1구씩 새겨져 본존불과 함께 삼존불로 배치된 것 같으며 남쪽 바위 보살상 안쪽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어쨌든 이 석굴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자 7세기 전반기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이 석불 상군은 고신라(古新羅) 불교미술(佛敎美術)이나 신앙연구(信仰硏究)에 귀중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참고)
힘들게 불상 앞에 오르신 어머님은 나와 동갑내기인 시동생은 이 절에 이름을 올리면 좋다는 말을 따라 시동생이 어릴 적부터 다녔던 절이라고 막내 동서에게 주전자에 맑은 물을 길어오게 해서 청수를 모시고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 앞에서 공손하게 절을 하셨다. 옆에서 바라보니 그 모습이 너무 경건하여 머리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어머님의 말씀 중에는 이 늙은 사람의 마지막 발걸음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더욱 정성껏 기도하는 모습에 내 가슴은 마치 바늘에 찔린 듯한 통증이 함께 온다.
비록 마지막 발걸음이 될지라도 산을 내려오시는 어머님의 평안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올 설날의 가족나들이를 신선사로 잡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나누며 즐거운 하산 길을 내려왔다.
올해는 설날이 마치 봄날같이 따스하다.
- 2007년 설날에 -
첫댓글 초등학교 시절에 겨울 땔감 구하기 위해 적어도 한번씩은 꼭 찾았던 단석산에 대해 이리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울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하셨던 방내리......글 잘 읽고 추억에 젖다 갑니다.흙으로 돌아갈 연세에 가까울수록 신선이 된다고 하던데 아마도 그런 경건함이 아닐까 싶네요....